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경이 말하는 십일조는 원래 토지 소산의 1/10을 바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교회는 모든 소득의 1/10을 바치도록 가르쳐 왔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성경은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라고 말씀한 구절이 한 군데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엄연히 교회가 만들어 낸 가르침인 것입니다.
특히 구약 창세기 28장에 등장하는 야곱의 서원을 토대로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드려야 한다는 가르침은 성경을 한참 잘못 해석한 것입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야곱의 서원은 말 그대로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모든 소득의 1/10을 요구하신 것이 아니라 야곱 자신이 스스로 서원한 것이었습니다.
간혹 어떤 이들은 구약의 이스라엘 나라는 농경 사회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의 토지 소산과 가축을 요구하셨다는 것 자체가 바로 그들의 모든 소득을 요구하신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앞서 '십일조의 의미를 찾아서 (1)'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구약시대의 이스라엘에서는 이미 화폐가 유통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돈으로 십일조를 드리는 행위를 엄격히 금지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온 땅이 여호와 하나님의 소유임을 드러내시기 위해 돈이 아니라 토지 소산과 가축을 가지고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때문에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십일조, 양식의 1/10은 될 수 있어도 모든 소득의 1/10은 아니다
그런데 신약시대에 들어서면서 바리새인들과 랍비들은 더 많은 성전 내의 수입을 창출하기 위해 제사장들과 함께 십일조의 범위를 확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화폐 역시도 십일조의 항목으로 정했습니다. 나아가 십일조로 드릴 수 없는 작물인 박하와 회향, 곧 향료의 십일조를 강조하기 시작했습니다. 참으로 비극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문제는 이와 같은 바리새인들의 십일조를 13세기 중세 교회가 채택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현시대의 한국교회가 이와 같은 십일조의 형태를 지향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참으로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함이 옳을까요?
앞서 '십일조의 의미를 찾아서(1)'에서 밝힌 바와 같이 구약식의 성전 제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토대로 그 효력이 상실되었음을 우리는 다시금 기억해야 합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성전 제사와 관련된 모든 종류의 희생 제물 역시도 그 의미가 사라졌다는 사실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의 희생 제물과 또한 성전에 관련된 헌물 등이 하나님께 드려질 이유가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만일 계속 십일조를 강조하고 희생 제물 곧 헌물을 강조한다면 이것은 참된 희생 제물이요, 참된 성전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모욕하는 죄인 것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의 능력을 무효화시키는 행위입니다.
그 때문에 우리는 더 이상 십일조를 운운하고, 희생 제물을 운운하는 그러한 행위는 엄격히 거부해야만 합니다. 현시대 한국교회 내에 팽배한 십일조 신학은 사실 성경을 잘못 이해하고 해석한 결과입니다. 그것은 성경으로부터 나온 올바른 신학이 아니라 교회에 의해 세워진 교회의 신학일 뿐입니다. 종종 한국교회 강단에서 외쳐지는 거짓 가운데 한 가지는 이것입니다.
"십일조를 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요? 저는 이와 같은 언변이야말로 하나님의 말씀을 도둑질해서 자기 배를 채우려는 잘못된 교회의 신학, 또는 목회자들의 신학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즉 한국교회가 갱신되고 회복해야 할 부분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무엇보다도 건강한 연보의 개념을 교회 공동체 내에 심어 주는 사역입니다.
이는 곧 자원하는 마음으로 감사의 연보를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해 주시고, 날마다 우리의 삶을 이끌어 주시는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마음으로 말입니다.
나아가 드려진 연보가 교회보다는 세상을 위해 쓰일 수 있도록 우리들의 교회 공동체는 그 방향을 설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때에 비로소 교회는 교회로서의 기능을 제대로 발휘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