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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사회에 공헌하는 인재 육성, 정선전씨 필구公 문중 원문보기 글쓴이: 한강의 언덕
정선전씨 구보 증수서(1860년)
旌善全氏 舊譜 增修序(1860년)
[번역문, 2021년 전과웅]
헌종(憲宗) 계묘년(癸卯年) [1843년]에 절도사(충청관찰사)로서 금강 유역의 옥천(錦節沃川)을 안찰(按察)할 무렵 유생(儒生) 정재순(鄭在淳) 등 모든 사람이 나에게 고(告)하기를 “이제 장차 송정(松亭) 전팽령(全彭齡)감사(監事)와 충간공(忠簡公) 사서(沙西) 전식(全湜) 좌의정(左議政) 의 위패(位牌)를 목담영당(鶩潭影堂)에 봉안문(奉安文)을 지어 제사(祭祀)를 올릴 수 있도록 하기를 청(請)하였다.” 내 두 선생(先生)의 도학(道學)과 충절(忠節)을 일찍이 경모(敬慕)함이 있었기에 글을 지어 봉헌한 적이 있었도다.
18년(十八年)이 지난 여름에 경기도 광주(廣州)에 사는 생원 전종술(全琮述)이 와서 청하기를 “우리 족보(族譜)를 이어서 발간(發刊)하기로 하여 이제 곧 마무리하게 되었으므로 그 책(冊)에 서문(序文)을 지어 줄 것을 청(請)합니다.” 하였다.
내 이미 전씨(全氏)에 관한 글을 지은 바가 있었으므로 또한 끝내 사양(辭讓)치 못하였다.
살펴보니 전씨(全氏)의 세대(世代)가 유구(悠久)하였다. 백제(百濟)에서 시작하여 신라 정선군(旌善君) 휘(諱) 선(愃)을 조상(祖上)으로 하여 신라(新羅)와 고려(高麗)에 이르기까지 봉훈(封勳)한 분이 13위(十三位)이다.
조선 시대에 와서 송정(松亭) 전팽령(全彭齡), 사서(沙西) 전식(全湜), 학송(鶴松) 전유형(全有亨) 등 여러 선생(先生)이 벼슬을 하였으며, 선비로서 경사(慶事)가 생기게 잘 다스렸도다. 세대(世代)는 40여 대(四十代)요. 그 파(派)는 13(十三)이라.
근세(近世)는 뛰어난 재주를 감추어 어두워졌지만, 자손(子孫)은 번성(繁盛)하였다.
순조(純祖) 기축(己丑)[순조29년 1829년]에 이르러 이미 합보(合譜)를 이루었다. 지금 30년(三十年)이 지난 후(後)에 자손(子孫)이 가득히 무성(茂盛)해졌기 때문에 또 이처럼 속간(續刊)하게 되었다. 어찌 조상(祖上)이 오랫동안 쌓은 덕(德)을 자손(子孫)들이 후(厚)하게 보답(報答)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옛사람이 말하기를 족보(族譜)를 밝히고 종족(宗族)을 거두어 종중(宗)을 세우고 조상(祖上)을 높이는 것이 바로 이것을 가리킴이니라
옛날에 소노천(蘇老泉)이라는 사람이 비로소 족보(族譜)를 닦는데 고조(高祖) 이하(以下)의 자손(子孫)들로 한 족보(族譜)를 만들어 집에 맡겨서 간직하게 하였다.
가로되 이를 본보기로 삼아서 우리 족보(族譜)가 크게 넓어져 가(可)히 무궁(無窮)한데 이르렀다. 노천(老泉)의 족보(族譜)가 위로 고조(高祖)에 이름에 불과(不過)하여도 오히려 넓고 무궁(無窮)하다 일컬었다.
이제 전씨의 족보를 소급해 올라가 보니 50세로 멀어졌지만, 전씨(全氏)로서 성(姓)한 대부분 사람이 정선군(旌善君)이 조상(祖上)임을 알지 못함이 없더라.
1600여 년(千 六百 餘年)의 세월이 새벽녘같이 밝아졌으니 추측해보니 넓게 펼쳐져서 무궁(無窮)함에 이르게 되었다. 어찌 노천(老泉)의 족보(族譜) 범위에 머무르겠는가?
선조(先祖)를 받들고 종족(宗族)을 공경(恭敬)함이 이처럼 이르렀다.
아! 슬프다.
선조(先祖)들은 시, 서, 예, 악(詩書禮樂)으로서 덕을 쌓아 후손(後孫)들에게 물려주었으나, 후손(後孫)들이 시, 서, 예, 악(詩書禮樂)에 익숙하지 못하여 조상(祖上)의 빛난 업적(業績)을 쇠퇴시키니 가히 후손(後孫)으로서 면목이 설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족보(族譜)는 어떻게 해서 족히 종족(宗族)을 거두고 또 어떻게 해서 족히 조상을 받드는 것인지에 대해 기록하는 것이고, 또한 모든 분이 이를 위해 노력하고 있는 일이 바로 이 족보(族譜)의 진정한 의의(意義)이다. 청컨대 이 글로 전씨(全氏)의 족보 서문(譜序文)으로 기록(記錄)한다고 두루 알리리라.
上之(哲宗) 十一年 庚申 (西紀 1860年) 仲夏節
資憲大夫 禮曹判書 兼 知經筵春秋館義禁府事 五衛都摠府都摠官
貫 진양 강시영 서
[原文]
憲宗癸卯余按錦節沃川鄭儒在淳諸人告余曰今將奉安松亭全監司沙西全忠簡公位板於鶩潭彰堂請綴文以祭余以兩先生道學忠節之夙有景慕遂爲文而還之越十八年夏廣州全生琮述來請曰家譜繼刊今將告竣請以一語弁其卷余旣爲全氏文之亦不敢終辭按全氏之世久矣自百濟有旌善君爲之祖逮羅迄麗封勳十三入我朝有松亭沙西鶴松諸先生之冠冕士林克濟其美者以其世則四十有餘以其派則十有三近雖晦彩潛光而其麗繁衍至純祖己丑旣成合譜今於三十年之後雲仍彌盛又此續刊豈非績累之久而報施之厚哉古所謂明譜收族立宗尊祖者正指此也昔蘇老泉始爲族譜使高祖之子孫家授一譜藏之曰從吾譜而盖廣之可以至於無窮老泉之譜不過上至於高祖而猶謂之廣之至於無窮今次全氏之譜溯以至五十世之遠凡以全爲姓人無不知旌善君之爲其祖上千六百餘年怳如隔晨則推而廣之至於無窮奚止於老泉譜之爲哉尊祖敬宗於是焉至矣噫祖先以詩書禮樂之積以惠其後人而爲後人者不能以詩書禮樂遺以光其祖考則其可曰有後乎然則譜何足以收族亦何足以尊祖又豈諸君子所以爲此譜之意也請以斯語遍告于全氏之入此譜者
上之十一年 庚申 中夏
原任資憲大夫禮曹判書兼知經筵春秋館義禁府事
五衛都摠府摠管 晉陽 姜時永 序
[해문]
憲宗 癸卯年에 錦節沃川을 按察할 무렵 鄭儒生 在淳等 모든 사람들이 나에게 告하되 曰 이제 장차 松亭 全監事와 沙西 副提學 左相 忠簡公의 위패를 목담영당(鶩潭影堂)에 奉安文을 지어 祭祀를 올리게 하기를 請하거늘 내 두 先生의 道學과 忠節을 일찍이 敬慕함이 있어 드디어 글을 作하였더니 十八年이 지난여름에 廣州宗人 全生 琮述이가 와서 청해 가로되 우리 族譜를 이어서 發刊하여 이제 장차 곧 竣刊하게되매 其冊에 序文을 지어 줄 것을 請하도다. 내 이미 全氏의 글을 지었으므로 또한 辭讓치 못하고 살펴보니 全氏의 世紀가 悠久해서 百濟로부터 旌善君을 祖上으로 하여 新羅와 高麗에 이르기까지 勳을 封한 분이 十三位요, 李朝때 와서 號 松亭, 號 沙西, 號 鶴松등 여러 先生의 官職과 사람들이 極히 아름다운 분들이라 世代는 五十代요 其 派則十三派라. 近世는 비록 크게 떨친 분은 없으나 子孫은 繁盛하여 純祖 己丑에 이르러 이미 合譜를 이루었고 지금 三十年後에 子孫이 가득히 茂盛하여 또 이어서 發刊하니 어찌 祖上이 쌓은 德을 子孫들이 厚하게 報答하지 않겠는가?
옛사람이 말하기를 族譜를 밝히고 宗族을 거두며 宗을 세우고 祖上을 높이는 것 바로 이것을 가르침이라 옛날에 蘇老泉이라는 사람이 비로소 族譜를 닦는데 高祖以下의 子孫들로 한 族譜를 만들어 집에 맡겨서 간직하게 하고 가로되 이를 쫓아 우리 族譜가 크게 넓어져 可히 無窮한데 이르렀다 하였으니, 老泉의 族譜가 위로 高祖에 不過하여도 오히려 넓고 無窮하다 하였으니, 이제 이 全氏로서 姓하는 사람이 旌善君으로 其 祖上을 알지 못함이 없더라.
千六百餘年에 새벽녘같이 밝으니 추상컨대 너르고 無窮한데 이름이 어찌 老泉의 族譜에 비유하겠는가? 할아버지를 받들고 宗族을 恭敬함이 이같이 이르렀으니 슬프다. 先祖들이 詩, 禮, 樂으로서 其 先祖를 빛나게 하지 못한, 즉 기 子孫이 있다고 하겠는가? 그러므로 族譜가 足히 宗族을 거두고 또 어떻게 해서 足히 할아버지를 받드는 것인지 모든 분이 하고 있는 일이 바로 이 族譜의 뜻이라 請컨대 이 글로 全氏의 譜序文으로 記錄한다고 두루 알리라.
上之(哲宗) 十一年 庚申 (西紀 1860年) 仲夏節
資憲大夫 禮曹判書 兼 知經筵春秋館義禁府事 五衛都摠府都摠官
貫 진양 강시영 서
◎ 弁 고깔 변, 말씀 변, 즐거워할 반, 갖출 판
1. 고깔(머리에 쓰는, 위 끝이 뾰족하게 생긴 모자) 2. 말씀 3. 땅의 이름 4. 나라의 이름 5. 급하다(急--) 6. 빠르다, 서두르다 7. 떨다 8. 두려워하다 9. (손으로)치다
◎ 逮 잡을 체, 탈 태
1. 잡다, 체포하다(逮捕--) 2. 뒤따라 가서 붙잡다 3. 쫓다 4. 미치다(공간적 거리나 수준 따위가 일정한 선에 닿다), 이르다(어떤 장소나 시간에 닿다) 5. 보내다 6. 옛날에, 이전에
◎ 迄 이를 흘
1. 이르다(어떤 장소나 시간에 닿다), 도달하다(到達--) 2. 마치다 3. 그만두다 4. 다하다 5. 마침내 6. 모두 7. 까지
◎ 美 아름다울 미
1. 아름답다 2. 맛나다 3. (맛이)좋다, 맛있다 4. 경사스럽다(慶事---) 5. 즐기다 6. 좋다 7. 기리다 8. 좋은 일
◎ 麗 고울 려, 고울 여
1. 곱다 2. 아름답다 3. 맑다 4. 짝짓다 5. 빛나다 6. 매다 7. 붙다(부착) 8. 나라의 이름 9. 마룻대(용마루 밑에 서까래가 걸리게 된 도리) 10. 짝 11. 수, 수효(數爻)
◎ 累 여러 루,여러 누,자주 루,자주 누,벌거벗을 라,벌거벗을 나,땅 이름 렵,땅 이름 엽
1. 여러 2. 자주 3. 묶다 4. 거듭하다 5. 포개다 6. 폐를 끼치다 7. 더럽히다 8. 연하다(連--: 잇닿아 있다) 9. 폐, 누 10. 연좌 11. 연루(連累ㆍ緣累) a. 벌거벗다 (라) b. 땅의 이름 (렵)
◎ 溯 거슬러 올라갈 소, 물 삭
1. 거슬러 올라가다 2. 거스르다 3. 맞서다 4. 따라 내려가다 a. 물 (삭)
◎ 怳 어슴푸레할 황
1. 어슴푸레하다, 분명(分明)하지 않다 2. 멍하다 3. 놀라서 바라보다, 놀라운 빛으로 보다 4. 황홀하다 5. 자실한 모양 6. 잠시(暫時), 잠깐, 수유(須臾)
◎ 奚 어찌 해
1. 어찌, 왜 2. 무슨, 어떤 3. 어디, 어디에서 4. 무엇 5. 어느 곳 6. 종, 하인(下人) 7. 종족(種族)의 이름
◎ 噫 한숨 쉴 희, 트림할 애, 탄식할 억
1. 한숨을 쉬다 2. 탄식하다(歎息ㆍ嘆息--) 3. 느끼다 4. 아아! a. 트림하다 (애) b. 하품 (애) c. 탄식하다(歎息ㆍ嘆息--) (억) d. 아아! (억)
◎ 관면 (冠冕)
벼슬하는 것을 이르는 말
◎ 潛光 잠광
광채를 드러내지 아니한다는 뜻으로, 뛰어난 재능을 숨기어 감춤을 이르는 말.
◎ 蘇老泉
◯ 소순 [ 蘇洵 ]
요약
중국 북송(北宋)시대의 문학자. 날카로운 논법(論法)과 정열적인 필치에 의한 평론이 구양 수(歐陽修)의 인정을 받아 유명해졌다. 정치, 역사, 경서 등에 관한 평론도 많이 썼으며, 아들 소식(蘇軾) ·소철(蘇轍)과 함께 삼소(三蘇)라 불렸다. 주요 저서에는 《시법(諡法)》,《가우집(嘉祐集)》등이 있다.
출생-사망/1009 ~ 1066
자/명윤(明允)
호/노천(老泉)
별칭/노소(老蘇)
국적/중국 북송(北宋)
활동분야/문학
출생지/중국 메이산[眉山:지금의 四川省]
주요저서/《시법(諡法)》(4권) 《가우집(嘉祐集)》
자 명윤(明允). 호 노천(老泉). 메이산[眉山:지금의 四川省] 출신. 젊은 시절에는 협객(俠客) 노릇을 하다가 27세 때에 분발하여 학문에 정력을 쏟았으나 진사(進士) 시험에 낙방하자 관리가 되기를 단념하고 정치와 역사평론의 저술에 힘썼다.
1056년 날카로운 논법(論法)과 정열적인 필치에 의한 평론이 구양 수(歐陽修)의 인정을 받게 되어 일약 유명하여졌다. 그후 조정에 나가 북송 이래의 예(禮)에 관한 글을 모은 《태상인혁례(太常因革禮)》(100권)를 편찬하였다.
정치 ·역사 ·경서 등에 관한 평론도 많이 썼으며, 아들 소식(蘇軾) ·소철(蘇轍)과 함께 삼소(三蘇)라 불렸고, 함께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로 칭송되었다.
또, 소순을 노소(老蘇), 소식을 대소(大蘇), 소철을 소소(小蘇)라고도 부른다. 그의 문집을 《가우집(嘉祐集)》 또는 《노천선생집(老泉先生集)》이라 하며, 그 밖에도 《시법(諡法)》(4권)의 저작이 있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소순 [蘇洵] (두산백과)
◎ 헌종 [ 憲宗 ]
정의
조선후기 제24대(재위:1834~1849) 왕.
개설
재위 1834∼1849.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이름은 환(奐)이다. 자는 문응(文應)이다. 호는 원헌(元軒)이다. 순조의 손자이다. 효명세자(孝明世子) 이영[李旲, 익종(翼宗)|문조(文祖)]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풍은부원군(豐恩府院君) 조만영(趙萬永)의 딸 신정왕후(神貞王后)이다.
비는 영흥부원군(永興府院君) 김조근(金祖根)의 딸 효현왕후(孝顯王后)이다. 계비는 익풍부원군(益豊府院君) 홍재룡(洪在龍)의 딸 명헌왕후(明憲王后)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830년(순조 30) 왕세손에 책봉되었다. 1834년 순조가 죽자 이 해 8세의 어린 나이로 경희궁 숭정문(崇政門)에서 즉위하였다. 대왕대비 순원왕후(純元王后: 순조妃)가 수렴청정을 하였다.
1837년(헌종 3) 3월 새로 등장한 외척 풍양조씨 세력이 우세해, 순조 때부터 정권을 전횡해 온 안동김씨 세력을 물리치고 한동안 세도를 잡았다. 그러나 풍양조씨 내부의 알력과 1846년 조만영의 죽음을 계기로 정권은 다시 안동김씨의 수중으로 넘어갔다.
순원왕후가 수렴청정을 거두어 1841년 비로소 친정(親政)의 길이 열렸으나 세도정치의 여파인 과거제도 및 국가 재정의 기본이 되는 삼정(三政)의 문란 등으로 국정이 혼란해졌다.
재위 15년 중 9년에 걸쳐 수재(水災)가 발생하여 민생고가 가시지 않았다. 1836년에는 남응중(南膺中), 1844년에는 이원덕(李遠德)·민진용(閔晉鏞) 등의 모반사건이 일어나고, 1848년부터는 많은 이양선(異樣船)이 출몰해 행패가 심해 민심이 어수선하였다.
순조 때의 천주교 탄압정책을 이어받아 1839년에 주교 앵베르(Imbert, L. J. M.), 신부 모방(Maubant, P. P.)과 샤스탕(Chastan, J. H.)을 비롯하여 많은 신자를 학살했다(기해박해). 이어 천주교인을 적발하기 위하여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을 실시하고, 1846년 최초의 한국인 신부 김대건(金大建)을 처형하였다.
재위 기간에 『열성지장(列聖誌狀)』·『동국사략(東國史略)』·『문원보불(文苑黼黻)』·『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삼조보감(三朝寶鑑)』 등을 찬수하게 하고, 각 도에 제언(堤堰: 물을 가둬 두는 둑)을 수축하게 하는 등의 치적을 쌓았다. 글씨를 잘 썼다.
상훈과 추모
1849년 창덕궁 중희당(重熙堂)에서 23세로 후사 없이 죽었다. 수용(睟容: 임금의 畵像) 1본이 선원전(璿源殿)에 봉안되어 있다. 시호는 경문위무명인철효대왕(經文緯武明仁哲孝大王)이다. 묘호는 헌종(憲宗)이다. 능호는 경릉(景陵)으로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헌종 [憲宗]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전식 [ 全湜 ]
요약
조선 중기 문신. 정경세 · 이준 등과 산수를 유력하여, ‘상사의 삼로’로 불렀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적을 방어하였다. 1642년 중추부지사 겸 경연동지사 · 춘추관동지사에 이어 대사헌에 보직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본관 옥천(沃川). 자 정원(淨遠). 호 사서(沙西). 시호 충간(忠簡). 1589년(선조 22) 진사가 되고 임진왜란 때 의병을 모아 왜병 수십 명을 죽이고 김익남(金益南)의 추천으로 연원(連源)도찰방이 되었다. 1603년 문과에 급제했으나 광해군의 실정으로 벼슬을 포기하고 정경세(鄭經世) ·이준(李埈) 등과 산수를 유력(遊歷)하여, ‘상사(商社)의 삼로(三老)’로 불렀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예조정랑에 등용, 기주관(記注官) ·지제교(知製敎)를 겸하였고 부수찬 ·교리가 되어 경연(經筵)에 참석하였다. 그 뒤 전적 ·장령을 역임하고 1624년 이괄(李适)의 난 때 태복시정(太僕寺正)으로서 왕을 호종하였다. 집의(執義)를 거쳐 병조참의 ·병조참지에 올랐다가 연평군(延平君) 이귀(李貴)와 원수(元帥) 장만(張晩)의 실책을 논박한 뒤 고향에 돌아갔다.
1628년 이조참의를 거쳐 대사간이 되었으나 병으로 사퇴하고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적을 방어하였다. 1642년 중추부지사 겸 경연동지사(經筵同知事) ·춘추관동지사에 이어 대사헌에 보직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영의정이 추증되었고, 상주(尙州) 백옥동(白玉洞) 서원에 배향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전식 [全湜] (두산백과)
◎ 전팽령 [ 全彭齡 ]
공(公)의 휘(諱)는 팽령(彭齡)이고, 자(字)는 숙로(叔老)이며, 관향은 옥천 전씨(沃川全氏)이다. 10세조는 전학준(全學浚)으로 벼슬은 동정(同正)을 지냈고, 그 후대에 전유(全侑)라는 분이 있어 벼슬이 민부 전서(民部典書)에 이르렀다. 그 분의 아들 전숙(全淑)은 벼슬이 판도 판서(版圖判書)에 이르렀으며, 그 뒤 대대로 현귀(顯貴)한 관리들이 배출하였다. 공의 증조(曾祖) 전오례(全五禮)는 대호군(大護軍)을 지냈고, 조고(祖考) 전효순(全孝順)은 현감(縣監)을 지냈으며, 선고(先考)는 전응경(全應卿)으로 출사(出仕)하지 않았고, 좌사간(左司諫)을 지낸 김사렴(金士廉)의 손녀(孫女)를 아내로 맞아서 성화(成化) 경자년(庚子年, 1480년 성종 11년)에 공을 낳았다.
공은 태어난 지 이듬해에 선고를 여의고서 모친에게 의지하여 성장하였으며, 학문에 힘쓰고 글공부를 부지런히 하였다. 홍치(弘治) 갑자년(甲子年, 1504년 연산군 10년)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고, 가정(嘉靖) 갑신년(甲申年, 1524년 중종 19년)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형조(刑曹)와 공조(工曹)의 좌랑(佐郞)ㆍ정랑(正郞)을 거쳐 사도시 첨정(司導寺僉正)ㆍ성균관 사성(成均館司成)ㆍ통례원 우통례(通禮院右通禮) 등을 역임하였다. 외임(外任)으로는 평안도 평사(平安道評事), 단천 군수(端川郡守)와 삼척(三陟)ㆍ밀양(密陽) 두 곳의 부사(府使)와 상주 목사(尙州牧使) 등을 역임하였는데, 상주에 재임할 때 조정에서 공이 학행(學行)이 있고 또 청렴하고 근신(謹愼)하다고 여기어 특별히 통정 대부(通政大夫)에 승진시켜 포상하였으니, 이때가 경술년(庚戌年, 1550년 명종 5년)이었다.
곧이어 병 때문에 벼슬을 그만두고 떠났다가 기미년(己未年, 1559년 명종 14년)에 나이 80세가 된 까닭에 또 가선대부(嘉善大夫)의 품계에 승진하여 부호군(副護軍)에 임명되었다. 그 이듬해 6월에 병이 들어 별세하였고, 8월에 고라산(高羅山)에 있는 선영(先塋) 아래에 장사지냈다.
공은 천성(天性)이 순후(醇厚)하여 자신을 드러냄이 없었으며, 기쁨과 노여움을 기색(氣色)에 드러내지 않았다. 남을 상대할 때에는 한결같이 정성과 신의로써 대하였고, 특히 효도와 우애에 독실하여 제사 때만 되면 반드시 몸소 제수(祭需)를 갖추어 올렸는데, 비록 나이가 늙어 병이 들었을 때에도 그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또 형제들과 더불어 재산 관리와 부모 봉양을 함께 하였고, 여러 조카와 손자들을 자기가 낳은 자식과 똑같게 보살펴 주었으며, 살림이 궁색한 사람이나 끼니조차 제대로 잇지 못하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어 도와주는 일을 잠시도 잊은 적이 없었다. 관직에 재임할 때에는 근신(謹愼)하게 처신하였고 고을을 다스리는 방식은 너그럽고 간편한 행정을 숭상하였으며, 오로지 덕(德)으로써 사람들을 감화시키기에 힘썼다. 그런 까닭에 공이 재임한 고을에 비록 혁혁(赫赫)한 칭예(稱譽)는 없었지만 공이 떠나간 뒤에는 항상 인애(仁愛)의 덕(德)을 남긴 것이 있었다.
벼슬길에 나선 지 37년 동안에 네 번이나 주군(州郡)을 맡아서 다스렸는데도 집안에 한 섬 정도의 쌓아 둔 양식 저축이 없었으나 공은 오히려 느긋하고 편안하게 지내었다. 만년(晩年)에는 벼슬을 내던지고 집에 돌아와서 산수(山水)로써 자오(自娛)하였으며, 조정에서 누차 공을 현직(顯職)에 제수하였으나 끝까지 나아가지 않으려고 하였다. 항상 친구들과 서로 즐겁게 유람하며 지냈는데, 거의 십년 동안이나 그렇게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공의 선취(先娶)는 생원(生員) 이국형(李國衡)의 딸인데, 1남 전엽(全燁)을 낳았는데, 계묘년(癸卯年, 1543년 중종 38년)에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다. 후취(後娶)는 김축(金軸)의 딸인데, 딸 하나를 낳아서 생원(生員) 정유건(鄭惟謇)에게 시집갔다. 내외손(內外孫) 약간 명은 모두 남자들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전팽령 [全彭齡] (국역 국조인물고, 1999. 12. 30., 세종대왕기념사업회)
※호는 송정(松亭)이다.
◎ 전유형 [ 全有亨 ]
정의
1566(명종 21)∼1624(인조 2). 조선 중기의 문신.
개설
본관은 평강(平康). 자는 숙가(叔嘉), 호는 학송(鶴松). 아버지는 전인(全絪)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괴산의 유생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헌(趙憲)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이듬해 왜군을 방어하기 위한 책략 10여조를 올려 선조의 칭찬을 받았으며, 재주를 인정받아 군자감참봉에 임명되었으나 아버지의 상을 당해 사임하였다. 이 때 다시 민심수습방안 등을 상소해 유성룡(柳成龍)으로부터도 주목받아 1594년(선조 27) 특별히 청안현감에 임명되었으며 충청도조방장을 겸해 왜적의 격퇴에 노력하였다.
1603년에는 붕당타파·세자보호 등을 포함한 시사(時事)에 관한 15조목의 소를 올려 조정에 파문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1605년 40세의 나이로 정시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해 감찰로 발탁되었으나 전란 중에 부모의 상을 의례에 맞게 치르지 못했다는 사간원의 탄핵으로 파직되었다.
광해군이 즉위하면서 다시 서용되어 함흥판관 등의 외직을 거쳐 분병조참의·광주목사(廣州牧使)·형조참판 등을 지냈으며, 이이첨(李爾瞻)과 세력을 다투던 임취정(任就正)과 결탁해 이이첨을 탄핵하는 소를 올리기도 하였다.
의술에도 조예가 깊어 광해군과 왕비의 병을 고치는 데 참여했으며 <오장도(五臟圖)>도 그렸다. 인조반정이 일어난 뒤에도 재능을 인정받아 문안사로 발탁되어 모문룡(毛文龍)에게 가서 군량을 계속 대기 어려운 연유를 설명하고 이를 주선했으며, 평안도를 내왕할 때 창성·의주 등 성의 방비상태를 아울러 살피고 돌아왔다.
1623년(인조 1) 동지중추부사 때 이유림옥사(李有林獄事)가 일어나자, 그를 석방해 벼슬을 주어서 그로 하여금 당류를 고변하게 하자고 청했다가 조정을 멸시했다는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난군과 내응했다는 무고를 받아 정상적인 절차도 없이 성철(成哲) 등 37인과 함께 참형을 당하였다.
그 뒤 신원(伸寃 : 억울하게 입은 죄를 풀어줌.)되어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1742년(영조 18) 괴산의 화암서원(花巖書院)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학송집』 1권이 전한다. 시호는 의민(義敏)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전유형 [全有亨]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옥천 양신정 [ 沃川 養神亭]
시대 조선
문화재 지정 충청북도 시도기념물 제29호
건립시기 1545년(인종 1)
성격 누정, 정자
유형 유적
면적 정면 3칸, 측면 2칸
소재지 충청북도 옥천군 동이면 금암리
분야 예술·체육/건축
요약
충청북도 옥천군 동이면에 있는 조선전기 문신 전팽령이 건립한 팔작지붕 형태의 누정. 정자. 시도기념물.
내용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건물. 충청북도 기념물 제29호. 일명 ‘전송정(全松亭)’이라고도 한다. 조선 중기의 문신 전팽령(全彭齡)이 밀양부사(密陽府使)로 있을 때 퇴직 후 쉬기 위한 장소로 지었다고 전해진다.
전팽령이 이 정자를 세운 것은 1545년(인종 1)인데, 정유재란 때 소실된 것을 1620년(광해군 12) 중건하였으며, 지금의 건물은 1828년(순조 28)에 다시 지은 것이다. 서쪽 한칸은 온돌로 되어 있고, 주위에는 나지막한 흙돌담이 둘러쳐져 있다.
후손들이 조상의 유적(遺蹟)을 아끼느라 단청(丹靑)하여 원형이 많이 변형되었다. 정자 서편 담장 밖에는 느티나무를 비롯하여 팽나무·상수리나무 노목이 울창하고, 소나무숲이 정자를 둘러싸고 있다.
정자 서편 낮은 곳에 늪이 있는데 전에 따오기가 살았다고 해서 목담(鶩潭)이라 하며, 남쪽에는 목담영당(鶩潭影堂)이라 이름한 사당(祠堂) 건물이 자리하고 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강시영 [ 姜時永 ]
이칭별칭
자/ 여량(汝亮) 여량(汝良),
시호/ 문헌(文憲)
유형/인물
시대/조선
출생 – 사망/
1788년(정조 12) ~ 미상
성격/문신
성별/남
본관/진주(晉州)
대표관직(경력)
한성부판윤, 형조판서, 대사헌, 예조판서
정의
1788(정조 12)∼? 조선 후기의 문신.
개설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여량(汝亮, 汝良). 진창군(晉昌君) 강인(姜絪)의 8대손으로, 할아버지는 강세정(姜世靖)이고, 아버지는 강준흠(姜浚欽), 어머니는 권빈(權儐)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819년(순조 19)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수찬을 지내고, 1829년 진하사(進賀使)의 서장관으로 정사 이광문(李光文)과 부사 한기유(韓耆裕) 등과 함께 청나라에 다녀왔다.
1838년(헌종 4) 부수찬을 거쳐 1843년 충청도관찰사, 1846년 행호군(行護軍), 1848년 한성부판윤·형조판서, 1854년(철종 5) 대사헌을 지냈으며, 1859년 예조판서가 되었다.
1866년(고종 3) 조대비가 수렴섭정(垂簾攝政)을 철회하고, 흥선대원군이 권력을 잡아 인사배치를 할 때 남인으로 기용되어 홍문관제학을 거쳐 이조판서로 승진되었다. 글씨에도 뛰어났다.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참고문헌
『순조실록(純祖實錄)』
『헌종실록(憲宗實錄)』
『철종실록(哲宗實錄)』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국조방목(國朝榜目)』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강시영 [姜時永]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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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사회에 공헌하는 인재 육성, 정선전씨 필구公 문중 원문보기 글쓴이: 한강의 언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