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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헤드린(sanhderin)에 대하여
1. 어원
1). 산헤드린이라는 말은 의회를 뜻하는 “히브리어: סנהדרין, 그리스어: συνέδριον, synedrion, sanhderin 모여 앉는다.”의 아람어적 형태로서 유대인의 종교, 정치적 통치 기구이다. 쉬네드리온은 “대여섯 명이 모여 토의한다.”는 의미라고 한다. 훗날 이 말은 ‘의회’를 가리키는 단어가 되었고 유대인들도 사용함. 2). 유대인이 선민임을 자부하지만 그들에게는 문제도 많았다. 즉 율법을 잘 지키려는 열심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종교적 문제도 있었지 만, 또한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서로 간에 갈등이 많았다. 그래서 소위 재판소를 여러 곳에 두고 문제가 생길 때 마다 현자들(제사장이나 장로들)이 바로 조정해 주도록 하였다. 그 대표적인 것이 “베트 딘”(히 “회의하는 집” 혹은 “재판소”라는 뜻)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후에 “산헤드린”이라고 고쳐 불렀다. 3). 에스라는 예루살렘에 있는 최고 재판소를 “크네셑 학가돌”이라 불렀다. 이 말은“최고 회의”라는 뜻으로 지금도 이스라엘은 국회를 크네셑이라 부른다.
2. 기원
1). 유래 ①. 탈무드 주장 : 기원 70년에 예루살렘이 멸망된 후 여러 세기 동안 편집된 책인 탈무드의 필자들은 산헤드린을 매우 오래된 기관으로 기술하였다. 그들의 생각에 따르면, 그 기관은 언제나 유대인의 율법을 토론하기 위해 모인 학자들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그 기원은 모세가 이스라엘을 인도하는 일을 돕도록 연로자 70명을 소집했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민11:16, 17) ②. 랍비들 주장 : 모세를 보좌했던 칠십인 장로들로부터 시작된 것이라 주장(출24:1) 모세시절 백부장 오십 부장들을 장로라고 불렀고, 이들은 여호수아, 사사시대를 지나 계속 유대사회에서 백성의 대표로 “장로, 귀인, 방백”으로 불리다가 신약에서는 산헤드린이라는 이름을 가진 것으로 주장한다. 그러나 출애굽 시대로부터 어떤 조직된 의회가 계속 존재했다는 증거는 전혀 없다. (민11:16~17) ③. 바사제국 시대에는 에스라서에 장로가 언급되어 있으며(스5:9, 6:7, 14, 10:8), 느헤미야 때에는 백성의 지도자들이 사회의 제반 사항을 다스렸던 것 같다(느 2:16; 11:1). 에스라는 예루살렘에 있는 최고 재판소를 “크네셑 학가돌”이라 불렀다. 이 말은“최고 회의”라는 뜻으로 지금도 이스라엘은 국회를 크네셑이라 부른다. ④. 조직된 기구로서 처음으로 분명하게 나온 것은 안티오쿠스 대제(Antiochus the Great)시대이다(BC223~187년). 그 회원들은 나이와 재산에 근거해서 선정되었으며 대제사장이 그 의장이었다. 마카비(Maccabean)혁명 이후에는 제사장들이 새로이 권력을 장악했다. 몇몇 학자들은 페르시아와 시리아의 지배기간(BC 333~165)에 존재했던 게루시아 라고 하는 고대 의회 또는 장로회의가 대 산헤드린의 전신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⑤. BC 63년에 폼페이(Pompey)가 등극하자 유대인의 영토는 다섯 개의 산헤드린으로 나뉘었는데, 그 중에 수도인 예루살렘의 산헤드린이 유대 정치의 주도적인 단체가 된다. ⑥. 요세푸스는 주전 69년 요한 히르카누스의 통치 때에 있던 산헤드린을 처음으로 언급하였다. 산헤드린은 둘째 성전이 지어진 이후에 대언자들의 대언이 없던 때에, 모세가 세운 70인 회의를 모방해서 만든 것으로 보인다(민11:16~24).
2). 형성과정 ①. 기원전 332년에 알렉산더 대왕은 유대를 지배하였다. 알렉산더가 사망한 뒤에 유대는 알렉산더의 영토 내에서 생겨난 두 개의 그리스 왕국 ~ 처음에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나중에는 셀레우코스 왕조 ~ 의 지배를 받게 된다. 기원전 198년에 시작된 셀레우코스 왕조의 통치 기록에서 유대인의 의회에 대한 언급이 처음으로 나온다. 이 의회는 권한이 제한되어 있었던 것 같지만, 외형적으로는 유대인들에게 자치권을 부여해 주었던 것이다. ②. 기원전 167년에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오코스 4세(에피파네스)는 유대인들에게 그리스 문화를 강요하였다. 그는 예루살렘의 성전 제단에서 제우스에게 돼지를 바침으로 예루살렘 성전을 더럽혔다. 이에 분노한 유대인들은 반란을 일으켰으며, 반란 기간에 마카베오가(家)는 셀레우코스 왕조의 통치에서 벗어나 하스몬 왕조를 세운다. 이로 인해 반란을 지지한 대중의 지도자인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국가 행정에 대한 권력을 획득하게 되었고, 그 결과 제사장직 계층은 힘을 잃게 된다. ③. 이런 과정을 통해, 그리스어 성경에 나오는 산헤드린이 형성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산헤드린은 국가 행정을 위한 회의이자 유대인의 율법을 해석하는 최고 사법 기관이 된 것이다.
3. 조직
1). 구성 ①. 중앙조직 : 대 산헤드린(Great Sanhedrin)은 유대교의 판관들의 모임으로 최고 법원(현대의 대법원)역할을 하는 고대 이스라엘의 재판 기구다. 대 산헤드린은 지도자인 나쉬, 코헨 가돌(대제사장/대사제), 부 판관인 아브 베잇 딘, 그리고 69명의 평 회원으로 구성된다. --- 역사학자 요세푸스에 의하면 산헤드린 공회(최고 재판소 혹은 중앙회의소)는 전통에 따라 71명으로 구성된다. 의장은 대제사장(1명)이 되고, 그 밑에 대제사장 24명, 장로 24명, 학자(서기관) 22명으로 되었다. 처음엔 주로 대제사장과 귀족들(사두개인들)로 구성되었으나, 바리새파의 세력이 강해지면서는 바리새파 현자들도 많이 들어와서 일했다고 한다. ②. 중간도시 : 큰 도시에는 중간급 산헤드린(소 산헤드린이라고 불렀다)이 있었는데 보통 23명의 재판관으로 구성되었다. 예루살렘에는 산헤드린 공회 외에도 소 산헤드린(중간급의 재판소)이 2-3(예루살렘, 가자라, 여리고)개가 더 있었다고 한다. ③. 지방도시 아주 작은 도시에는 가장 낮은 재판소가 있고 보통 3사람의 재판관이 재판을 맡아했다.
2). 회원 자격 ①. 평생회원 : 순수한 이스라엘의 혈통을 지닌 사람으로 국한되었으며 평생회원이었다. ②. 유대인에게 국한 : 그 재판권의 한계는 유대인에 국한되었다.
3). 두 개의 조직(랍비자료, 요세푸스의 기록이 서로 다름) ①. 요세푸스의 기록 : 대제사장이 중심으로 구성되어 민, 형사제판을 관할하는 정치기구 ②. 랍비자료 : 평신도인 바리새인으로 구성되며 종교생활의 여러 문제와 율법(Torah) 해석에 종사하는 종교기구
4). 바리세파와 사두개파의 참여 문제 산헤드린의 구성에 관한 논쟁은 2개의 주요당파였던 사두개파와 바리세파의 참여문제에 초점이 맞춰지고 있다. ①. 사두개파 사람들로 구성되었다고 주장, 혹은 바리세파로 구성되었다 주장. ②. 두 집단이 서로 교체하거나 또는 혼합 형태로 산헤드린을 구성했다고 주장. 마가복음, 누가복음에는 예수에 대한 재판부분에서 대제사장· 원로· 율법학자 등으로 구성된 연합체를 '전체의회'(synedrion) 또는 '그들의 의회'라는 말로 지칭하고 있다. 요한복음에는 대제사장과 바리세인들이 의회를 소집했다고 되어 있다. 사도행전은 명백히 하나이면서 동시에 같은 “의회와 원로 회” 앞에서 거행된 베드로와 요한의 재판을 묘사하면서 산헤드린의 구성 집단인 사두개파와 바리세파의 분열을 말한다.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바리새인들이 요구하는 것을 사두개인들은 마지못해 들어주었다고 한다. 바울은 산헤드린 앞에서 자신을 변호할 때 이 두 집단 사이의 경쟁 관계와 신앙의 차이를 이용하였다.(행23:6~9).
5). 산헤드린은 평생회원 ①. 종신제 : 산헤드린이 주로 귀족들로 구성되어 있었으므로, 그 직위는 종신제였다. ②. 임명제 : 공석은 현직 성원들이 새로운 사람을 임명하여 채웠다. ③. 자 격 : 미슈나에 따르면, 새로운 성원은 “제사장이나 레위인” 또는 “딸을 제사장과 결혼시킬 자격이 있는 이스라엘 사람” ~ 혈통의 순수성을 족보로 증명할 수 있는 유대인 ~이어야 했다. ④. 승 계 : 산헤드린 법정이 나라 전체의 사법 제도를 관장했기 때문에, 논리적으로 볼 때 하급 법정에서 명성을 얻은 사람은 산헤드린 재판관의 지위에 오르게 되었을 것이다.
6). 판결의 영향 ①. 유대인들은 산헤드린을 대단히 존중하였으며, 하급 법정의 재판관들은 산헤드린의 결정을 받아들일 의무가 있었는데,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사형을 당할 수 있었습니다. ②. 산헤드린은 체포권이 있음 : 대제사장과 그의 의회는 다마스쿠스에 있는 회당들의 지도자들에게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체포하는 일에 협조하라는 지시를 내렸다.(행9:1, 2; 22:4, 5; 26:12) 또한 축제를 지키려고 예루살렘에 온 유대인들도 산헤드린이 공포한 소식을 가지고 고향에 돌아간다. ③. 독점적인 사법권 : 미슈나에 따르면, 산헤드린은 국가적으로 중요한 문제, 그 법정의 판결을 무시하는 재판관들의 처리, 거짓 예언자들에 관한 재판에 대해서는 독점적인 사법권을 가졌습니다.
7). 회의장소 랍비들에 따르면 그들이 모인 장소는 둥근 원형 집으로 이곳의 반은 성전 내부에 반은 성전 외부에 있었으며 재판관들은 성전 외부 방에 앉았다고 한다. 의장인 대제사장은 방의 끝에 앉았으며 그의 양 옆에는 보좌관이 있었다. 공회의 회원들은 대개 제사장이나 레위 사람이었다.
4. 업무
1). 역할 ①. 최고의회기관 : 신약시대 유대인들을 통치하는 최고의회기관이었다. ②. 최고법정 : 유대법에 관한 문제들을 최종적으로 다루는 최고법정이었다. 사법적으로는 대제사장, 거짓 예언자, 반역죄를 지은 원로, 잘못한 지파를 심판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상소할 수 있는 최고법정의 역할도 담당했다. ③. 자체의 군대를 가지고 있었다. ④. 참된 선지자와 거짓선지자를 가려내는 일을 했다. ⑤. 사람들이 신성모독죄를 지었는지의 여부를 가려내는 일을 했다. ⑥. 자문회 : 유대인의 제반사항에 대해서는 자문회(諮問會)의 역할을 했다. ⑦. 중앙정부 역할 : 유대 민족이 실질적인 독립을 쟁취하지 못하고 있었던 때에는 일종의 중앙 정부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⑧. 최종 결정기구 : 율법의 해석에 관계된 사건에 대해서는 최종적인 결단을 내렸다. ⑨. 형사 사건의 경우에는 로마 총독의 동의하에서 처형했었다. ⑩. 매해 혹은 매달 종교 달력을 제정했다 ⑪. 임명권 : 정치적으로는 왕과 대제사장 임명 ⑫. 전쟁선포, 예루살렘과 성전의 세력범위 확장 등을 명할 수 있었다. ⑬. 감독 권 : 종교적으로는 속죄일을 포함하여 일정한 의식을 감독했다. 대 산헤드린은 그 아래 작은 지방 산헤드린을 감독했으며,
2). 권한 ①. 산헤드린은 유대인들의 내정을 거의 모두 관장하였다. 산헤드린은 사람들을 체포할 관리들을 거느리고 있었으며(요7:32), 하급 법정에서는 로마의 간섭 없이 사소한 범죄와 민사 소송을 재판하였다. 하급 법정에서 판결을 내리지 못한 사건은 산헤드린으로 회부되었고, 그곳에서 최종적인 결정을 내렸다. ②. 산헤드린이 권한을 유지와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로마의 통치를 지지해야 하였다. 하지만 로마는 어떤 일이 정치적인 공격이라는 의심이 생길 때는, 문제에 개입하여 그들이 적절하다고 여기는 조처를 취하였다. 그 한 가지 예가 사도 바울을 체포한 경우다.(행 21:31~40).
3). 회의 ①. 대 산헤드린 회의시간 : 성전 안에 있는 다듬은 돌 뜰에 낮 동안 열렸으며, 안식일과 유대교 축제일에는 열리지 않았다고 한다. 탈무드의 자료에 따르면 대 산헤드린은 특정한 때 예루살렘 성전의 “리시카트 라 가지트”('깨어진 돌의 방'이라는 뜻)에서 모임을 갖던 71명의 현자들로 구성된 법정이었으며. 나지와 아브 베트 딘이라고 하는 2명의 의원(zugot)이 이 모임의 의장이 되었다고 한다. 대 산헤드린은 종교적 입법기관으로서 “법”(Halakha:유대교 율법의 총칭)은 이곳에서 나와 모든 이스라엘에 공표되었다. ②. 사형은 재판을 한 그다음 날에야 비로소 선고되었기 때문에, 사형이 언도될 수 있는 사건은 안식일 전날이나 축제 전날에는 재판하지 않게 되어 있었다. 증인들은 무고한 피를 흘리는 일의 심각성에 관해 엄중한 훈계를 받았다. 그러므로 축제 전날 가야바의 집에서 밤에 열린 예수에 대한 재판과 유죄 판결은 불법이었다. 더 심각한 잘못은, 재판관들 자신이 거짓 증언을 찾고 빌라도를 설득하여 예수를 처형하라는 명령을 내리게 한 일이었다.(마 26:57~59, 요11:47~53, 19:31)
4). 회의 성수 조건 산헤드린공회는 모두 71명이지 만 23명 이상이 출석하면 성회가 되어 회의(결정)를 할 수 있었다. 이곳에서 의논을 해서 다수결 원칙에 의해 결정되면, 결정된 것은 즉시 법이 되어 전 이스라엘에 적용되었다.
5). 회의 결과 ①. 탈무드에 의하면, 만약 산헤드린이 한 죄인에 대해서, 전원일치로 유죄판결에 이르게 되면 이 사건은 무죄가 된다고 한다. 즉 한 사람도 죄인에 대해서 무죄하다는 주장이 없으면 그것은 재판 전체가 죄인에 대해서 왜곡(편견적) 되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②. 본래 산헤드린공회에서는 될 수 있는 대로 사형판결을 내리지 않으려 했다. 아자리아의 아들 랍비 엘르아잘 때는 7년 동안에 한 사람을 사형시켰다고 한다. 그래서 엘르아잘은 유대나라의 산헤드린공회는 7년에 한 사람 정도를 사형 했다고 자랑했다. 그러자 랍비 탈폰과 랍비 아카바는 우리가 만일 산헤드린공회의 회원이었다면 한 명도 사형시키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6). 산헤드린의 주요 업무 ①. 할라카(Halakha) 곧 유다인의 ‘일상 법’을 공표하는 일 ②. 대제사장의 임명 : 일반적으로 제사장은 성전 예절에 관한 것은 모두 집전할 수 있었지만 속죄제(욤 키푸르)만은 거행할 수 없었다. 속죄제를 드릴 수 있는 제사장을 대제사장이라 했던 것이다. 최초의 대제사장은 모세의 형 ‘아론’ 한 사람이었지만 솔로몬 시대에는 18명으로 늘어났고 예수님 시대의 대 제사장 등 합 77명이다.
5. 마지막 산헤드린
1). AD70년 : 기원전 63년부터 로마의 지배가 시작되자 산헤드린은 5개로 통합되었고 ‘예루살렘 산헤드린’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이들은 차츰 정치세력화 되어갔고 유다인의 모든 문제에 자문역할을 담당했다. 그러나 기원후 66년부터 시작된 ‘유다 독립전쟁’에서는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했고 전쟁이 끝나는 70년 이후 산헤드린은 공적으로 해산되어 역사에서 사라졌다.
2). 그 후 산헤드린은 다른 지방에서 소집 됨 : 야브네에서, 그 뒤에는 팔레스타인의 다른 지역에서 다시 소집되었다. 몇몇 학자들은 이것을 예루살렘의 의회법정 → 예시바 이 지속된 것이라고 평가한다. 주도적인 학자들로 구성된 후기 산헤드린은 “종교·입법·교육” 등을 담당하는 팔레스타인 유대인의 최고기관이었다. 또한 정치적인 면도 갖고 있었는데, 최고 지도자인 나지가 로마인에 의해 유대인 정치 지도자(족장 혹은 지배자)로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①. 기원 후 70년, 로마가 예루살렘을 멸망시킬 때 랍비 요한나 벤 자카이는 로마의 장군에게 부탁해서 유대 남쪽에 있는 작은 도시 얌니야를 전쟁으로부터 보존했다. 그리고 그곳에 학교를 세워 재판도 하고 학자들을 가르침으로 산헤드린을 다시 시작했다. 그 후 산헤드린공회는 팔레스타인 안에서 이곳저곳으로 옮겨 가며 존속한다. ③. AD 425년 이스라엘의 티베리우스에서 모였던 산헤드린 회의가 마지막 회의였다. 당시 공회장 힐렌2세가 주도했으며 이 산헤드린은 425년 족장제도가 끝남에 따라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6. 현재
1). 현대초기에 산헤드린을 다시 구성하려 함 이들의 시도는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 실패로 끝났다.
2). 2005년 새해에 들어와서 1월 20일자 이스라엘 INN.com 인터넷판 보도에 따라 “산헤드린의회 구성” “아마도 지난 1600년만에 처음으로 아주 독특한 의식이 오늘 티베리우스에서 거행되었다. 예루살렘이 AD 70년에 로마에 의하여 파괴되기 전 헤롯성전 방에서 모였던 산헤드린 종교회의는 71명의 공회원으로 구성되었으며 AD 425년까지 존재해 왔었다. 오늘 거행되었던 예식은 아직도 생생하다. 관계 당국자들은 특별 랍비훈련을 받은 71명의 랍비들로 구성된 산헤드린 공회 구성의 의도를 발표하였다” 산헤드린 대변인 랍비 챠임 리취만(Rabbi Chaim Richman)은 산헤드린이 성전 재건을 위한 지속적인 노력을 가하는 것이 시기적으로 적절하다는 사실을 밝혔다.
3). 2005년 가을 산헤드린(최고평의회 겸 최고재판소)을 개혁하여 이스라엘에서 매우 존경을 받고 있는 랍비 위원회가 지난 9일 예루살렘에서 거행되기로 계획되었던 ‘게이 프라이드 퍼레이드(Gay Pride Parade)’에 대해 성명을 발표했다. : 유대 지역사회의 거센 반발을 사면서도 ‘게이들의 긍지(Gay Pride)’를 보여주려 했던 이 행사에 대해 세 명의 산헤드린 위원들이 서명한 그 성명에는 주의 말씀을 경외하는 자들은 이 행사가 이뤄지는 것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며, 만일 허용한다면, 그들의 죄가 중하여 하늘의 보좌에 의해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명시되어 있었다. 또한 이스라엘 유대인들은 게이 프라이드 퍼레이드가 예루살렘에서 진행되는 것을 막기 위해 곳곳에서 시위를 벌였으며,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에서 그런 행사를 치르는 것은 가증스러운 일이라면서 만일 정부가 퍼레이드 진행을 허용한다면 폭력을 수반한 반대 시위운동을 대대적으로 벌일 것이라고 다짐했었다. “그러나 당초의 우려와는 달리 퍼레이드가 별다른 충돌 없이 끝나 예루살렘 경찰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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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