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천문화원(원장 이기양)에서는 김천이 배출한 역사적인 인물의
현황과 행적, 그분들이 잠들어있는 묘소를 조사하고 정리한
향토사료지인 "김천의 역사인물과 묘소"를 발간하였다.
"김천의 역사인물과 묘소" 표지와 창녕조씨 문중
이 향토사료지에는 김천지역에 세거하고 있는 76개 문중의 수많은
역사적인 인물들과 묘지들을 성씨별 가나다 순으로 담고 있는데,
맨 앞장에 창녕조씨 김천 입향조인 참의공 조심(曺深)의 묘소사진이
실려있으며, 마침 조심 묘소의 석물 등 새단장이 마무리되어 찾아본다.
문중의 역사인물 ~ 조심(曺深,1385~1414)과 조승중(曺承重,1411~1484)
조심은 고려의 운명이 다함을 한탄하며 고려말에 처향인
봉산면 봉계로 낙향한 창녕조씨 김천 입향조이며
산원(散員)을 지내고 1493년에 병조참의에 증직되었다. ... 하략
창녕조씨 김천입향조 참의공 조심(曺深) 묘소
창녕조씨 김천 입향조 참의공 조심(曺深)의 묘소는 봉황이
물위에 떠있는 형상이라하여 봉황부유형(鳳凰浮遊形)의 명당이라
불리며, 봉산면 예지리 방목산자락에 있는데, 이번에 김천 참의공종회
(종회장 조운현,曺雲鉉)에서 주관하여 석물 등을 개축 재단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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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대 아래에서
참의공 조심이 개경에 살다가 1389년 처가곳(부인 서산정씨 친정)인
이곳 김천으로 낙향하게 된것은 위화도 회군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려말기인 1388년 요동정벌을 위해 출정한 우군도통사 이성계와
좌군도통사 조민수(曺敏修)장군 등은 9일만에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우왕을 폐위시키고 창왕을 옹립하며, 그 공으로 조민수는 좌시중에 오른다.
참의공 조심 묘소 전경
그러나 정권을 장악한 이성계 일파의 전제개혁 등, 정책 마찰로
조민수(曺敏修) 장군이 1389년 조정의 탄핵을 받아 창녕으로 유배되면서
그의 동생인 찬성공 조경수(贊成公 曺敬修)도 정권으로부터 소외되기에
이르렀으며, 이성계와의 대립으로 집안이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할 처지가 되자, 이때 조경수의 3남인 참의공(參議公) 조심(曺深)도
벼슬을 버리고 처가인 서산정씨가 있는 김천 봉계로 낙향하게된다.
묘소와 묘비
참의공 조심의 유택인 이곳은 "극락산을 주산(主山)으로 하고
멀리 황악산을 안산(案山)으로, 샘골과 큰골을 각각 좌청룡(左靑龍)과
우백호(右白虎)로 삼은 현침혈(縣枕穴)의 명당"이라고 한다.
옛 묘비와 새로 건립(1988년)한 묘비
증통정대부 병조참의 조공지묘, 숙부인 서산정씨 부자좌
(贈通政大夫 兵曹參議 曺公之墓, 淑夫人 瑞山鄭氏 祔子左)
이곳은 원래 조심의 부인 서산정씨의 친정 아버지인 정윤홍(鄭允弘)의
묏자리로 잡아 놓았던 자리인데. 마침 친정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는 밤새 옹달샘에서 물을 길어 묘광(墓壙)에 물을 채웠다.
묘비와 석물
이튿날 정윤홍의 상여가 도착하여 보니 묘광에 불이 가득한지라
명당이라고는 하나 불길하다고 여겨 산 너머 분통골로 자리를
옮겼으며, 훗날인 1414년 8월 남편이 별세하자 친정에 부탁하여
자신의 남편인 참의공 조심의 묘를 이곳에 모시게 되었다.
장명등
김천 입향조 참의공 조심(曺深)은 두 아들을 두었는데, 첫째가 선무랑
조승중(宣務郞 曺承重)이고, 둘째가 울진공 조계문(蔚珍公 曺繼門)이다,
문장공 매계 조위(曺偉)선생은 조계문의 아들로 조심의 손자이다.
조심의 묘비
참의공 묘비문(參議公墓碑文)
公의 諱는 深, 本貫은 昌寧이다. 曾祖 諱元桂는 閤門祗候이고
祖 諱遇禧는 判典儀寺事로 贈左侍中 府院君이고
考 諱敬修는 密直司使로 贈左贊成이고, 妣 平山郡夫人
金氏는 洪武(명태조의 연호) 乙丑年(1385)에 公을 낳았다.
새 문인석과 옛 문인석(오른쪽)
公은 散員(고려 때 別將다음의 武官)에 蔭補(조상의 덕으로
벼슬이 내려지는 것)되었다가 永樂(明成祖의 연호) 갑오년(1414)
팔월에 本第에서 별세, 이곳에 返葬되고 弘治(명효종의 연호)
계축년(1493)에 병조참의(兵曹參議)에 추증되었다.
새 문인석과 옛 문인석(왼쪽)
夫人 瑞山鄭氏는 고려때 僉議中贊(첨의중찬) 仁卿의 五世孫으로
증조 諱世忠은 監察掌令이고 祖 諱璹는 判典農寺事이고, 考 諱允弘은
軍器寺副正이고 妣는 江陽李氏로 弘治 丁卯년(1507)생이다.
문인석과 사자상
부인은 曺門에 와서 二男을 낳았으니 장남 承重은 宣務郞이고
차남 繼門은 蔚珍縣令이다. 宣務郞공은 2님 2녀를 낳았으니
장남 保는 司直이고 차남 倜(척)은 현직 義禁府都事이고 장녀는
僉節制使(첨절제사) 崔漢伯에게, 차녀는 金顗(김의)에게 출가하였다.
개축한 묘소와 석물
縣令公은 1남 1녀를 낳았으니, 1남 偉는 현직 全羅道觀察使이고
1녀는 刑曹判書 金宗直에게 출가하였다. 부인은 成化(明 憲宗의 연호)
乙未年(1475) 정월에 89세를 일기로 별세, 동년 12월에 공의 묘 좌측에
祔葬되었으니, 묘는 같으나 壙穴은 다르니 弘治 癸丑年(1493)에
숙부인으로 추증되었고, 丁巳년(1497) 이월 일에 세우다.
사자상(석호) 앞의 글귀
(왼쪽)숭조애족(崇祖愛族) ~ 조상을 높이고 겨레(종족)를 사랑한다
(오른쪽)충효경의(忠孝敬義) ~ 나라에 충성, 부모에게 효도하며, 의를 존중한다
지금으로부터 612년전인 1414년에 조성한 조심(曺深) 묘소(개축 전)
묘소 뒤편에서 보는 입향조 묘역
선무랑 조승중(宣務郞 曺承重) 묘소 ~ 참의공 조심 묘소 아래
선무랑 창녕조공 휘 승중, 배 공인 안동권씨 지묘
(宣務郞 昌寧曺公 諱 承重, 配 恭人 安東權氏 之墓)
선무랑 조승중(宣務郞 曺承重,1411~1484)은 김천 입향조
조심(曺深)의 장남으로 김천 봉산면 봉계에서 태어났으며,
자는 덕보(德保)이고 선무랑을 지냈다. 동생은 울진 현령을 지낸
조계문(曺繼門)이며, 장남 조보(曺保)는 사직을 지냈고, 차남 조척
(曺倜)은 함창군수와 거창군수, 고양군수 등 5개지역 군수를 역임했다.
창녕조씨 선무랑공파 종중제단(昌寧曺氏 宣務郞公派 宗中祭壇)
선무랑공파는 조승중(曺承重,8세) - 보(保,9세) - 헌우(獻虞,10세) -
균(筠,11세)-백량(伯良,12세)-인(訒,13세)-인원(仁元,14세)-수(璹,15세)
- 한일(漢逸,16세) - 계(枅,17세) - 명일(命一,18세)로 이어진다
창녕조씨 김천 입향조 조심(曺深) 묘역
덕원재(德源齋) ~ 청녕조씨 입향조 조심의 재실
덕원재 상량문(德源齋上樑文)
朝夕으로 松楸(무덤주위에 심은 소나무와 가래나무)를 보호하니
경모하는 뜻 저절로 생기고 春秋로 霜露(계절의 변천)를 밟으니
悽凔(처창)한 마음 더욱 간절하네. 이는 당연한 天理요. 固然한 인사일세.
그러므로 先王이 근본 보답하는 儀禮를 제정하고 후손이 조상 추모하는
정성을 다한다는데, 우리 참의공은 세족의 출신이요, 廟堂의 名賢으로
불행이 국운이 다할 즈음 만나 王朝의 교체 차마 볼 수 없었으니
竹館(죽림 속에 지어진 고토의 처소)에서 누가 밤중의 明月을 알손가?
덕원재 상량문 편액
栗里(晉나라때 徵土 陶潛의 고향)에서 스스로 상고의 청풍 즐기었네.
福地에 菟裵(노은공이 은거하던 곳인데 전하여 은거하는 것을 뜻함)가
마련되니 시내는 鳳溪를 流轉하고, 吉地에 衣履가 모셔지니 때는 牛山을
차지한지 벌써 5백년동안 자손이 번창하고 거의 20代 가까이 家聲이
赫赫하여 爵祿을 서로 이었고, 詩禮를 능히 전수하니, 先德 두터워서그 蔭德
저절로 두터운 줄 알겠고, 根源 長遠해서 그 流波 역시 長遠한줄 알겠네.
덕원재기 편액
祭享은 이내 빠뜨림이 없으나 齋舍를 아직 건립하지 못하여 서로 깊은 유감
간직했다가 끝내 빠른 협의 이루어져 도끼질하고 톱질하니 新甫(山名)의 잣나무와
祖徠의 소나무 다듬어지고, 장엄하고 찬란하니 離婁(옛날 눈 밝은 사람)의
먹줄과 公翰子(魯나라 巧才) 의 먹통 거쳤으니, 단단한 담장 두루 바라 보건데,
저 물가에 엄연히 둘렀는데, 先德을 추모하기 위해 이것으로서 편액을 걸고
후손을 계도하기 위해 이것으로서 규범을 삼았네.
이에 五梁(들보를 다섯줄로 놓아서 짓는 집의 제도)으로 된
건물 준공되어 大偉(다음의 기량대첩을 말함)로된 노래 화답하누나.
종산의 소유권 확정경위, 참의공묘비 제2비건립 및 덕원재보수 기공기 편액
어이어차 대들보 동쪽으로 향하니 九鳳山 꼭대기 하늘에 솟았구나.
鳳이 盛代찾아 내려온 이곳에 창문의 아침 해 대들보 서쪽으로 향하니 둥근
것은 못 굽은것은 둑일세. 밤낮없이 활수가 솟아나니 그 빛 하늘에 반사 되었네.
어이어차 대들보 남쪽으로 향하니, 시냇가의 벼와 기장 가을을 맞이했네.
저 輞川 (唐나라 王維의 별장이 있는 곳)에만 좋은 별장 있다고 마소.
여기 전야에도 세 오솔길 그윽 하다오.
덕원재사 임원록 편액과 대들보
어이어차. 대들보 북쪽으로 향하니 극락산 어이 그리 웅장하고 신비의
지역에 맑은 기운 깊었으니, 예부터 뛰어난 재덕(才德) 배출되기 마련일세.
어이어차. 대들보 위로 향하니 신명을 감응시킨다는 말 거짓이 없네.
조상이 바로 앞에 있는 듯, 온 정성 다하니 의당 많은 福祿 그지 없이 누리리.
어이어차. 대들보 아래로 향하니 금릉의 문물 누구나 다 축하하네.
온 동산 꽃나무에 봄바람 일렁이니 천륜을 다지는데 즐거운 일 많아서랴.
덕원재 정문인 진원문(進遠門)
삼가 바라건데 상량을 마친 뒤에 제향(祭享)에 더욱 경건하고 재사가
점차 새로워지며 효도와 충성은 단연 繼述(선대의 뜻과 사업을 계승하는 것)
하는데 있으니, 애모와 정성 다해 著存(조상에 대해 애모와 정성을 다함으로써,
조상이 다시 생존한 듯 하고 앞에 나타난듯 하다 는 뜻)을 잊지 않았으면 하네.
아! 오늘의 이 성공으로 보아 반드시 영원한 보수 지속되리.
단기 4296년 10월 일 은진 송우용(恩津 宋友用) 기록하다
첫댓글 ㅎㅎ 참으로 대단한 명문가(계보) 이십니다
수많은 인재를 배출
하여 문중을 번성케
하고, 그 후손들은 유지를 받들어 지극한 효성으로 문중
을 잘 가꾸어가니
부럽습니다
감사히 잘읽었습니다 ^^
좋은 말씀 고맙습니다.
행복한 한주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