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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내가 하느님과의 여정을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하느님! 더 이상 견뎌낼 희망이 없습니다. 굴욕으로 점철된 삶이오니 차라리 저를 죽여주십시오. 나를 위로해 줄 이 아무도 없나이다. 나를 도와준 모든 이에게 씻을 수 없는 고통만을 안겼나이다. 용기가 없어 스스로 죽지도 못하오니 주님! 저를 용서하소서. 제발 저를 죽여주소서.” 1998년 12월 31일. 그동안 사 모아둔 수면제 80여 알. 한 손에 올려놓기에 너무 많아서 나는 세 번에 나누어 그것을 다 삼켰다.
하얗고 파란 구름이 뭉개 뭉개 피어올랐고, 멀리 노을도 보였다. 참 따뜻했음에도 나는 부들부들 떨었으며, 내 몸은 허공에 떠있는 것처럼 신비한 감미로움에 휩싸여 있었다. 처음에는... 그곳이 어디인지 몰라서 한참동안 몸을 웅크려야만 했다. 그러다가 문득 아연실색했다. ‘아 그렇지 내가 죽었지...’ 하지만 내가 스스로 나를 죽였음을 생각해 낸 후에도 나는 움직일 수 없었다. 한 발짝이라도 잘못 짚으면, 허공 어디로든 빠져버릴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그때 한 목소리가 들렸다. “루치오야, 루치오야! 네가 최선을 다해 세상을 살면 내가 널 도와줄 터인데 너는 최선을 다하지도 않고 나를 원망만 하느냐?”
‘나는 그렇게 그날... 하느님의 은혜와 용서로 한계선을 넘어 다시 깨어났고, 그때부터 그 이전과는 다른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었다. 나는 나의 남은 삶을, 나에게 새 삶을 주신 주님을 찬양하며 언제나 최선을 다해 살 것이다. 다시는 아내와 아이들을 버리지 않을 것이다.’
윗글은 수원교구설정 40주년을 기념하여 2003년에 발간된, 신앙체험수기문집 ‘풀씨를 만들어주신 하느님’에 실렸던 ‘새 삶을 주신 하느님’이란 제목의 글의 일부이다.
내가 스스로 나를 죽이고,,, 하느님을 체험하고 다시 깨어난... 1998년 12월로부터 어언 20여년의 시간이 지나갔다. 이제 내가 벌써, 이순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다. 참으로 치열했고 간절하고 절실했으나, 결국 찰라와 같은 시간이었다. 그날 이후... 나의 삶은 어떻게 변했을까?...
안타깝게도, 나의 삶은 그리 평화롭지 못했다. 하느님 보시기에, 내가 합당치 못한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나를 다시 깨어나게 하시고, 말씀하신 대로 수렁에서 건져주셨지만... 희망, 용기의 은총 외에도 슬픔과 고난이라는 보속도 함께 주신 것이다.
주님께서는, 당신께서 창조하신 온갖 피조물들... 바람과 구름, 생명을 가진 들꽃과 벌 나비들과, 계절의 조화를 통해서... 때론 사제와 수도자와, 친구 모습을 한 천사들을 통해 끊임없이 내게 말씀하셨다. ‘루치오야! 나는 네가 도움을 요청할 때마다 너에게로 가겠다. 나는 너에게 그침 없는 위로를 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슬픔과 고난 또한 항상 함께 한다는 것을 명심하여라.’ ‘네가 나에게 순명하며, 내가 선택해 준 그 길을 걸어갈 때마다 너는 항상 나의 음성을 알아들을 수 있을 것이다. 너는 나의 음성을 들을 때마다 순명해야 한다. 나의 위로에는 항상 슬픔과 고난이 함께함을 명심하고, 네가 감당하기 어렵더라도 내가 보낸 그들의 손을 뿌리치지 말거라. 그리하면 그들이 너를 이끌어 네가 가야 할 곳으로 너를 인도할 것이다.’
나는 교회의 가르침대로 살기 위해 노력했다. 어떻게 사는 것이 주님께서 말씀하신 ‘최선을 다하는 삶’인지 알 수는 없었으나, 나는 나름 열심히 일했고 기도했다. 작은 것이나마 사제의 말씀을 실천했고, 성경의 가르침대로 일상을 지키려 애썼다.
주님께서는 사제의 강론을 통하여, 성가를 통하여, 피정을 통하여, 혹은 교우형제자매들을 통하여 나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내 말을 듣지 않았으니 죽도록 피땀 흘리지 아니하면 먹지 못하리라.” “삶의 껍데기가 아닌 진실로 가치 있는 것만을 추구하며, 죽음이 시시각각 다가옴을 항상 인식하며 사는 참다운 삶을 살아야만 한다.”
신앙을 통해 그리스도의 가르침대로 산다는 것은... 매일 매일의 삶에서 주님께서 부여해주신 상황과 시련들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그분께서.. 우리와 함께 살게 하신 사람들이나 우리에게 일어나게 하신 일상에 대하여 우리의 뜻을 내려놓고 그분의 뜻을 온전하게 받아들이는 삶을 사는 것이다. 부당하여 이해되지 않는 일과 무의미하고 무가치한 고난일지라도, 그것은 주님께서! 자녀인 우리가 고난을 이겨내려는 노력과 과정을 통해 조금이나마 당신의 아름다운 성품을 닮게 하고 순명하도록 하는 은혜를 우리에게 허락하신 것이다.
하느님 자녀의 삶에는 이차적인 목적이 존재할 수 없다. 감히 대가를 바라는 기복신앙은 경망스러운 것이다. 모든 것에 순명하는 것, 슬픔과 고난에 익숙해져서 마침내 그것을 소중한 자신의 경험으로 변화시키는 것, 항상 기꺼이 그분의 뜻을 따르면서 그분을 새롭게 알고 그분과 흠 없이 일치되는 것. 이것이 그리스도인다운 참된 삶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나의 노력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비명도 신음도 지를 겨를이 없었던 어려운 시기가 지나가자 나는 다시 나태하고 교만해지기 시작했다. 가슴 벅찬 주님과의 동행도 시들해지고, 불꽃같았던 믿음도 사그라진 그 자리에는 나를 바라보고 그침 없이 지켜주시는 그분의 안타까움만이 남아있었다.
주님께서는! 나를 도와주시겠다는 약속을 저버리지 않으시고 끊임없이 내게 말씀하셨다. 한사코 중량감을 과시하다가 가장 남루하고 참혹하게 누더기가 되어버리는 목련꽃을 통하여... 절정에 도달하는 순간 마치 무너지듯이 문득 추락해버리는 동백꽃을 통하여...
그러나 조금의 성취감으로 우쭐해진 나는.. 욕심과 게으름의 유혹에 속절없이 무너져버렸고, 원망과 조급함만이 마음속에 가득해져서 내게 주신 주님의 은총을 기쁨으로 받아들이지 않기 시작했다. 슬픔을 외면하기 시작했고, 고난을 멀리하고 수치와 함께 할 수밖에 없는 쾌락을 가까이 하기 시작했다.
결국! 주님과 나와의 소통이던 묵상과 기도와 고해는 은혜로운 삶에 대한 넋두리로 변질되었고, 심지어 미사참례마저 바쁘다는 핑계 속에 파묻혀 점차 부재되고 소멸되었다.
세상은 나를, 주일날 성당에 나가 기도하고 봉사하며 한가롭게 평화의 인사나 나눌 수 있도록 가만 놔두지 않았다. 일을 핑계 삼은 많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나는 내 사업장이 커지는 속도보다도 훨씬 더 빠르게 세상적인 일에 몰두했다. 골프도 쳐야했고 당구도 쳐야했고, 애경사를 쫓아다녀야 할 일이 넘치고도 넘쳤다. 나는 너무 빨리 우쭐해졌다.
‘하느님께로부터 보살핌을 받는 나’라는 나의 밑도 끝도 없던 교만은, 결국 나로 하여금 그분 앞에서의 두 손 모음조차 까맣게 망각하게 했다. 주님께서 내게 해주셨던 그 말씀이, 있었는지 없었는지조차 생각하지 않고 사는 삶이... 일부러 외면하고 사는 삶이... 다시 시작되었다.
나는 결국 또 다시 쓰러졌고, 이번에는 이전보다 훨씬 더 고통스럽게 절뚝거렸다. 하느님의 보호막이 사라져버린 세상은 또 다시 나를 다 피우고난 담배꽁초처럼 길바닥에 내던져버렸고, 그나마도 침을 뱉고 발로 비벼 뭉그러뜨려버렸다.
30여 명이 넘는 직원과 연매출 400억 원을 달성했던 우리 회사는, 믿었던 영업부장의 횡령으로 순식간에 뿌리째 흔들렸다. 그로부터 비롯된 악성채권 7억 원은 심각한 타격이었다. 돈보다 더 무서운 것은 소문이었다. 우리 회사가 부도위기라는 엉뚱한 얘기가 나돌기 시작했다. 잘못된 소문의 결과는 무서웠다. 삽시간에 거래중단 통보가 속출했고 거래량은 급감했다.
필요할 때만 하느님을 찾는, 교만해진 나는... 아쉬움이 급하여, 또 다시 주님께 간구했다. ‘주님께서는 한쪽 문을 열어놓지 않고는 절대로 다른 쪽 문을 닫지 않으신다. 모든 길은 열려고 하면 열릴 것이다.’
하지만 나는 꿋꿋하게 버텨내는 것 외 다른 방도가 없었다. 주님께 두 손 모으고 기도드리는 것밖에 나를 도와 줄 희망의 끈은 어디에도 없었다. 나는 마치 도살장을 지척에 두고 겁에 질린 소처럼 오줌을 재리면서도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더 열심히 뛰고 달렸다.
그렇지만... 뇌성에 벽력으로, 성당에도 근거 없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교우들 중 몇 사람이 내 권유로 우리 회사에 투자를 했는데, 회사가 부도나는 바람에 큰 손실을 입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내가 일부러, 가망이 없는 줄 알면서도 그들을 속여서 투자하게 했다는 것이었다.
남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의 입을 통해, 나에 대한 소문은 점차 악의적으로 과장되었고 점점 더 거칠어졌다. 마침 성당 보수공사가 한창이었던 그 무렵... 성당에서 맡고 있던 직분 때문에 공사의 요모조모를 관여할 수밖에 없었던 나는, 나를 지칭하여 돈과 관련된 일에서는 일체 손을 떼게 해야 한다는 말을 듣게 되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참으로 견디기 힘든 괴로움이었다.
나는 결국 10여 년 동안 지속해왔던 성당의 봉사직분을 내려놓아야만 했다. 전례해설과 레지오마리애 등 일체의 제 단체 활동도 그만두었다. 나는 그렇게 나의 유일한 피난처였던 ㅇㅇ성당에서 떠나야했다. 내 영혼은 정처를 잃었고 내 가슴은 산산조각이 났다.
나는 서러웠지만 울지 않으려 이를 악물었다. 사실과 전혀 다른 소문 때문에 빚어진 일로 울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울면, 최선을 다해 살아온 내 인생이 너무 억울하다는 주님께 대한 푸념이 욕설처럼 쏟아질 것 같았다. 세상에 대한 분노를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나는 스스로의 힘으론 도저히 어찌해볼 수 없는 현실이 너무 버거워 숨을 쉬기조차 힘들었다. 나는 도망치고 싶었다. 숨고 싶었다. 그렇게라도 해야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용기를 내 다시 일어나자. 주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절대 실패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당신께 의지하여 언제나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다. 몇 번을 넘어지더라도 다시 일어나 시작하는 것이 진정 나다운 삶이다.’ 하지만 어디에도... 내가 숨을 곳은 없었다.
나는 결국, 무릎을 꿇었다. 나는 내가 짊어져야 할 십자가의 무게를 극복할 수 없었다. 결국 나는, 2014년 4월11일에 또 다시 나를 죽였다. 아니, 이번에는 내가 나를 죽인 것이 아니라, 내 삶을 움켜 쥔 대인공포증과 우울증이라는 병이 나를 죽였다. 돈에 시달리고, 사람에게 시달리는 싸움에 지친 나는... M&A를 빙자하여 기어이 뺏으려 작정하는 각다귀 모리배들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사냥에 성공한 독거미가, 먹이에 침을 꽂기 전에 포획물의 생명이 시들기를 기다리듯, 그들은 나의 영혼과 육신을 서서히 마비시켜 결국 빈털터리로 회사를 포기하게 만들었다.
건물의 옥상 구석에 넋을 잃고 주저앉은 나는, 하늘을 보았다. 어디엔가... 누군가... 행여, 살길을 가르쳐줄지 몰라 고개를 빙 둘러보았다. 안행을 이루고 먼 길을 떠나는 철새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나에게 어서 오라고 부르는 하늘의 손짓처럼 느껴졌다. 나는 무서웠다. 사는 것도 무섭지만 죽는 것 또한 더욱 무서웠다. 현실에 지쳐 또 다시 죽음을 선택했지만, 죽는다는 것은 또 다른 무서움이었다. ‘마지막 선택조차 두려움을 극복해내야만 실행에 옮길 수 있는 것이 인생이던가?’ 삶이란 죽는 순간까지도 극복해야 할 것투성이라는 마지막 깨달음을 ‘질겅’ 씹으며, 두 눈을 부릅뜨고 몸을 던질 15층 아래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이번에도 주님께서는, 나를 다시 일으키셨다! 참으로 지고지순하신 은총이었다. 다시 깨어났을 때 아내가 눈물 그렁한 눈빛으로 내게 얘기했다. “괜찮아,,. 괜찮아! 살 수 있어. 슬픔도 자라면 언젠간 꽃으로 필거야. 괜찮아!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을 얻을 수 있는 거야.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으로 살 수 있는 거야...”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고통스럽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고, 거울에 비쳐진 모습은 이미 나이 오십을 훌쩍 넘겨 머리가 허옇게 센 무지랭이였다. 나는, 내가 다시 걸어가야 할 앞날을 생각하며 숨을 헐떡거렸다. 절뚝거리며 먼 길을 걸어가야 할 나를 위해 피눈물로 기도했다. 하루하루 아무런 열망조차 느낄 수 없는 낮과, 단지 두려움과 외로움만이 밀려드는 밤이 계속되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어진 나는! 결국 인근 성당을 다시 찾아갔다. 또 다시 제대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 기둥으로 가려진 후미진 자리에 무릎을 꿇고 나는 또 흐느꼈다. 이 세상 그 어느 곳에도 의지할 곳을 찾지 못해 가슴이 텅 비어버린 울음이었다. “하느님! 나의 하느님! 제발 저를 도와주십시오. 이것이 정녕 헛된 꿈일지언정, 제가 꿈이라도 꾸지 않았다면 이때껏 연명이나마 할 수 있었겠습니까? 주여! 저를 불쌍히 여기시어 이 수렁에서 다시 일으켜주소서.”
억지로 여민 감정이 마치 파편에 찔린 것처럼... 잠재된 용암이 분출구를 찾은 양 설움이 솟구쳤다. 진정하려해도 아귀가 풀린 가슴의 떨림은 좀체 잦아들지 않았다. 눈시울이 뜨거워지더니 후둑 후둑 눈물이 떨어졌다.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입을 앙 다물었다. “오 주님! 저를 도와주소서. 저는 두려움에 휩싸여 감히 주님을 바라볼 수조차 없나이다.”
그때! 놀랍게도.. 음성이 또 들렸다. “왜 그러느냐? 루치오야! 힘을 내거라. 내가 여기에 있으니 두려워하지 말거라.” 뜻밖에도 그분의 음성은 책망의 기색이 전혀 없었으며, 울려나오는 위로의 파장은 나의 가슴을 속속들이 까뒤집어 흔드는 듯했다. “왜 교만이 너의 손을 잡도록 했느냐? 만일 네가 슬픔과 고난의 손을 잡고 있었더라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 순간 나는, 그간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요동치던 주님께 대한 반역의 의지를 남김없이 제단 위에 내려놓았다.
주님께서는 여전히 나를 용서해주셨고, 이번에도 또 같은 말씀을 주셨다. “루치오야 루치오야! 네가 최선을 다해 세상을 살면 내가 널 도와줄 터인데 너는 최선을 다하지도 않고 나를 원망만 하느냐?”
이제 나는! 내 삶의 여정을 늘 하느님과 함께 하고 있다. 여전히 고난은 쉼 없이 앞장서서 나를 인도하고 있고, 슬픔 또한 끈기 있게 나의 곁을 지키고 있다. 나는, 이후에도 여러 번 넘어지고 또 넘어졌다. 매번 넘어질 때마다 나는, 나를 믿고 의지하는 가족과 주변사람들에게 얼굴을 들 수 없었지만, 용기를 내어 다시 일어서서 걷다가 바로 또 다시 넘어지는 것을 피할 수는 없었다. 괴로운 시간이었고 안개는 걷히기는커녕 날마다 더 짙어지고 날씨마저 점점 더 매서워졌다.
모든 일은 시간이 지나면 해결된다는 말이 있다. 또 다시 내게 주어진 지난 시간동안... 나는 내 가슴 속의 상처를 다시 잡아 뜯고, 뼛속까지 울리도록 아픔을 되씹으며, 도대체 무엇이 잘못이었는지를 반추하고 반성하며, 잘못됐던 과거의 생각들을 서슴없이 버렸다.
그렇게 후벼 파낸 상처에 딱지가 않고, 산들거리는 봄바람과 가을의 낙엽이 서너 번쯤 지나가고 나자... 문득 내 가슴 안에 무엇인가가 훌쩍 커져 있는 걸 느꼈다. 겨울을 이겨내는 게 두려워도, 지나고 나면 시련은 늘 내게 자양분처럼 스며들어와 있었다. 한 해 한 해 겨울이 지난 후에는 언제나 내면에서부터 조금씩 더 자라 있었다.
돈을 버는 것은,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함이다. 돈 때문에 안절부절 못하는 서글픔에서 자유롭기 위해서다. 출세하고 싶은 것은, 자신이 쓸모없는 존재라고 생각하는 자굴심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다. 그리고 명예를 얻는다는 것은, 삶이 허무한 것임을 깨닫고 죽음 앞에서의 겸손함을 되찾는데 있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편안함을 추구한다. 또한 새로운 환경에 쉽게 적응하고 익숙해진다. 게다가 지나간 과거는 너무도 빨리 잊어버린다.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기에,,. 추구하고 익숙해지고 잊어버리는 과정을 반복하면서도, 도무지 만족할 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풍족해도 항상 부족하다고 또 때를 쓴다.
치열하고 간절하게 살아 온 나의 삶은... 한편으론 늘 외로웠고, 세상에는 수없이 많고 많은 일탈의 유혹이 있었다. 삶이 고단하고 세상이 더럽고 마음속에서 먼지가 날릴수록, 나를 향한 세상의 유혹은 더욱 더 집요하고 지독했다. 결국 지나고 나면 후회밖에 남지 않는 몽환임을 모르는바 아니었지만, 유혹들은 언제나 그럴듯한 가면을 쓰고 내게 다가와 나의 삶을 분탕질했다.
하지만 이제 나는, 중요한 것을 알고 있다. 어떠한 경우에도 멈추어 서서 불의와 타협하려 하거나.. 악한 제안에 귀 기울이거나.. 교만하거나 유혹에 빠지게 된다면... 종국에는 형언할 수 없이 고통스럽게 되고, 견딜 수 없는 슬픔을 겪게 되며,,, 결국 하느님으로부터의 용서는 기대할 수조차 없게 된다는 것이다.
주님께서 왜 우리에게... 연약함과 무기력의 인생길을 통과하게 하시는지... 왜 혼돈과 핍박 속에서 살게 하시며 슬픔과 고난을 주시는지... 그 뜻을 조금은 알게 되었다.
나는 이번에 소속 본당을 옮겼다. 그침 없으신 하느님의 은총으로 의왕시에 예쁜 새집을 마련했으므로 기쁜 마음으로 청계예수성심 성당으로 교적을 이동했다.
처음 미사에 참례하던 날! 본당의 대성전 입구를 지키시는 예수성심상을 마주하여 그분의 지그시 감은 눈을 바라보면서, 나는! 나의 모든 감각이 그분의 부르심에 응답하려는 열망으로 소용돌이 치고, 당장 고해하고 기도하고 싶은 충동으로 전율하는 것을 느꼈다.
그분은 아무런 약속도 없으셨지만, 나는 그분의 그윽한 미소가 이미 내 마음 깊은 곳을 속속들이 꿰뚫어 보고 있으며, 나보다 내 자신의 마음을 더 잘 알고 계신다는 것을 안다.
나는! 씻어야 할 지저분한 오물이 온 몸에 잔뜩 묻어있는 느낌을 지울 수 없어서, 죄인이 의탁하는 심정으로 두 손을 모았다. “사랑의 주님! 저의 삶은 순결하지 못했습니다. 저의 삶은 바람과 더불어 피고 지는 빈약한 갈대꽃이었습니다. 초라하기 그지없는 치욕에 물들어 있는 저를 부디 용서바랍니다.” “나의 아버지, 나의 주님! 하루를 살고 나면 온몸에 죄의 얼룩이 지고, 온통 죄의 냄새에 찌들어 사는 저에게도, 당신께서는 아침이면 깨워 주시고 눈물을 흘리면서라도 기도할 수 있도록 허락하셨으니, 저를 불쌍히 여기시어 같은 죄를 또 다시 반복하지 않게 하시고, 굳건한 신앙으로 유혹을 물리치고 참다운 인간으로 살게 하소서.” “주님! 부족하오나, 제가 당신 보기를 원합니다! 더욱 많은 빛을 바라볼 수 있도록 저를 도와주소서. 더 온전한 자녀일 수 있게 저를 용서하시고 보살펴주소서.”
주님은! 우리에게 새롭게 찾아오시는 것이 아니고, 우리에게서 떠나가시는 것도 아니었다. 그분은 늘 우리 곁에 머물러 계시는데 다만 우리가 그것을 외면하고 있을 뿐이었다. 우리네 삶이 아무리 왜곡되고 일그러지고 추해진다 할지라도, 우리가 우리의 이웃을 사랑과 용서로 대하고 주님의 뜻에 순명하면 우리는 다른 모습으로 변화될 수 있다.
내 삶이 꽃이 아니면 어떻겠는가? 꽃잎이 한두 장 찢겨 있으면 또 어떻겠는가? 원했던 무늬가 아니라하여 원했던 색깔이 아니라하여 버릴 수는 없는 것 아니겠는가? 이리 보아도 저리 보아도 그냥 그대로의 모습인, 평생을 바쳐 만든 나 자신인 것을... 비록 훌륭하지는 못하더라도 그 안에 나의 열정이 있었고, 순수하고 정직하고, 심지어 약간 덜떨어진, 그렇게 흔쾌히 빠져 허우적거렸던 솔직한 나의 모습인 것을...
‘물속에 사는 물고기들은 물의 존재를 모르고 산다. 때문에 그들에게 물이란 없는 것과 같지만 사실은 어디에나 있는 것이다. 또한 우리는, 우리가 사는 공간이 비어있다고 여겨 이를 허공이라 부르지만 텅 빈 것 같은 공간은 공기로 가득 차 있어 어디에도 빈 곳은 없는 것이다. 이처럼 물고기가 물을 떠나서야 비로소 자신이 물속에 살았었음을 알게 되고, 사람 또한 공기를 떠났을 때에야 자신이 공기 속에 살았었음을 알게 되는 것처럼, 하느님의 사랑이란 그런 것이다.’
주님께서 가르쳐주시는 진리는 성경이나 사제의 강론만을 통해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분별력을 갖고 인격적으로 성장해야만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회개하고 고해하고 보속 받는 것은, 가장 추악하고 끔찍한 세상이라는 아수라장에서 회개와 보속을 통해 희망과 구원의 새 삶이 열리는 하느님의 은총을 경험하는 것이다.
생각해보니... 나 자신을 포함한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사랑을 절실히 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동정과 보살핌만을 받고 싶어 하는 것은 아닌지 문득 되돌아본다.
아직도 한없이 부족하오나! 이 글을 쓰는 동안, 제 삶의 상실된 것에 대한 슬픔과 저 자신의 한계를 반추해볼 수 있는 시간을 허락하신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이 글을 읽어주신 우리 모두의 삶에, 어서 어서 봄이 와서... 겨우내 얼어붙었던 마른가지로 몸속의 환희와 찬양을 노래하듯 꽃을 품어내는 홍매화와 복사꽃처럼... 빛의 그림자속에 오글오글 모여 있다가 마치 꿈을 꾸듯 산야로 번지는 산수유처럼... 우리가 우리의 신앙공동체 안에서 늘 밝고 평화롭기를 기도드립니다. 아멘!
첫댓글 루치오 총무님!
일찍히 파란 만장한 세월을 보내셨군요
이 모든 것을 신앙의 힘이 아니면 어떻게 견디었겠습니까?
체험수기 공모등을 보면 글쓰기에도 많은 재주가 있으신것
같습니다.
앞으로도 좋은글 부탁드리며,
감사합니다
배려와 응원의 마음이 담긴 댓글에 감사드립니다.
우리 본당 블로그가 더욱 더 활성화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무색함을 무릅쓰고 취미삼아 가끔 쓰는 글을 올려보았습니다. 어서 빨리 미사가 재개되어 본당에서 모두 함께 뵙기를 기도드립니다.
곱씹어 읽지는 못하였지만, 무척이나 큰 파도가 지나간 느낌이라 할까요? 먹먹하네요... 주님께서 루치오총무님을 더 사랑하시나 봅니다.^^ 찬미예수님 감사합니다.
마음속에서 꺼내기 쉽지 않은 실타래를 한올 한올.... 때로는 거칠게.. 때로는 너무 여리게 하늘 높이
풀어가는 고해는? 마치도 예수님께서 피투성이 되어 골고타로 향하는 모습에 루치오 형제님이
그 십자가를 함께 지고가는 느낌입니다....
감사드리며~ 성주간 잘 보내시고요^^ 주님 은총이 늘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성하의 아름다운 메시지를 전해드립니다.
강은 자신의 물을 마시지 않고, 나무는 자신의 열매를 먹지 않으며...
태양은 스스로를 비추지 않고, 꽃은 자신을 위해 향기를 퍼트리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는 서로를 돕기위해 태어났습니다.
인생은 당신이 행복할 때 좋습니다.
그러나 더 좋은 것은 당신 때문에 다른 사람이 행복할 때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