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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꿔 온 빛으로 써내려간 슬픈 시간의 기록
문단과 평단, 그리고 독자들의 호평으로 2006년 시단을 뜨겁게 달구었던 시집 『가재미』 이후, 2년 만에 문태준 시인이 새 시집 『그늘의 발달』을 펴냈다. 등단 14년 만에 펴낸 네번째 시집이다. 문태준 시인은 1994년에 등단하여 6년 뒤에 첫 시집 『수런거리는 뒤란』을 출간하였고, 다시 4년 뒤에 두번째 시집 『맨발』을 내었으며, 그 후 불과 2년 만에 세번째 시집 『가재미』를 펴냈다. 언론에서는 이렇듯 6년, 4년, 2년으로 점점 가속화되는 그의 시집 발간 속도를 두고 이것이 그의 시단 내 비중이 증가하는 것을 숫자로써 보여주는 셈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그리고 다시 2년이 지났다. 문태준 시인은 자신의 확고한 궤도를 왕성한 창작욕과, 그와 동시에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아름다운 작품으로 증명이라도 하듯 또 한 권의 시집을 묶어내었다. 이전 시집에 비해 좀더 깊고, 그래서 좀더 아름다운 71편의 시가 총 4부에 걸쳐 실렸다.
“최근 주목 받고 있는 젊은 시인들이 ‘고양이’과라면 그는 비슷한 연배인데도 ‘소’과에 가깝다. 그는 소처럼 ‘마실’ 다니며 끔뻑끔뻑 쓴다. 그런데 그게 너무 아름답다.”
문태준 시인을 두고 “멀게는 백석, 가깝게는 장석남과 시적 혈연관계다. 그는 서정시 가문의 적자다”라고 말한 바 있는 문학평론가 신형철의 표현대로, 시인의 마음 안에 있는 눈은 소처럼 크고 맑다. 이것은 화려한 도시의 뒷골목에서 날카로운 두 눈을 형형하게 뜨고 있는 최근 젊은 시인들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고양이과의 최근 젊은 시인들이 문명의 이기와 폭력에 짓눌린 개인의 상처 혹은 그것들을 철저히 무시하는 개인의 욕망을 탈문법, 탈서정으로 그려낸다면, 소과의 문태준은 느리지만 힘 있는 걸음으로 귀향길에 오른다.
이러한 그의 느린 걸음걸이는「물끄러미」 「덜컥도 없이 너는 슬금슬금」 등의 제목에서도 잘 드러난다. 뿐만 아니라 그의 시에서 자주 드러나며 그 분위기를 강하게 전달하는 “어룽어룽” “조촘조촘” “물렁물렁” “슬금슬금” “들썽들썽” “끔벅끔벅” 등의 의성어/의태어 등도 이것을 뒷받침한다. 이번 시집의 해설을 맡은 문학평론가 김주연은 문태준 시인의 작품에서 느껴지는 이러한 특징을 바탕으로 그의 시가 “둥글고 의뭉스럽다”고 단언한다. 이것은 다시 말해 시인이 둥글게 인식하는 세계의 모습을 드러내는 방법이, “그러면서도 그렇지 않고, 그렇잖으면서도 그런 숨김의 미학”에 있다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이 의뭉스러움은 무엇보다 현대적 인식을 전통적인 문법과 가락으로 귀향시키는 일에 효과가 있다고 그는 덧붙인다. “의뭉스러움은 느슨한 길 위에서 승리가 된다.”
문태준은 또한 “서정시 가문의 적자”라는 표현답게 전통을 귀히 여기고 문법을 존중한다. 그러나 현명한 아들이 그러하듯, 그는 그 길을 그대로 따라가지 않는다. 그 길 위를 천천히 걸으면서, 훨씬 현대적일 수밖에 없는 자신의 시적 자아를 개입시켜서, 그 길을 심심하지 않게 하고, 나아가 재미를 주는 것이다. 그의 시가 더욱 매력적인 이유는 여기에 있다.
한편 이번 시집의 표제작 「그늘의 발달」은 시인의 아버지가 고향 집의 감나무를 베는 것을 보며 쓴 시이다. 이번 시집에서 ‘그늘’은 ‘눈물’과 같은 의미로 그려진다. 시집 뒤표지에 실린 산문에서 시인은 “나의 하루가 또 그늘을 짓고 말았다고 나는 어제 나에게 말했다. 눈물도 그늘이라며 눈물로 얼굴을 덮으면서 말했다”고 고백한다. 살아가면서 느끼는 슬픈 감정, 그래서 어쩌면 하루하루 살아가는 그 자체가 시인에겐 그늘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살아가는 일이란 결국 그늘의 발달을 부르는 일. 그러나 그것을 외면하고 없애려 노력할 필요는 없다. “눈물을 감출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시인은 그늘을 만드는 감나무를 베는 일 대신 “엎드린 그늘이 되어/밤을 다 감고/나의 슬픈 시간을 기록”한다. 그래서 이 시는 “잠시 꿔온 빛”으로 씌인 시인의 일기이다.
이 외에도 독자들은 문태준의 이전 시집에서 익히 만나온 자연의 모습과 시인의 유년 시절의 그 소박하고 평화롭고 정감이 가득한 세계를 다시 만날 수 있다. 어떤 감정도 넘치게 드러내는 법 없이 단지 그것이 거기에 있다고만 말하는 그의 시는 다시 한 번 독자들의 마음에 아름다운 그림을 새겨 넣는다. 문태준의 시 속에 드러난 세계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곳이지만, 시인의 조명이 없었다면 잃어버렸을 세계이기 때문이다. 삶의 감각, 사물의 감각, 언어의 감각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그의 시를 읽다 보면, 독자들은 사소하고 숨어 있는 섬세한 감각이 얼마나 우리 삶의 깊은 곳을 관통하고 있는지를 새삼 깨닫게 될 것이다.
작품들
사랑의 농원에 대하여
생각하였느니
나는 나로부터 변심하는 애인
나의 하루와 노동은 죽은 화분에 물을 부어주었느니
흘러 흘러갔어라,
먼 산 눈이 녹는 동안의 시간이
죽은 화분에 물을 부어주었느니
풀이 사라진 자리에
다시 풀이 와
어떤 곳으로부터 와
풀은 와서 돋고
몸이 커지고 스스로
풀꽃을 피우고 문득
여인이 되었어라
수심(愁心)을 들고 바람 속에 흔들리거나
내가 돌아앉으면
눈물을 달고 어룽어룽 내 뒤에 서 있었어라
어디로부터 왔느냐
묻지는 않았으니
누구도 나에게 그렇게 묻지 않았듯이
우리는 이 화분을 들고
앞서고 앞서서 가거나
늦추고 늦추어서 갈 뿐
우리는 이 화분을 들고
서로에게 구름 그림자처럼 지나가는 애인
나는 나로부터 변심하는 애인
그러하니 사랑이여,
우리가 만나는 동안은
샘물을 길어서
주름을 메우고
서로의 목을 축여다오
-「화분」
아버지여, 감나무를 베지 마오
감나무가 너무 웃자라
감나무 그늘이 지붕을 덮는다고
감나무를 베는 아버지여
그늘이 지붕이 되면 어떤가요
눈물을 감출 수는 없어요
우리 집 지붕에는 폐렴 같은 구름
우리 집 식탁에는 매끼 묵은 밥
우리는 그늘을 앓고 먹는
한 몸의 그늘
그늘의 발달
아버지여, 감나무를 베지 마오
눈물은 웃음을 젖게 하고
그늘은 또 펼쳐 보이고
나는 엎드린 그늘이 되어
밤을 다 감고
나의 슬픈 시간을 기록해요
나의 일기(日記)에는 잠시 꿔온 빛
-「그늘의 발달」
어디서 고부라져 있던 몸인지 모르겠다
골목을 돌아나오다 덜컥 누군가를 만난 것 같이
목하 내 얼굴을 턱 아래까지 쓸어내리는 이 큰 손바닥
나는 나에게 너는 너에게
서로서로 차마 무슨 일을 했던가
시절 없이
점점 물렁물렁해져
오늘은 두서가 더 없다
더 좋은 내일이 있다는 말은 못하겠다
-「눈물에 대하여」
두꺼비가 지렁이를 잡아먹고 있었다
둥근 두꺼비가 긴 지렁이를 삼키고 있었다
지렁이의 긴 하체를 두꺼비의 짧은 앞다리가 팽팽하게 잡아 한참을
지렁이의 버둥거리는 몸을 끈적끈적한 입으로 물고 다시 한참을
지렁이의 축축한 배가 두꺼비의 등 속으로 서서히 들어가는 이 아침
덜컥도 없이 슬금슬금 미끌미끌하게 들어가는 이 한참
그늘이 그늘을, 그늘의 생활이 그늘의 생활을
마저 넣고 입을 꼬옥 막고 눈을 돌리고 나를 바라보는 이 한참
두꺼비가 나에게 똑같이 가까이 가까이로 다가오는 이 한참
-「덜컥도 없이 너는 슬금슬금」
이 밤에 알 수 없다, 마음이 홀로 사는 곳을
앵초꽃의 보라를 보다가 거북이의 등에 거북이가 올라타는 것을 보다가
문득 이 밤에 진흙 속에 사는 진흙게를 생각하게 되는 이유를
늙은 여자의 몸 같은 갯벌의 몸을 더듬게 되는 이 관능을
그 뻘구멍에 마음이 살고 있는가 질문하며 뻘구멍을 파들어가는 이 시간의 손을
마음이여, 무슨 이유로 네가 그곳에서 뻘물을 마시면서 살고 있겠는가
음란하고 물컹물컹한 진흙의 무희를 네가 사랑할 만한 이유를 찾을 수 없다
진흙벽과 흘러내리는 진흙지붕과 진흙밥과 다발이 없는 진흙꽃과
한 번도 말하지 않은 진흙말과 진흙입맞춤과 미소가 적은 진흙아침과 진흙하늘과
태아처럼 몸이 나뉘지 않은 진흙허파와 진흙허벅지와 진흙발과 동공이 없는 진흙눈과
그리하여 세계가 한 덩어리의, 혹은 흐물흐물해서 쥘 수 없는 진흙이라는 너의 인식을
이 밤에 알 수 없다, 마음은 진흙 속 한 마리 진흙게라는 나의 비유를
진흙에는 주소가 없으므로 너를 결코 만날 수 없을 걸이라는 너의 비유를
물의 시간도 흙의 시간도 아니요, 완고함도 유순함도 아닌
다만 있다,라고 할 수밖에 없는 그곳
흥건하게 있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그곳
진흙우박들이 흘러내리고 진흙계절들이 밀려와 덮는, 그리하여 아무도 우리의 출생을 증명할 수 없는 그곳
마지막까지 누구의 종교로도 구원할 수 없는 그곳
마음이여, 무슨 이유로 네가 그곳에 진흙의 은자(隱者)로 살고 있겠는가
이 밤에 알 수 없다, 뻘구멍을 파들어가 만나게 된 이렇게 끝나게 된 진흙문장을
-「뻘구멍」
배를 깔고 턱을 땅에 대고 한껏 졸고 있는 한 마리 개처럼
이 세계의 정오를 지나가요
나의 꿈은 근심 없이 햇빛의 바닥을 기어가요
목에 쇠사슬도 느슨하게 정오를 지나가요
원하는 것은 없어요
백일홍이 핀 것을 내 속에서 보아요
눈은 반쯤 감아요, 벌레처럼
나는 정오의 세계를 엎드린 개처럼 지나가요
이 세계의 바닥이 식기 전에
나의 꿈이 싸늘히 식기 전에
-「엎드린 개처럼」
시집 소개
시집『그늘의 발달』에는 소박하고 평화롭고 정감이 가득한 세계가 있다. 그 세계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계이지만, 시인의 조명이 없었다면 잃어버렸을 세계이다. 삶의 감각, 사물의 감각, 언어의 감각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빚어내는 이 세계는 사소하고 숨어 있는 섬세한 감각이 얼마나 우리 삶의 깊은 곳을 관통하고 있는지를 새삼 깨닫게 해준다. 소용돌이치는 세상살이의 급류 속에서 이 감각들은 조용히 가라앉아 따뜻하게 위무하는 보드라운 언어들을 솟아나게 한다. 시의 깊이는 감각의 깊이이고 삶의 깊이이다.
시인이 쓰는 산문(뒤표지 글)
날이 밝아오는 것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다. 부엌은 가만히 앉아 있고, 이불은 누워 있다. 엷은 안개가 걷히면서 빛이 들어서고 있다. 조금씩 들어서는 빛처럼 사람들이 세상을 움직이는 소리가 나의 창문으로 들어선다. 오동나무의 윤곽이 살아나고, 새소리는 큰 공중을 오가며 반짝인다. 숲으로 가는 젖고 좁은 길이 보인다. 나는 왼손을 오른 손목에 얹고 맥박을 짚는다. 세상이 이처럼 미동으로 막 시작하는 때가 가장 황홀하다. 이 세계를 또 새롭게, 최초로, 충분히 느끼는 때. 이것은 무언가 젖는 느낌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이것은 무언가 낯선 곳을 호흡한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나의 하루가 또 그늘을 짓고 말았다고 나는 어제 나에게 말했다. 눈물도 그늘이라며 눈물로 얼굴을 덮으면서 말했다. 당신과의 이별도, 그보다 좀 더 큰 당신인 세계와의 이별도 어제는 있었다. 황망했다. 예상하지도 못한 채 큰일을 당하고 만 때처럼. 나와 나의 세계를 오로지 설명할 수 있는 둘레로서의 그늘. 나는 발달하는 그늘을 보았다. 그리고 지금 어제의 일을 잊은 듯 앉아 있는 나에게 날이 다시 밝아오고 있다. 어두움과 환함의 교차가 이 시간에 어김없이 일어난다는 사실에 감사하다. 나의 시는 물러나는 빛과 물러나는 어둠, 그 시간에 태어났다. 당신의 감정과 생각이 대체로 살고 있는 그곳. 그곳을 떠나고 싶지도, 떠날 수도 없다. 그곳은 우리에게 하늘이다.
첫댓글 아직 책을 펼치지도 못했는데 소상한 소개글을 먼저 감상하게되어 책을 읽는데 많은 도움이 될것 같으네요. '시크릿' 보다 ' 배꼽'보다 먼저 읽어야 할것 같으네요. 수고하셨고 감사드리고요.
김재준님 수고에 감사드리며 더욱 꼼꼼히 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