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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內浦地方 가을 나들이
一 松 韓 吉 洙
2018년 10월 29일 1년 중 그 좋은 가을의 막바지이다.
서울 광진구 시우회 운영위원들 24명이 말없이 지나가려고 하는 가을이 너무나 아쉬웠는데 임도보고 뽕도 따는 행사가 있기에 한 자리를 차지했다. 광진구와 자매결연을 하고 있는 충남 보령시 웅천읍에 있는 사회복지법인 [이야기마을]을 위문격려 겸 나들이하는 기회가 있었기 때문이다.
손가락으로 튕기면 “쨍”하는 소리가 들릴 것 같이 투명한 가을 하늘은 팽팽하고 맑았다. 우리들의 어깨를 스치는 가을바람은 연인의 손길인 냥 보드랍고 간지럽다. 이런 청명한 날씨에 어찌 방안에서 뒹굴 수 만 있으랴! 우리도 밖으로 나가 가을 하늘을 보고 임도 만나는 양수겸장 행렬에 나섰다.
구의동 옛 방지거 병원 앞에서 08;20에 출발한 관광버스 내에서 회원들은 “금강산 구경도 식후경”이라 김밥으로 아침식사를 때우고 김광수 회장의 인사말이 끝나자마자 광동제약에서 나왔다는 강 모 본부장이라는 사람이 마이크를 독점하더니 새로 나온 건강에 좋다는 약에 대한 PR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그러더니 동가홍상同價紅裳이라 마음을 홀리는 무슨 퀴즈를 내고 선물을 주고 혼자 북 치고 장구 치는 일을 다 하고 있었다. 그래서 가만히 들어 보니 그냥 흘리는 약장수의 말만은 아닌 것 같기도 하다. 듣다 보니 그 약이 심신이 허약한 안식구에게 안성맞춤으로 딱 맞을 것 같기도 해서 필자도 주문대열에 합류했다.
그러는 사이에 우리 버스는 경부고속도로에서 서해안 고속도로로 옮겨 타더니 이 약장수를 행담도에 내려주고 우리는 일로 남으로 달려 웅천읍 부당길이라는 시골길로 들어섰다. 주변은 만 가실인지라 오곡백과가 무르익어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른 현장이었다.
마침내 우리들은 수탉들이 “꼬끼오”로 맞이해 주는 마을 끝에 있는 외딴 집에 도착하고 보니 빨갛게 익은 감과 노란 모과 등 과일들도 고개를 숙이며 우리에게 어서 오라고 인사하고 있었다.
이곳이 사회복지 법인 [이야기 마을]이었다. 보령시청 기획감사 팀장을 비롯하여 관계직원들과 웅천 백영창 읍장 등 7-8명의 직원들이 미리 나와서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들은 위문품을 차량에서 꺼내 나열해 놓고 기념사진을 촬영한 뒤에 김광수 회장이 이곳 [이야기 마을]의 양회대 원장에게 위문품을 증정하는 절차를 마치고 2층에 올라가니 커다란 강당이 교회 기도실 같은 분위기인데 이곳 양모세 사무국장이 이곳의 운영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었다.
이어서 목사이신 양회대 원장님의 환영사가 있었고 김광수 회장의 답사가 있었으며 필자가 펴낸 낙수첩 제7집[사랑의 송가]를 양회대 원장과 보령시청의 기획감사 팀장에게 전달하는 절차도 있었다. 이러한 절차를 마친 우리들은 장애인들이 생활하고 있는 시설을 둘러보았는데 대부분의 환우들이 거실에 모여 TV를 시청하고 있었다. “떡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백영창 읍장에게 읍내에서 수의과 병원을 하고 있는 최규교씨의 안부를 물으니 그 아들들이 공부를 잘 해서 서울대학과 카이스트에 들어갔다는 이야기는 들었으나 근황은 잘 모르겠는데 알아서 알려주겠다고 했다.
이곳 이야기 마을은 “장애인과의 만남은 행동입니다”라고 하는 캐치프레이즈 아래 2007년 1월 사회복지 법인을 설립하여 2009년 생활관을 신축했다고 한다. 이곳은 부지면적이 1.520m2이고 건물면적은 590.28m2로 수용인원은 정원 30명인데 현재 29명이 살고 있으며 이를 운영하기 위한 직원은 19명이 있다고 한다. 주요사업으로는 건강증진 지원사업, 일상 생활능력 향상사업, 장애 유형별 사업, 사회 재활사업, 특화 사업, 특별행사 사업, 후원 자원봉사 사업, 인권지킴이단이라는 사업 등을 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12;00가 지났다.
민은 식이위주라는 말도 있으니 우선 점심을 제대로 챙겨먹어야 한다. 장애시설에서 나가다 보니 오른쪽 언덕위에 아담하게 지어 놓은 건물이 있으니 우리가 점심을 예약한 <고향산천>이라는 음식점이다. 아무리 식이 우선이라고 해도 이 집의 문지기처럼 서 있는 큰 돌에 새겨놓은 시 한 수를 먼저 읽어 보아야 제대로 밥맛이 날 것 같았다.
故鄕山川
여리고 여린 무릎
돌부리에 걷어채어 성한 곳이 없었던 곳
천진하기만 하던 어린 날에
포근하기만 했던 어머님의 품속은
노년의 그리움으로 남는 곳.
유년의 벗들이어 기억하는가?
씀박이와 같이 쓰디쓴 기억과
된장국같이 구수하고
잘 익은 개복승아같이
새콤하고 달콤한 기억들을.
버리고 간 사람도
그리운 사람도
차별 없이 아우르는 다정한곳
그리운 고향산천을.
음식점 입구에 있는 넓은 돌에 새겨있는 이 시를 읊고 나니 이집의 음식 맛은 먹어보지 아니해도 맛이 짱 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자연석으로 만든 돌계단을 오르니 넓은 홀이 나오는데 이미 정갈한 음식상이 차려져 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토종닭을 삶아 놓은 그릇에서 한 국자 떠서 국물 맛을 보니 명불허전이라 홀로 먹다가 둘이 죽어도 모르겠다는 경지다.
거기에다가 막걸리를 가미하게 되니 도도한 기분이 저절로 솟는지라 “위하여” 소리가 연발하는데 음식이 제대로 입으로 잘 들어가는지 모르겠다. 한낮의 따뜻한 陽光은 등짝을 덥히는데 맛깔스런 시골음식인지라 뱃속에서 계속 불러들인다. 마지막 입가심으로 이곳 아줌마가 손수 말린 감 조각을 내놓는데 살살 입속에서 녹는다.
다음은 가을 드라이브에 최적이라는 보령호保寧湖에 도착했다
이 보령 댐은 충청남도 보령시 미산면 보령호로 819(용수리)에 위치하고 있다. 산 깊고 물 맑은 곳으로 꼽히는 미산지역에 자리하고 있는 이곳에서 서해 인근 7개 시군에 생활용수를 공급하고 있어 산업적 가치가 높을 뿐만 아니라 경치가 좋아 새로운 관광명소로 자리 잡고 있다. 그 외에 보령호는 굽이굽이 푸르른 산으로 둘러져 있어 연인들의 드라이브 코스로도 제격이란다.다목적댐인 보령호는 높이 50m 길이 291m 총저수량 1억1700만t의 댐이다. 한국수자원공사가 1992년 6월부터 4.286억 원을 들여 충청남도 서북부 지역에 생활용수와 공업용수 등을 공급할 목적으로 건설한 다목적댐인데 4년 4개월만인 1996년 10월에 완공되었다.
보령 댐은 성주산과 아미산의 계곡물이 흘러드는 웅천천을 막아 세운 댐으로 은어가 많이 서식했던 웅천천이 댐이 들어서면서 거대한 인공호수로 변했다. 이 보령 댐의 물은 부근 시군에 생활용수로 공급하는 외에 공업용수로는 보령 관창공단 태안화력발전소 당진화력발전소에도 공급하고 있다.호수 주변에 볼 만한 곳은 이곳에는 무궁화공원이 조성되어 있으며 보령댐 수몰기념관을 비롯하여 도화담 약수와 옥마산 중대암의 영천약수가 있고, 수현사水鉉祠(충남문화재자료 142) 용암사龍岩祠 보령 삼계리 입석保寧三溪里立石등이 있어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다음에는 금강 댐에서 보령 댐으로 물길을 연 도수로 공사 내용을 알아본다.
2016년 충남 지역의 극심한 가뭄으로 물난리가 나자 할 수 없이 부분단수를 시행하였는데 가뭄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금강과 보령 댐에 물길을 뚫어 보령 댐의 수위를 높이는 도수로 설치 사업을 한 겨울인 2016년 11월에 착공하였는데 3개월 만에 완공하여 이듬해 2월 22일에 통수식이 개최 되었다고 한다.
이 사업으로 인하여 보령 댐은 하루 11만 5천 톤의 물을 금강으로 부터 가져올 수 있게 되었는데 기존 보령 댐의 하루 용수 공급 능력이 28만 5천 톤이었는데 도수로 사업으로 인해 약 1.4배의 용수 공급 능력이 증가된 것이니 정말 대견한 사업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상황인데도 4대강의 보를 헐어버려야 한다는 자들이 있으니 한심하다.
우리들은 보령 댐 휴게소 앞의 단풍이 든 느티나무 앞에서 단체사진을 찍고 추사 고택을 향하여 북쪽으로 달려갔다.
禮山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고택
예산은 예절 바른 사람들의 땅이라고 한다. 고려 태조 때 왕 건은 그 땅에 예와 덕을 갖춘 백제 유민을 모았다. 백제부흥운동이 거셌던 그 땅이 잠잠해지길 바라서였다. 그 땅은 이후 고려 예산현으로 불렸다. 그러나 백제의 흔적을 모두 지울 순 없었다. 그 땅 서쪽에 있는 수덕사는 백제계의 곡선미로 건축하였기에 지금까지 그 찬란함을 유지하고 있다.또한 예산은 살기 좋은 땅이었다. [택리지]의 저자 이중환은 충청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땅을 內浦라 했다. 가야산 둘레 열 고을이 내포였고 예산은 그중 한 고을이었다. 땅이 기름졌으니 부자가 많았다. 영조의 부마도 그 땅에 향리저택인 향저鄕邸를 두고 살았다. 그곳에서는 추사 김정희를 낳았기에 그 건물도 추사고택으로 개명했다. 추사고택에 들렸다 하면 고택뿐 아니라 추사의 묘소와 추사 기념관 그리고 추사의 증조부인 김한신, 화순옹주의 정려문과 묘소 백송 그 외에 화암사까지 둘러보아야 제대로 1괄해서 보았다고 할 수 있다.
추사 기념관
우리는 먼저 추사 기념관에 들렸다. 사전에 예약을 하지 아니했다고 문화 해설사 없이 우리끼리 관람했다. 여기에서는 추사의 학문과 예술은 물론 세한도 불이선란 죽로서실 무량수각 일산이수정이라는 글씨와 그림을 볼 수가 있다. 그 외에 추사 김정희의 일대기와 업적 등 기본적인 내용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평생 추사가 쓴 글씨나 족자 아니면 현판 등 추사에 관련된 것은 다 모아놓아 추사 백과사전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우리들은 2층에는 오르지 못하도록 금줄을 쳐 놓아서 유감이었다. 이곳에는 추사 본인뿐 아니라 추사의 고조부가 영의정이었으며 증조부는 옹주와 결혼한 부마라는 가문에 관한 사실도 가족 체계 도에 표시해 놓았다.
추사 선생
다음은 추사 내외분의 묘소를 가 보았다. 봉분은 나지막하고 석물도 단조롭다. 추사는 15세에 동갑인 한산 이 씨와 혼인해 금슬이 좋았으나 5년 만에 아내를 잃었다. 그리고 23세에 두 살 아래인 예안 이 씨와 재혼했다. 1937년 후손들이 한산 이 씨 홀로 잠들어 있던 이곳에 과천에 묻혔던 추사와 예안 이 씨를 이장하면서 3인 합장묘가 되었다고 한다.
추사와 예안 이 씨와의 애틋한 이야기도 전하고 있다. 추사가 제주도 유배 때 아내에게 쓴 편지 40여 통이 있는데 양반 댁에서 조동으로 자란 추사가 제주도 음식이 입에 맞지 않는다며 반찬투정을 하는 편지를 보내면 부인은 정성스레 반찬을 마련하고 의복과 함께 보내주었다고 한다.
하지만 예안 이 씨도 유배 3년째인 1842년 세상을 떠나고 만다. 한 달여 뒤 부음을 받은 추사는 눈물로 슬퍼하며 애서문哀逝文과 제문을 지었다. 특히 도망시悼亡詩가 전 하는데 이는 아내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시로 무척 슬프고 애틋하다.
어떻게 월로(月下老人)께 호소를 하여
서로가 내세에 바꿔 태어나
천리 밖에서 내가 죽고 그대는 살아
이 마음 이 설움 알게 했으면.
추사 선생은 1786년(정조 10년)에 예산 이곳에서 태어나 1856년(철종 7년) 71세 까지 살다가 작고했다. 그의 호는 추사秋史 완당阮堂 예당禮堂 시암詩庵 과노果老 농장인農丈人 천축고선생天竺古先生 등 2백여 개나 된다. 24세 때 아버지를 따라 중국 청나라에 가서 짧은 시간에 당대 제1의 학자인 옹방강翁方綱(1733~1818) 완원阮元(1764~1849) 등과 필담으로 대화를 했는데도 천재성을 인정받아 직접 가르침을 받고 금석학과 서체 등을 배웠으며 31세 때에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를 고증하여 비문의 뜻을 밝혀내는 밝은 눈을 우리들에게 보여주었다. 그러더니 34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승장구하여 51세에 성균관 대사성에 올랐다. 그러나 55세에 안동 김 씨 세력에 밀려 위리안치圍籬安置 유배형을 받고 63세까지 제주도로 유배되었는데 그곳에서 추사체를 완성하였고 헌종 말년에 귀양이 풀려 돌아왔다.
그러나 1851년 66세 되던 해에 또다시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되었다가 2년 만에 풀려 돌아왔다. 안동 김 씨의 행패로 정계에는 복귀하지 못하고 아버지의 묘소가 있는 과천의 과지초당瓜地草堂에서 3년간 은거하면서 학문과 예술에 몰두했다.
1856년, 봉은사에서 화엄경 경판을 보관할 전각의 현판을 김정희에게 청했다. 추사는 ‘板殿’이라 쓴 후 그 옆에 행서로 ‘七十一果病中作’이라고 썼다. ‘71세에 과천에서 병중에 쓴 작품’이라는 뜻이다. 추사는 이 글씨를 쓰고 나서 3일후에 세상을 떠났다.
이 판전은 어린 아이가 쓴 것처럼 어떤 기교나 서법도 드러내지 않은 글씨. 오랜 연구와 깊은 통찰력으로 자신만의 독창적인 서체, 추사체를 만든 김정희.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글씨는 모든 것을 초월한 글씨다.
“될 성 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는 말이 있다. 김정희는 어렸을 때부터 무언가 남다른 싹이 보였던가 보다. 나이 6살 어린 김정희가 써서 월성위 대문에 붙인 입춘첩을 보고 당시 북학파의 대가인 박재가朴齊家가 지나다가 이를 보고 추사의 부친을 찾아뵙고“이 어린아이가 훗날 학예로 이름을 드날릴 만 하니 제가 이 아이를 가르쳐 성취시키겠습니다. 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 다음해인 김정희가 7살 때는 당대의 명재상 채제공蔡濟恭이 역시 추사의 앞날을 예지하는 듯 한 말을 남겼다. “만일 글씨를 잘 쓰게 되면 반드시 운명이 기구할 것이니 절대로 붓을 잡게 하지 마시오. 그러나 만약 문장으로 세상을 울리게 되면 크게 귀하게 되리다.”
추사고택
우리는 추사 내외 묘소에서 묘원의 잔디를 밟고 고택으로 향했다. 그런데 이 고택은 원래 남에게 넘어간 것을 박정희 대통령이 복원을 지시해서 우리들에게 추사의 자취를 보여주게 되었다고 한다.
고택 솟을대문으로 들어서보면 안채와 사랑채의 구분이 엄격히 구분된 조선시대의 유교적 가옥이지만 철저한 유교사회에서도 그의 실학자적인 면모는 발견할 수 있다. 사랑채 댓돌 앞에 石年이라 각자된 석주는 추사의 아들인 商佑가 쓴 것으로 그림자를 이용하여 시간을 측정하는 해시계로 추사가 직접 제작하였다고 전해진다.
추사고택에서 유심히 볼거리 중 하나는 세한도다. 이는 시화 일치를 추구한 추사의 정신세계를 반영한 걸작이다. 이 세한도는 추사가 윤상도의 옥사사건에 연루되어 제주도에서 유배 중일 때 중국에서 귀한 책을 계속해서 조달해 주는 등 의리를 저버리지 않는 제자 이상적에게 건넨 그림이었다. 그건 산수화가 아니라 뜻 그림이었다. 세한도에 찍은 낙관은 장무상망長毋相忘이다. 오래도록 서로 잊지 말자는 말인데 34세 때 문과 급제 후 10년간 승승장구로 승진했을 때 임금에게서 기쁘고 기쁘고 또 기쁜 일이라고 격려까지 받았던 추사가 직접 그린 세한도에는 꿋꿋이 역경을 딛고 일어서는 선비의 의지가 담겨 있다고 한다.
고택의 사랑채와 안채 기둥마다 여러 가지 내용의 주련柱聯이 달려있어 눈길을 끈다. 대충 훑어보던 중 안채의 기둥에 붙어있는 대팽두부과강채大烹豆腐瓜薑菜 가장 좋은 반찬은 두부 오이 생강 나물이고 고회부처아녀손高會夫妻兒女孫 가장 훌륭한 모임은 부부 아들 딸 손자와의 모임이다 이라는 주련의 역동적인 글씨가 필자의 눈을 호강시켰다.
안채는 가운데의 안마당을 중심으로 사방이 막힌 ㅁ자형의 배치를 보이고 있다. 살림살이를 하던 안채는 문을 들어서면 바로 보이지 않도록 판벽을 설치하여 막아놓았다. 대청은 다른 고택들과는 달리 동쪽을 향하였고 안방과 그 부속공간들은 북쪽을 차지하고 있다.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며 지형의 높낮이가 생긴 곳에서는 사람 인人자 모양의 맞배지붕으로 층을 지게 처리하였다.
사랑채 뒤편으로 안채가 있고 그 뒤로는 영당이 자리하고 있다. 영당에는 추사의 제자이자 화가인 이한철李漢喆이 그린 초상화(복제 본)가 있다. 국가 중대사 때 입는 대례복 차림의 나이 든 추사가 인자하고 평온한 표정을 짓고 있다. 볼에는 어려서 앓은 것으로 추정되는 마마 자국까지 표현돼 있다.
추사의 이 고택에 대한 애정은 각별했다. 세상에서 버리면 추사는 고택에서 몸과 마음을 추슬렀고 높게 쓰이면 한양으로 갔다. 추사고택은 일찍 사별한 어머니의 품이었다.
원래 추사고택은 부마의 집이었다. 추사 증조부 김한신은 영조의 둘째 딸 화순옹주와 결혼했다. 영조는 김한신을 월성위로 봉했고 서울 월성위궁과 함께 예산 땅에 향리저택을 하사했다. 이 향저는 처음엔 53칸짜리였고 충청도 53개 고을이 한 칸씩 부조해서 지었다고 한다. 향저는 1960년대 개축 후 36칸 반으로 축소됐다.
영의정 김흥경의 아들인 김한신(1720∼1758)은 사도세자의 누이동생인 화순옹주와 결혼하였으나 1758년 사도세자와 말다툼 끝에 벼루를 맞고 3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화순옹주는 오빠 사도세자의 하는 짓에 격분하여 영조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14일 동안 식음을 전폐한 뒤 남편의 뒤를 따라 숨을 거두었다. 영조는 화순옹주의 정절을 기리면서도 부왕의 뜻을 저버린 데 대한 아쉬움 때문에 열녀문을 내리지 않았으나 후일 정조가 열녀홍문을 세워주었다. 옹주는 조선왕조의 왕실에서 나온 유일한 열녀라고 한다. 가까운 곳에 김한신과 화순옹주의 합장묘가 있다.
추사 고택.
추사 기념관 전경.
고택 옆에 자리 잡은 추사 내외의 무덤.
백송추사고택에서 북쪽으로 600m쯤 올라가면 천연기념물 제106호인 백송을 볼 수 있는데 백송은 중국북부 지방이 원산지로 우리나라에 몇 그루 없는 희귀한 수종이다. 예산의 백송은 추사선생이 25세 때 청나라 연경에서 돌아올 때 백송의 종자를 붓대 속에 넣어가지고 와서 고조부 김흥경의 묘 입구에 심었던 것이다.원래는 밑에서 50cm부터 세 줄기로 자라다가 서쪽과 중앙의 두 줄기는 부러져 없어지고 동쪽의 줄기만이 남아서 자라고 있다. 1980년도에 줄기의 피해 부분을 외과 수술하여 치유하였고 그 후부터는 철저하게 보호 관리하고 있다. 소나무 줄기의 껍질 표면이 페인트로 색칠을 한 듯 하얗게 물들어 있는 백송은 중국 원산의 희귀한 소나무 품종이라고 한다.
한편 백송공원에는 추사의 독창적인 예술세계를 볼 수 있는데 그 수준 높은 미술사적 가치를 관광자원화하기 위해서 국내 유명 조각가들의 작품을 모아 전시해놓았다고 한다.
화암사추사의 체취는 오히려 화암사華巖寺에서 짙게 느껴진다고 한다. 화암사는 고택 뒷산인 오석산烏石山 서남쪽 자락에 있다. 추사가 소봉래小蓬萊라고 써서 뒷산 바위에 새겨 놓았는데 봉래란 금강산의 다른 이름이다. 추사의 증조할아버지 김한신(1720~1758)은 왕실로부터 추사고택 일대 토지를 별사전으로 받았다. 그 땅에 화암사도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월성위月城尉에 책봉된 김한신은 화암사를 중건해 집안의 원찰願札로 삼았다. 그럼으로 화암사는 한마디로 경주 김 씨의 가내 사찰이었다. 화암사에서 추사의 흔적이 가장 진하게 남아있는 곳은 대웅전 뒷마당이다. 뒤편으로 돌아가면 병풍처럼 둘러쳐진 바위 이쪽저쪽에 ‘시경’詩境 ‘천축고선생댁’天竺古先生宅이라고 새겨 놓았다. 재치가 넘치지만 본격적인 절집이라고 생각했다면 뒷마당에 이런 글을 새기지는 않았을 듯싶다. 불교를 깊이 이해하고 있지만 신자는 아니라고 구태여 변명하는 듯한 느낌도 든다. 10년 뒤에는 와병 중에도 서울 봉은사에 판전板殿 현판을 쓴 추사다. 하지만 환갑 언저리까지만 해도 불교를 바라보는 시각이 한 걸음쯤은 뒤로 물러나 있었던 것 같다.
우리는 추사고택 한쪽에서 막걸리 파티를 열고 차내에서 불가한 음주를 이곳에서 해결을 했으니 이것도 현명한 처사라 할 것인지?
그러나 이번 추사고택을 방문하면서 화순옹주의 홍문과 묘소 그리고 백송과 화암사를 보지 못하고 그냥 지나치고 말았는데 너무나 아쉽다. 이걸 기화로 다음에 다시 들릴 핑계꺼리가 되었으면 좋겠다.
우리들은 기념품으로 나누어 줄 물품을 구입하기 위하여 잘 가다가 약간 뒷걸음처서 광천으로 백 했다.
광천의 젓갈시장
광천 젓갈시장은 충청남도 홍성군 광천읍 옹암포(독배)에 있는 시장이다. 과거 서해안의 여러 섬에 흩어져 살고 있던 사람들이 광천장이 열리는 날이면 이곳에 모여 해산물을 팔면서 지역의 중심 상권으로 크게 번성시켰다. 광천토굴젓갈은 옹암포에서 생산하는 새우젓으로 생산량이 많을 때에는 전국의 새우젓 생산량의 약 60%를 차지할 정도로 명성이 자자하다고 한다. 논산시 강경과 쌍벽을 이루는 광천토굴젓갈이 유명해진 이유는 이곳 사람들이 새우젓의 소금 간을 맞추는 솜씨가 뛰어났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한 폐 금광이었던 토굴을 젓갈 저장고로 이용하게 되면서 기온 변화가 심한 바깥공기의 영향을 받지 않고 연중 10~15℃와 65%인 습도조절로 젓갈을 숙성시켜 다른 지역에 비해서 젓갈의 맛과 색이 월등하게 좋기 때문이라고 한다.
우리는 광천역 앞에 차를 세우고 내려와 보니 때는 바야흐로 국화의 가절인지라 색색으로 쌓아 올린 11층 국화 탑을 보고 모두를 카메라에 이를 담느라고 열중하여 기념품은 안중에도 없었다.
광천역 옆에 있는 젓갈 슈퍼에서 공동 선물로 낙지젓갈을 주문했고 필자는 꼴뚜기젓과 새우젓을 사기도 했다.
자! 이제는 상경하는 일만 남았다. 열심히 달려 아침에 출발했던 구의동에 도착하니 밤 8시이다. [술도둑 밥도둑]이라고 하는 음식점에서 동태 탕으로 저녁식사를 하고 保寧市長이 보낸 기념품과 광천 시장에서 마련한 기념품을 들고서 각자 아침에 나왔던 곳으로 가기위하여 오늘 모임의 휘나레를 장식했다.
2019년 한맥문학 동인회 사화집 제19호에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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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