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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호산아] ☆ 낙동강 1300리 종주 대장정 (27)
생명의 물길 따라 인간의 길을 생각한다!
☆ [낙동강 종주] * 제11구간 (낙단보→구미보) ② [도개-구미보-금오서원]
2020년 10월 18일 (일요일) [독보 28km]▶ 백파
☐ [낙동]→ 낙단보→ 도개→ 선산대교→ 구미보→ [도리사]—[금오서원]→ 구미
* [상주]→ [영남제일로-낙동교]→ [낙단보](관수루)→ [낙동강 東路강변]→ (25도로 교각)下→ (301고속도로 교각)下→ [右江左田 長長堤防路]→ [월암서원](구미시 도개면 월림리)→ [도개(면)](오복식당)→ [左田右江]→ 선산대교-일지교 교각 아래→ 제방로→ [구미보] → 해평 [도리사]→ 선산 [금오서원]-[채미정]→ [구미]
낙동대로와 함께 가는 임호제 그리고 도개(면) 마을
☆… 낮 12시 정오의 시각, 월암서원(月巖書院)에서 내려와 다시 길 위서 섰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 밝은 가을 햇살이 눈부시다. 낙동강에서 올라오는 청랑한 기운이 온몸을 감싼다. 월암서원을 지나 직선의 제방 길, 임호2제(堤)이다. 왼쪽으로 들판에는 누런 벼가 익어가고 들판 안쪽에 자리 잡은 마을(월림리)은 아늑하고 평화스럽다. 직선의 길을 그대로 20분 정도 걸어 내려오면 낙동강에 유입되는 작은 하천을 만나게 된다.
하천을 거슬러 약 300미터 올라가면 ‘월림교’, 다리를 건너 다시 낙동강 강안으로 내려온다. 그리고 직선의 길이 1km 이상 이어지는데, 임호제(堤)이다. 그야말로 자를 대고 금을 그어놓은 듯, 남쪽으로 일직선으로 아득하게 뻗어 있는 길이다. 그 제방 길의 중간 쯤, 왼쪽으로 25번 도로가 가까이 다가와, 내가 걷고 있는 제방 길과 나란히 이어진다. 25번 국도는 상주에서 낙동강 ‘낙단대교’(아침에 이 교각 밑은 지나왔다)를 건너 구미시 도개(면)을 경유하여 해평(면)에 이르는 ‘낙동대로’이다. 여기 도개에서부터는 계속해서 제방의 바이크로드와 나란히 간다.… 제방 길은 신곡천을 만나, 25번 도로의 교각 아래를 지나 하천을 700m 정도 거슬러 올라가, 신곡천(신곡교)를 건너 다시 강안으로 내려온다. 신곡천을 건너면 바로 도개(면) 마을이다.
도개 오복반점
☆… 12시 20분, 배가 고팠다. 가산리—월암서원 사이의 도로에서 만났던 낙동강 지킴이 손명환 님의 말씀을 상기하여, 식사를 하기 위해 도개 마을로 들어갔다. 십자가 첨탑, 교회가 보이는 작은 시골 면소재지 마을이다. 식당도 많지 않았다. 마을 안으로 들어가 중앙로, 도개초·중·고등학교의 맞은편에 허름한 시골 중국집 ‘오복반점’이 있다. 여닫이문을 열고 들어가니, 사람들이 홀 안을 가득 찼다. 짬뽕을 잘하기로 소문난 맛집이라, 원근에서 많은 사람들이 찾아온다고 했다. 방안으로 들어가 탁자 앞에 자리를 잡았다. 아, 무거운 배낭을 벗어 놓고 다리를 뻗었다. 참으로 수고가 많은 나의 소중한 다리이다. 주문한 짬뽕은 큰 그릇에 양도 많고 홍합, 오징어 등 해산물이 푸짐하게 들어가 있었다. 시장기 때문인지 얼큰하고 구수한 맛이 일품이었다. 오복반점의 짬뽕, 명불허전이다. 참 맛있게 먹었다.
도개제(堤)
☆… 오후 1시, 도개 마을에서 25번 도로의 굴다리를 지나 강변의 바이크로드에 올라섰다. 더없이 맑고 청명한 날씨, 가을의 신선한 기운이 참으로 쾌적한 날이다. 지금부터의 길을 도개제(堤), 다시 아득한 직선의 제방 길이다. 2차로의 바이크로드와 보도가 시설되어 있었다. 그리고 25번 국도 낙동대로가 나란히 달린다. 자동차 전용도로를 무자비하게 달리는 차소리가 낙동강의 고요함을 흩어버린다.
구미 도개 ‘신라불교초전지(新羅佛敎初傳地)’
☆… 오후 1시16분, 25번 도로 건너편 하나로마트, 주유소가 있는 지점을 지났다. 가로수가 서 있는 쭉 뻗은 제방 길의 풍경이 자못 시원하다.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니 멀리 우뚝한 산이 보이고 그 오른쪽으로도 산이 이어진다. 그 우뚝한 산이, 신라 최초의 사찰인 도리사가 있는 해발 693m의 ‘냉산’이다.
도개제(堤)가 끝나는 지점, 낙동강에 유입되는 작은 개천이 있다. 개천을 바로 건너는 다리가 없으므로 개천을 거슬러 올라가서 다리를 건넌다. 그런데 그 개천의 상류에 ‘신라불교초전지(新羅佛敎初傳地)’ 테마공원이 있다. … 신라 최초로 창건된 도리사와 관련하여, 구미시가 신라에 불교가 처음 전해진 것을 주제로 하여 조성한 공원이다. 지금까지 내가 걸어오면서 나의 시야에 떠나지 않은 우뚝 솟은 산이 있었다. 바로 그 냉산인데 태조산이라고도 한다. 이 산록에 아도화상이 창건한 ‘도리사’가 있다. 고구려 승려 아도(阿道)가 서라벌에 가서 불교를 전파하고자 했으나 신라 조정의 반대로 좌절되자 낙동강을 건너 이곳 선산의 모례의 집에서 은거, 불도를 닦으며 지냈다. 도개 ‘신라불교초전지’ 공원은 바로 모례의 집터에 조성된 것이다. 도리사에는 아도화상이 참선하던 좌선대가 있다. … 도리사 창건설화가 전한다.
‘… 어느 날 모례의 집안으로 칡넝쿨이 뻗어 들어왔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모례는 칡넝쿨 길을 따라 산으로 올라가 보니, 산중의 바위 위에서 스님 한 분이 좌선을 하고 있었다. 아도(阿道)스님이었다. 반가움에 절을 하고 이곳에 머물게 된 이유를 묻자, 겨울에도 복숭아꽃 오얏꽃이 활짝 피어 있는 모습을 보고 이곳이 성스러운 길지임이 틀림없으니 이곳에 절을 짓고자 한다 하였다. 이후 모례는 스님을 집에서 모시고서, 정성으로 시주하여 절을 지어 도리사라 하였으며, 아도가 참선하던 바위가 도리사 아도화상 좌선대이다.’ …
☆… 다리를 건너서 강안으로 나아가면 신림제(堤), 직선으로 가는 길은 선산대교 아래를 지나간다. 선산대교는 선산(읍)에서 군위(읍)으로 이어지는 68번 국도가 낙동강을 건너가는 다리이다. 그리고 이어서 일선교 다리 밑을 지난다. 일선교는 낙동강 서쪽의 선산과 동쪽의 해평면 일선리를 잇는 규모가 작은 옛날 교량이다. 다리 밑 바이크로드 바닥에 ‘↑부산하구둑 269km ↓안동댐 116km’에 씌어있었다.
일선교에서 구미보까지
☆… 두 개의 다리 밑을 지나 다시 제방 길에 올라섰다. 여기, 일선교에서 구미보까지 6.4km이다. 일선교 제방의 공터에서 ‘달리기 복장’을 갖춰 입은 일군의 남녀들이 몸을 풀고 있었다. 구미에 사는 마라톤 동호인들이었다. 바이크로드를 이용하여, 본격적인 마라톤에 들어가기 전 스트레칭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일선교-구미보 간의 왕복 13km의 구간을 달리는 것이었다.
일선교에 1km 내려온 지점에서 아까 일선교 제방에서 몸을 풀던 마라토너들이 내 뒤에서 달려와 스쳐 지나간다. 탄탄한 몸매에 역동적으로 달리는 모습이 보기에 좋았다. 주먹을 쥐고 파이팅을 외쳐 주었다.
인생의 마라톤
☆… 나도 몇 년 전까지 매년 두 차례 마라톤을 했었다. 매년 4월, 봄날에는 하남의 미사리에서 개최되는 ‘mbc 아디다스 한강 마라톤’에 참가하여 팔당호반을 뛰었고, 가을에는 파주 임진각에서 열리는 ‘통일마라톤’에 참가하여 통일로를 달렸다. 그리고 가을 의암호반이 아름다운 ‘춘천마라톤’에도 두 차례 참가하기도 했다. 그때 같이 마라톤을 하면서 우정을 쌓은 벗들이 ‘성신사계’ 형제들과 ‘왕희마라톤클럽’의 벗들이다. ‘왕희’에는 강형수, 신종태, 김용태 등이 형제가 되어 함께 뛰었다. 그리고 ‘성신사계(星新四季)’는 ‘청소년 적십자(RCY)’ 지도자로 활동하면서 만난 모임으로, 우정과 의리로 굳건하게 맺은 형제들이다. 오상수, 조석현, 최기석, 김길수, 강석준, 박철응, 이경일 등이다. 우리는 함께 마라톤을 하면서 어려움과 즐거움을 함께했다. 마라톤을 포함, 연중 봄·여름·가을·겨울 사계절에 한 번씩 만나기로 하여 ‘성신사계(星新四季)’라고 한 것이다. 지금도 한결같은 형제애를 지니고 있다. 나의 낙동강 종주에도 왕희의 형제들과 성신사계 형제들이 뜨겁게 성원을 하고 있다. … 지금 여기 낙동강변 내 눈앞에서 달리는 마라토너들을 보면서 새삼 나의 가슴이 뛰고… 우리 마라톤 형제들의 얼굴이 하나하나 떠올랐다.
인생은 종종 마라톤에 비유된다. 특히 인내와 끈기를 가지고 결승점까지 달려야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내가 멈추어 있는 동안에도 경쟁자들은 계속 달린다. 내가 넘어지면 다른 사람들과의 격차는 더욱 벌어진다. 그러나 마라톤과 분명히 다른 점이 있다. 인생에서는 1등이 딱 한 사람은 아니라는 점이다. 마라톤에서는 기록이 가장 빠른 사람만 1등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인생에서는 누구나 1등이 될 수 있다. - 김영식의 「10미터만 더 뛰어봐」중에서 -
나 역시 마라톤을 뛰면서 늘 인생을 생각했다. 사람이 일생을 살아간다는 것은 분명 단거리 경주가 아니다. 우리는 부모님의 몸을 빌어 하늘의 뜻을 품고 이 세상에 태어난다. 그리고 마라톤과 같은 인생의 여정을 시작한다. 결코 짧지 않은 한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 우리는 자신의 뼈를 키우는 성장기에 자기 나름의 꿈을 갖는다. 그리고 이후 그 꿈을 실현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한다. 인생의 목표를 성취하기 위하여 열정을 불태우면서, 때로는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고뇌하며, 삶의 처처마다 뜨거운 땀을 흘린다. 그리하여 성취의 기쁨을 누리기도 하지만 때로는 실패의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크고 작은 실패의 과정을 통하여, 자신만의 진정한 삶의 가치를 실현한다. … 마라톤 또한 골인 지점에 들어오기까지 체력의 한계와 정신적인 고통을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인생이나 마라톤이나 ‘경쟁(競爭)’이라는 점에서 보면 모두 치열하다. 그러나 인생도 또한 경쟁이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남과의 경쟁이 아니라 ‘자신과의 싸움’이라는 면에서 고무적이다.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고 골인 지점에 들어서는 마라토너처럼, 삶의 고난을 극복하고 자아실현(自我實現)을 하게 되면, 누구나 스스로 일등(一等)이 된다.
☆… 낙동강 1,300리 종주는 멀고 먼, 일종의 마라톤이다. 그래서 당초 낙동강 여정을 감히 ‘대장정(大長征)’이라고 한 것이다. 멀고 힘든 여정을 감당하는 자신과의 싸움이다. 마라톤처럼, 인생처럼 이 길 또한 내가 택한 여정이다. 낙동강 종주는 나의 인생이 자연과 더불어 사유하는 인생사적 마라톤이다.
청명한 하늘, 멀고 아득한 길
☆… 지금 눈앞에 뻗어있는 길은 멀고 아득하다. 다리는 무겁고 허벅지가 딱딱하게 굳었다. 연일 낙동강을 걸어 내려온 피로감이 온몸을 휘감고 있다. 그러나 눈앞에 청명한 하늘이며 밝은 햇살이며 … 신선한 공기가 폐부 깊숙이 스며든다. 기분이 아주 산뜻하고 쾌적하다. 그래서 몸을 무거워도 마음이 충만하게 살아있으니, 마음이 가는 곳에 나의 길이 있다. 그리고 순수한 자연은 건강하고 아름답다. 호수처럼 가득히 고여 있는 낙동강 강물, 그 가장자리 둔치에 억새꽃이 만발하여 밝은 햇살을 받아 눈부시게 빛나고 있다. 하늘에 떠 있는 하얀 구름이 강물과 어울려 은은한 가을 풍경을 이루었다.
길은 아득하게 이어지고, 오른쪽 강안의 둔치에는 가을색이 완연했다. 일선교에서 2km로 내려온 지점 한 쌍의 젊은 커플이 타고온 자전거를 세워놓고 억새꽃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며 가을을 즐기고 있다. 가을에는 사랑도 익는다! 비록 나는 고단하고 막막한 나그네의 길을 가고 있지만, 젊은이의 ‘가을 사랑’이 아주 아름답다. 길의 왼쪽에는 여전히 낙동대로, 탄탄대로룰 달리는 자동차가 질주하고 있다. 그리고 벼가 누렇게 익은 너른 들판이 보인다. 평화롭고 넉넉한 대한민국의 가을이다!
낙동길 물길, 눈부신 억새
☆… 길은 여전히 일(一) 자의 직선으로 뻗어 있고 원근법의 초점은 아득한데, 그 오른쪽으로 멀리 구미보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전에 내 옆을 지나갔던 일군의 마라토너들이 구미보 반환점을 돌아서 다시 뛰어오고 있었다. 거친 숨소리, 완강한 근육질의 다리가 피스톤처럼 힘차게 움직인다. 그 달리는 모습만 보아도 가슴이 뛰고 마음에 생기가 솟는다. 또 주먹을 불끈 쥐고 ‘화이팅!’을 외쳤다. 그리고 나의 길을 다잡아 걷는다!
☆… 오후 2시 46분, 바이크로드 바닥에 ‘↑부산하구둑 265km ↓안동댐 120km’에 쓰인 지점을 통과했다. 아직도 멀기는 하지만, 주탑(柱塔)의 모습이 송이버섯처럼 생긴 구미보가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오늘의 일차적인 포인트가 시야에 잡혔으니 힘이 솟아올랐다.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마사이보법으로 당당하게 걷는다. 무겁고 뻑뻑한 다리도 다시 생기를 얻은 듯, 발걸음이 경쾌하게 움직인다. 너른 둔치를 사이에 두고 강물이 고여 있고 그 너머에 검푸른 산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다. 그 산 너머가 선산읍이다. 길가에는 키가 크게 자란 억새꽃들이 태양의 역광을 받아 눈부시게 빛난다. 구미보가 가까이 다가오면서 너른 둔치는 자연생태공원으로 잘 가꾸어져 있었다. 여기저기 나무도 심고 습지를 산책할 수 있는 나무테크 탐방로가 잘 조성되어 있다.
낙동강 구미보
☆… 오후 3시 정각, 드디어 오늘의 일차적인 포인트인 구미보(龜尾洑)에 도착했다. 열심히 걸어온 덕분에 가을 해가 아직 중천에 있다. 구미보는 동쪽의 해평면 낙산리와 서쪽의 선산읍 원리 사이에 가설 된 보(洑)이다. 구미보는 장수와 복의 상징인 거북이, 수호의 상징인 용(龍)을 형상화한 시설로, 풍요롭고 아름다운 낙동강에, 보(洑)의 한 가운데 거북이 형상의 중앙 권양대(捲楊臺)를 만들어, 거기에 올라가면 360도 전망이 가능하다. 가족 또는 연인들을 위한 수변공원이 조성되어 있고, 동쪽의 제방 길을 따라 낙동강 종주 자전거도로 이어진다. 구미보의 주변은 시민들이 휴식과 경관을 즐길 수 있는 편의시설이 갖추어져 있다. 보의 유지관리교 및 낙동강 통합관리센터 등이 있다.
구미보 수변공원
☆… 수변공원은 구미보의 하류에도 잔디공원으로 잘 조성되어 있고, 벤치와 편의시설 등이 잘 갖추어져 있었다. 오늘따라 많은 사람들이 가족과 함께 나와 10월의 가을 햇살을 즐기고 있었다. 따사로운 햇살이 내리는 오후, 사람들이 모여와 가을 즐기는 모습이 참 평화스럽다. 그런데 수변공원 잔디밭 가장 자리에 단정한 시비(詩碑) 하나가 서 있다. 가만히 읽어보니 이우(李瑀)의 시 「梅鶴亭」(매학정)이라는 시를 새겨 놓았다. 시비의 전면에 ‘선학경’이라 쓰고, 뒷면에 시(詩)를 새겨 놓았다. 오언율시(五言律詩)다.
壺傾籍沙眠 (호경자사면) 호리병 기울여 모래사장을 쏟아놓고
繞沙淸灘響 (요사청탄향) 모래 톱 에워싸고 맑은 여울이 소리 내어 흐르네
孤鶴叫松梢 (고학규송초) 외로운 학 한 마리 소나무 끝에 울고
夢回江月上 (몽회강상월) 꿈속 강을 돌아 달 위로 올라간다
彈琴石榻上 (탄금석탑상) 돌 위에 걸터앉아 거문고를 타니
逸響連松風 (일향연송풍) 솔바람과 잇달아 멀리 울리노라
遽看鶴舞影 (거간학무영) 갑자기 학이 춤추는 모습을 보고
月出淸江東 (월출청강동) 맑은 강 동쪽에서 달이 솟아오른다.
— 이우(李瑀) 「매학정(梅鶴亭)」
‘매학정(梅鶴亭)’은 구미보 건너, 감천의 아래쪽 구미시 고아면 예강리, 낙동강 강가에 있는 명필 황기로(黃耆老)의 정자이다. 이우(李瑀)는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동생으로 황기로의 제자이며, 또한 그의 사위이다. (황기로의 매학정(梅鶴亭)은 다음 여정에서 탐방계획이 되어 있다)
☆…오늘 낙동의 낙단보에서 구미보까지 24km를 걸어왔다. 구미보에서 숭산대교 앞을 경유하여 해평습지를 지나, 금오공과대학이 있는 구미시 용호동 산호대교까지는 16km 이상을 더 걸어야 한다. 시간적으로 체력적으로 무리가 아닐 수 없다. 오늘은 해평에 있는 유서 깊은 천 년 고찰 도리사(桃李寺)에 대해 알아보고, 구미보를 건너 1.6km 떨어진 선산읍 원리에 있는 금오서원(金烏書院)을 탐방한다.
[구미시 해평] — 태조산 도리사(桃李寺)
☆… 도리사(桃李寺)는 신라 최초로, 아도화상(阿道和尙)이 냉산의 높은 산록에 창건한 천 년 고찰이다. 경북 구미시 해평면(海平面) 냉산(冷山, 지금의 太祖山)에 있는 절이다. 신라 최초의 절로 알려져 있다. 선산 해평의 절로 아주 유명한 곳이다. 새재사랑산악회 민창우 대장이, 과문한 나에게 도리사에 대한 정보를 귀띔해 주어서 탐방하게 되었다.
도리사(桃李寺)는 중국에서 불도를 닦고 귀국한, 고구려의 아도(阿道)가 눌지왕(訥祗王) 때 신라에 와서 그때까지 불교가 없었던 신라에서 포교하기를 요청하여, 처음에는 배척을 받아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후에 소지왕(炤知王)의 신임을 얻어 불교를 일으키게 되었다. 이 무렵 왕궁에서 돌아오던 아도(阿道)가 이 곳 산 밑에 이르자, 때가 겨울인데도, 산허리에 복숭아꽃 ·배꽃이 만발한 것을 보고, 거기에 절을 짓고 도리사(桃李寺)라고 하였다는 내력이 있다.
桃李寺前桃李開 (도리사전도리개) 도리사 앞에는 도리(桃李)꽃 피었더니
墨胡已去道師來 (묵호이거도사래) 묵호자 가버린 뒤 아도가 왔네
誰知赫赫新羅業 (수지혁혁신라업) 뉘 알리요, 빛나던 신라 때 모습
終始毛郞窨裏灰 (종시모랑음리회) 모례(毛郞)의 움집 속엔 재뿐인 것을!
영남 사림(士林)의 조종(祖宗)으로 불리는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이 선산부사로 있을 때, 선산의 십절(十絶) 중의 하나인 도리사(桃李寺)를 이렇게 노래했다. 짤막한 시(詩)이지만 이 속엔 도리사 창건의 역사가 압축되어 있다. 묵호자, 아도, 모례… 한번쯤은 들어본 듯도 한 이런 이름들이 실꾸리처럼 얽혀 있다. 장장 1,600년이라는 아득한 세월이 덧쌓여 있는 천 년 고찰 도리사이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아도(阿道) 또는 묵호자라고 불리는 스님이 있었다. 고구려에서 불교 전파의 뜻을 품고 낙동강을 건너와 신라 땅 일선현, 지금의 구미 선산에 들어온 그는 ‘모례’라는 사람의 집에 숨어 지내며 불법을 전하고 있었다. 이차돈의 순교로 신라가 불교를 공인하기 110여 년 전이다. 그러던 어느 겨울날 냉산 자락에 복숭아꽃, 오얏꽃이 활짝 핀 것을 보고 그곳에 절을 지었다. 그래서 절 이름 도리사(桃李寺)가 되었다. 바로 신라 최초의 절이다. 때는 눌지왕 2년(418)이었다.
아도(阿道) 스님이 머문 모례의 집은 사찰에서 가까운 도개면이다. 모례 집안의 우물[毛禮家井]이 남아 있는 일대를 구미시에서 ‘신라불교초전지’로 꾸며 놓았다.
신라 땅에 최초로 세워진 도리사(桃李寺)는 불교가 꽃처럼 피어나던 신라나 고려시대에는 숱한 사람들의 발길을 모으며 번창했다. 조선시대 숙종 3년(1677) 큰불을 만나 대웅전을 비롯한 모든 건물과 함께 그 역사도 타버렸다. 그 뒤 영조 5년(1729) 아미타불상의 금칠을 새로 하여 산내 암자였던 금당암(金堂庵)으로 옮기면서 암자이름을 도리사로 바꾸니 옛 도리사는 터만 남게 되었다. 지금의 도리사가 바로 당시의 금당암이다. ― 도리사 (답사여행의 길잡이·8-팔공산 자락, 초판 1997., 한국문화유산답사회, 김효형, 흥선, 김성철, 유홍준, 문현숙, 정용기)
☆… 도리사는 절로 들어가는 입구가 국내에서 가장 긴 사찰이다. 산문[일주문]에서 절간 주차장까지 무려 5km가 넘는다. 초입은 느티나무 가로수길이 이어지고 사찰에 가까워질수록 솔숲이 울창한 산간도로를 따라서 올라가야 한다. 정갈한 솔숲 사이로 난 산책로를 따라 가면 적멸보궁, 태조선원, 극락전 등의 전각이 있다. ↑
도리사의 적멸보궁(寂滅寶宮). 건물 뒤편에 별도로 석탑(石塔)을 만들어 부처의 진신사리(眞身舍利)를 봉안하고 있다. 1977년 절 동쪽에 있던 석종(石鐘) 모양의 부도를 경내로 옮기는 과정에서 금동육각사리함(국보 제208호)과 함께 사리 1점이 발견됐다. 도리사는 신라 최초의 사찰이라는 타이틀에, 진신사리를 보유한 절이라는 명성을 더하게 되었다.
극락전(極樂殿)은, 부석사 무량수전처럼 서방정토의 주재자인 아미타불(阿彌陀佛)을 모신 법당이다. 경내의 태조선원(太祖禪院)은 절집이라기보다 일반 한옥에 가깝다. 왕건이 견훤과의 싸움에서 승리하고 고려 창건의 기초를 세운 지역이라는 것과, 신라 불교의 태동지라는 의미를 겸한 중의적 명칭이다. 극락전 마당에서 조금 내려가면 아도화상이 참선하던 좌선대(坐禪臺)가 있다. 고인돌 모양의 평평한 돌 옆에 2개의 비석이 서 있다.
구미 금오서원(金烏書院)
☆… 금오서원(金烏書院)은 구미보에서 산을 끼고 1.6km 돌아가면 경상북도 구미시 선산읍 원리, 마을 뒷산의 산록에 있는 서원이다. 마을 앞에는 김천에서 내려오는 ‘감천’이 낙동강에 유입된다.
1572년(선조 5)에 최응룡(崔應龍)·김취문(金就文) 등이 선산부사 송기충(宋期忠)에게 청하여, 길재(吉再, 1353~1419)의 충절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금오산(金烏山) 아래에 서원을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575년에 ‘金烏’라고 편약을 받아 사액서원이 되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602년(선조 35) 지방유림이 선산부사 김용(金涌)에 청하여 지금의 위치에 복원하였으며, 장현광이 「금오서원중건봉안문(金烏書院重建奉安文)」을 지었다. 1609년(광해군 원년)에 다시 사액을 받았다. 이때 점필재 김종직(金宗直), 신당 정붕(鄭鵬), 송당 박영(朴英)을 추향하고 이후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을 추가 배향하여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 당시에 훼철되지 않고 존속한 47개 서원 중의 하나이다. 경내의 주요 건물로는 문루 읍청루(挹淸樓)·정학당(正學堂)·상현묘(尙賢廟)·동재·서재·재실·등이 있다. 매년 봄·가을에 향사를 하고 있으며, 소장전적 6종 23책이 있다.
금오서원은 야은(冶隱) 길재(吉再)를 존향(尊享)하는 서원이다. 종향된 점필재 김종직(1431~1492)은 길재의 제자인 아버지 강호 김숙자와 경은 이맹전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그리고 김종직의 학문은 김굉필, 정여창, 김일손에게 전수되었다. 신당 정붕은 김굉필의 제자이다. 그리고 환훤당 김굉필에게 배움을 받은 정암 조광조까지 이어진다. 여현 장현광은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의 문인들 사이에서 학덕과 실력을 인증 받았다고 한다. 장현광(張顯光)은 오늘날 구미시 인동에 거주하면서 영남의 남인계열 학자들을 길러냈다. 구미시 낙동강변 인동의 동락서원(東洛書院)에서 장현광을 배향하고 있다.
금오서원 정학당(正學堂)은 학문을 강론하던 강당으로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이다. 강당인 정학당은 중앙의 마루와 양쪽에 협실로 되어 있다. 사당인 상현묘(尙賢廟)는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이다. 그고 읍청루(挹淸樓)는 정면 3칸,측면 2칸의 2층 누각이다. 정학당 앞 기숙공간인 동재 일건재(日乾齋)와 서재 시매재(時昧齋)를 배치하고 있다. 동재는 3칸 모두 온돌방으로 꾸미고, 서재는 2칸은 온돌과 1칸의 마루로 되어 있다.
금오서원에는 원훈이라고 하는 칠조(七條)가 정학당 현판에 새겨져 있다. ‘해서는 안 되는 7가지’이다. 1. 창에 벽에 낙서하는 것(汚穢窓壁), 2 책을 손상하는 것(損傷書冊), 3. 놀기만 하고 공부를 안 하는 것(遊戱廢業), 4. 함께 있으면서 예의를 지키지 않는 것(郡居無禮), 5. 술이나 음식을 탐하는 것(干索酒食), 6. 대화가 난잡한 것(對話亂雜), 7. 옷차림이 바르지 않는 것(衣冠不正) 등이다. ‘이 일곱 가지 금기를 어기는 자는 서원에 들어와 있으면 돌아가고 오지 않았다면 오지 말라.’(犯此七禁者 已來則歸 未來則莫來)고 적혀 있다.
구미 채미정(採薇亭)
길재(吉再, 1353~1419))는 36세 때, 기울어져 가는 고려의 앞날을 걱정하면서 "뜻 많은 수양산의 백이, 숙제라네"라고 읊으며 절의(節義)를 다짐했고, 그 다짐대로 38세 때 벼슬을 버리고 선산으로 귀향했다. 길재가 고려 말에 벼슬을 버린 것이나 조선 왕조에서 절대 권력자의 요구를 거부한 것은 고식적인 충절로만 해석할 수 없다. 그것은 인간으로서 버려서는 안 되는 의리(義理)와 그것을 지키려는 가열한 정신의 발로였다. 출세에 눈 먼 사람들, 권력에 빌붙어 특권을 좇는 사람들이 횡행하는 시대, 특히 배신과 은혜, 그리고 굴종을 강요하는 시대에 길재는 누구도 흔들지 못하는 절의(節義)를 지니고 있었다.
채미정(採薇亭)은 고려에서 조선의 왕조 교체기에 두 왕조를 섬기지 않고 금오산 아래 은거한 야은(冶隱) 길재(吉再, 1353~1419)의 충절과 학문을 추모하기 위해 영조 44년(1768년)에 금오산 아래 건립한 정자이다. 경상북도 구미시 남통동, 금오산 아래에 있는 조선시대의 건축물이다. 채미정은 멀리 바라보이는 금오산과 채미정 전면의 맑은 계류와 수목들이 채미정과 어우러져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는 경관미가 뛰어나다. 2008년 12월 26일 대한민국의 명승 제52호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처음 금오산으로 낙향을 해서 지은 집은 초가(草家) 한 채였다. 왕조의 변혁기에 그는 소신을 지켜 자연에 은거하여 자연과 하나가 되어 유유자적하며 학문을 연구하고 그 도학을 후세에 전했다.
臨溪茅屋獨閑居 (임계모옥독한거) 개울가 초가집에 홀로 한가로운데
月白風淸興有餘 (월백풍청흥유여) 밝은 달 맑은 바람 흥이 넘치누나!
外客不來山鳥語 (외객불래산조어) 찾아오는 사람 없어 산새와 벗을 하고
移床竹塢臥看書 (이상죽오와간서) 대밭에 평상을 옮겨 누워서 책을 보네
— 야운(冶隱) 길재(吉再) 선생의 시(詩)
길재(吉再)는 이색(李穡) 정몽주(鄭夢周) 문하에서 학문을 익히고 고려시대인 1386년 문과에 급제하고 성균관박사를 거쳐 문하시중에 올랐다. 길재의 호는 야은(冶隱)인데, 목은(牧隱) 이색(李穡),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와 더불어 삼은(三隱)이라 일컬어진다. 저서에『야은집』,『야은언행습유록』이 있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왕조가 들어서면서 두 왕조를 섬길 수 없다하여 벼슬을 사양하고 선산[금오산]에 은거하면서 절의를 지켰다. 채미(採薇)란 중국의 백이(伯夷)·숙제(叔齊)가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먹다가 굶어죽은 고사에 비유하여 명명한 것이다. 백이숙제는 충절의 표상이다. 경내의 경모각(敬慕閣)에는 길재의 충절을 기리는 숙종(肅宗)의 어필 오언절구가 있다. …
歸臥烏山下 (귀와오산하) 금오산 아래 돌아와 은거하니
淸風比子陵 (청충비자릉) 청렴한 기풍은 엄자릉에 비하리라
聖主成其美 (성주성기미) 성주께서 그 미덕을 찬양하심은
勸人節義興 (권인정의흥) 후인들에 절의를 권장하심일세.
— 숙종어필(肅廟御筆) 「좌사간길재(左司諫吉再)」
길재(吉再)는 낙동강변 지금의 구미시 고아읍 봉한리에서 태어나, 11세에 낙동강 건너 아도화상이 창건했다는 도리사(桃李寺)에서 공부를 했다. 길재는 31세에 과거에 급제했는데, 이때 길재는 그보다 14살이나 어린 이방원(李芳遠)과 만난다. 이방원은 1년 앞서 16세의 어린 나이로 급제를 했다. 길재와 이방원은 한 동네에 살면서 돈독한 사이가 되었다. 이성계의 아들 중 유일하게 문과에 급제한 이방원은 길재의 학문과 인품에 감복을 했다.
후에 이방원(李芳遠)이 실권을 장악한 뒤, 길재(吉再)의 훌륭한 학덕을 생각하여 정종을 통하여 한양의 조정으로 불러들였다. 그리고 태상박사의 벼슬을 내렸다. 이에 길재는 이방원을 만나 옛정을 생각하여 벼슬을 내리는 것은 감사하지만 두 임금을 섬기는 것은 도리가 아니므로 철회해 줄 것을 요청했다. … ‘나는 고려 사람이니 조선 왕이 내린 벼슬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며 거절했다. 목숨을 내거는 결기가 없이는 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이방원은 길재의 고사(固辭)를 받아들였다. 어릴 적부터 교유해온 그 성정을 인정했던 것이다. 오히려 ‘강상불역(綱常不易)의 도(道)’라며 칭찬을 했다. 길재이기에 가능한 길이었다. 길재는 선산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에 개경에 들렀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패망한 나라의 수도 개경에서 세월의 덧없음, 권력의 허망함, 인간사 흥망성쇠의 무상함을 노래했다. 그것이 회고가이다.
오백년 도읍지를 匹馬(필마)로 돌아드니
山川(산천)은 의구하되 人傑(인걸)은 간 데 없네
어즈버 太平烟月(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 아, 지금 대한민국은 어떤가? 어즈버 太平烟月(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
<계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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