한 뼘 텃밭 외 2편
윤현순
1996년 「시대문학」 등단. 「중심꽃」, 「되살려 제 모양 찾기」, 「노상일기」.
도시에서 농사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역사를 다시 쓰듯 새로운 일인데요
넓은 강당 가득채운 도시농부 지망생들
눈망울이 벌써 초롱초롱 빛납니다
스티로폼 박스랑 꾸미는 연장들로
요래요래 이래요 하며 시범을 보이더니
화사하고 앙증맞은 텃밭이 되었네요
살살펴서 적당히 다독다독 흙을 넣고
손가락으로 쏙쏙 구멍을 내더니
상추넷 배추둘 쑥갓도 여섯포기
하 이런 세상에나 내가 버린 쓰레기가
안전한 먹거리용 텃밭이 되다니요
집에 가서 하나씩 만들어보시고
여기심은 채소들을 반씩 나눠 심으세요
귓가에 쟁쟁 구르는 은방울 같은 노래
한 뼘 텃밭 한 뼘 텃밭 한 뼘 텃밭 한 뼘 텃밭
요거 한 열 두 개 쯤 만들어 놓으면
아들손자며느리 집에 오는 날
왁자지껄 밥상이 푸짐해지겠네요.
재식거리
사랑이 뿌리내릴 가장 합리적인 거리
미움으로 변하기 전까지
허용할 수 있는 최대한의 거리
아니면
너의 꿈을 펼칠 수 있게 배려하고
양보할 수 있는 임계점의 거리
가까이 가면 상처를 입고
더 가까이 가면 자유를 잃고
거기서 한 걸음 더 다가가면
목숨까지 잃게 되는
내 관심의 반경 내에서
가장 기쁜 마음으로 함께 누릴
사랑의 안전거리.
떡 잎 떼기
쓸데없이 붙어있다 군담하지 말자
힘줄 굵게 부풀려 아랫배에 힘을 주고
단단한 세상 뚫어낸 위대한 힘이다
사나운 햇빛 온 힘으로 막아내고
사방으로 흩어지는 햇살은 휘어잡아
통통하게 젖살 찌운 거룩한 모성이다
한여름 땡볕에 늘어진 몸 받쳐주고
이제는 힘에 부쳐 누렇게 변한 잎을
황송하게 떼어내는 초겨울 시린 문턱
맑은 하늘 바라보며 웃음 짓는 백세노모.
몇 번을 꾸어도 질리지 않는 예쁜 세상
역사는 다시 반복되고 회오리에 휩쓸려 그 시간이 나에게 도착했다. 알지도 못하면서 입으로만 외워 부른 유행가처럼 텃밭의 채소들은 따라쟁이 따라쟁이 하고 놀렸다. 딴에는 제법 손 하나 덜었다고 생각했던 나의 개입이 텃밭에는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았었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데는 무려 62년의 세월이 흘렀다.
특별히 선택받은 부류의 전유물일 뻔 했던 농업이 우리가 사는 도시에서 도시농업으로 활발하게 살아난다. 도시농업관리사는 그런 일을 돕는 사람들이다. 향수에 젖어서 막연한 그리움으로 노래하기보다는 손바닥 만한 텃밭에서라도 손톱 밑에 흙 묻혀가며 꿈틀거리는 지렁이를 손바닥위에 올려놓고 손자손녀와 함께 지렁이 춤도 춤추어 볼 수 있게 되었다.
도란도란 이야기 속에 자란 상추 밭에서 예쁜 쟁반위에 상추 한 장 잘라 놓고 씨익 웃고 나서는 또 하나 잘라 보라고 옆 사람에게 넘겨주며 흐뭇한 노래 불러보고 자투리로 기른 고구마도 한 개 구워보며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울 수 있는 이제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아파트 베란다가 텃밭이 되는 세상이 돌아왔다. 그렇게 예쁜 세상을 꿈꾸며 도시농업관리사가 된 나는 그 속에서 노래 한다.
몇 번을 꾸어도 질리지 않는 예쁜 세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