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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10. 묵상글 ( 연중 제1주간 수요일. - 하느님 벗 그리고 나.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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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10. 연중 제1주간 수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하느님 벗 그리고 나>
“예수님께서는
갖가지 질병을 앓는
많은 사람을 고쳐 주시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셨다.”(마르 1,34ㄱ)
“다음 날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예수님께서는 일어나 외딴곳으로 나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다.”(마르 1,35)
하느님을 만납니다
나를 만나시는 하느님을
나를 만납니다
하느님을 만나는 나를
하느님을 만나는 것이
나를 만나는 것이요
나를 만나는 것이
하느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벗을 만납니다
나를 만나는 벗을
나를 만납니다
벗을 만나는 나를
벗을 만나는 것이
나를 만나는 것이요
나를 만나는 것이
벗을 만나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만납니다
나에게 벗을 맡기시는 하느님을
벗을 만납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맡기신 벗을
나를 만납니다
내게 벗을 맡기시는 하느님을 만나고
하느님께서 내게 맡기신 벗을 만나는
하느님을 만나는 것이
벗을 만나는 것이요
나를 만나는 것입니다
벗을 만나는 것이
하느님을 만나는 것이요
나를 만나는 것입니다
나를 만나는 것이
하느님을 만나는 것이요
벗을 만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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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10. 연중 제1주간 수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주님의 일상
연중 1주 수요일-2012
“예수님께서는 갖가지 질병을 앓는 많은 사람을 고쳐 주시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셨다.
예수님께서는 일어나 외딴곳으로 나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온 갈릴래아를 다니시며, 회당에서 복음을 선포하셨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일상, 아니 일생에 대한 요약입니다.
공생활 이후 예수님은 매일 그리고 돌아가실 때까지 이렇게 사셨습니다.
탁 드는 느낌은 불꽃 같은 삶이셨습니다.
그다음 드는 느낌은 “나는?”입니다.
“나는 이중 무엇을 얼마만큼 잘 따르고 있나?”입니다.
주님은 병을 고쳐 주시고 마귀를 쫓아내십니다.
어제 봤듯이 예수님은 책상받이가 아니십니다.
사람들의 삶 한가운데서 생사고락을 같이 하십니다.
대부분 시간을 병자들과 악령 들린 사람들 가운데서 보내십니다.
이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그제는 식사를 하며 병원에서 일하는 의사나 간호사들이
얼마나 힘들지 형제들과 얘기를 나눴습니다.
노상 아픈 사람들과 상대를 하니 말입니다.
사람은 아픈 사람을 대하면 아픔이 전이되고
우울한 사람과 만나면 우울함이 전이되기 마련이지 않습니까?
그러기에 살려면 그리고 그 일을 계속하려면 둘 중의 하나입니다.
전이돼도 극복할 수 있을 정도로 사랑이 충만하던지
전이 되는 것을 아예 잘 차단하던지.
많은 사람은 극복할 수 있을 정도의 사랑이 없기에
전이 되는 것을 차단하는 쪽으로 선택을 합니다.
저도 30대 후반까지만 해도 고통을 많이 겪는 분들을 찾아다녔습니다.
그러다가 찾아가지 않아도 찾아오는 분들로 감당하기 힘들어졌습니다.
그런데 찾아가지 않기 시작하면서부터 감당하기가 더 힘들어진 겁니다.
역시 찾아가야 합니다.
태도의 문제인데 더 능동적이기 위해서입니다.
찾아 떠나지 않고 찾아오는 분들을 맞이하는 것은
안주하고 수동적이지 않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지요.
오늘 주님은 붙잡는 사람들을 뿌리치고 다른 곳으로 떠나십니다.
그러므로 저도 그랬어야 했고, 지금도 그래야 합니다.
그러나 고통받는 분들을 제가 감당하지 못하고
그들 고통이 전이되는 걸 차단하게 된 더 큰 원인은 따로 있었습니다.
바로 기도 부족이었습니다.
기도가 부족했다고 제가 말할 때 그것은
기도 시간이 짧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어쩌면 기도 시간은 짧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 기도 시간은 충분했었는지도 모릅니다.
저의 기도에 있어서 부족했던 것은 시간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저의 사랑이 부족한 것이었는데,
그것은 하느님 사랑에 제가 풍덩 잠기지 못한 것입니다.
기도란 다른 무엇이 아니라 하느님 사랑에 잠기는 겁니다.
하느님 사랑의 샘에서 물을 깃는 겁니다.
주님은 그 바쁜 중에도 “일어나 외딴곳으로 나가시어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저도 그랬어야 했고, 지금도 그러해야 합니다.
기도하러 가서
무엇을 하지 말고,
생각을 하지 말고,
계획을 하지 말고,
자책을 하지 말고,
명상이나 심지어 묵상도 말고
오직 사랑에 잠겨 있다가 나와야 할 겁니다.
지난 주일부터 이번 봄 학기 강의 준비하러 왔습니다.
인터넷이 안 되는 곳에 있어서 강론을 올릴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강의에 집중하느라 새로운 강론을 쓸 수 없어
전에 올렸던 강론을 다시 올립니다.
양해 바랍니다.
다음 주부터 새로운 강론 꼬박꼬박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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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10. 연중 제1주간 수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다가가시어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이 가셨다.”(마르 1,31)
예수님의 공생활 활동은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곧 기도생활과 활동생활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활동생활은 다시 말씀의 선포활동과 치유구마활동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이를 예수님의 3중 직무 곧 예언직과 사제직과 봉사직으로 관련지을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이 세 가지 내용을 모두 담고 있는데, <첫째 장면>은 예수님께서 치유와 구마로 사람들에게 봉사하시는 장면이요, <둘째 장면>은 새벽에 외딴 곳으로 나가시어 기도하시며 아버지와 친교를 이루시는 기도하시는 장면이요, <셋째 장면>은 이웃 고을로 가시어 복음을 선포하시는 장면입니다.
<첫째 장면>에서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다가가시어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이 가셨다.”(마르 1,31)고 말씀하시는데, 이는 치유를 받아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일으켜지자 치유가 일어났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마치 산고의 아픔이 다해야 아기가 탄생하는 것이 아니라, 아기가 탄생하면 산고의 아픔은 사라져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곧 치유가 믿음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치유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마귀들이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들이 당신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마르 1,34)라고 말씀하시는데, 이는 ‘아는 것’과 ‘믿는 것’은 같지 않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마귀들은 예수님을 알고는 있었지만, 결코 믿지는 않았습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앞 장면에서도 마귀는 “나자렛 사람 예수님, ~저는 당신이 누구인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마르 1,24)라고 고백하면서도 예수님을 믿지는 않았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 역시 아는 것에 앞서 믿고 사랑해야 할 일입니다. 진정 믿을 때라야 진정 알게 되고, 아는 바를 믿고 사랑하며, 믿고 사랑하는 바를 실천할 때 진정 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둘째 장면>에서는 예수님의 삶의 중심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말해줍니다. 곧 아버지 하느님과의 ‘친교와 일치’에 당신 삶의 중심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는 기도와 활동의 삶 사이의 밀접한 관계를 보여줍니다. 곧 기도는 활동이 되고 활동은 기도에 뿌리를 두어야 한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셋째 장면>에서는 예수님께서 하느님 곁을 떠나 이 땅에 오신 이유를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마르 1,38) 라고 알려줍니다. 이는 당신께서는 “기쁜 소식”, 곧 “하느님 나라가 왔다”는 것을 선포하러 오셨다는 말씀입니다. 또한 이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나타나시어 우리에게 주신 사명이기도 합니다(마르 16,15).
오늘 우리는 병든 이들과 마귀 들린 이들을 고쳐주시고, 먼저 외딴 곳에서 기도하시고, 복음을 선포하시는 예수님을 만나 뵈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 은총과 사랑을 입은 이들로서, 예수님의 이 사랑을 우리의 소명으로 받은 이들임을 명심해고, 예수님 삶, 곧 이 3중 직무를 실행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나는 그 일을 하도록 떠나온 것이다.”(마르 1,38)
주님!
지금 여기에 있는 이유를 알게 하소서!
당신 뜻이 주어지고 베풀어진 선물임을 알게 하소서!
당신의 뜻을 알고 실행하는 것이 제 삶이 되게 하소서!
제 뼈 속에 갇힌 당신 뜻이 제 심장에서 불타오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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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10. 연중 제1주간 수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무엇을 하더라도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능력에는 그만한 수고와 땀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희생과 노력 없이 능력을 지닐 수는 없는 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능력을 가지고 마귀를 쫓아내며 앓는 이들을 치유해 주셨는데 이 또한 그만한 정성을 쏟으셨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모든 힘은 하느님 아버지에게서 오는 것이고 따라서 아버지와의 관계를 맺지 않고는 그 능력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관계를 맺는 것이 기도입니다. 토마스 키킹 신부는 “기도는 하느님과 맺는 관계이며 그 관계를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다.”라고 정의하였습니다. 우리는 기도한 후 하느님의 뜻을 다른 사람에게 알리고, 다른 사람의 사정을 하느님께 알리는 것은, 이웃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요, 의무입니다. 열병으로 누워있는 나에게 따뜻한 이웃이 있는가? 아니면 나는 열병으로 누워있는 이에게 이웃이 되어 주고 있는가? 성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외딴곳으로 가시어 기도하셨습니다. 왜 외딴곳으로 가셨을까요? 외딴곳은 광야입니다. 고요함이 있는 곳입니다. 기도하는 장소입니다. 달콤하고 안락한 잠자리가 아니라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서 마음을 모으는 곳입니다. 예수님은 침묵 속에서 하느님 아버지와의 관계를 늘 유지하였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계시는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마태6,6).
이른 새벽은 새로운 시작의 출발점입니다. 모든 것을 하느님의 섭리에 맡기며 하루를 아버지의 뜻 안에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아버지를 통해서 세상에 오셨으니, 그분의 뜻을 헤아리고 찾는 것은 당연합니다. 기도는 나의 원의를 이루지 않고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기도를 통해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하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오랫동안 그렇게 자주 주님의 기도를 바쳐왔으면서도 주님의 뜻보다 내 뜻을 이루려 할 때가 더 많습니다.
시몬과 그 일행이 예수님을 찾아 나섰다가 그분을 만나자 “모두 스승님을 찾고 있습니다”(마르1,35).하고 말하였습니다. 여기에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모시고 한곳에 머물고자 하는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마르1,38).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도하셨기에 당신이 할 소명을 확실히 할 수 있었습니다. 신앙인에게 기도가 없으면 뿌리 없는 나무와 같습니다. 노자는 “고요함이 없는 활동은 다만 어지러운 난장판”이라고 했습니다. 혹 늘 많은 일을 하는 것 같은데 열매가 없다면 그것은 아마도 기도하지 않고 일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하더라도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고는 지금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식별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닐 수 없습니다”(유광수).
우리가 하느님의 힘을 입으려면 고요 속에서 외딴곳을 찾아 기도 하신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여전히 바쁜 일상이지만 오늘은 성경을 읽고, 성체 조배를 하며 고요함에 머물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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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10. 연중 제1주간 수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식당에서 조기구이를 먹었습니다. 큰 가시는 조심해서 버리고 먹었습니다. 그런데 작은 가시 하나가 걸렸습니다. 껌을 씹고, 양치질을 해서 없어졌지만 순간 당황했습니다. 속담에 ‘바늘 도둑이 소 도둑 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냉담하는 분들이 무슨 큰 이유가 있어서, 큰 사건이 있어서 냉담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사소한 것들이 쌓여서 냉담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약속이 있어서 한 주 미사에 빠졌는데 그 다음부터 주일 미사에 빠지는 분도 있었습니다. 함께 차를 타고 오는 분이 사정이 생겨서 한 주 같이 오지 못했는데 그 다음부터 주일 미사에 빠지는 분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옛 어른들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악한 것은 아주 작은 것이라도 하지 말고, 선한 것은 아주 작은 것이라도 행하여라.” 오늘 독서에서 엘리는 사무엘이 하느님의 음성을 들었음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사무엘에게 하느님의 음성을 듣거든 이렇게 말하라고 하였습니다. “주님,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 엘리의 말을 들은 사무엘은 이제 예언자가 되었습니다.
교육(敎育)이라는 말은 가르치고 육성한다는 뜻입니다. 단순히 지식을 전하는 것은 진정한 교육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처음 찾아온 제자들에게 ‘와서 보아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12명의 제자들과 함께 지내면서 가르치고 육성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하느님 나라의 지식을 가르치신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의 삶에 대해서 직접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이렇게 너희의 발을 씻겨주는 것은 너희도 그렇게 하라고 모범을 보여주는 것이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직접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타 언덕을 오르셨습니다. 기도하지 않고는 표징을 보여 줄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셨습니다. 겟세마니 동산에서는 밤을 새워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겸손하셨고, 먼저 십자가를 지셨고, 먼저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교육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의 교육을 비난하셨습니다. 그들은 지식을 전하면서 본인들은 모범을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십자가를 지라고 하였지만 본인들은 십자가를 외면하였습니다. 그들은 겸손해야 한다고 말하였지만 교만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자비를 말하면서 죄인들을 용서하지 않고 단죄하였습니다. 그들은 율법과 계명으로 하느님을 찬미하고, 하느님께 영광을 드려야 하는데 율법과 계명으로 하느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하였습니다. 율법과 계명을 자신들의 욕망을 채우는 도구로 사용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위선자들이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듯이, 스스로 나팔을 불지 마라.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 너는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너는 단식할 때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어라. 네가 단식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지 말고,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보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활동을 전해 주고 있습니다. 가난한 이, 아픈 이, 외로운 이, 죄인들에게 다가가시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아무런 조건 없이, 묻지도 않으시고, 따지지도 않으시고 목마른 사람에게는 물을 주시고, 눈먼 이는 눈을 뜨게 해 주시고, 듣지 못하는 이는 듣게 해 주십니다. 한적한 곳에 가셔서 기도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또 다른 곳으로 가자고 재촉하십니다. 다른 곳에도 복음을 전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2024년이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뒤를 따라서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되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온 갈릴래아를 다니시며, 회당에서 복음을 선포하시고 마귀들을 쫓아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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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10. 연중 제1주간 수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주님께서는 오늘 질병을 앓는 많은 사람을 고쳐 주시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십니다. 그중 하나는 베드로의 장모였습니다. 베드로의 장모는 왜 열병이 났었을까요? 사실 장모의 열병이 왜 생겨났는지 우리는 알 길이 없습니다.
자기 사위인 베드로가 딸과 가족들을 놔둔 채 주님을 따라다녀서 열병이 났는지 코로나 같은 어떤 감염으로 열병이 났는지는 우리는 알 수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손을 잡고 일으키시는 순간 그 열병이 나았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 병을 치유하셨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렇게 주님께서는 많은 사람을 치유하십니다. 몸의 병도 고치시고 마음의 병도 고치십니다. 마귀도 쫓아내십니다.
몸의 병은 눈에 금방 드러납니다. 어딘가 불편하다는 것을 우리는 쉽게 알아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음의 병은 그렇지 않습니다. 마음의 병은 자신이 드러내지 않으면 다른 사람은 눈치채기 어렵습니다. 또한 그 상처가 얼마나 깊은지, 오래됐는지도 파악하기 힘듭니다. 어쩌면 마음의 병이 몸의 병보다 고치기 어렵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손을 잡고 일으키시나 봅니다. 주님의 이런 행위에는 많은 말들이 담겨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아픈 마음을 알고 있다는 부드러운 손길….
그 어름 같은 상처를 사랑으로 메우는 따뜻한 손길….
그 고통에 주저앉아 있는 영혼을 일으키는 응원이 손길….
오늘 주님께서 우리의 손을 잡아주시기를 바랍니다. 그 손길로 우리가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그 잡아주심으로 우리의 상처가 아물고 어둠 가득했던 마음 한구석이 다시 밝은 빛으로 가득 차기를 희망합니다.
일어나십시오. 그대는 다시 걸을 수 있습니다. 힘을 내십시오.
맺음
사실 우리 삶의 시작은 우리가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에 의해 던져진 공처럼
누군가에 의해 쏘아 올려진 화살처럼
우리는 우리 의지와 상관없이
삶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맺음은 다릅니다.
우리는 우리 삶의 맺음을 만들 수 있습니다.
조금 더 아름답게
조금 더 예쁘게
조금 더 빛나게 말입니다.
시작도 중요하지만
맺음은 더 중요합니다.
우리 삶의 맺음이 평온하기를….
저의 삶의 맺음이 평화롭기를 기도합니다.
딱딱한 곳은 ‘괜찮아’라며 어루만져 주기를
무른 곳은 내가 나를 사랑해 주기를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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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10. 연중 제1주간 수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폭의 넓이가 1미터인 길이 있습니다. 이 길을 바깥쪽으로 벗어나지 않고 똑바로 걷는 것을 그 누구도 어렵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1미터 넓이의 길 양옆에는 끝이 보이지 않는 낭떠러지가 있습니다. 더군다나 안전 펜스도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때도 이 길을 걷는 것이 어렵지 않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이때는 너무 힘든 일이 되고 맙니다. 혹시라도 발을 헛디디면 낭떠러지로 떨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불안과 걱정의 마음이 충분히 걸을 수 있는 길도 걸을 수 없는 길로 만듭니다.
불안과 걱정의 마음을 가지면 지금을 제대로 살 수 없습니다. 그런데 혹시 모를 경우를 생각하며 불안과 걱정 안에서 앞으로 한 발 내딛는 것도 힘들어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예전에 어떤 사람이 4층 높이의 계단에서 지하 1층으로 떨어졌습니다. 가운데가 뚫려있는 회전형 계단으로, 자그마치 5층 높이로 거의 15미터 정도가 됩니다. 이 사람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놀라운 것은 가벼운 찰과상만 입었다고 합니다. 혹시 초능력자일까요?
아니었습니다. 이 사람은 만취된 상태에서 실수로 계단 아래로 떨어진 것입니다. 하지만 완전히 취한 상태여서 몸에 어떤 힘도 들어가지 않았고 이곳저곳에 부딪히며 떨어져서 찰과상 입는 정도로 그쳤다고 합니다. 만약 이 사람이 의식이 있어서 온 힘을 줬다면 크게 다쳤을 것이라고 하더군요.
불안과 걱정도 온 힘을 주는 것과 비슷합니다. 몸에 힘을 빼고 주님께 모두 맡기는 믿음을 통해 여유를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이 세상을 더 기쁘고 또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 시몬의 장모를 비롯한 병든 이들을 고쳐 주시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십니다. 병자와 마귀 들린 사람, 그리고 그의 가족들은 얼마나 불안하고 걱정이 많았을까요? 이 불안과 걱정으로 자기 상태를 더 나쁘게 했을 것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믿음보다는 원망이 더 많았을 것이고, 다른 이를 향한 사랑보다는 자기를 배려하지 못한다면서 미움이 더 컸을 것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고, 예수님을 통해서 모든 걱정과 불안을 몰아낼 수 있었습니다.
그 힘은 과연 어디서 온 것일까요? 예수님께서는 바쁘고 힘든 가운데에서도 잊지 않고 하셨던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외딴곳으로 나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습니다. 치유와 구마의 권능은 하느님 아버지에게서 오는 것이었지요. 따라서 그분과 일치하는 기도가 필수적이었던 것입니다.
주님과의 진정한 일치를 통해서만 우리의 모든 걱정과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주님의 모범을 따라 더 열심히 기도하고 그분께 대한 믿음을 키워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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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다른 사람이 무엇을 하든 신경 쓰지 마라. 더 나은 자신이 되기 위해 노력하라(윌리엄 보엣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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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10. 연중 제1주간 수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삶의 중심과 질서
-기도와 일-
어제부터 연중시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성탄시기 이벤트도 끝나고 평범한 일상의 시작입니다. 우선 성무일도 찾기가 쉽고 단순해서 좋습니다. 제의 색깔도 한결같음을 뜻하는 초록색입니다. 새삼 하루하루 평범한 일상이 얼마나 고맙고 소중한지 깨닫습니다. 새벽 잠깨어 휴게실에 들렸다 게시판을 보니 연합회 수도형제의 부고가 붙어 있었습니다.
두 분다 독일 수도원에 속한 분으로 한분은 1937년생으로 저보다 12세 연상이니 88세로, 한분은 1942년생으로 저보다 7년 연상이니 83세로 선종했습니다. 요즘 대부분이 80-90세 사이에 세상을 떠납니다. 90세 넘기가 쉽지 않습니다. 저의 경우도 앞으로 남은 햇수로 10년-15년 안팎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또 어제는 신문에서 80년대 초반 서강대에서 함께 공부했던 인천교구 제정원 신부의 부고도 접했습니다. 40년 전 공부하던 때 본 후 한 번도 못 봤는데 72세로 선종했다는 기사였습니다.
이처럼 살아서가 아닌 죽어서 만나는 경우가 앞으로도 비일비재할 것입니다. 새삼 인생무상과 더불어 살날이 얼마 안 남았음에 하루하루가 참 소중함을 느낍니다. 그래서 늘 강조하다시피 삶을 일일일생, 일년사계로 압축한 후 현 시점을 확인해 보면서,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좌우명 시를 읽으며 삶의 중심과 질서를 잡습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하늘 향한 나무처럼
비가 오든, 눈이 오든, 덥든 춥든,
봄, 여름, 가을, 겨울
늘 하느님 불러 주신 이 자리에서
하느님만 찾고 바라보며
정주의 나무가 되어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살다보니
작은 나무가 이제는 울창한 아름드리
하느님의 나무가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받으소서.”
전부 7연으로 된 좌우명 고백기도시로 2012년 수도원 설립 25년 기념감사제 행사때 낭독한 시인데 얼마나 많이 나눴는지 모릅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읽어보며 삶의 중심과 질서를 잡는 시입니다. 연중시기 제1주간 수요일,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의 하루 일상이 얼마나 치열한 100% 삶인지 잘 드러납니다. 회당에서 가르침이 끝나자마자 시몬의 병든 장모를 고치시고, 많은 병자를 고치시고, 전도 여행을 떠나십니다.
날마다 가르치시고, 고치시고, 하늘나라 복음을 선포하시는 평범한 일상에 지극히 충실한 삶입니다. 날마다 이런 스승이자 의사이신 주님을 만나 배우고 치유를 받고 복음 선포에 최선을 다해야 하는 우리의 삶임을 깨닫습니다. 주목할 바 예수님 삶의 중심입니다. 삶의 한복판 중심에 위치한 외딴곳에서의 기도입니다. 분주한 일상을 마친 후, 외딴곳에서의 기도가 삶의 리듬처럼 자리 잡고 있음을 봅니다. 참으로 영육이 살기위해 외딴곳에서의 충전은 필수입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끊임없이 피정 차 외딴곳 이곳 수도원을 찾습니다.
‘다음 날,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예수님께서는 일어나 외딴곳으로 나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다.’
저는 밤 12:30분에 잠깨어 기상 후 수도원 외딴곳 집무실에서 강론을 쓰고 있습니다. 지난 밤에도 강론 쓰기를 완성했는데 잠깨니 꿈이었고 참 난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기도가 끝나자마자 찾는 사람들입니다.
“모두 스승님을 찾고 있습니다.”
새삼 삶의 중심과 질서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예수님의 분별의 지혜가 탁월합니다. 에수님은 결코 군중의 인기에 영합하거나 유혹됨이 없이 본연의 사명에 충실하시며 삶의 중심과 질서를 어지럽히지 않습니다.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
이어 예수님께서는 온 갈릴래아를 다니시며, 회당에서 복음을 선포하시고 마귀들을 쫓아내시니 그 모습 얼마나 아름답고 거룩한지요! 어느 한 곳에, 사람들에 집착함이 없이 홀가분하게 성령의 바람 따라 책임을 다하신 후 자유롭게 훌훌 떠나시는 모습이 참 보기 좋습니다.
예수님의 시야가 참 넓고 깊습니다. 이 모두가 외딴곳에서의 기도의 힘임을 깨닫습니다. 늘 거기 그 자리에 산같이, 나무같이 정주하는 우리 수도자의 삶이라 해도 내적시야는 주변에 깨어 두루 넓고 깊게 활짝 열려있어야 함을 배웁니다. 오늘 제1독서 사무엘에게서도 우리는 삶의 중심과 질서에 충실한 모습을 배웁니다.
소년 사무엘은 스승 엘리 앞에서 주님을 섬기는 모습이 참 아름답고 거룩합니다. 늘 깨어 주님께 귀 기울여 경청하는 사무엘이었기에 주님의 매번 부르시는 음성을 듣습니다. 급기야 네 번째 주님이 부르시자 엘리가 알려 준대로 대답합니다.
“사무엘아. 사무엘아!”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
정말 사무엘처럼 이렇게 깨어 주님의 말씀에 경청하며 살고 싶음은 누구나의 영적소망일 것입니다. 사무엘이 자라는 동안 주님께서 그와 함께 계시어, 그가 한 말은 한 마디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했다니, 얼마나 사무엘이 지극 정성 하느님을 섬겼는지 깨닫습니다. 또 사무엘이 하느님 중심의 삶에 얼마나 잘 질서 잡힌 균형과 조화의 삶이었는지 짐작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은 사무엘이 주님의 믿음직한 예언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니 사필귀정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삶의 중심과 질서를 잡아주시어 하루하루 날마다 깨어 당신의 부르심에 기꺼이 응답하며, 기도와 일이 균형과 조화를 이룬 삶을 살게 하십니다.
“주님, 보소서. 당신 뜻을 이루려 제가 왔나이다.”(시편40;8,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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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10. 연중 제1주간 수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그때에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어서, 사람들이 곧바로 예수님께 그 부인의 사정을 이야기하였다.(마르 1,30)
죄의 악취에서 참회의 항기로
예수님께서 그대 침상 머리맡에 서 계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계속 잠을 잘 수 있겠습니까?
그분께서 와 계신데도 침대에 누워 있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분이 어디 계시냐고 그대는 물을 것입 니다. 그분은 지금 여기 계십니다.
“너희 가운데에는 너 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요한 1,26). “하느님 나라가 너희 가운데 있다”(마르 1,15 참조). 믿음은 우리 가운데 계시는 예수님을 알아뵙게 합니다. 그분의 손을 만질 수 없다면 그분 발 앞에 엎드립시다. 그분 머리에 다다를 수 없다면 눈물로 그분의 발을 씻어 드립시다(루카 7,38 참조) 우리의 참회는 구원자께 향기가 됩니다. 구원자의 자비가 얼마나 큰지 깨달으십시오. 우리 죄에서 역겨운 냄새가 납니다.
죄가 썩는 냄새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죄를 뉘우치고 눈물로 참회하면 주님께서는 죄의 악취를 향기로 바꾸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손을 잡아 주시도록 기도합시다. 복음사가는 “곧 열이 가셨다”(마르 1,31)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 여인의 손을 잡아주시자 열이 달아난 것입니다.
-히에로니무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1
모든 피조물이 하느님의 말씀이다
창조의 말과 일과 새로운 피조물 사이에는 긴장이 있다. 첫 번째 긴장은 안과 밖의 긴장이다. 참된 말은 밖으로 나가되 안에 머무른다. 하느님으로부터 벗어나는 출구는 그분께로 들어가는 입구다. 이 안과 밖의 긴장 내지 변증법이야말로 하느님의 일하는 방식, 인간이 영적으로 일하는 방식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요소다. 엑카르트는 하느님이 일하는 방식, 인간이 영적으로 일하는 방식을 안과 밖의 긴장으로 보고 있다. 엑카르트는 참된 삶과 참된 창조의 근본적인 동력은 위아래가 아니라 안팎이라고 생각한다. 토마스 아 캠피스는 자신이 수도원을 나설 때마다 인간보다 열등하게 되었다고 말하지만, 이와 달리 엑카르트는 지성을 부여받은 만물이 스스로에게서 나오는 만큼 스스로에게로 들어간다고 말한다. 안은 밖으로 나가는 것에 맞서지 않는다. 안과 밖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사실, 하느님의 메아리인 만물은 밖으로 나가고 싶어 함은 물론이고 되돌아 들어가고 싶어하기도 한다. 만물은 자신들이 흘러 나왔던 곳으로 되돌아가겠다고 아우성을 친다. 엑카르트는 창조계가 근원으로 되돌아갈 것이라고 생각한다. 피조물의 전 생애는 자신이 흘러 나왔던 곳으로 되돌아가겠다고 소리치고 분주하게 움직이는 행위에 다름 아니다.(98)
✝️ 수요일 그리스도인 일치의 날✝️
세계 교회사, 아우구스트 프란츤
제 2부 중세 그리스도교
제 3기 : 1050 ∼ 1300년
중세 중기 교회의 전성
제 2절: 그레고리오 개혁과 성직 서임권 논쟁
교회의 자유:
그레고리오 개혁은 클뤼니 수도원의 개혁과는 교회정책적인 방향 정향(定向)에서 구별된다. 둘 다 교회의 자유 개념에서 출발하였다. 그러나 클뤼니는 이 자유를 우선 자기의 내적 생활에 대한 제후와 주교들에 의한 외적인 압박과 침해로부터의 자유라고 간주하였을 때, 그 개념은 확장되어 적극적인 내용을 얻게 되었다. 왜냐하면 “자유”는 중세적 • 게르만적 개념에서는 각자가 적극적으로 하거나 마음대로 하게 하는 총체를 뜻하였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자유”에 대하여, 각자가 법질서 또는 특권에 의거하여 자기에게 요구할 수 있는 권리와 의무의 전체라고 말하였고, 이 자유가 누군가에 의하여 손상될 경우 사람들은 그것을 다시 찾기 위하여 싸웠던 것이다.
그레고리오 개혁의 목표가 된 “교회의 자유”는, 마찬가지로 우선은 교회를 세속 권세가들의 간섭에서 해방시키는 것을 내용으로 하고 있었다. 그레고리오로부터 그 이름과 특징을 얻은 이 운동은 교구와 수도원들이 왕과 제후와 귀족들에 의해 수여되고(속인에 의한 서임), 또한 자주 철면피한 방법에서 금전적으로 충분히 이용되었다(성직 매매)고 공격하였다. 또 그 운동은 종교적 • 교회적인 사명 영역의 자주성을 보장하기 위하여 교회의 자유로운 선거권 회복을 요구하였다. 동시에 자명한 일이지만 방해받지 않고 집행될 수 있도록 교회의 고유한 적극적인 권리들을 인정해 줄 것도 아울러 요구하였다. 그러나 이에 관하여 아직 보편타당한 법적 규범이 없었으므로, 그 윤곽을 잡고 관철을 위하여 노력하는 것이 이 운동의 과제였다.
그래서 정치권력과의 투쟁이 일어나게 되었다.(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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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10. 연중 제1주간 수요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갖가지 질병을 앓는 사람들을 고쳐 주시고
마귀들을 쫓아내십니다.
이것은 오늘 복음 마지막에 가서 보면
복음 선포를 위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기적을 일으키는 예수님께서
자신들과 함께 있기를
사람들은 원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곳에 머물지 않고
떠나십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예수님과
예수님 당신이 생각하는 자신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기적을 일으키시면서
자신들이 필요한 부분을 해결해 주기를
원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거부하지는 않으시지만
당신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다른 목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병의 치유와 마귀를 쫓아내는 것은
그 목적을 위한 하나의 과정에
불과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복음 선포입니다.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이
예수님의 사명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한 선포이기보다
병의 치유와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통해
사람들이 직접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한 경험으로 사람들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
즉 하느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셨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것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었고
그 희망을 더 많은 사람들이 갖게 되도록
예수님께서는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러 다니셨습니다.
그렇게 시작한 하느님 나라는
완성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비록 우리도 이 세상에서
병이나 여러 어려움을 겪으면서 살아가지만
예수님께서 2천년 전에 오셨다는 것은
우리에게도 희망의 소식을 전해줍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셨고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도 이 세상에서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려고 노력한다면
하느님 나라가 완성되는 그 날에는
하느님을 집접 뵙는 기쁨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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