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 : 앞서가신 신앙의 선구자
요사이 청소년들에게 많은 관심을 끄는 인물은 단연 ‘인기 스타’인 것 같다. 그들의 이름을 꿰는 것은 물론이고, 그들의 근황과 생활 구석까지 모르는 것이 없을 정도로 관심이 많다. 스타는 인기를 먹고 산다. 아니 인기에 죽고 산다. 그러니 생명력이 짧다. 한시적이다.
반면에 청소년들에게 존경하는 영웅이 있느냐고 물으면 대답을 잘 못한다. 존경하는 영웅에 별로 관심이 없는 것 같다. 하지만 영웅들은 시대가 지나고 세대가 바뀌어도 변함없이 늘 공경받는다. 그들은 스타처럼 인기에 죽고 사는 것이 아니다. 영웅들의 위대한 업적은 어느 시대에나 큰 영향을 끼치고, 삶의 지혜로 작용한다. 그들의 삶 자체가 후대 사람들에게 존경을 불러일으키게 만든다. 그들은 우리 세대에도 살아있는 것이며, 그래서 항구하다.
영원을 생각하고 하느님 나라를 찾는 우리 신앙인들에게도 신앙의 영웅이 있다. 믿는 이는 인기에 좌우하는 스타가 아니라, 신앙의 훌륭한 모범을 보이신 신앙 선조들을 기억한다. 우리 한국교회에도 신앙의 귀감이 되는 선구자가 많다. 특히 해마다 7월 5일이 되면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대축일을 지낸다. 이날은 신부님이 복자위에 오르신 날로서, 신부님을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로 정하여 기념하고 있다. 그것은 한국인 최초의 사제이실 뿐 아니라, 박해 속에서도 굳건한 신앙으로 주님의 부르심에 충실하였던 착한 목자의 모습을 보여주셨기 때문이다.
김대건 신부님은 1821년 독실한 천주교 집안에서 태어나, 신앙의 깊은 가르침 안에서 성장하였다. 신부님의 가족들도 모두 순교의 영광을 받을 정도로 열심하였다. 1836년 모방 신부에 의해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사제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박해의 어려움 때문에 학업을 지속하고자, 유방제 신부의 인도로 길을 떠나 마카오 신학교에 들어갔다. 1841년 11월 조선교회가 박해 때문에 소식이 끊어지자, 고국의 양들을 걱정하여 여러 차례 의주 방면으로 입국을 시도하였지만 실패하였다.
1843년 중국의 ‘소팔가자’에서 최양업과 신학공부를 계속하다가, 조선 교구장인 페레올 주교의 명으로 두만강을 건너 입국을 시도하였지만 또 실패하였다. 다시 돌아가 1844년 부제품을 받고, 1845년 1월 1일 변문을 통해 서울로 들어오는 데 성공하였다. 고국에서 선교사 영입 준비를 마친 다음 상해로 되돌아와, 그해 6월 상해에서 페레올 주교에게 사제품을 받았다. 그리고 8월에 상해를 떠나, 10월 충청도 강경 나바위에 도달하였다.
새 사제로 입국하여, 숨어 지내는 교우들을 찾아 사목하였고, 조선교구 부교구장으로 임명되어 1846년 5월 선교사를 영입할 뱃길을 개척하려고 백령도에 도착하였다. 그러다가 6월 초 관헌에 체포되어, 해주를 거쳐 서울로 압송되었다. 3개월 동안 문초를 받고, 그해 9월 16일 반역죄로 군문효수형을 선고받아 새남터에서 참수되었다.
신부님은 1857년 가경자로 선포되고, 1925년 7월 5일 복자위에 오르셨다. 그리고 1984년 5월 6일 온 교회가 공경하는 성인이 되셨다.
신부님은 한국인 최초의 사제이시며, 최초의 서양학문 유학자이시다. 비록 짧은 기간 동안 사목하셨지만, 교회를 사랑하는 목자의 열정을 느낄 수 있다. 25통의 옥중서한을 통해 탁월한 학문의 지혜와 신자들을 배려하는 목자의 사랑을 보여주셨다. 신부님은 한국인으로서 전통 관습을 가장 잘 이해한 목자이셨다. 또한 관헌들의 온갖 회유에도 흔들리지 않고, 타협을 모르는 불 같은 신앙으로 모든 후배 사제의 신앙적 귀감이 되셨다.
이렇듯이 신부님은 순교를 통하여 굳건한 신앙을 지켰고 자신이 흘린 피로써 한국교회에 신앙의 뿌리를 내린 것이다. 그만큼 앞서가신 우리 신앙의 선구자이시기에, 성인의 대축일을 모든 신자가 참여할 수 있도록 7월 5일에 가까운 주일로 옮겨서 지낸다. 이날 교회는 순교자의 용기(제1독서)와 주님의 나라를 위한 박해를 뛰어넘는 참된 행복(복음)을 선언하며, 고통 가운데서도 기뻐하는 희망을 주는 하느님의 사랑(제2독서)을 상기시키는 성서 대목들을 봉독한다.
신부님은 한국인 첫 사제로서, 천국에서 한국교회와 특히 후배사제들을 위하여 하느님께 전구해 주실 것이다. 성인의 축일을 맞아, 여름 날씨처럼 뜨거운 열정으로 교회를 돌보시던 그 깊은 사랑을 묵상해 보자. 우리도 성인을 본받기로 다짐하고 그분의 전구를 구하여 굳건한 신앙의 은혜를 받도록 하자.
<나기정 다니엘 신부, 대구 가톨릭 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경향잡지, 2001년 7월호>
성 김대건 사제 순교자 대축일 특집 - 체포에서 순교까지 -
(사진설명)
▲순위도에서 체포됨
김대건 신부가 제3대 조선교구장 페레올 주교의 지시로 서양 선교사 입국로 개척을 위해 서해안 일대 해도를 작성하던 중 황해도 순위도 등산나루에서 포졸들에게 체포되고 있다.
▲옥중 세례를 베풂
포도청으로 압송된 김대건 신부가 한달여간 혹독한 옥중생활을 하면서도 죄인들에 복음을 전파, 함께 체포된 선주 임성룡의 아버지 임군집에게 옥중 세례를 베풀고 있다.
▲위대한 순교
김대건 신부가 1846년 9월16일 서울 한강변 새남터에서 어영천 군사들에게 참수형에 처해지고 있다. 그림= 탁희성 화백
"나는 '천주'를 위해 죽는 것입니다"
김대건 신부는 기해박해(1839년)와 병오박해(1846년) 순교자 79명과 함께 1925년 7월5일 로마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다. 한국 천주교회는 해방 후 김대건 신부 순교 100주년이 되던 해인 1946년 김 신부를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로 정하고, 그 축일을 그의 시복일인 7월5일로 정했다. 올해는 김대건 신부가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로 선포된 지 60돌이 되는 해이다. 이 뜻깊은 날을 기념해 김대건 신부 생애 중 '체포부터 순교까지'의 과정을 구성해 보았다.
1846년 6월5일(음력 5월12일) 황해도 작은 섬마을인 순위도 등산나루. 밤새 대지를 탐한 해무가 채 증발하지도 않은 이른 아침. 대지의 나른함을 깨우는 날카로운 소리들이 포구에 울려 퍼졌다. 나루 옆 주막 사람들이 화들짝 놀라 맨발로 뛰쳐나와 보니 말쑥한 양반 차림의 한 청년과 순라 포졸들이 때아닌 시비를 벌이고 있었다. 포졸들은 "조선 해안에서 어민들에게 해를 끼치는 중국 어선들을 몰아내기 위해 배를 징발하겠다"며 위협했고, 청년은 "한양에서 순위도까지 몇차례 왕래했지만 이런 법은 없었다"며 한치도 물러나지 않았다. 예나 지금이나 황금어장인 백령도 인근에는 중국 어선들의 횡포가 극심했던 모양이다.
포졸들은 예상보다 선주의 저항이 거세자 호패를 보여줄 것을 요구했다. 불심검문이다. 마침 호패를 차지 않았던 청년이 불응하자 포졸들은 "행색이 조선 사람이 아니라 중국놈 닮았다"며 청년과 뱃사람들을 포박해 등산 진영으로 끌고 갔다. 이 청년이 바로 한국인 첫 사제 김대건 신부다.
김 신부가 서울에서 순위도 등산나루까지 배를 타고 온 이유는 제3대 조선교구장 페레올 주교 지시로 서양 선교사 입국을 위한 '해도'를 만들기 위해서다. 그는 5월12일 선주 임성룡의 배를 타고 마포에서 강화, 연평도, 장연 터진목을 거쳐 등산나루까지 오면서 해도를 그렸다. 또 마합, 목동 2곳에선 중국 배를 만나 선원들에게 상해에 있는 메스트르 신부 등에게 보내는 편지를 부탁하기도 했다.
등산 첨사 정기호가 진영에 끌려온 김 신부 일행을 심문하는데 그의 행장에서 '예수성심상'과 '성모자상', 언문 소책자 1권이 나왔다. 등산 첨사는 이들이 천주교도임을 바로 알아채고 힐문하자, 청년은 "중국 광동성 오문현(지금의 마카오) 출신 '김대건'으로 25살이며 천주교를 봉양하고 있으며, 1844년(갑진년)11월에 압록강을 건너와 서울에 기거하다 올해 4월18일에 황해도 산천을 유람하려고 한강 마포에서 임성룡의 배를 타고 함께 이 곳에 왔다"고 진술했다.
김 신부 일행은 닷새 후 6월10일 해주 감영으로 압송됐다. 황해 감사 김정집은 김 신부 일행이 압송돼 오자 곧바로 의금부에 보고했고, 의금부는 다시 국왕에게 이를 알렸다.
당시 국왕인 헌종은 13일 이 보고를 받고 의금부에 '김대건'의 행적을 낱낱이 밝힐 것을 지시했고, 국방부격인 비변사의 요청을 받아들여 이들을 서울로 압송하도록 명했다.
같은 날, 해주 감영에선 황해 감사가 직접 김 신부 일행을 문초하고 추가로 임성룡의 아버지 임군집(요셉, 임치백이라고도 함)과 김중수를 체포했다. 이날 김 신부는 네 차례, 임성룡(23)과 사공 엄수(44)는 세 차례 문초를 받았다. 김 신부는 이 날 황해 감사에게 "자신은 '김대건'이 아니라 '우대건'"이라며 "우씨는 조선의 희성이고, 김씨는 흔해 김가로 속였다"고 거짓 진술을 했다.
김 신부 일행은 포도청 군관 6명과 군사 4명의 특별 호위 속에 18일 해주에서 출발, 칼과 수갑을 찬 채 쉬지않고 걸어서 3일만에 서울에 당도, 포도청에 투옥됐다. 황해 감사 김정집은 김대건 일행이 압송되는 동안 김 신부가 중국 배에 부탁한 편지를 집요하게 찾아내 조정에 보냈다. 김 신부가 쓴 편지에는 여러 장의 조선 지도가 들어 있어 조정이 발칵 뒤집혔다.
김 신부에 대한 문초는 6월20일부터 7월19일까지 포도청에서 도합 6차례 진행됐고, 40회의 진술이 있었다. 김 신부는 심문 첫 날 여섯 번째 진술에서 비로소 자신이 중국인 우대건이 아니라 '용인 태생' 김대건이라고 밝혔다. 김 신부의 이 '용인 태생' 진술 때문에 김 신부의 고향이 '솔뫼'가 아니라 '용인'이라고 조심스레 주장하는 학자들이 최근 간간히 등장하고 있다.
김 신부와 함께 압송된 선주와 사공은 문초를 이기지 못하고 이의창(베난시오)ㆍ이재용(이재의 토마스)ㆍ이기원(이신규 마티아)ㆍ현석문(가롤로) 등을 밀고했다.
영의정 권돈인은 김 신부 신원이 모두 밝혀지자 9월15일 어전회의에서 헌종에게 김대건을 조국을 배반한 반역자로 사형에 처할 것을 간청했다. 함께 있던 우의정 박회수, 예조 판서 조병현, 병조 판서 김좌근, 좌참찬 김흥근, 수원 유수 이약우, 지돈녕(왕족 재판관) 이헌구 등도 영의정을 동조했다. 이에 헌종은 "김대건의 군문효수형을 즉각 시행할 것"을 명했다.
김대건 신부는 옥중 생활을 하면서도 복음 선교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김 신부는 옥중 죄인들뿐 아니라 좌포도청 포장 이응식에게까지 천주교 교리와 복음을 전했다.
1846년 9월16일 아침. 포도청 감옥에 갇혀있던 김 신부는 지금의 서울 인의동에 있는 어영청으로 압송됐다. 어영청은 1개 중대를 총으로 무장하게 하고, 나무채 2개로 만든 가마 위에 등 뒤로 손을 포박한 김대건 신부를 태워 10여리 떨어진 처형지 새남터로 갔다.
군인들은 새남터에 도착하자 하늘을 향해 일제 사격을 하고 나팔을 불었다. 시끌벅적하던 처형장에 일순간 정적이 감돌았다.
군사들은 일사불란하게 흩어져 원을 만든 후 그 안으로 김 신부를 밀어 넣었다. 그러자 관장이 일어서서 "죄인 김대건은 외국인과 교섭했기에 사형에 처한다"며 선고문을 재빨리 읽었다.
관장의 낭독이 끝나자 김 신부는 큰 소리로 "나는 이제 마지막 시간을 맞았으니 여러분은 내 말을 똑똑히 들으십시오. 내가 외국인들과 교섭한 것은 내 종교와 내 하느님을 위해서였습니다. 나는 천주를 위해 죽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이 내게 시작되려고 합니다. 여러분이 죽은 뒤에 행복하기를 원하면 천주교를 믿으십시오. 천주께서는 당신을 무시한 자들에게는 영원한 벌을 주시는 까닭입니다"라며 복음선포로 유언을 남겼다.
군사들은 김 신부의 속바지까지 벗기고 양 손을 등 뒤로 묶은 채 얼굴에 물을 뿌린 뒤 회가루를 뿌렸다. 그런 다음 군사 2명이 김 신부의 겨드랑에 몽둥이를 꿰고 그를 어깨에 맨 채 원 둘레로 3바퀴 돌았다. 그러는 동안 군사들은 김 신부에게 갖은 희롱과 모욕을 주었다.
희롱이 끝나자 김 신부를 매고 돌았던 군사 2명은 그의 무릎을 꿇리고 두 귀에 화살을 뚫어 꽂았다. 그런 다음 김 신부의 머리채를 새끼로 매어 모래사장에 꽂아 놓은 창 자루에 뚫린 구멍에 꿰어 반대쪽에서 그 끝을 잡아당겨 머리를 쳐들게 했다.
김 신부는 이런 와중에도 조금도 냉정을 잃지 않았다. 그는 군사들에게 "이렇게 하면 되었소? 마음대로 칠 수 있겠소? 자! 치시오. 나는 준비가 다 되었소"라고 말했다.
군사 12명이 칼을 들고 서로 싸움을 하듯 김 신부 주위를 빙빙 돌며 검술시범을 보이더니 차례로 김 신부의 목을 쳤다. 김 신부의 머리는 8번째 칼을 맞고서야 떨어졌다. 군사 한명이 김 신부의 머리를 소반에 담아 관장에게 보여주니, 관장은 형집행을 조정에 보고하려 즉시 그 자리를 떠났다. 이렇게 김대건 신부는 만 25살에 순교했다.
[평화신문, 제878호(2006-07-02), 리길재 기자]
마카오 성 김대건 신부 발자취를 따라서
▲ 김대건 성인 동상은 갓을 쓴 도포 차림에 왼쪽 가슴에 성경을 안고 축복을 하는 모습이다.
한국교회 첫 번째 사제 성 김대건(안드레아, 1821~1846) 신부의 젊은 시절 땀과 고뇌가 밴 마카오를 찾는다. 한국교회와는 작지만 소중한 인연을 간직한 성지다. 이번 취재는 '베네시안 마카오'와 마카오항공 협찬으로 이뤄졌다.
먼저 마카오가 김대건 신부와 무슨 상관이 있는 곳인지부터 알아야겠다. 마카오는 김 신부가 정든 고향을 떠나 1837년부터 1842년까지 5년간 사제가 되기 위해 신학 공부를 한 곳. 당시 박해의 바람이 휘몰아치는 조선 땅에 신학교가 있을 리 만무했다. 그래서 당시 조선 전교를 맡고 있던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가 운영하는 마카오신학교까지 유학을 떠나야만 했다. 중국을 거쳐 마카오까지 가는 데만 반년 이상이 걸린 고난의 여정이었다.
최양업과 최방제가 김대건과 함께 유학길에 올랐고, 최방제는 불행히도 마카오에 도착한 지 6개월 만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최양업은 김 신부를 이어 한국교회 두번째 사제가 됐다. 조선 소년 김대건은 낯설고 물설은 이곳에서 뼈를 깎는 각오로 학업에 정진하며 조선교회를 이끌어갈 '하느님의 종'으로 거듭난다. 충청도 솔뫼가 김대건의 몸이 태어난 육체적 고향이라면 마카오는 소년 김대건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을 부어준 정신적 요람인 셈이다. 도박 말고는 우리에게 그다지 알려진 것이 없는 마카오, 알고 보면 한국교회와 이처럼 큰 인연을 맺고 있는 곳이다.
세월의 무상함 탓일까. 마카오에서 김대건 성인의 자취를 느낄 수 있는 곳은 많지 않다. 마카오를 처음 찾는 신자라면 김대건 성인이 공부했던 신학교가 어디였는지 가장 궁금할 것 같다. 아쉽게도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는 흔적조차 찾아보기 어렵다. 김대건 성인을 만날 수 있는 곳은 극동대표부 터 인근에 있는 카모에스공원. 김대건 성인 동상이 세워져 있는 곳이다.
▲ 1835년 화재로 성당 정면과 일부만 남은 성바오로성당은 마카오를 대표하는 얼굴이다. 김대건 성인도 이 성당에 자주 들러 기도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마카오의 중심지 루아 데 산토 안토니오 거리에 있는 카모에스공원은 16세기 후반 마카오에서 살았던 포르투갈의 국민 시인 루이즈 카모에스를 기려 만든 공원이다. '흰 비둘기 공원'이라고도 불리는 이 공원 한 구석에 서 있는 김대건 성인 동상은 왼쪽 가슴에 성경을 안고 축복을 하는 모습으로 순례객을 반긴다. 갓을 쓴 도포 차림에 영대를 걸친 김 신부. 동상 좌우 편에서 고개를 길게 내민 야자수가 낯선 이국땅임을 실감케 한다.
김 신부의 유학생활은 말도 못하게 고달팠을 것이다. 무더운 날씨에 입에 맞지 않는 음식, 라틴어로 진행되는 신학교 수업, 끊임없이 밀려오는 고향과 가족에 대한 그리움…. 아버지 김제준의 순교 소식을 들었을 때는 얼마나 가슴이 찢어졌을까. 당장 달려가고 싶었을런지 모른다. 카모에스 공원 구석구석에 머나먼 고향 조선을 향한 김 신부의 그리움과 안타까움이 배 있는 듯하다.
한국 주교회의가 이 동상을 제막한 것은 1985년 10월이다. 공원 한 구석에 있던 동상은 이후 양지바른 잔디밭으로 옮겨졌고, 1997년에는 홍콩과 마카오에 사는 신자들의 지원으로 보수를 거쳐 지금의 좌대 위에 세워졌다. 좌대 네 개 면에는 김 신부의 약력이 한글과 중국어, 포르투갈어, 그리고 영어로 쓰여져 있다.
▲ 김대건 성인 유해가 안치돼 있는 것으로 알려진 성 안토니오 성당. 왼편 숲은 카모에스공원이다.
김 신부의 흔적을 느낄 수 있는 다른 한 곳은 카모에스공원 바로 앞에 있는 성 안토니오 성당이다. 한인교포 신자가 봉헌한 김대건 신부 목상이 있는 곳. 그리고 이 성당 제대 아래에는 김대건 성인 유해가 묻혀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성 안토니오 성당에 부임한 지 3년 됐다는 진보존(陳寶存) 주임 신부에게 제대 아래에 묻혀 있는 것이 무엇인지 물었더니 "김대건 성인의 유해인지 유품인지 잘 모르겠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궁금하다고 남의 나라 성당 제대 밑을 파볼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곳을 찾는 한국 순례객들을 위해 안내문 정도는 꼭 있어야할 것 같았다.
성 안토니오 성당을 나와 '포트리스 힐'(요새 언덕)을 몇백 미터 걸어 올라갔더니 성 바오로 성당이 나온다. 마카오를 상징하는 대표적 문화유산이다. 정면 부분만 덩그러니 남아있는 성당. 마카오를 찾는 관광객이라면 꼭 들르는 명소 중의 명소이다.
▲ 성 안토니오 성당에 있는 김대건 성인 목상.
예수회 선교사들이 1602년부터 짓기 시작해 1637년에 완성한 이 성당은 설립 당시 아시아 최대 규모이자 극동 아시아 지역에 세운 최초의 대학 건물이기도 하다. 그러나 1835년 화재로 대부분 소실되고, 지금은 건물 정면과 계단, 좌우측 일부 벽면과 지하실만 남았다. 김 신부가 봤던 성당도 불에 타고 남은 지금의 성당 모습이었을 것이다.
김대건 신학생도 마카오에 머무는 동안 이 성당에 자주 들러 간절히 기도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김 신부는 당시 사제들만 통과할 수 있는 성당 정문의 돌계단을 무릎으로 기어오르면서 "반드시 사제가 되어 이 문을 통과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당시 김대건 신부를 기억하는 이들은 '믿음으로는 안드레아 신학생을 따를 자가 없었다"는 기록을 남겼다고 한다.
지금은 사진 찍는 관광객들로만 붐비는 성 바오로 성당. 170여 년 전 이곳을 무릎으로 기어오르며 기도하는 신학생 김대건을 마음으로 그려봤다. 김 신부가 이곳에서 조선교회를 생각하며 흘린 땀과 눈물과 피가 없었더라면 오늘의 한국교회가 가능하기나 했을까. 지금은 비행기로 4시간이 채 걸리지 않는 마카오. 마카오에 갈 기회가 있으면 김 신부의 넋이 깃든 성지들을 꼭 한번 둘러보자. 한국교회 신앙의 뿌리를 찾아가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마카오
중국과 유럽, 특히 포르투갈 문화가 한데 어우러져 '동방의 작은 유럽'으로 불리는 곳이다. 16세기부터 400여 년간 포르투갈의 지배를 받다가 1999년 중국에 반환됐다.
지금은 중국의 행정특별자치구로 운영된다. 전체 면적은 29㎢로, 서울 여의도의 3.5배 크기다. 인구는 50여만 명이며, 대부분 중국인이다. 홍콩과는 배로 한 시간 거리다. 중국어와 포르투갈어를 공용어로 함께 사용한다.
가톨릭국가 포르투갈의 영향으로 한때는 가톨릭 교세가 번성했으나 지금은 그렇지 못하다. 20여 개 성당이 있지만 미사를 봉헌하는 성당은 10여 곳에 불과하며, 신자 수는 2만여 명 정도다.
[평화신문, 제960호(2008년 3월 9일), 남정률 기자]
가톨릭의대 성 김대건 신부 얼굴 재복원 성의회관에 전시
성 김대건 신부 만나러 오세요
두개골 원형 유지…이목구비는 수정
성 김대건 신부 얼굴이 재복원됐다.
가톨릭의대 가톨릭응용해부연구소(소장 한승호 교수)는 최근 대구가톨릭대 김일영(환경조각 전공) 교수와 성 김대건 신부 얼굴 재복원 작업을 마치고 종전보다 실물에 가까운 성인 얼굴(사진)을 완성했다.
기존 복원 작업은 2001년 서울 명동주교좌본당 주임 백남용 신부가 가톨릭응용해부연구소에 의뢰해 이뤄졌다.
이 때 가톨릭의대를 비롯한 7개 대학 해부학 관련 전문가와 미술가들이 참여해 성인 유해를 실측한 자료를 바탕으로 작업을 진행했다. 당시 성 김대건 신부 얼굴 복원은 첨단 해부학 기술을 토대로 일궈낸 의미있는 작업으로 평가됐다.
이번 재복원 작업은 가톨릭의대가 성 김대건 신부 흉상을 학교 기념물로 제작하기 위해 김일영 교수에게 기존 복원상을 축소 모형으로 제작해줄 것을 부탁하면서다.
김 교수는 복원상에서 드러난 얼굴의 전체적 비례 오류 등 조각적 관점에서 문제점을 지적하고 축소 모형을 만드려면 재복원 작업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이에 가톨릭의대는 김 교수와 기초 실측 작업부터 다시 시작하며 복원에 나섰다.
재복원상은 기존의 두개골 원형을 최대한 유지하는 한편 눈과 코 등 전체적 얼굴 비례를 수정했다. 또한 해부학 실측으로 표현할 수 없는 눈과 코, 귀 등은 한국인 표준으로 맞춰 제작했다.
김 교수에게 제작을 의뢰한 가톨릭의대 사무처장 윤성호 신부는 "가톨릭의대가 자랑하는 해부학 기술을 통해 우리나라 첫 사제 성 김대건 신부 얼굴을 실물에 가깝게 복원한 것 자체로도 큰 의미있는 일이다"며 "재복원된 얼굴상은 가톨릭의대를 상징하는 기념물로 쓰일 것이다"고 말했다.
재복원된 성 김대건 신부 흉상은 가톨릭의대 성의회관 1층 로비에 전시돼 있다. 김 교수는 13일까지 열리는 '가톨릭대 초청 성의회관 개관기념 서울가톨릭미술가회전'에 재복원된 흉상을 출품했다.
[평화신문, 제972호(2008년 6월 1일), 박수정 기자]
김대건 신부 얼굴 재복원
한국교회 첫 사제인 김대건 신부의 얼굴이 새롭게 복원돼 대중들에게 한결 가깝게 다가왔다.
가톨릭대학교 의과대학 해부학교실 산하 응용해부연구소(소장 한승호 교수)는 최근 김대건 신부의 얼굴을 재복원, 실제 형상과 가장 가깝게 제작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김대건 신부의 두상은 지난 2001년 서울 명동본당 주관으로 5개 대학과 국립과학수사연구소가 공동으로 참여한 가운데 복원한 바 있다. 2001년 복원작업은 당시 과학기술을 총동원한 성과로 특히 국내에서 처음으로 법의인류학적 기법을 활용해 큰 관심을 모았다.
그러나 최근 응용해부연구소 2001년 작업에서 머리와 두발의 비례, 목과 승모근의 위치 등 일부 형태의 복원이 미진했다는 지적에 따라 재복원을 추진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지적은 김대건 신부 흉상 축소본을 가대 기념물로 제작하는 과정에서 밝혀졌다.
특히 이 작업에서는 기존 복원작업을 바탕으로 완성된 얼굴 윤곽과 머리뼈와의 관계 등을 비교, 복원조각가에 의해 다듬는 등 법의인류학적 관점에서 재검증하는 과정을 수행해 각 학문적인 면에서 복원 과정이 보완됐다는 데 의의가 있다.
가대 성의교정 사무처장 윤성호 신부는 “김대건 신부의 코와 귀, 입술 등은 뼈를 통해서만 유추하기 어려운 부분이라 한국인의 평균치로 만들수밖에 없었다”며 “앞으로는 김대건 신부의 가계 조사를 통해 우성형질을 확인, 그에 대한 평균치로 제작한 경우 보다 실물에 가까운 복원이 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이번 재복원은 물론 1차 복원도 주도한 바 있는 가대 응용해부연구소는 국내 최고 수준의 기술을 갖춘 연구소로 정평이 나 있으며, 현재 국내에서는 유일하게 연구소 건물도 따로 두고 운영 중이다. 또 작품 제작은 복원 조각 전문가인 김일영 교수(대구가톨릭대)가 맡았다. 조각상 제작 과정에서는 검증되지 않은 부분은 최대한 객관적인 형태만을 표현하고 세부 주름이나 기교를 더하지 않아 조각적으로는 더욱 견고한 효과를 거둔 것으로 평가받는다.
한편 김대건 신부의 재복원 흉상은 강남성모병원 내 성의회관과 가톨릭대 신학교, 명동성당 등에서 만날 수 있다. 아울러 가대는 6월 20일까지 강남성모병원 내 성의회관 1층 로비에서 펼쳐지는 ‘성의회관 개관 기념작품전’에서 김대건 신부의 흉상을 대중에게 선보인다.
[가톨릭신문, 2008년 6월 8일, 주정아 기자]
김대건 성인 서한에 드러난 바오로 사상
시대ㆍ환경 달라도 주님께 대한 오롯한 마음은 닮은 꼴
6일은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이다. 사도 바오로의 해에 지내는 이 대축일을 기념해 김대건 성인의 서한에 드러난 바오로 사상을 정리해 보았다.
▲ 김대건 신부는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조선의 복음화를 위해선 어떤 고통도 기꺼이 받을 것임을 강조했다. 사진은 김대건 신부 표준 영정.
모든 고난을 기꺼이
"우리로서는 우리의 편의를 위해서가 아니고 다만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이것을 계획하고 있으니만큼, 조선에 들어갈 가능성만 있다면 무슨 위험인들 마다하겠습니까?"(1842년 12월 9일 중국 요동 백가점에서 스승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 선교사들의 조선 입국로 개척을 위해 엄동설한 중국 요동 벌판을 누비던 21살 청년 신학생 김대건은 스승에게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모든 고난을 기꺼이 받아들일 것이라고 다짐한다. 마치 사도 바오로가 "나의 간절한 기대와 희망은, 내가 어떠한 경우에도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고, 언제나 그러하였듯이 지금도, 살든지 죽든지 나의 이 몸으로 아주 담대히 그리스도를 찬양하는 것입니다"(필리 1,20)고 한 고백처럼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모든 것을 투신하겠다는 결의가 드러난다. 사도 바오로와 김대건에게 있어서 선교는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에 있어 부수적인 것일 뿐이다. 그래서 자신들의 직무를 '영의 봉사직'(2코린 3,8)이라고 고백했다.
묵주 기도를 수없이
"저는 홀로 의주에서 한 4km 가량 떨어진 아주 은밀한 산골짜기를 찾아들어 울창한 숲 속의 어두침침한 나뭇가지 밑에 몸을 숨기고 있었습니다. 눈이 사방에 깊이 쌓여 산촌이 모두 하얗고 싸늘한데 밤이 되기를 기다리자니 너무나 지루하여 묵주 기도를 수없이 거듭하였습니다."(1845년 3월27일 조선 밀입국에 성공한 김대건 부제가 한양에서 입국 과정을 기록해 파리외방전교회 대표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 김대건 부제는 한 겨울 압록강을 건너 의주에서 조선 신자들과 접선하기 위해 홀로 눈 덮힌 산 속에 숨어 지내면서 추위와 배고픔, 지루함을 이겨내기 위해 하염없이 묵주기도를 했다. 이 기도는 "내 마음의 소원, 그리고 내가 그들을 위하여 하느님께 바치는 기도는 그들이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입니다"(로마 10,1)는 사도 바오로의 기도처럼 동족 구원을 염원한 간절한 기도였다.
몸은 허약하기 짝이 없어
"제가 할 일은 태산같이 많으나 몸은 허약하기 짝이 없습니다. 아! 마음은 간절하지만 한 일은 미미합니다."(김대건 부제가 1845년 4월 7일자로 한양에서 파리외방전교회 대표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 하느님의 능력은 인간의 허약함을 통해 완성된다. 김대건 신부는 사도 바오로가 앓던 고질병처럼 위장병과 허리 통증을 늘 안고 살았다. "나는 그리스도의 힘이 나에게 머무를 수 있도록 더없이 기쁘게 나의 약점을 자랑하렵니다"(2코린 12,9)는 바오로의 고백처럼 김대건도 자신의 질병 안에서 그리스도가 머무길 희망했다.
그리스도 힘을 믿습니다
"저는 그리스도의 힘을 믿습니다. 그분의 이름 때문에 묶였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형벌을 끝까지 이겨낼 힘을 저에게 주실 것을 기대합니다."(김대건 신부가 1846년 6월 8일 감옥에서 베르뇌ㆍ 매스트르ㆍ 리브와ㆍ르그레즈와 신부 앞으로 보낸 편지에서)
- 사도 바오로가 선포한 복음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내가 갇혀 있을 때나, 복음을 수호하고 확증할 때나 여러분은 모두 나와 함께 은총에 동참한 사람들입니다"(필리 1,6)는 사도 바오로의 말처럼 김대건 신부도 자신이 그리스도 때문에 투옥된 것을 은총으로 기쁘게 받아들이고 있다.
▲ 김대건 신부 서한 곳곳에는 사도 바오로의 선교 정신과 그리스도 중심의 구원관을 잘 드러내 주고 있다. 사진은 김대건 신부의 옥중서한.
우리 종교가 참되다
"여러분은 우리 종교가 좋고 참되다고 자백하면서 그 종교를 사교로 괴롭히고 있으니 여러분 자신은 자기 모순에 빠져 있는 거요."(김대건 신부가 146년 8월 26일 감옥에서 페레올 주교에게 보낸 편지에서)
- 김대건 신부는 자신을 신문하는 관리들의 이율배반적인 자기모순을 꾸짖고 있다. 마치 사도 바오로가 율법주의에 빠져있는 유다인 지도자들을 신랄하게 비난하는 상황을 보는듯 하다. 사도 바오로는 "죄가 여러분 위에 군림할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은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총 아래 있습니다"(로마 6,14)고 가르친 것처럼 김대건 신부도 관리들에게 자기 모순에서 빠져나와 가톨릭은 참 종교로 인정할 것을 훈계한다.
마음으로는 한 사람이 되어
"성교회 영광을 더하고 천주의 착실한 군사와 의자가 됨을 증거하고, 비록 너희 몸은 여럿이나 마음으로는 한 사람이 되어, 사랑을 잊지 말고 서로 참아 돌보고 불쌍히 여기며, 주의 긍련하실 때를 기다리라."(김대건 신부가 순교 직전인 1846년 8월말 옥중에서 조선 교우들에게 보낸 마지막 회유문 내용에서)
-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와 결합된 삶은 교회 안에서 서로 격려하고 사랑하는 모습에서 드러난다고 했다.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무질서하게 지내는 이들을 타이르고 소심한 이들을 격려하고 약한 이들을 도와주며, 참을성을 가지고 모든 사람을 대하십시오. 아무도 다른 이에게 악을 악으로 갚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서로에게 좋고 또 모든 사람에게 좋은 것을 늘 추구하십시오"(1테살 5,14-15).
바오로의 권고처럼, 김대건 신부도 교우들에게 마지막 유언으로 서로 사랑으로 참으며 격려할 것을 당부했다.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결합되고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를 체험할 것을 강조한 사도 바오로와 김대건 신부의 공통된 그리스도론을 발견할 수 있다.
[평화신문, 제977호(2008년 7월 6일), 리길재 기자]
[한국순교자 103위 시성 25주년 기획 - 이 땅에 빛을]
(2) 김대건, 목을 잃고 하늘을 보다
순교로 진리 지키며 자신을 온전히 봉헌
<사진설명>
▲ 서울시 이촌2동에 위치한 새남터 순교성지. 1846년 반역죄로 사형 선고를 받은 성 김대건 신부는 10월 16일 26세의 나이에 군문 효수형으로 이곳에서 순교했다.
▲ 새남터 순교성지에 있는 성 김대건 신부의 동상. 성인은 하느님을 향한 사랑으로 죽음을 통해 자신을 완전하게 봉헌했다.
▲ 새남터 순교성지에 보관돼 있는 성 김대건 신부의 친필 서한.
순교로 진리 지키며 자신을 온전히 봉헌
1845년 상해서 사제품 … 용인서 주로 활동
이듬해 반역죄로 체포돼 10월 새남터서 순교
지난해 12월 4일 겨레얼살리기운동본부(이사장 한양원)는 ‘우리 민족 5000년을 지켜준 인물 100인’중 한명으로 성 김대건 신부(1822~1846)를 선정했다. 역시 지난해 7월 한국조폐공사는 ‘한국의 인물 시리즈 메달’ 9호로 김대건 신부를 선정, 기념 메달을 출시했다. 이밖에 김대건 신부를 소재로 하는 오페라, 음악회, 소설, 연극 등은 헤아리기도 힘들다.
왜 우리는 160여 년 전 약관의 나이로 스러져간 이 청년에게 열광하는가. 무엇이 우리를 그 앞에서 옷깃 여미게 하는가. 103위 시성 25주년의 해를 시작하며 새남터 성지를 찾았다.
목을 잃고 하늘을 보다
목도리를 챙기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겨울 칼바람이 목을 친다. 하지만 목에 와 닿는 그 서늘함이 꼭 날씨 때문만은 아닌 듯 했다.
새남터(서울시 용산구 이촌2동). 성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을 비롯한 수많은 순교자들의 목이 박해의 칼날에 ‘툭 툭’ 떨어진 곳이다. 그 애절한 장소에 한국순교복자수도회가 1987년 완공한 3층 기와 새남터순교기념대성전이 서 있다.
성인의 친필 서간 앞에 섰다. 성인을 생각하면 늘 가장 먼저 15살 어린 소년의 모습이 떠오른다. 1836년 12월 겨울. 신학생으로 선발, 신학교가 있는 마카오로 가기 위해 중국 대륙을 도보로 횡단하는 소년은 얼마나 집과 부모 형제들이 그리웠을까. 얼마나 조선 음식이 먹고 싶었을까. 얼마나 추웠을까.
김대건 신부의 생애와 영성
성인은 1821년 8월 21일 충청도 솔뫼에서 김제준 이냐시오와 고우르술라의 아들로 태어나, 1827년 정해박해때 용인 골배마실로 피신할 때까지 순교자인 증조부와 부친의 영성을 배우며 자랐다.
어려서부터 뛰어난 신앙심과 총명함으로 주목을 받았던 성인은 모방 신부(파리외방전교회)로부터 세례를 받고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충남 청양 다락골 출신 최양업(토마스)과 충남 홍성 출신 최방제(프란치스코)와 함께 신학공부를 위해 1836년 12월 마카오로 떠난다. 어려운 과정을 거쳐 1845년 8월 17일 상해 김가항 성당에서 페레올 주교로부터 사제품을 받은 성인은 그해 10월 12일 충남 강경 부근의 황산포 나바위에 도착했다. 이후 용인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성인은 1846년 6월 5일 관헌들에게 체포, 9월 15일 반역죄로 사형이 선고되어 다음날인 16일 새남터에서 군문 효수형으로 순교했다. 그때 나이 26세였다.
당시 조선 교구장이던 페레올 주교는 성인에 대해 “영렬한 신앙심, 솔직하고 신실한 신심, 놀랄 만큼 유창한 말씨는 한 번에 신자들의 존경과 사랑을 그에게 얻어 주는 것이었다”고 했다. 사형장에서 성인은 “내가 외국인들과 교섭한 것은 내 종교를 위해서였고 내 하느님을 위해서였다. 나는 천주를 위해서 죽는다”고 했다. 성인은 또 “영원한 생명이 내게 시작되려 한다”고도 했다. 자신의 목을 칠 망나니들에게도 “천주교 신자가 되어 나중에 만나자”고 했다. 신념을 위해 자신의 젊은 목숨을 바치는 것만큼 아름다운 것이 있을까. 그 신념이 진리라면 더욱 사람들의 가슴을 울린다. 하늘을 보지 못한 사람은 하지 못할 말이다. 참 행복을 보지 못한 사람은 하지 못할 말이다.
성인은 사랑에 사로잡혀 사목자로서의 사명을 충실하게 실천했으며, 하느님에게 사로잡혀 죽음을 목전에 둔 극한 상황에서도 진리를 말했고, 죽음으로 자신을 완전하게 봉헌했다.
목을 들어 하늘을 보다
새남터 성당의 유명한 103위 순교 성인화 진품 앞에 섰다. 그 중심에 김대건 신부가 두 손 모으고 서 있다. 망나니의 번득이는 칼날 앞에서 느꼈을 법한 공포가 느껴지지 않는다. 천국의 행복이 가득하다. 참 평화스럽다.
신앙을 고백한다고 해서 목숨을 빼앗는 그런 시절이 아니다. 2009년이다. 이제는 고해성사를 위해 몇날 며칠을 걸어서 사제를 찾아갈 필요도 없다. 행복은 지척에 있다. 손을 뻗기만 하면 된다.
칼바람이 어느덧 물러났다. 바람 한 점 없는 포근한 날씨. 움츠러들었던 목을 펴고 하늘을 본다. 성인의 덕(德)에 아직 이르지 못해서일까. 날씨 따라 마음도 이랬다 저랬다 한다.
김대건 신부의 마지막 편지(요약)
“주께서 하고자 하신 일 아니랴”
우리 벗아 생각하고 생각할지어다.
천주께서 아득한 태초로부터 천지 만물을 지어 제 자리에 놓으시고, 그 중에 사람을 당신 모상과 같이 내어 세상에 두신 목적과 그 뜻을 생각할지어다.
이제 우리 조선에 교회 들어온 지 50~60여 년 동안 여러 번 군난으로 교우들이 이 지경이 되고, 또 오늘날 군난이 치성하여 여러 교우들과 나까지 잡히고 아울러 너희들까지 환난을 당하고 보니, 우리 한 몸이 되어 애통한 마음이 어찌 없겠으며 육정에 차마 이별하기 어려움이 없으랴.
그러나 성경에 말씀하시되 작은 털끝이라도 주께서 돌보신다 하고 모르심이 없이 돌보신다 하셨으니 어찌 이렇다 할 군난이 주께서 하고자 하신 일 아니면 주님의 상과 주님의 벌 아니랴. 황황한 시절을 당해 마음을 늦추지 말고 도리어 힘을 다하고 역량을 더해서 마치 용맹한 군사가 병기를 갖추고 전쟁터에 있음 같이 해서 싸워 이길지어다.
부디 서로 우애를 잊지 말고 서로 도우면서, 주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환난을 거두시기까지 기다리라. 혹 무슨 일이 있을지라도, 부디 삼가고 극진히 조심해서 주님의 영광을 위하고 조심을 배로 더하고 더하여라.
할 말이 무궁한들 어찌 편지로써 다하리, 그친다. 우리는 미구에 전장에 나아갈 터이니 부디 착실히 닦아, 천국에서 만나자.
김대건 신부 배출한 김해김씨
‘천주교 성인공파’ 분리·창립
2002년 9월. 성 김대건 신부의 생가인 충청도 솔뫼에서 뜻깊은 행사가 열렸다. 김대건 신부를 배출한 김해김씨 안경공파에서 ‘천주교 성인공파’(天主敎 聖人公派)가 창립총회를 갖고 분리돼 나온 것.
안경공파는 김대건 신부의 증조부인 김진후(비오, 1735∼1814) 순교자를 제1대 파조(派祖)로 하여 그의 네 아들과 그 후손들을 ‘천주교 성인공파’로 분파한다고 밝혔다.
시조에서 시작하여 세대순으로 종계(縱系)를 이루는 가계에서 천주교 집안이 독립된 파로 갈라져 나오기는 처음이었다.
이 자리에는 김대건 신부의 증조부이며 성인공파의 파조인 김진후(비오, 1735∼1814) 순교자의 8∼11대 후손이 한 자리에 모여 선조의 신앙을 본받아 살아갈 것을 다짐했다.
성인공파에서는 김대건 신부를 비롯해 순교자 12명을 배출했다. 하지만 이들은 김대건 신부의 후손이라는 이유로 갖은 고초를 겪었다. 박해를 피해 숨어 살다보니 친척끼리의 왕래도 없었고 나중에는 서로 남남이 되었다.
하지만 그러한 난관을 신앙의 힘으로 버티어내고 200년이 지나 성인공파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신앙명가(信仰名家)로 거듭난 것이다.
[가톨릭신문, 2009년 1월 25일, 우광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