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를 손에 들자마자 단숨에 밤을 새워 읽었어요. 누가 삼국지를 남자만 읽는다고 하는지 모르겠어요. 여자인 저도 그냥 빠져 버리는데 말이에요.” 어느 유명 여류작가의 말이다. 삼국지가 여자들의 마음까지 사로잡는 비결은 무얼까? 우리가 가장 많이 만나는 삼국지는 나관중이란 사람이 쓴 ‘삼국지연의’다. 역사가들은 진수가 쓴 삼국지를 더 쳐주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진수가 쓴 삼국지는 조조의 위나라를 중심으로 기술했다. 나관중은 유비와 관우, 제갈공명이 주인공인 촉나라를 중심으로 썼다. 저자가 어디를 중심으로 쓰느냐에 따라 역사이야기는 다른 방향으로 그려진다. 진수가 조조를 충신으로 기술하는 부분에서는 유비가 역적이 되지만, 나관중의 삼국지에서 유비는 절대적인 충신이고 조조는 간악한 역적에 불과하다. 그런데 중국인들은 조조보다 유비와 관운장과 제갈공명을 더 사랑했다. 이들은 중국 민중의 꿈이었고 우상이었다. 유비가 민중을 사랑하는 장면에서는 감동했고, 관운장의 청룡언월도가 휘둘러질 때마다 환호했고, 끝을 알 수 없는 제갈공명의 지략에 탄복했다. 삼국지 이야기를 하면서 중국인들은 자신이 천하를 호령하는 꿈에 젖었다. 그들에게 삼국지는 삶이었고 행복이었고 기쁨이었다. 자연 관찰·분류 자연학의 집약서 필자도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삼국지를 수십 번 읽었다. 그런데 대학 시절 기상학을 공부한 이후 삼국지를 보는 관점이 조금 바뀌었다. 삼국지를 보라! 그 안에는 영웅들의 꿈만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의 병을 고치고 귀신을 부르는 요술이 나온다. 바람과 비를 마음대로 부리고 하늘의 별을 보고 미래를 꿰뚫어 보는 신묘함도 있다. 거의 모든 전투에서는 날씨가 중요한 팩터로 나온다. 왜 바람이 부는지, 천둥번개가 치는지 과학적인 이치에 대해서는 몰랐지만 이런 기상현상들이 자연과 국가와 민중에게 자연스럽게 연관된다는 것을 민중은 알고 있었다. 그렇다 보니 자연에 대해 품었던 소박한 믿음과 바람들이 ‘마술’이나 ‘신통력’이라는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 아닐까 한다. 동양에서 기상현상은 음(陰)과 양(陽)의 대립으로 보았다. 음양만 아니라 오행지(五行志) 이론도 발달했다. 오행지는 고대에 자연을 관찰하고 분류하고 인식하던 자연학의 집약서라 할 수 있다. 오행지는 공간으로 말하자면 천상과 지상의 중간계쯤이다. ‘반지의 제왕’에서 요정들이 사는 공간과 비슷하다. 비바람이 불고 번개가 치고 우레가 울리는 허공 중의 기상공간과 기후에 따라 변하는 가뭄과 홍수, 안개와 대설 등 지상의 공간이 대상영역이 된다. 오행지는 시간이 흐르면서 음양설과 결합해 역사적 기상기후서 성격을 띠게 된다. 때아닌 철에 꽃이 피고 서리가 내리고 홍수와 화재, 대풍, 지진, 대설과 같은 자연재해가 나타나면 오행지에서는 나라에 큰 변고가 생길 전조로 해석했다. 말이나 양, 소, 돼지, 닭 등 가축에 돌연변이가 발생하는 사건은 생물학적 변이로 나라가 망할 징조로 보았으며, 낮에 칠흑이 될 정도로 캄캄해지는 대무(大霧) 현상도 하늘의 경고로 보았다. 중세 유럽에도 오행지적 사고 오행지적 사고는 동양인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유럽의 중세인에게 재난은 초자연적인 현상이었다. 중세를 휩쓴 가장 큰 재앙이 기근이었다. 중세인들은 기근을 알리는 무시무시한 천체 현상으로 혜성의 출현과 일식을 꼽았다. 혜성과 극심한 기근의 관계는 당대의 연대기마다 등장한다. 혜성은 인간에게 보내는 경고로, 하나님이 하늘을 휘갈기는 채찍이었다. 혜성이 나타날 때마다 홍수가 일어났고, 우박이 내려 농작물이 모두 파괴됐으며, 가축이 전염병에 걸려 죽어갔다. 국가가 망했고 장기간의 전쟁이 벌어졌다. 그러다 보니 천체나 자연현상이 미래를 알려준다고 믿게 된 것이다. 오행지 이론을 통해 삼국지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의 생활방식과 사고를 엿볼 수 있음이 매우 좋다. 앞으로 글을 써 나가면서 삼국지 날씨 속에 녹아 있는 오행지 이야기를 소개해 나가도록 하겠다. 독자들에게도 좋은 사유거리가 되리라 믿는다. <반기성 연세대 지구환경연구소 전문연구원> TIP -고려사에 나타난 오행지 사상 고려 인종 11년 12월, 5일간 짙은 안개가 자욱하게 끼고 나무에 얼음이 맺혔다. 오행지에서는 나라에 큰 도적이 있을 징조로 해석한다. 당시 요괴한 중 묘청이 왕을 서경으로 행차하길 종용했던 사례를 예로 든다. 의종 18년에는 음습한 안개가 전국을 뒤덮었다. 나라에 큰 혼란이 올 징조로 해석하고 있다. 역시 무신의 난이 극성을 부렸다. 명종 14년 경성에 큰 지진이 있었다. 나라가 망할 징조라고 해석한다. 재미있게도 고려의 마지막 시기인 공민왕, 우왕, 공양왕 시절에 가장 많은 지진이 관측되고 있는데 하늘이 고려의 명운이 쇠한 것을 미리 알려준 것이라고 본다. 고요(鼓妖) 현상에 대한 기록도 있는데 이것은 마른번개처럼 형체는 없이 소리만 울리는 것이다. 왕이 백성의 소리를 듣지 아니하여 나라가 망해가는 전조라는 것이다. 소통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는 것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