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설 『태고의 시간들』
이 소설에서 태고는 ‘오랜 옛날’을 의미하는 太古가 아니다. 여기서 태고는 시간과 공간이 중첩되는 공간, 시공을 초월한 개념으로 상징적인 단어다. 태고에 대하여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태고는 우주의 중심에 놓인 작은 마을이다. 남에서 북까지 빠른 걸음으로 가로지르면 대략 한 시간쯤 걸린다. 동에서 서까지도 마찬가지다. 누군가 느린 걸음으로 주변을 찬찬히 둘러보면서 사색에 잠긴 채 태고를 한 바퀴 돈다면 아침부터 저녁까지 꼬박 하루가 걸릴 것이다.”
소설은 우리나라와 같이 오랫동안 외세의 침략을 받아왔지만 거리에는 문학가, 예술가들의 동상이 즐비한 폴란드에서 가장 두꺼운 독자층을 확보하고 있는 ‘올가 토카르추크’라는 여류작가의 소설이다. 그는 2018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고, 같은 해 우리나라 한강이〈채식주의자〉로 수상한 바 있는 맨부커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녀는 바르샤바 대학에서 심리학을 공부했고, 인류학과 철학, 특히 불교철학에 관심이 많다고 한다.
“창공처럼 무겁고 무한한 연민의 서사(敍事), 인류 보편적 가치의 보고(寶庫),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올가 토카르추크〉의 대표작”으로 소개 한 소설에 대해서 “경계를 가로지르는 삶의 한 형태를 충만한 열정으로 그려낸 서사적 상상력은 인간의 이해를 넘어서는 최고의 소설적 능력을 보여주었다.” - 노벨문학상 수상이유 -
“올가 토카르추크는 말과 꿈의 화가다. 독자들에게 신 이야기, 인물의 영혼의 층위를 질문/발견하라고 도전한다.” - 뉴페이지스 -
“태고는 우주의 중심이며, 인간과 동식물이 어우러지는 살아있는 유기체로 생성과 소멸의 과정 안에서 지속과 번영을 되풀이 한다. 태고의 이야기는 인류의 이야기다.” - 마리아 엔티스(문학평론가)
이렇듯 찬사가 이어지는 소설은 인류보편의 가치를 이야기하고 있다. 소설의 본문을 옮겨 보는 것으로 독후감을 대신할까 한다.
“배움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밖에서 배우는 것과 안에서 배우는 것. 흔히 사람들은 전자를 최선, 나아가 유일한 방법으로 여긴다. 그렇기에 장거리 여행, 혹은 보고 읽는 것을 통해서 아니면 대학 교육이나 수업을 통해서 배움을 얻는다. 존재 바깥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통해 뭔가를 습득하는 것이다. 인간은 어리석은 존재이기에 배워야만 한다. 그렇기에 꿀벌처럼 부지런히 지식을 모아서 그것을 자신에게 덧붙여나가고 그렇게 지식이 쌓이면 그것을 활용하거나 가공하기도 한다. 그러나 내면에 도사린 ‘어리석음’, 다시 말해 학습을 필요로 하는 본성은 바뀌지 않는다.
쌓이기만 하는 지식은 인간에게 아무런 변화를 가져다주지 못하거나 단지 변화를 일으키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그저 겉옷을 다른 옷으로 갈아입는 것과 마찬가지다. 하지만 지식을 자기 것으로 만들며 배우는 사람은 끝없는 변화를 체험하게 된다. 배워서 알게 된 것들이 존재 속으로 고스란히 스며들기 때문이다.”(18쪽)
“사람들은 광기란 어떤 대단하고 극적인 시간이나 감당할 수 없는 고통 때문에 발생한다고 믿는다. 가령 살인을 당했다든지, 가강 가까운 사람이 죽었다든지, 아니면 신의 얼굴을 보았다든지 하는 구체적인 원인으로 인해 당사자가 미쳐가는 것이라 여긴다. 느닷없이 단번에, 어떤 특정한 이유로 인해 광기가 엄습하여 마치 올가미처럼 이성에 족쇄를 채우고 감정을 뒤흔들어 놓는다고 생각한다.
반면에 폴로렌티카(태고에 사는 여자) 별다른 이유도 없이 광기에 사로잡혔고, 이유 없이 미쳐버렸다. 한때 그녀에게도 광기의 원인이 될 만한 일들이 있었다. 술 취한 남편이 백강에서 익사했을 때, 아홉 자녀 중 일곱을 잃었을 때, 유산에 유산을 거듭했을 때, 유산하지 않은 아이를 지웠을 때, 두 번은 유산의 위험으로부터 가까스로 아이를 지켰을 때, 헛간이 모조리 불탔을 때, 그녀에게 남은 두 아이가 그녀를 버리고 세상 어딘가로 사라졌을 때 말이다.”(64쪽)
“그리고 나서 발과 무릎, 사타구니를 내려다보았다. 이것들도 모랫길이나 들판, 정원처럼 먼 곳에 있고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몸은 인간이라는 연약한 재료로 만들어진 부서진 조각상 같았다.
아직도 손가락이 움직이고 벌써 몇 달째 꿈적도 안 하는 창백한 손의 끝마디에 여전히 감각이 남아있다는 것이 이상했다. 그녀는 양손을 무감각한 무릎 위에 올려놓고 치맛자락을 서투르게 만지작거렸다.
...
누군가를 죽인다는 건 움직일 수 없는 권리를 빼앗는다는 뜻이다. 삶이란 결국 움직임이니까. 죽임을 당한 몸은 움직이지 않는다. 인간은 몸이다. 그리고 인간이 경험하는 모든 것들의 시작과 끝은 몸 안에 있다.”(212쪽)
한국외국어대 폴란드어과를 졸업하고 폴란드 바르샤바 대학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은 역자 최성은은 ‘옮긴이의 말’에서 올가 토카르추크의 작품에 대해 “토카르추크의 작품에서는 여성이 화자로 등장하거나 여성이 중심인물이 되어 서사의 축을 담당하는 경우가 빈번하다. 특히 탄생부터 성장, 출산, 노화, 죽음에 이르기까지 여성의 삶, 여정을 자연스럽게 그려내고 ‘여성으로서 존재한다는 것’의 의미를 발견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는 점에서 포스트 페미니즘(여성의 지위신장)적 성향도 엿볼 수 있다.”고 했다.
토카르추크는 2006년 ‘한국문학번역원’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폴란드의 한 잡지와 인터뷰에서 한국에 대한 애정을 나타냈다. “내가 지금까지 본 색깔 중에 가장 아름다운 것은 한국 스님들이 입는 승복의 회색빛이다. 그것은 염료를 푼 물에 캔버스 천을 담가서 만들어진다. 서울이나 홍콩에서 여성들의 옷차림을 본 순간 나는 너무나 아름다워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유럽, 특히 중부유럽 여자들이 즐겨 입는 스타일과는 근본적으로 너무나 달랐기 때문이다. 그곳에서는 유럽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선정적인 방식으로 여성성을 강조하려 애쓰는 경향을 찾기가 힘들었다.”
《태고의 시간들》이 소설의 줄거리는 ‘소설은 허구와 현실이 중첩되어 있다. 러시아, 프로이센(독일), 오스트리아로부터 점령당했던 삼국분할기(1795∼1918)로부터 1차 세계대전(1914∼1918)과 2차 세계대전(1939∼1945)중의 유대인 학살, 전후 폴란드 국경선의 변동, 사유재산의 국유화, 냉전체제와 사회주의 시대(1949∼1989)그리고 자유노조를 중심으로 한 민주화운동과 체제전환(1989)에 이르기까지 20세기 폴란드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역사적 사건들이 이야기의 배경이며, 태고마을 주민들은 이러한 사건들의 목격자 또는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등장인물 중 한 명인 게노베파는 2차 세계대전 중에 이웃에 살던 유대인들이 독일군에게 끌려가 무참히 학살당하는 장면을 목격하고, 남편 미하우는 유대인 가족을 지하실에 숨겨주기도 하지만 결국 그들이 다른 도시로 탈출을 시도하다 죽음을 맞았다는 비보를 듣는다. 아들인 이지도르는 사회주의 시대에 ‘편지’라는 매체에 매혹되어 독일, 스위스, 벨기에 등의 여행사와 자동차 회사로부터 광고 카탈로그를 배송 받는 법을 터득하지만 이로 인해 정부당국으로부터 서방 세계와 내통하는 스파이로 의심받게 되고, 밀실로 끌려가 고초를 겪는다. 이처럼 폴란드 역사의 실제 사건들이 허구 속에 촘촘히 배치됨으로써 ‘태고’라는 가상의 장소는 사실적 개연성을 나타낸다.
《태고의 시간들》에서는 역사와 개인의 이야기가 대립하고 동시에 공존하고 있다. 토카르추크는 미시(微示-넌지시 비치기만 함)서사(敍事-사건이나 상황을 연쇄적으로 적음)기법을 활용하여 거대 서사를 축소하는 방식으로 역사 속에 스러져간 익명의 존재, 역사의 뒤편에서 소수자로 취급받을 수밖에 없었던 개인의 의미를 환기시키고 있다. 다양한 역사적 사건들이 등장하지만 정작 토카르추크가 강조하는 것은 역사에는 기록되지 않은 혹은 기록될 수 없었던 이야기들인 것이다.
신화에서 역사가 태동하고 역사가 다시 신화를 지어내면서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가 와해되고 그렇게 우리네 삶도 언젠가는 결국 신화가 된다는 것, 그리하여 신화가 또다시 현실로 탈바꿈하는 가운데 인류의 보편적 이야기는 바로 이 순간에도 끊임없이 탄생되고 변주되고 지속되고 있다는 깨달음 … 바로 《태고의 시간들》이 우리에게 주는 선물이다.(옮긴이)
태고의 시간들-서평.hwp
폴란드의 역사.hw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