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에서 가장 먼 곳까지/ 이문재
그러면 그렇지, 겨울이 옷소매를 놓아주려나보다.
이른 아침 겨울의 언 발치에 보슬비 내린다. 잔설 듬성듬성한 산등성이 나무들이 극세사 같다. 열한시 방향 시야가 조금 흐리다. 내륙 산간의 가장 깊은 데를 넘어가는 늦겨울 보슬비다.
보슬비는 고요에 간섭하지 않으려는 듯
빗방울을 불리지 않고 소리 없이 소리를 내려놓는다. 창문을 열자 미세먼지 같은 한기가 실핏줄 끝까지 스며든다. 견딜 만하다. 그러고 보니 여기 백두대간 늑골 뒤켠도 입춘 부근이다. 고드름 끝이 조금 순해졌다.
고요는 밖에 있고 침묵은 여전히 내 안에 있다.
그렇다고 침묵이 잘 여무는 것은 아니다. 면벽에서 단맛이 나려면 아직 멀었다. 나 몰라라 해놓고 투항하듯 기어든 외진 산촌 나의 겨울 한 철은 백묵 같았다. 하얀 먹 백묵은 검은 바탕에만 쓸 수 있는 이상한 필기구였다. 간혹 고요의 외곽에서 단단해지던 정신은 여지없이 부러지고 시도 때도 없이 습기를 빨아들였다.
젖은 눈 쉬지 않고 내리는 밤은 무섭도록 고요했다.
습설은 거대한 집음기였다. 수제비 같은 눈송이들이 천지간 소리란 소리를 다 집어삼켰다. 그럴수록 내 안이 시끄러워졌다. 나는 소음이고 소음의 확성기였다. 하루가 다르게 청력이 나빠졌다. 산촌의 눈 내리는 밤 난청은 침묵의 눈동자를 쏘아볼 수가 없었다. 나는 나의 바깥이었다.
밖에서 고요가 빼곡해질수록 내 안의 침묵은 헐거워졌다.
침묵을 노려보면서 침묵의 내부로 진입하려다가 매번 실패했다. 침묵은 앙칼졌다. 밖에서 고요가 건장해질수록 나는 무너져내렸다. 기억이 강박 쪽으로 달려가고 상상이 과대망상과 뒤엉키기도 했다. 세속 도시의 거리들이 능구렁이처럼 몸뚱어리를 휘감았다. 함부로 내뱉은 말들이 잠복기가 끝난 병균처럼 기승을 부렸다. 그때 기어코 하지 못한 말들이 여기저기 화농처럼 곪아터졌다.
강원도의 견갑골 언저리 홀로 겨울 한 철을 보내면서
내 마음의 음량이 산간 고요의 음량과 같아지기를 원했다. 과거로만 쏠리는 상한 마음을 지금 여기로 불러오고 싶었다. 죽기 전에 죽고 싶었다. 죽기 전에 죽어서 다시 태어나고 싶었다. 내가 새로워져서 지금 여기가 길고 넓고 깊어지는 것을 보고 싶었다.
그러면 그렇지 보슬비가 진눈깨비로 바뀌고 있다.
겨울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물러설 리 없다. 겨우내 쌓인 눈이 한나절 보슬비에 녹아내릴 턱이 없다. 겨울이 며칠 더 머물러도 괜찮다. 조급해하지 않기로 한다. 병을 고치려면 병이 드는 데 걸린 만큼 시간이 필요하다는 말이 있다. 침묵의 중심에서 가장 먼 곳까지 다시 다녀오기로 한다.
그러면 그렇지 아건 아예 투석전이다.
진눈깨비가 열두시 방향에서 들이닥친다. 하늘이 급하게 낮아지고 고드름 끝이 다시 빳빳해진다. 장작불 괄괄하게 지피고 감자부터 한 솥 쪄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