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희-2】
최승희는 1911년 11월 24일 경성 종로구 수창동(현재 종로구 내수동)에서 2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당시 조선의 양반 가문이었던 탓에 어린 시절의 최승희는 궁색함이 없이 풍요로운 생활을 누렸다.
그러나 최승희가 숙명여고보에 입학할 즈음 가세가 급격히 기울면서 그녀의 미래도 불투명해졌다.
가계가 빈곤해지자 큰 오빠 최승일은 돈이 적게 드는 사범학교 진학을 추천했다.
1926년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 졸업생 중 8등으로 졸업한 최승희는 100명 정원의 경성사범학교의 입학시험을 치렀다.
총 800명의 지원자 중 7등이라는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했으나 입학 연령에 한 살이 미달한다는 이유로 불합격 통보를 받았다.
우울해하고 있는 최승희에게 최승일은 당시 세계적인 일본의 현대무용가였던 이시이 바쿠의 무용 관람을 주선하면서 일본으로 건너가 현대 무용을 배워볼 것을 권유했다.
오빠 최승일은 1922년 최초의 프롤레타리아 문학단체인 ‘염군사’에 가입하여 계급문학에 가입한 문사였다.
1925년에는 조선프롤레타리아 예술동맹인 ‘카프’ 조직에 참여했고 이후 경성방송국에 근무하면서 당시 문화계의 유명인사가 되었다.
훗날 최승희에게 안막을 소개해준 이도 최승일이었으며, 당대 연극 영화계의 유명 배우였던 석금성은 최승일의 부인이었다.
당시 조선에서 무용이라는 것은 기생들이나 하는 천박한 것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무용을 배운다는 것, 그것도 일본까지 가서 무용을 배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최승일은 주저하는 최승희를 독려했다.
1926년 3월 경성공회당에서 개최된 이시이 바쿠의 공연을 관람한 최승희는 그의 무용에 매료되었다.
이시이 바쿠는 1911년부터 본격적인 무용수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35세의 나이에 유럽으로 건너가 서구 현대무용의 신조류를 공부하고 돌아온 그는 일본 현대무용의 개척자로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1920년대 중반 이시이는 유럽의 표현주의, 구성주의, 다다이즘과 같은 신조류에 영향을 받은 무용으로 활발한 발표회를 추진하고 있었다.
만주 공연을 마친 뒤 조선을 경유하여 일본을 돌아갈 예정에 있던 이시이 바쿠는 1926년 3월 21일부터 23일까지 경성에서 공연을 가졌다.
이 기회를 틈타 최승일은 최승희를 이시이 바쿠에게 보내려고 했지만 부모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힐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최승일은 이시아 바쿠와 접촉하고 부모의 승낙을 얻어내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이렇게 최승희의 운명이 결정되는 데까지 걸린 시간은 나흘이었다.
1926년 3월 25일 최승희는 이시이 바쿠와 함께 도쿄로 떠나기로 결정했다.
최승일은 최승희의 무용 수학 연한 2년, 의무 연한 1년의 계약을 이시이 바쿠와 맺었다.
최승희가 무용 공부를 위해 일본으로 떠난다는 사실에 불안감을 떨칠 수 없었던 숙명여고보 선생님들과 어머니가 이를 만류하기 위해 급히 경성역에 도착했지만 기차는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이날의 해프닝을 기록한 당시의 신문기사에는 앞으로 펼쳐질 새로운 인생에 대한 최승희의 설렘과 가족의 불안감, 세간의 기대가 잘 묘사되어 있다.
글의 출처
제국의 아이돌
이혜진 지음, 책과 함께 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