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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수와 백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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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해석 및 시 맛있게 읽기 스크랩 마이너리그- 김종삼 시인/ 황명걸
은하수 추천 0 조회 35 15.11.14 20:1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마이너리그- 김종삼 시인/ 황명걸

 

'종삼'의 분위기를 풍기며

삼류를 자처했던

마이너 리그 소속

김종삼 시인

 

그는 모리스 라벨을 좋아했다

그리고 무척 시행을 아꼈다

 

뒷주머니에 비죽 거죽을 내민 월급봉투를

무슨 비밀이라도 들킨 양 황망히 쑤셔 넣으며

곶감 빼어 먹듯 지폐를 뽑아 썼다

급기야는 씨를 말렸다

그러고는 돈을 꾸러 다녔다

 

낡은 베레모 앞으로 눌러 대머리를 감추고

여윈 양손 바지 호주머니에 찌르고서

성병걸린 사람처럼 어기적어기적 걷던

안짱다리 사내

 

툭하면 쌍놈의 새끼 소리를 연발했던

못말릴 선배

그는 시에 있어서 지독한 구두쇠였다

일상에 있어서는 밉지않은 무뢰한이었다

정신적으로는 고독한 배가본드였다

삶의 철저한 리버럴리스트였다

 

- 시집『내 마음의 솔밭』(창작과비평사, 1996)

..................................................

 

 오늘 11월 1일은 제29회 ‘시(詩)의 날’이다. 1908년 육당 최남선이 우리나라 최초의 신시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발표한 날을 기념일로 정했다. 왜 꼭 그날이어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아무튼 8월 1일이 아니라 11월 1일인 게 그나마 다행이다. 시인의 날도 아닌 시의 날에 시인이 무슨 치하를 받거나 위로받을 일은 전혀 없다. 달력에 수두룩 빽빽한 무슨 날 무슨 기념일이 있지만 달력에도 표기되지 않는 시와 시인에겐 영양가 제로인 날이다.

 

 각 시인 단체에서는 시의 날을 빌미삼아 일부 회원들이 모여 몇몇의 시낭송을 들려주는 등의 행사를 갖겠지만 지금까지 시와 시인, 시와 독자의 소통통로를 넓혀가기 위한 어떠한 구체적인 장이 마련되었는지 아는 바는 없다. 시가 어려운 입지에 처해 있다는 이야기는 오래전부터 나돌았지만 애당초 시와 시인은 세상의 주류이거나 조명을 받는 위치에 있지는 않았다. 물질 만능 사회에서 시와 시인의 ‘별 볼일 없음’은 어쩌면 당연한 노릇일지 모른다.

 

 시인은 언제나 음지에 존재하며, 추수를 마친 뒤 쓸쓸한 밭이랑에서 떨어진 이삭을 줍는 노인의 늙은 연민과 낡은 우수 같은 것이다. 굳이 따지자면 잘나가는 몇몇 시인은 제외되어야 옳겠지만 시인의 대개는 ‘마이너리그 소속’이다. 아니 더 솔직히 말하면 2만 명도 넘는 시인 가운데 후하게 잡아 98%는 마이너리그에도 들지 못하는 흑싸리 껍데기 등외품 시인이다. 물론 나도 그 중 하나이리라. 이를테면 독자로 남아야 마땅할 존재인 것이다.

 

 그래도 ‘삼류를 자처했던’ 김종삼 시인 정도라면 족히 열손가락 안에 꼽히는 시인의 표상 가운데 한 분일 것이다. 생활능력은 별로 없었지만 바흐를 즐겨들었고 모리스 라벨을 좋아했다. 흔히 평판 좋은 사람을 일컬을 때 남의 험담하는 걸 보지 못했다는 증언을 덧붙이곤 하는데 명백한 나쁜 짓이나 잘 못되어 가는 정치까지 눈감아주는 아량을 포함해서는 곤란하다. 시인이 ‘툭하면 쌍놈의 새끼 소리를 연발했던’ 것은 시인 본성이라 할 수 있다.

 

 그가 가장 혐오했던 것은 속물근성으로 동아방송국 근무 시절 직장의 한 아첨꾼을 박치기하려다 빗나가 지프차를 들이받는 바람에 이마를 열 바늘이나 꿰맨 일화도 있다. 공산주의를 싫어하면서도 거창학살사건 때는 통곡하며 시를 쓴 일도 있다. 우리 시단에서 ‘가장 순도 높은 순수시’를 쓴 시인이며, ‘시에 있어서 지독한 구두쇠’인 그의 시는 짧은 것이 특징이다. 보들레르도 ‘긴 시는 짧은 시를 쓸 수 없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것’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김종삼은 보헤미안이자 ‘고독한 배가본드’였고 무산자였다. 20년 직장을 그만둔 후로는 시와 음악과 술로만 살았다. 잦은 음주로 인한 간경화로 1984년 12월 세상을 떠났다. ‘나같이 인간도 덜 된 놈이 무슨 시인이냐, 나는 건달이다, 후라이나 까고’ 라며 내뱉기도 했지만 ‘非詩일지라도 나의 직장은 詩이다’라고 스스로 밝혔듯 평생 시를 껴안고 살았다. 다음은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란 시다. 그를 진정한 시인으로 기억하는 또 다른 이유이다.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시가 뭐냐고? 나는 시인이 못됨으로 잘 모른다고 대답하였다. 무교동과 종로와 명동과 남산과 서울역 앞을 걸었다. 저물녘 남대문 시장 안에서 빈대떡을 먹을 때 생각나고 있었다. 그런 사람들이 엄청난 고생 되어도 순하고 명랑하고 맘 좋고 인정이 있으므로 슬기롭게 사는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알파이고 고귀한 인류이고 영원한 광명이고 다름아닌 시인이라고.”

 

 

권순진

 

Love Transfering - Wang We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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