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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없는 증오
붕괴된 성전의 잔해 위에서: ‘이유 없는 증오’(שִׂנְאַת חִנָּם)를 넘어
고대 유대의 성전 파괴, 특히 기원후 70년 로마에 의해 제 2성전이 무너진 사건은 유대 역사에서 가장 깊은 상흔으로 남아 있습니다. 탈무드(요마 9b)는 이 비극의 결정적인 원인으로 ‘시나트 히남(שִׂנְאַת חִנָּם, Sinat Chinam, 이유 없는 증오)’을 지목합니다.
무너진 벽 앞에 서서 – 역사의 거울을 마주하다
지금으로부터 약 2천 년 전, 예루살렘의 심장이자 하늘과 땅이 만나던 거룩한 장소인 제 2성전이 로마의 짓밟힘 속에 불타 없어졌습니다.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고 무너져 내린 그날, 유대인들은 나라를 잃었고, 수백 년 동안 전 세계로 흩어지는 디아스포라의 유랑 길에 올라야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매년 티샤 베아브(Tisha B'Av, 아브월 9일)가 되면 금식하며 바닥에 앉아 예레미야 애가를 읊조립니다. 그리고 통곡의 벽, 그 거대하고 차가운 돌벽 앞에 서서 묻습니다. "전능하신 분의 임재가 머물던 그 거룩한 성전이 어찌하여 이토록 처참하게 파괴되어야 했는가?"
역사학자들은 로마 제국의 압도적인 군사력과 유대의 지정학적 한계를 말합니다. 제국의 황제와 장군들의 야욕이 원인이었다고 분석합니다. 그러나 유대의 현자들, 탈무드의 랍비들은 전혀 다른 진단을 내렸습니다. 그들은 외세의 칼날을 탓하기 전에, 우리 내부의 영혼을 들여다보았습니다.
탈무드 요마(Yoma) 9b는 우리에게 지워지지 않는 서늘한 문장을 던집니다.
"제 1성전이 파괴된 것은 우상숭배와 음란함, 그리고 유혈 사태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토라를 공부했고, 계명을 지켰으며, 자선(쩨다카)을 행했던 제 2성전 시대에는 왜 성전이 파괴되었는가? 그것은 바로 그들 사이에 시나트 히남(שִׂנְאַת חִנָּם, Sinat Chinam)', 즉 '이유 없는 증오'가 가득했기 때문이다."
얼마나 충격적인 선언입니까? 겉으로는 하나님을 섬기고, 율법을 철저히 지키며, 종교적인 의무를 다했던 이들이었습니다. 도덕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였던 그 사회가, 단 하나, '서로를 향한 증오' 때문에 뿌리째 흔들리고 결국 신의 심판을 받아 무너졌다는 것입니다.
오늘 날 이 '이유 없는 증오'의 본질이 무엇인지, 그리고 위대한 랍비들을 비롯한 우리 시대의 영적 스승들이 이 고대의 비극을 통해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경고와 해법을 던지고 있는지를 깊이 나누고자 합니다.
캄차와 바르 캄차 – 사소한 모욕이 부른 파멸
랍비들은 이 '이유 없는 증오'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님을 보여주기 위해, 탈무드 기틴(Gittin) 55b에 나오는 한 편의 비극적인 이야기를 전합니다. 바로 '캄차(Kamza)와 바르 캄차(Bar Kamza)'의 이야기입니다.
예루살렘의 한 부유한 사람이 연회를 열기로 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절친한 친구인 '캄차'를 초대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하인의 실수로 이름이 비슷한, 주인이 가장 혐오하던 원수인 '바르 캄차'에게 초대장이 전달되었습니다.
바르 캄차는 의아해하며 연회장에 도착했습니다. '아, 이 사람이 드디어 나와 화해하고 손을 내밀려는 모양이구나.' 기쁜 마음으로 자리에 앉은 그를 발견한 주인은 분노로 얼굴이 굳어졌습니다. 주인은 차갑게 말했습니다. "당장 내 집에서 나가라."
바르 캄차는 당황하여 간청했습니다. "제발 부탁입니다. 이미 온 손님들이 저를 보고 있으니, 창피를 당하지 않게 여기 머물게 해 주십시오. 제가 먹은 음식 값은 모두 지불하겠습니다." 주인은 거절했습니다. 바르 캄차는 다시 애원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연회 비용의 절반을 내겠습니다." 주인은 여전히 단호했습니다. "마지막입니다. 이 연회 전체 비용을 제가 다 낼 테니, 제발 나를 쫓아내어 모욕 주지 마십시오."
그러나 화가 난 주인은 바르 캄차의 덜미를 잡고 수많은 현자와 귀빈들이 보는 앞에서 그를 길거리로 내던져 버렸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가장 끔찍한 부분은 주인의 잔인함만이 아닙니다. 그 연회장에는 당대 최고의 랍비들과 지도자들이 앉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누구도 개입하지 않았습니다. 그 누구도 "멈추시오! 아무리 원수라 할지라도 인간에게 이런 모욕을 주어서는 안 되오"라고 말하며 바르 캄차의 손을 잡아주지 않았습니다. 지도자들의 침묵은 주인의 행동을 묵인한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길바닥에 버려진 바르 캄차는 깊은 수치심과 분노에 휩싸였습니다. '랍비들이 거기 앉아서 보고만 있었다니! 그들도 이 모욕에 동조한 것이다.' 복수심에 불탄 그는 로마 황제에게 가서 유대인들이 반역을 꾀하고 있다고 거짓 밀고를 했습니다. 그리고 이 사소한 오해와 모욕, 그리고 공동체의 침묵이 굴러온 굴려진 눈덩이가 되어, 결국 로마 군대가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성전을 불태우는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랍비 조나단 삭스는 이 대목에서 준엄하게 지적합니다.
"성전은 로마인의 군사력에 의해 무너진 것이 아닙니다. 성전은 내부에서 먼저 무너졌습니다. 한 인간의 존엄성을 짓밟고도 아무런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했던 공동체, 나와 다른 타인을 원수로 규정하고 배척했던 그 냉혹함이 예루살렘의 벽을 허물어뜨린 진짜 무기였습니다."
랍비 조나단 삭스의 통찰 – 차이의 존엄성과 도덕적 실명
랍비 조나단 삭스는 그의 명저들과 강연을 통해 '이유 없는 증오'의 본질을 현대 사회학적, 철학적 관점에서 깊이 분석했습니다. 그는 증오가 결코 '이유 없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역설합니다. 증오하는 자들에게는 언제나 명백하고 정당한 '이유'가 있습니다.
제 2성전 시대의 유대 사회는 극도로 분열되어 있었습니다. 바리새파, 사두개파, 에세네파, 그리고 로마에 맞서 무력 항쟁을 주장하던 열혈파(Zealots)까지. 각 파벌은 자신들만이 진정으로 토라를 이해하고 있으며, 자신들만이 하나님의 뜻을 대변한다고 믿었습니다.
랍비 삭스는 이를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을 '오류를 범한 형제'가 아니라 '처단해야 할 원수'로 바라보는 태도"라고 정의했습니다.
그들은 왜 증오했습니까? 자신들의 의로움을 증명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내가 저 사람을 증오하는 이유는 저 사람이 율법을 어겼기 때문이고, 저 사람이 민족을 배신했기 때문이며, 저 사람의 사상이 위험하기 때문이라는 '종교적·정치적 명분'이 차고 넘쳤습니다.
랍비 삭스는 이것이 바로 사탄의 가장 강력한 유혹이라고 말합니다.
"인간은 스스로 악을 행한다고 믿을 때보다, '신의 이름으로' 혹은 '대의명분을 위해' 정의를 실현한다고 믿을 때 가장 잔인해질 수 있습니다."
각자가 자신의 정의에 눈이 멀어 타인의 아픔을 보지 못하는 상태, 랍비 삭스는 이를 '도덕적 실명(Moral Blindness)'이라고 불렀습니다. 제 2성전 말기의 예루살렘은 종교적 열정으로 가득 찼으나, 도덕적 실명에 걸린 상태였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향해 손가락질하며 "너 때문에 이 나라가 망한다"고 외치는 동안, 정작 공동체를 묶어주던 연대의 끈은 완전히 썩어 없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랍비 삭스는 평생 동안 '차이의 존엄성(The Dignity of Difference)'을 부르짖었습니다. 인류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지만, 모두가 다르게 창조되었습니다. 랍비 삭스는 "하나님은 복사본을 만들지 않으신다. 모두가 유일무이한 원본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따라서 나와 다른 타인의 존재는 내 존재를 위협하는 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무한한 창조성을 보여주는 신비입니다.
그러나 '시나트 히남(שִׂנְאַת חִנָּם)'에 사로잡힌 이들은 차이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나와 다르면 틀린 것이고, 틀린 것은 멸절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이러한 이분법적 사고가 거룩한 도시 예루살렘을 지옥으로 만들었습니다.
랍비 쿡과 영적 스승들의 경고 – 자아도취적 의로움의 함정
근대 유대교의 위대한 신비주의자이자 이스라엘의 첫 번째 수석 랍비였던 아브라함 이쯔학 쿡(Rabbi Abraham Isaac Kook) 역시 이 문제를 깊이 파고들었습니다. 랍비 쿡은 '이유 없는 증오'가 대개 '자아도취적 의로움(Self-righteousness)'에서 비롯된다고 보았습니다.
그는 종교적으로 가장 열성적인 사람들이 가장 쉽게 이 함정에 빠진다고 경고했습니다. 자신이 신의 뜻을 완벽하게 수행하고 있다고 믿는 순간, 인간은 영적 교만에 빠집니다. 그리고 그 교만은 필연적으로 자신과 다른 방식으로 신을 섬기거나, 세속적인 삶을 사는 이들을 향한 경멸로 이어집니다.
랍비 쿡은 제 2성전의 붕괴를 보며 이렇게 탄식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했지만,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을 사랑하지 않았다. 그들은 성전의 양식을 지키는 데는 엄격했으나, 인간 영혼의 성전을 돌보는 데는 소홀했다."
또 다른 위대한 스승, 랍비 요나단 아이베쉬츠(Rabbi Jonathan Eybeschutz)는 증오가 영혼에 미치는 파괴력을 질병에 비유했습니다. 육체의 병은 약으로 고칠 수 있지만, 마음의 병인 증오는 영혼의 눈을 가려 자신이 아프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게 만듭니다. 증오하는 사람은 자신이 의로운 분노를 표출하고 있다고 착각하기 때문에, 회개(테슈바)할 기회조차 얻지 못합니다. 이것이 바로 증오가 가진 가장 무서운 파괴력입니다.
하바드(Chabad) 루바비치 운동의 정신적 지주였던 메나헴 멘델 슈네어손(Rabbi Menachem Mendel Schneerson) 랍비는 '이유 없는 증오'가 공동체의 연대감을 어떻게 파괴하는지 지적했습니다. 유대 사상에서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의 몸과 같습니다. 오른손이 실수를 해서 왼손을 때렸다고 해서, 왼손이 오른손을 향해 보복을 하거나 증오하지 않습니다. 결국 같은 하나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시나트 히남(שִׂנְאַת חִנָּם)'은 우리가 연결되어 있다는 이 근원적인 감각을 마비시킵니다. 내 형제의 고통이 나의 고통이 되지 않고, 내 이웃의 파멸이 나의 승리처럼 느껴지는 순간, 공동체라는 유기체는 뇌사 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로마 군대가 성벽을 뚫기 전에, 이미 예루살렘 주민들의 마음속에서는 서로를 향한 성벽이 겹겹이 쌓여 있었던 것입니다.
현대 사회의 거울 – 알고리즘과 확증 편향의 시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2천 년 전 예루살렘의 이야기를 단지 박물관에 박제된 고대 유대인들의 실패담으로만 치부할 수 있을까요?
랍비 조나단 삭스는 생전에 현대 사회를 바라보며 깊은 우려를 표명했습니다. 그는 우리가 고대 예루살렘의 '이유 없는 증오'가 그 어느 때보다 광범위하고 정교하게 재현되는 시대를 살고 있다고 경고했습니다.
오늘날의 인터넷과 소셜 미디어(SNS)를 보십시오. 스마트폰 속의 알고리즘은 우리가 보고 싶어 하는 것, 우리의 편견을 강화하는 뉴스만을 지속적으로 공급합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에코 챔버(Echo Chamber, 반향실)'에 갇히게 됩니다.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만 증폭되어 들리고, 나와 다른 생각을 하는 이들의 목소리는 차단되거나 왜곡되어 들어옵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정치가 양극화되고, 세대 간, 성별 간, 계층 간의 갈등이 극에 달하고 있습니다. 상대방을 나와 대화하고 타협해야 할 '시민 사회의 동반자'로 보지 않고, 우리 사회에서 멸절시켜야 할 '바르 캄차'처럼 대하고 있습니다.
온라인 공간은 매일 밤낮으로 '이유 없는 증오'의 언어적 학살이 일어나는 연회장이 되었습니다. 익명의 그늘에 숨어 타인에게 모욕을 주고, 그 모욕을 보며 대중은 침묵하거나 동조합니다. 2천 년 전 예루살렘의 연회장에서 랍비들이 침묵했던 그 비극이, 오늘날 우리의 모니터 화면 위에서 매초마다 반복되고 있는 것입니다.
랍비 삭스는 현대인들이 확증 편향에 사로잡혀 "타인을 악마화함으로써 자신의 도덕적 우월감을 소비하고 있다"라고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내 삶의 불만과 불안을 외부에 있는 특정 집단에게 투사하여 그들을 증오할 때, 우리는 기묘한 카타르시스와 의로움을 느낍니다. "저들이 나쁘기 때문에 내가 정의롭다"는 이 값싼 방정식이야말로 현대판 '시나트 히남(שִׂנְאַת חִנָּם)'의 실체입니다.
우리가 쌓아 올린 지식의 탑, 우리가 이룩한 경제적 번영, 우리가 자랑하는 민주주의의 시스템이 아무리 견고해 보일지라도, 공동체 내부에 증오의 바이러스가 퍼지면 제 2성전처럼 한순간에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릴 수 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해법은 무엇인가? – '이유 없는 사랑(אהבת חינם, Ahavat Chinam)'의 회복
그렇다면 이 파멸의 굴레를 어떻게 끊어낼 수 있겠습니까? 무너진 성전을 다시 세우고, 분열된 사회를 치유할 수 있는 유일한 열쇠는 무엇입니까?
랍비 아브라함 이쯔학 쿡은 절망의 심연에서 인류를 구원할 위대한 영적 처방전을 우리에게 남겼습니다.
"제 2성전이 '이유 없는 증오(שִׂנְאַת חִנָּם, 시나트 히남)'로 인해 파괴되었다면, 성전과 세계가 다시 재건되는 것은 오직 단 한 가지, '이유 없는 사랑(아하밧 히남, אהבת חינם)'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이유 없는 사랑'이란 무엇입니까? 상대방이 나에게 잘해주었기 때문에, 상대방이 나와 의견이 같기 때문에, 상대방이 내 편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런 조건 없이, 상대방이 나와 다른 생각을 가졌고, 심지어 나에게 적대감을 보일지라도, 그가 가진 '인간으로서의 존엄성'과 '하나님의 형상' 그 자체를 인정하고 품어주는 사랑입니다.
랍비 조나단 삭스는 이 '이유 없는 사랑(אהבת חינם)'을 실천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으로 '경청(Listening)'의 태도를 제시했습니다. 히브리어로 '들으라'는 뜻의 '쉐마(Shema)'는 단순히 소리를 듣는 것을 넘어, '상대방의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이해하며 응답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랍비 삭스는 말했습니다.
"위대한 공동체는 모두가 같은 목소리로 노래하는 곳이 아니다. 위대한 공동체는 서로 다른 목소리들이 모여 아름다운 하모니를 만들어내는 곳이다."
우리는 나와 다른 목소리를 억압하려 하지 말고, 그 목소리가 왜 나오게 되었는지 그 배경과 아픔을 들어야 합니다. 대화를 시작해야 합니다. 내 주장을 관철하기 위한 대화가 아니라, 내 주장이 틀릴 수도 있음을 인정하는 겸손의 대화, 타인의 존재를 용납하는 대화를 시작해야 합니다.
현자들의 전승에 따르면, 미래에 메시아가 오셔서 지으실 제 3성전은 돌과 나무로 지어지는 물리적인 건물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과 인간 사이에 흐르는 사랑과 연대로 지어지는 '영적인 성전'입니다. 우리가 이웃을 향해 마음을 열고, 상처받은 이들의 눈물을 닦아주며, 적에게 화해의 손길을 내밀 때, 우리는 매 순간 우리 삶 가운데 성전을 재건하고 있는 것입니다.
행동하는 의로움
성전이 파괴되던 날, 유대의 랍비 조난 벤 자카이(Johanan ben Zakkai)는 절망에 빠진 제자들을 이끌고 예루살렘을 탈출하여 '야브네(Yavneh)'라는 작은 마을에 학당을 세웠습니다. 제자들은 통곡했습니다. "제단을 잃었고 제사를 지낼 수 없으니 이제 우리의 죄는 어떻게 용서받습니까?"
랍비 요하난 벤 자카이는 제자들의 어깨를 잡으며 이렇게 위로했습니다.
"낙담하지 말거라. 우리에게는 성전 제사보다 더 강력한 속죄의 수단이 남아 있다. 그것은 바로 '헤세드(Chesed)', 즉 '자비와 친절의 행위'이다."
건물로서의 성전은 사라졌지만, 인간이 인간에게 베푸는 작은 친절, 이웃을 향한 자비로운 마음이 있는 곳이라면 그 어디든 하나님의 임재(שְׁכִינָה, 쉐키나)가 머무는 성전이 된다는 위대한 패러다임의 전환이었습니다. 유대교가 2천 년의 유랑 속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행동하는 친절'의 힘 덕분이었습니다.
우리는 '바르 캄차'의 비극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연회장에 앉아 침묵했던 이들의 직무유기를 교훈으로 삼아야 합니다. 우리 주변에서 누군가 부당하게 모욕을 당하고 외면받을 때, 우리는 더 이상 침묵하는 관객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먼저 일어나 그의 방패가 되어주고, 그의 손을 잡아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이유 없는 증오'의 싹을 잘라내는 길입니다.
증오의 세상에 사랑의 성전을 세우자
오늘 우리는 역사의 잔해를 돌아보며 엄중한 선택의 기로에 서 있습니다. 유대의 조상들이 범했던 오류를 반복하며 증오와 분열의 불길 속으로 사회를 밀어 넣겠습니까? 아니면 랍비 삭스와 랍비 쿡이 제시한 영원의 길, '이유 없는 사랑'의 길을 선택하겠습니까?
우리가 사는 세상은 여전히 차갑고 분열되어 있습니다. 사방에서 혐오의 언어가 쏟아지고, 서로를 향한 불신의 벽은 높아만 갑니다. 그러나 어둠이 깊을수록 아주 작은 촛불 하나가 더 밝게 빛나는 법입니다.
아주 작은 일부터 시작할 수 있습니다.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의 글을 볼 때, 분노의 댓글을 달기 전 그 사람의 처지를 한 번 더 생각합시다. 그리고 내 이익과 배치되는 이웃을 만날 때, 그를 적으로 규정하기 전 먼저 인사를 건넵시다. 사소한 오해로 멀어진 친구가 있다면, 자존심을 내려놓고 먼저 화해의 메시지를 보냅시다.
이것은 나약함이 아닙니다. 이것은 세상을 바꾸는 가장 용기 있고 강력한 영적 투쟁입니다.
랍비 조나단 삭스는 "증오는 세상을 파괴하지만, 사랑은 세상을 구원합니다. 타인을 향해 조건 없이 베푸는 친절과 사랑이야말로, 인류가 신에게 드릴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성전입니다."라고 전합니다.
우리가 상호 간의 증오를 멈추고 '이유 없는 사랑'으로 서로를 보듬을 때, 2천 년 전 불타 없어졌던 예루살렘의 영광은 치유와 화해라는 더 찬란한 모습으로 우리 가운데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
우리 모두 증오의 세상에 사랑의 성전을 짓는 거룩한 건축가가 됩시다.
By Torah & Judaism edi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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