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597
8월29일[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연중 제21주간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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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강론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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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flFmibbEIeA
(김명겸 사도 요한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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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하느님께서 언제나 나와 함께 동행하신다는 확신 속의 순교!>
하느님 움직임의 특징은 철저하게도 하향성(下向性) 그냥 계셔도 좋으련만, 굳이 밑으로 밑으로 내려오셔서, 작고 보잘것없는 인간과 어울리십니다. 예수님의 삶이 그랬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대체로 반대입니다. 철저하게도 상향성(上向性)입니다. 보란 듯이 한번 높이 높이 솟구쳐보고 싶은 욕구, 매스컴의 주목을 받고 싶은 욕구, 주전선수가 되고 싶은 욕구, 무대 위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싶은 욕구, 주역, 주인공이 되고 싶은 욕구가 있습니다.
그러나 때로 조역으로서의 삶, 조력자로 사는 삶, 주변인으로 사는 삶, 선구자로 사는 삶, 예언자로 사는 삶도 얼마나 아름다운지, 의미 있는지를 알게 되면 생각이 바뀔 것입니다.
오늘 기념일을 맞이하시는 세례자 요한의 삶이 그랬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의 삶은 감독, 또는 작가로 사는 삶이었습니다. 감독이나 작가가 영화나 드라마에 얼굴 드러내는 것 보셨습니까? 그들은 자신의 작품에 단 한 번도 얼굴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그들의 역할은 무대의 한 가운데서 화려한 조명을 받는 역할이 절대로 아닙니다. 렌즈의 초점이 맞춰지는 주인공으로서 역할이 절대로 아닙니다.
그의 역할은 주인공이 확실히 뜨도록, 작품이 잘 나오도록, 무대 아래서 열심히 뛰는 것입니다. 그는 단 한 번도 영화나 드라마에 얼굴을 나타내지는 않습니다만, 작품이 잘 되기만을 바라며 묵묵히 헌신합니다.
예수님께서 오실 길을 미리 닦는 일, 예수님께서 메시아임을 선포하는 일, 그리고 마침내 임무를 완수하고는 무대 뒤로 조용히 사라지는 일이 세례자 요한에게 맡겨진 일이었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세례자 요한은 그야말로 완벽했습니다.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었습니다. 예언자로 사는 삶이 조금도 흐트러지는 법이 없었습니다. 자신을 과대평가하지도 않았고, 자신을 그럴듯하게 포장하지도 않았습니다.
그 어떤 상황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의 평가에 조금도 우쭐거리지 않았습니다. 그 어떤 순간에도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부여하신 선구자로서 지녀야 할 본연의 자세를 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삶에 진지했습니다. 자신의 삶에 충실했습니다. 자신의 삶에 대한 지속적인 의미부여가 계속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는 세례자 요한의 수난과 죽음에 대해서 언급되고 있습니다. 신구약을 통틀어 예언자치고 고통이나 십자가와 멀리 떨어져 있었던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들은 늘 세상으로부터 반대의 표적이 되었습니다. 수시로 끔찍한 고통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예수님과 흡사한 방법으로 수난을 당했습니다. 그들의 삶에서 안정이나 평화라는 단어는 꽤 낯선 단어들이었습니다.
왕의 치부를 신랄하게 지적한다는 것은 죽음과 직결되는 일이었습니다. 왕을 향해 쓴소리를 수시로 남발한다는 것은 간땡이가 부어도 단단히 부었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거듭되는 고통과 시련, 수난과 십자가 앞에서도 예언자들은 흔들림 없이 ‘달려야 할 길’을 꾸준히 달렸습니다.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의연했습니다.
그들의 이런 배경에는 무엇이 있었을까요? 하느님께서 자신과 반드시 함께하고 계신다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자신과 동행하신다는 확신을 배경으로 한 참 평화가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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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TdL8d5-PKg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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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이 자신의 죽음을 바라보는 시선은 어떠해야 할까?>
오늘은 요한 세례자가 수난당하고 죽임을 당한 일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헤로데는 헤로디아의 딸 살로메가 춤을 춘 것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요한을 죽여야 했습니다. 그는 죽이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약속을 했고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을 실망시킬 수 없었습니다.
헤로데는 왕이 아니라 노예였습니다. 세상의 시선 때문에 자신이 하고자 하는 방식대로 행동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살로메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녀는 춤을 잘 추고 자신의 상품을 어머니에게 물었습니다. 어머니 헤로디아도 노예였습니다. 쾌락과 돈과 권력의 노예였습니다. 헤로데에게 붙어있기 위해 그것을 비판하는 요한을 죽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이들은 다 가진 것 같았지만, 실제로는 세상에 속한 이들이었습니다. 오직 요한만이 세상 것에 휘둘리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생명을 하느님 뜻에 봉헌하였기 때문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죽음은 헛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요한은 죽음을 면하기 위해 발버둥 치지도 않았습니다. 예언자로서의 소명을 다 이루는 죽음을 맞았습니다. 이것이 믿는 이가 죽음을 받아들이는 자세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죽음을 대하는 자세는 크게 세 가지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자신은 죽지 않을 것처럼 죽음을 부정하거나 무시하는 경우입니다.
어떤 사람이 죽기 직전 유일한 혈육인 동생이 마지막 인사를 하러 왔을 때 숨넘어가는 소리로 “내 돈 2억 갚아, 임마!”하고 죽었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끝까지 죽지 않으려고 발버둥 칩니다. 모두가 죽음을 인정하지 않는 자세입니다. 이들은 죽음을 삶과 완전히 별개로 여깁니다.
두 번째는 체념하는 것입니다. 그때 가서 그냥 받아들이면 되는 것이라 여깁니다. 저희 할머니는 임종 마지막 순간에 어머니가 성당 나가는 것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리고 마리아란 이름으로 대세를 받으셨습니다. 저희 고모도 마찬가지입니다. 역시 불교를 믿으셨고 끝까지 하느님을 믿기를 거부하셨지만, 마지막 순간 대세를 받고 돌아가셨습니다. 죽음이 삶의 일부가 된 경우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사람은 죽음을 삶과 별개가 아닌 것으로 여깁니다. 삶에서 실천해오던 하느님 뜻을 죽음과 연결합니다. 부활이 보장되어 있기에 죽음도 삶의 일부입니다. 그리스도를 전하는 도구로 죽음을 이용합니다. 요한이 그러한 사람이었습니다. 안드레아는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어가면서도 며칠 동안이나 설교했다고 합니다.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서 라이언을 구하러 왔던 주인공은 죽어가면서 라이언에게 “잘 살아야 해!”라고 말해줍니다. 그리고 라이언은 평생 자신을 위해 죽은 사람들 때문에 못 살 수가 없었습니다. 나이가 들어 그들의 무덤 앞에서 아내에게 묻습니다.
“여보, 나 잘 살았지?” 이런 이들은 죽음을 삶으로 받아들이고 이용할 줄 안 사람들입니다. 전태일도 근로기준법전을 끌어안고 자신의 몸을 불태우며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노동자들을 혹사하지 마라! 내 죽음을 헛되게 하지 말라”라며 죽었습니다.
누구는 자살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어떤 관점에서는 자기 죽음을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 이용한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제가 보았던 가장 감동적인 죽음은 어떤 자매님이었습니다. 신학생 때 방학 동안에 이태리 본당에 실습을 나갔는데 어떤 분들이 한 자매님을 가리키며 저분이 말기 암 환자라는 것입니다. 저는 잘못 알아들은 것 같아 귀여겨듣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다음 해의 여름에 다시 갔는데 그분이 병원에서 돌아가시기 직전이라는 것입니다. 본당 신부님과 함께 가서 인사를 드렸습니다. 왠지 저를 기억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장례식 때는 시골 본당이 가득 찼습니다. 그분은 3개월 산다고 암 선고를 받았는데 3년을 사셨습니다. 그분이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아픔을 호소한 적은 한 번도 없다고 합니다.
그분은 항상 오늘을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이웃에게 정성을 다하였습니다. 그분이 죽기 직전이라는 것을 안 사람들은 그 자매에게 모두 감동하였습니다. 그분에게 도움을 받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분은 죽음을 이용한 분입니다. 죽음이 삶의 일부였고 그래서 그분의 삶은 지금도 지속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죽음은 먼저 자신이 왕임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이 세상이 왕이 아닌 하느님 자녀인 것입니다. 하느님 자녀는 이 세상이 멸망해도 영원히 삽니다. 그러니 왕은 죽음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요한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세상에 영향은 주지만 세상의 영향을 받지는 않습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영향을 받으면 어떻게 자녀를 교육할 수 있겠습니까?
또한 예언자의 면모가 있어야 합니다. 요한의 죽음은 이 지상의 노예로 사는 이들의 민낯이 드러나게 하였습니다. 예수님도 당신의 죽음으로 세상이 진리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죽음은 이렇듯 누군가에게는 교육적이어야 합니다.
또한 사제임이 드러나야 합니다. 헤로데는 나중에 그리스도의 이야기를 듣고 자신이 죽인 요한이 아니냐고 두려워하였습니다. 요한은 자신의 죽음으로 헤로데를 그리스도께 오게 하였습니다. 물론 받아들이고 안 받아들이고는 자기 선택입니다. 그러나 돌아가시면서 자녀들에게 꼭 성당 다니라고 한마디는 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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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6,17-29: 요한 세례자의 죽음
오늘은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이다. 세례자 요한의 삶은 모두 그리스도께 대한 증거였다.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가실 길을 닦아드린 다음, 그 길을 예수님께 내어드리고 자기의 제자들을 그분께 인도하고 순교하신 분이다. 그분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피를 흘리기까지 견디어낸 사람들과 수도자들의 아버지이다. 요한 세례자는 고행과 순교의 두 면을 보여준 분이다. 그는 권력 앞에서도 두려움 없이 말하였고, 진리와 정의를 위하여 순교하였다. 그분은 당신의 삶으로 그리스도의 선구자가 되었으며, 피로써 주님을 증거하신 분이다. 헤로데 왕의 잘못을 간하다가 잡힌 몸이 되었는데, 이제는 헤로데의 만용이 세례자 요한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있다.
왕의 잘못에 대해 자신의 위험을 생각지 않고 끝까지 지적할 수 있었던 그분의 예언자적 정신과 자세를 볼 수 있다. 예언자는 구약에서나 신약에서나 항상 하느님의 뜻을 전한 사람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예언자들은 항상 진리 편에서 그것을 증거했기 때문에 항상 박해를 받았고 죽임을 당했다. 그래도 그 예언자적 정신은 항상 계속됐다. 예언자의 삶은 고금을 막론하고 항상 박해를 받았다. 그래서 권력은 진리를 외치는 입을 막아 침묵하게 하고, 또한 침묵을 강요하곤 하였다. 그러나 진정한 예언자들은 그 권력에 맞서 생명을 바치면서까지 진리를 외쳐왔고 지금도 외치고 있다. 지금 이 시대에도 마찬가지이다. 그 예언자적 삶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계승해야 한다. 이것은 말로만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삶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나타나지 않으면 되지 않는 것이다.
복음에서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자기들이 바라고 기다리고 있던 엘리야라고 알기도 하였고, 예언자 중에 하나라고 생각하였다. 아마 예수님 안에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하였을 것이다. 로마의 억압에서 해방하여 자유를 주고 세계를 지배할 승리를 가져다줄 정복자로서 예수님을 엘리야로 생각할 수도 있었고,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보면서 그분 안에서 하느님의 능력과 말씀을 전하던 예언자의 모습을 생각했다. 그러나 그분은 엘리야를 무한히 능가하시고 예언자들을 초월하신다.
하여간에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우리의 생활 속에서, 기도와 신앙 안에서 예수님을 누구라고 생각하는지,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 그분이 누구시라고 말할 수 있는지 생각해 보자. 죄를 짓고 쫓기는 마음으로 헤로데처럼 말할 것인가? 군중들처럼 현세를 위한 해방자인가? 아니면 진실한 믿음 안에 생명의 주님으로 대하고 있는가? 진리를 두려워하지 않고 자만에 빠져 죄 없는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을 수 있는 헤로데와 같은 잘못은 범하지 않아야 한다. 또한, 요한 세례자의 자세를 본받고, 예언자적 삶을 살아가며 주님을 우리의 참 구세주이시며 생명을 주시는 분으로 대하고 모시는 우리 되도록 하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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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교회는 항상 쇄신 되어야 한다.(Ecclesia est semper Reformanda!)" 저는 이 말을 신학생 때 들었습니다. 저는 이 말을 들으면서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제가 신학교에 다니던 80년대는 저항과 탄압의 시대였습니다. 학생들과 시민들의 요구는 ‘직선제 개헌’이었습니다. 우리의 대통령은 우리의 손으로 뽑아야 한다는 의지였습니다. 이런 저항의 과정에서 꽃잎처럼 많은 젊은이들이 산화하였습니다. ‘박종철, 이한열, 강경대’는 공권력에 의해서 사망하였습니다. 공권력은 강하고, 저항의 힘은 약해 보였지만 깨어 있는 시민들은 ‘직선제 개헌’을 성취하였습니다. 밤이 깊을수록 새벽은 가까이 오는 것처럼 그렇게 우리는 자유와 민주를 맞이하였습니다. 당시 신학교에도 ‘쇄신 위원회’가 있었습니다. 매주 식당의 게시판에는 ‘대자보’가 붙었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문헌을 연구하였고, 교회가 나가야 할 방향을 진지하게 토론하였습니다. 교수 신부님들은 신학생들의 열정을 이해하셨고, 후원해 주셨습니다. 어느덧 40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교회는 항상 쇄신 되어야 한다.” 이 말은 신약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그 시작은 ‘세례자 요한’이었습니다. 광야에 나타난 세례자 요한은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을 따랐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 그리고 ‘우리는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모시고 있다.’고 말할 생각일랑 하지 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는데, 하느님께서는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녀들을 만드실 수 있다. 나는 너희를 회개시키려고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러나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시다. 나는 그분의 신발을 들고 다닐 자격조차 없다.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이 해야 할 역할을 잘 알았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에 앞서 구원의 길을 준비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에도 공권력은 강하였고, 세례자 요한은 약해 보였습니다. 그리고 공권력에 의해서 세례자 요한은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예수님에 의해서 선포되는 하느님나라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뜨거운 솥을 식히는 가장 빠른 방법은 솥을 뜨겁게 하는 아궁이의 불을 빼는 것입니다. 아궁이의 불을 빼내지 않고서는 달리 뾰족한 방법이 없습니다. 우리 사회는 어쩌면 뜨거워진 솥과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경쟁, 이익, 성공, 권력, 욕망, 이기심, 원망, 분노’의 불이 타오르기 때문입니다. 제도를 변경하고, 새로운 조직을 만들고, 사람을 바꾸어서 일시적인 효과를 볼 수 있지만 근본적으로 욕망의 불을 빼내야만 새로운 사회가 시작될 수 있을 것입니다. ‘양보, 희생, 사랑, 희망’이 있어야 뜨거워진 솥을 식힐 수 있습니다. 불을 빼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인내가 필요하고,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자칫 뜨거운 불에 다칠 수도 있습니다. 누가 그런 일을 하였을까요? 예언자들이 있었습니다. 오늘 축일을 지내는 세례자 요한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새로운 나라를 이야기 하셨습니다. ‘섬김, 봉사, 희생, 나눔, 십자가, 죽음’을 통한 부활의 나라입니다. 우리는 때로 디딤돌이 되는 것을 기쁘게 생각해야 합니다. 가정과 이웃을 위해서 밑거름이 되는 것도 감수할 줄 알아야 합니다.
교회는 수많은 디딤돌과 밑거름이 있었기에 아름다울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축일로 지내고 있는 ‘세례자 요한의 수난’도 한 개인의 억울한 죽음으로 보기 보다는 하느님께서 이루고하 하는 구원의 역사로 볼 수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수난은 바로 예수님의 수난을 미리 예고하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모두 건강하고, 부유하고, 오래 살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많은 사람들의 꿈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위해서라면 질병도, 가난도, 단명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신앙인의 태도입니다. 많은 순교자들은 바로 그런 길을 걸어갔습니다. 많은 성인들은 바로 그러한 삶을 살았습니다. 하지만 고통과 수난 중에서도 희망을 포기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이 너와 맞서 싸우겠지만 너를 당해 내지 못할 것이다. 내가 너를 구하려고 너와 함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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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세례자 요한의 죽음>
“이 헤로데는 사람을 보내어 요한을 붙잡아 감옥에 묶어 둔 일이 있었다. 그의 동생 필리포스의 아내 헤로디아 때문이었는데, 헤로데가 이 여자와 혼인하였다. 그래서 요한은 헤로데에게, ‘동생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고 여러 차례 말하였다. 헤로디아는 요한에게 앙심을 품고 그를 죽이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헤로데가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그를 두려워하며 보호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말을 들을 때에 몹시 당황해하면서도 기꺼이 듣곤 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좋은 기회가 왔다. 헤로데가 자기 생일에 고관들과 무관들과 갈릴래아의 유지들을 청하여 잔치를 베풀었다.”(마르 6,17-21)
세례자 요한이 한 일은, 예수님이 메시아라고 증언한 일(마르 1,7-8), 그리고 메시아를 잘 맞이할 수 있도록 사람들을 회개시킨 일입니다.(마르 1,4) 당시에 요한의 회개 선포를 받아들인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온 유다 지방 사람들과 예루살렘 주민들이 모두 그에게 나아가, 자기 죄를 고백하며 요르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마르 1,5) 그러나 기득권층 사람들은 요한의 회개 선포에 관심이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마르 11,31) 헤로데와 헤로디아와 헤로디아의 딸도 요한의 회개 선포에는 관심이 없었고, 아마도 그들은 죄의식이나 양심의 가책 같은 것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세속의 권력자가 하느님의 예언자를 죽인 일에 대해서, 우리는 “하느님께서는 왜 당신의 예언자가 살해당하는데도 보고만 있으셨을까? 살인자들에게 천벌을 내리셔야 하는 것이 아닌가?”라고 물을 때가 많습니다. 그 질문에 대한 답변은 단순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 살인자들이 회개하기를 기다리셨다.” 베드로 사도가 종말의 심판을 설명한 말을 헤로데의 상황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미루신다고 생각하지만 주님께서는 약속을 미루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여러분을 위하여 참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2베드 3,9)
요한이 헤로데와 헤로디아의 죄를 비판한 일도 ‘회개 선포’에 속한 일이고, 그 두 사람을 회개시키기 위해서 한 일입니다. 그것은 헤로데와 헤로디아 같은 죄인들도 회개해서 구원받기를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일입니다. <헤로데는 나중에 왕의 자리를 빼앗기고 헤로디아와 함께 지금의 프랑스 지역에서 귀양살이하다가 죽었다고 전해집니다. 두 사람은 죽기 전에라도 회개했을까? 그것은 모릅니다. 어떻든 그들도 하느님의 심판대에 섰을 텐데, 그 심판의 결과는 회개 여부에 달려 있습니다. 죽기 전에라도 회개했다면 멸망을 피했겠지만, 끝까지 회개하기를 거부했다면 멸망 쪽으로 갔을 것입니다.>
복음서 본문의 표현만 보면, 헤로디아만 요한을 죽이려고 했고, 헤로데는 요한을 보호하려고 애쓴 것으로 생각하기가 쉬운데, 그것은 아니고, 헤로데는 처음부터 요한을 죽이려고 붙잡아서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렇지만 백성들의 여론이 어떻게 움직일지 알 수 없어서 여론의 움직임을 지켜보려고 한 것이고, 헤로디아는 성급하게 요한을 곧바로 죽이려고 한 것입니다. 그런 헤로디아를 헤로데가 말리면서 기다리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도대체 왜 헤로데와 헤로디아는 세례자 요한을 미워했을까?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자기가 한 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을(요한 3,20) 설명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헤로데와 헤로디아는 요한의 비판이 듣기 싫었고, 요한의 입을 막으면 자기들의 죄가 덮어질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악한 생각이기도 하고, 어리석은 생각이기도 합니다. 예언자가 진리를 말하면, 그 말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따라서 죄와 악을 꾸짖는 예언자를 박해하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박해하는 것이고, 하느님을 박해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헤로데의 생일잔치에 참석한 ‘고관들과 무관들과 갈릴래아의 유지들’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 사람들은 당시 그 지역의 고위층 사람들이었고, 여론을 주도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헤로데가 세례자 요한을 죽일 때, 그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범죄를 막거나 반대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을까? 마음속으로는 헤로데가 큰 죄를 짓고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헤로데의 권력이 무서워서 침묵을 지킨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고, 눈앞에서 벌어지는 악행에 대해서 아무 관심도 없었던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고, 그 일에 동조한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마음속으로 무슨 생각을 했든지 간에 그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은 모두 그 살인죄의 공범들입니다. 악행을 보면서도 침묵하거나 방관하거나 구경만 하는 것은 그 악행을 함께 하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은 죽이는 것과 같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마르 3,4) 그런 상황에서 “나는 그 악행에 가담하지 않았다.”라고 말하는 것은 비겁한 변명일 뿐입니다.
오늘날에도 악행을 알면서도 침묵하거나 방관하거나 관심 두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침묵하는 다수 때문에 독재자들이 마음껏 독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경고하셨습니다. “세상 창조 이래 쏟아진 모든 예언자의 피에 대한 책임을 이 세대가 져야 할 것이다. 아벨의 피부터, 제단과 성소 사이에서 죽어 간 즈카르야의 피에 이르기까지 그렇게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가 그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루카 11,5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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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청주교구 정용진 요셉 신부님]
(1)
오늘 복음에는 자기 인생의 주인공이 되고자 하는 네 사람이 나옵니다. 이들에 대하여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하신 말씀을 떠올려 봅니다. 첫 번째는 헤로데 임금으로, 한마디로 ‘부패한 사람’입니다. 그는 부정과 부패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불륜을 저지르는 부도덕함 말고도 많은 부정을 저지르며 권력을 지키고 키우려는 열망으로 가득하였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헤로데의 동생 필리포스의 아내 헤로디아입니다. 헤로디아는 “요한에게 앙심을 품고 그를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앙심(증오)은 암흑의 힘으로, 마귀의 호흡(숨)과도 같습니다. 마귀는 사랑을 알지 못하고 집요하게 질투하며 시기하고 미워합니다. 헤로디아는 증오의 영에 사로잡혔습니다.
세 번째는 헤로디아의 딸(소녀)입니다. 그는 허영심에 가득 찬 춤꾼입니다. 술에 취한 헤로데는 그의 춤을 보고 ‘무엇이든 모든 원하는 것을 주겠다.’라고 말하는데, 이는 악마가 예수님을 유혹할 때 한 말과 같습니다.(마태 4,9 참조) 이렇듯 이들의 뒤에는 언제나 악마가 있습니다. 여인에게 증오를, 소녀에게 허영심을, 남자에게 부정과 부패의 씨를 뿌려 키워 갑니다.
그리고 네 번째 사람으로 세례자 요한이 나옵니다.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입니다. 요한은 예수님께 자리를 내드리고자 끊임없이 자신을 낮추고 스스로 없어진 위대한 순교자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사랑과 진리와 다른 이들 안에 온전히 자기 인생을 내줌으로써 영원한 생명의 나라로 갑니다. 그러나 자기만을 위하여 살면서 자기 안에 생명을 가두려 하는 사람들, 곧 부패한 임금, 증오에 갇힌 부인, 허영심에 사로잡힌 소녀는 결국 허무 속에 자기 인생을 말라 버리게 합니다. 세례자 요한의 위대한 증언 앞에서 우리가 사는 세상의 모습과 우리의 일상을 되돌아봅시다.(프란치스코, 성녀 마르타의 집 아침 미사 강론, 2019년 2월 8일 자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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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오늘은 세례자 요한의 수난과 죽음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여인에게서 태어난 모든 사람 가운데 가장 큰 사람인 요한은 부당한 죽음을 변호할 어떤 기회도 얻지 못한 채 죽임을 당합니다. 예수님의 선구자로서 증언의 삶을 살아온 요한의 사명 끝은 순교였습니다. 순교는 가장 완전한 증언입니다. 고전 그리스어에서 ‘증언하다’는 곧 ‘순교하다’입니다.
어제 주일 복음 말씀은 잔치에 초대받았을 때 끝자리에 가서 앉고, 또 우리가 누군가를 식사에 초대하려거든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저는 이들, 눈먼 이들과 같이 우리에게 되갚을 수 없는 이들을 초대하여 함께 음식을 나누라는 것이었습니다.(루카 14,7-14 참조)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공교롭게도 첫자리에 앉으려는 이들이 벌이는 잔치에서 죽임을 당합니다. 이 잔치는 임금인 헤로데가 베푼 잔치였고, 여기에 초대된 이들은 저마다 세상에서 높은 위치에 있는 이들이었습니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궁궐에서 벌어진 헤로데 임금의 잔치 이야기 다음에 곧바로 광야에서 벌어진 예수님의 잔치를 소개합니다(6,30-44 참조). 이렇게 하여 두 잔치를 대비시킵니다.
오늘 복음의 이야기가 세례자 요한의 잘린 머리로 끝나는 죽음의 식사라면, 이어지는 이야기는 남자만도 오천 명가량이나 배불리 먹은 예수님과 군중의 생명의 잔치입니다. 이는 삶의 기준에 따라 그 결과가 정반대로 나올 수 있음을 암시합니다. 곧 우리의 본보기가 누가 되느냐에 따라, 우리가 누구를 본받아 사느냐에 따라 삶이 달라진다는 뜻입니다.
헤로데의 궁전에는 부와 권력, 교만과 허영, 음모와 계략, 증오와 원한, 불의 그리고 쟁반 위의 잘린 머리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광야에는 동정과 연민, 사랑과 친교 그리고 배불리 먹고 남은 빵과 물고기로 가득 찬 열두 광주리가 있습니다. 우리가 머물러 살고 싶은 곳은 어디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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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님]
마르코는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마르 1,1)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세례자 요한의 죽음을 예수님에 대한 나자렛 사람들의 무시와 열두 제자의 파견(마르 6,1-13 참조) 그리고 헤로데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는 이야기와 빵의 기적(마르 6,14-16.30-44 참조) 사이에, 헤로데 안티파스 임금을 매개로 한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한 사람들의 여론 (마르 6,14-16 참조)을 함께 놓고 있습니다.
헤로데 안티파스는 배다른 동생 필리포스의 아내 헤로디아를 차지하여 세례자 요한에게서 비난을 받았습니다. 모세의 율법은 살아 있는 형제의 부인과 혼인을 시도하는 것을 근친상간이라 하며 금지하였기 때문입니다.(레위 18,16; 20,21 참조)
헤로데는 비록 세례자 요한을 감옥에 가두었지만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여겨 바로 죽이지 않고 보호해 주며 때로는 요한의 말을 기꺼이 듣고는 하였습니다. 오히려 입장이 불편하였던 헤로디아가 앙심을 품고 세례자 요한을 죽일 기회만 노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기회는 쉽게 왔습니다. 헤로데 안티파스는 자신의 생일잔치 때 헤로디아의 딸인 살로메의 춤에 넋이 나가 허튼 맹세를 지키고자 세례자 요한을 참수하였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체면을 구기고 싶지 않았기에 인식이 흐려진 것입니다.
마르코가 이렇게 세례자 요한의 죽음에 대하여 언급한 것은, 그의 죽음이 예수님의 길을 준비하는 요한의 사명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죽음을 암시하기 때문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께서 보시기에 참으로 의로웠습니다. 담대히 진리를 외치고 또 증언함으로써 순교하였기 때문입니다. 세속 권력자 헤로데 안티파스는 자신의 생일 잔칫상에 사람의 목을 잘라 올렸지만,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며 그리스도이신 예수님께서는 몇 개의 빵과 몇 마리의 물고기로 많은 이를 먹이시어 하늘 나라의 풍성한 잔치를 보여 주십니다.
요한의 죽음과 연결된 이러한 대조를 통하여 세례자 요한의 수난 기념일인 오늘의 의미를 더욱 잘 깨우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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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이리 가져다주십시오.”
오늘은 세례자 요한의 수난 기념일입니다. 그는 참으로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고난을 받았습니다. 사실 바오로 사도가 말한 것처럼, 고난은 그리스도인의 특권인가 봅니다.
그는 진리를 위해 목숨을 바쳤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찌 보면, 한 푼 춤 값으로 팔려버린 그의 목숨은 참으로 억울한 죽음처럼 보입니다.
그렇지만 비록 폭군이 그의 머리는 베었어도 그의 소리는 벨 수가 없었습니다. 그의 혀는 잠잠하게 만들었지만 그 소리는 가라앉힐 수는 없었습니다. 예언자의 소리는 가로막는다고 가로막히는 소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의인과 악인의 극한 대조를 보여줍니다. 한편에는 음모를 꾸미며 속임수를 쓰며 악의에 찬 헤로디아가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부화뇌동하는 헤로데가 있습니다. 다른 한편에는 진실하고 강직하며, 어떤 거짓에도 굴하지 않는 세례자 요한이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불경스러운 세 가지 죄악에 대해서 듣습니다. 파렴치한 생일잔치, 소녀의 음탕한 춤, 임금의 무모한 맹세가 그것입니다. 그리고 그 맹세는 결국 무고한 의인의 죽음을 불러들입니다.
헤로데와 헤로디아는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생각했지만, 요한은 이스라엘 백성과 하느님의 영광을 생각했습니다. 오로지 진실을 위해 목숨을 바쳤습니다. 결국 올가미에 걸려 넘어진 이는 의인이 아니라 폭군이었습니다.
거짓을 꾸미는 악인의 혀는 결국 자신이 쳐놓은 덫에 걸려 넘어지고, 진실한 의인의 혀는 영광의 관이 씌워졌습니다.
1945년, 히틀러의 암살계획에 연루되어 나치에 의해 사형당한 디트리히 본회퍼는 '고난에 관한 설교'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의인이 고난을 받아야 하는 이유는 하느님 의식을 세상 속으로 가져온 까닭이다”
그렇습니다. 그는 하느님 의식을 세상 속으로 가져온 바람에 고난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세월이 흐를지라도 폭군의 죄악을 고발하는 의인의 외치는 소리는 계속될 것입니다. 비록 혀가 잘려도, 온몸이 혀가 되어 외칠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숨 막히게 외치고 있는 예언자들의 소리를 듣습니다. 오늘 세례자 요한이 외치는 소리는 교종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무관심의 세계화’가 우리에게 남을 위해 우는 법을 빼앗아 가버린 이 시대에 남을 위해 우는 법을 가르쳐줍니다. 진리와 정의를 위해 우는 법을 말입니다.
하오니, 주님!
제 혀가 진정으로 사랑하여 울게 하소서.
눈물 흘리는 이들의 소리를 듣고 울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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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샘 기도>
주님!
제 혀가 거짓을 꾸미지 않고, 진실 되게 하소서.
타인을 뭉개지 않고, 자신을 뭉개어 내어주게 하소서.
제 혀가 어둠을 가르는 불혀가 되고, 진리를 밝히는 말씀의 쌍날칼이 되게 하소서!
헛된 맹세로 덫에 걸려들지 않고, 침묵에 묶어 두어도 의로움을 외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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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의롭고 거룩한 삶을 살 수 있기를>
매일 정답만 얘기하지 마시고 다른 얘기할 수 없나요? 참 답답합니다. 정답은 저도 알고 있는데 실천하려고 하니까 왜 나만 손해를 보며 살아야 하나? 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습니다. 참을 만큼 참았고 기다릴 만큼 기다렸는데 아직도 저 모양이니 어쩌면 좋습니까?
정답을 알고 있는데 다른 것을 요구하면 어찌합니까? 물론 뒤집어서 생각해 볼 수도 있지만 결국은 그리로 가야 하지 않나요. 그래서 말이죠. 성경에서 답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 사람의 생각은 흔들릴 수 있고 오류를 범할 수도 있지만 하느님의 말씀은 진리이고 힘이 있고, 살아있으니 그 말씀에서 해답을 얻어야 명확합니다. 그리고 해답을 얻었으면 그리 사는 것입니다. 손해를 보고, 가슴이 아프고 억울해도 인내하면서 하늘을 보는 것입니다. 천상에 보화를 쌓고 위로받아야 합니다.
헤로데는 그의 동생 필리포스의 아내 헤로디아와 혼인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헤로데에게 “동생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라고 여러 차례 말하였습니다. 그래서 헤로디아는 요한에게 앙심을 품게 되었고 요한은 결국 목이 베어지는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요한은 바른말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의로운 죽음으로 기억합니다. 그는 육으로는 죽었지만, 그의 의로움은 끊임없이 오늘도 살아 있습니다.
그러나 헤로데는 육적인 죽음과 영적인 죽음을 동시에 마주하게 됩니다. 막강한 권력을 가진 그였지만 몹시 괴로운 마음으로 요한의 목을 베어 오라고 명하였습니다. 생일잔치에서 춤을 추는 헤로디아의 딸에게 ‘무엇이든지 청하는 것을 주겠다’고 맹세까지 하였고 손님들이 보는 앞이어서 ‘요한의 머리를 갖다 달라’는 그의 청을 물리치지 못하였습니다. 생일 파티에서 한마디 약속한 것이 이런 결과를 가져오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한 일입니다. 어떻게 보면 취중에 한마디 한 것으로 볼 수도 있는데… 정말 얼마나 말을 조심해서 해야 하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무모한 권력을 내세우지 않고 참된 권위를 회복해야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약속이 잘못되었으면 거두어들여야지, 위신 체면 때문에 덮어버리면 결국은 파멸을 만나게 됩니다. 의인의 삶은 영광스럽게 기억되고, 자기의 영달과 안전을 지키려 급급해하는 사람은 결국 패배한 사람으로 남게 됩니다. 사실 일상 안에서 힘들고 어려운 일이 많이 있습니다. 밑지고 손해를 보는, 불이익을 당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인내하고 기다리며 주님의 뜻을 찾는 이를 하느님께서는 영원한 승리자로 인정하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헛된 장담을 하거나 앙심을 품는 일은 없어야 하겠습니다.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마음 안에 좋지 못한 감정들을 몰아내고 나로 말미암아 상처받은 사람이 있다면 상처를 치유해 주시기를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 요한처럼 어떤 처지나 상황 안에서도 의롭고 거룩한 삶을 살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하느님, 제가 숨 쉬는 것만으로도 당신께는 더 좋은 기도가 되게 하소서. 입술보다는 발걸음이 더 좋은 기도가 되게 하소서.”(토마스 머튼)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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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지난주에 있었던 휴가 때, 경상도에 있는 수목원을 방문했습니다. 모든 것이 예약제였는데, 입장이나 그 안에서의 식사도 예약해야 가능한 곳이었습니다. 가격도 상당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책에서 소개한 내용을 보고는 관심이 갔고, 올해 첫 휴가인데 그동안 쉼 없이 달려온 것에 대한 보상 차원에서 다녀오겠다고 결심했습니다.
날짜가 가까워지면서 약간의 걱정이 생겼습니다. ‘이런 곳을 혼자 가는 사람이 있을까?’, ‘다들 누군가와 함께 올 텐데 나만 혼자 가면 어색하지 않을까?’, ‘식사 가격도 상당하던데, 나 혼자 가는데 이렇게 비싼 식사를 하면 사람들이 흉보지 않을까?’ 등의 생각들이 밀려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곧바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뭐 그렇게 대단한 사람인가?’
저를 바라보는 사람에게 저는 대단하지도 또 중요하지도 않은 존재입니다. 그래서 제게 신경 쓸 필요가 없습니다. 그 좋은 곳에서 굳이 대단하지도 않은 사람까지 신경 쓸 필요가 뭐 있겠습니까? 이 점을 생각하니 그저 저에게만 집중하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나’에게만 대단하고 중요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자유를 존중하면서 아주 맛있는 식사를 할 수 있었고, 힘들어도 그곳에서 멋진 시간을 보낼 수가 있었습니다. 남 눈치보다 내 눈치가 더 중요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눈치는 주님 눈치입니다. 주님께서 보시기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하는데, 남 눈치 보느라고 정작 주님 눈치를 신경 쓰지 않는 어리석은 우리의 삶을 반성해야 합니다.
오늘은 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입니다. 그는 헤로데 임금의 불륜을 질책하다가 헤로데의 아내 헤로디아의 간계로 순교하게 되었지요. 그런데 그 과정에서 몇 명의 사람들을 묵상할 수 있게 됩니다. 바로 사람들의 눈치를 보고서 요한 세례자의 참수를 명하는 헤로데 임금, 잘못된 자기 행동을 질책하는 요한 세례자를 제거하려는 헤로디아, 그리고 잘못된 행동임을 알면서도 어머니의 명령이라면서 따르는 헤로디아의 딸, 마지막으로 죽음의 위험이 있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하느님의 뜻을 외치는 요한 세례자입니다.
물론 당시에는 요한 세례자가 가장 불행한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지금도 그럴까요? 그 어떤 사람도 헤로데, 헤로디아, 헤로디아의 딸이 행복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의 눈치만 보았을 뿐, 주님 눈치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남 눈치 보느라 정작 주님 눈치는 신경 쓰지 못하는 어리석은 삶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 안에서 그리 특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눈치를 보면서 주님의 뜻을 따르게 될 때, 하늘나라에서 특별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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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선>
마르코 6,17-29 (세례자 요한의 죽음)
그때에 헤로데는 사람을 보내어 요한을 붙잡아 감옥에 묶어 둔 일이 있었다. 그의 동생 필리포스의 아내 헤로디아 때문이었는데, 헤로데가 이 여자와 혼인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요한은 헤로데에게, “동생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고 여러 차례 말하였다. 헤로디아는 요한에게 앙심을 품고 그를 죽이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헤로데가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그를 두려워하며 보호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말을 들을 때에 몹시 당황해하면서도 기꺼이 듣곤 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좋은 기회가 왔다. 헤로데가 자기 생일에 고관들과 무관들과 갈릴래아의 유지들을 청하여 잔치를 베풀었다. 그 자리에 헤로디아의 딸이 들어가 춤을 추어, 헤로데와 그의 손님들을 즐겁게 하였다.
그래서 임금은 그 소녀에게, “무엇이든 원하는 것을 나에게 청하여라. 너에게 주겠다.” 하고 말할 뿐만 아니라, “네가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 내 왕국의 절반이라도 너에게 주겠다.” 하고 굳게 맹세까지 하였다. 소녀가 나가서 자기 어머니에게 “무엇을 청할까요?” 하자, 그 여자는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요구하여라.” 하고 일렀다. 소녀는 곧 서둘러 임금에게 가서, “당장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저에게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고 청하였다. 임금은 몹시 괴로웠지만, 맹세까지 하였고 또 손님들 앞이라 그의 청을 물리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임금은 곧 경비병을 보내며, 요한의 머리를 가져오라고 명령하였다. 경비병이 물러가 감옥에서 요한의 목을 베어, 머리를 쟁반에 담아다가 소녀에게 주자, 소녀는 그것을 자기 어머니에게 주었다. 그 뒤에 요한의 제자들이 소문을 듣고 가서, 그의 주검을 거두어 무덤에 모셨다.
<선>
선은
살아남으려
악에
굴복함으로써
스스로를
죽이지 않으며
악에
죽임 당함으로써
선은
끝내 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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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하느님의 심장을 지닌>
“내가 너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말하여라.
너는 그들 앞에서 떨지 마라. 그랬다가는 내가 너를 그들 앞에서 떨게 할 것이다.”
오늘 독서 예레미야서는 예언자라면 떨지 말고 주님께서 명령한 것을 전해야 한다는 말씀인데 우리 교회는 세례자 요한의 순교 축일에 이 예레미야서를 독서로 읽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이런 예언자였고, 그래서 순교했다는 뜻일 겁니다.
예언자란 하느님 말씀을 전하기 위해 하느님께 파견된 사람입니다. 그러나 가브리엘과 라파엘 천사처럼 그렇게 파견된 존재가 아니라 쓴소리를 해야 할 사람이나 집단에게 파견된 존재입니다.
가브리엘이나 라파엘 천사가 좋은 소식의 전달자라면 예언자는 듣는 이들이 듣기 싫어하는 말 그것도 하느님 말씀을 전달하는 존재이고, 그러니만큼 평소 하느님 말씀을 들으려 하지 않고 늘 역행하던 자들에게 하느님 말씀을 듣지 않으면 다시 말해서 지금 하는 나쁜 짓을 멈추지 않고, 고치지 않으면 미래에 불행해질 것이라고 예언하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누가 이렇게 하느님 말씀을 듣지 않고 계속 나쁜 짓을 할까요? 그들은 하느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들이고 세상 권력에 흠뻑 취한 자들입니다.
세상이 자기 뜻대로 돌아가고 세상 사람들을 자기 맘대로 주무르다 보니 하느님이 어디 계시냐 하고 하느님이 두려운 줄 모르게 된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심장이 센 자가 아니면 이들 앞에서 떨리고 하느님 말씀은커녕 아무 소리도 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떨지 않으려면 강심장을 가져야 하고, 하느님 말씀을 전하려면 하느님 심장을 장착해야 합니다.
그런데 하느님 심장에는 용기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 심장에는 하느님 말씀을 듣지 않는 자들에 대한 연민이 먼저 있습니다.
이들이 당신 말씀을 듣지 않는다고 분노를 터트리시거나 포기해버리셨다면 하느님은 예언자도 파견하지 않으셨을 겁니다.
아직 포기하지 않는 사랑이 있으시기에 벌을 주시기 전에 곧 분노를 터트리시기 전에 지금 하는 짓을 멈추고 회개하라고 호소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언자라면 이런 하느님의 심장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예언을 듣는 사람이기도 하고, 예언을 해야 하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느님 말씀을 듣는 사람이기도 하고, 하느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어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한편으로는 회개해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 예언해야 함을 세례자 요한을 통해서 배우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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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동생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마르6,18)
<진리를 증언하자!>
오늘 복음(마르6,17-29)은 '세례자 요한의 죽음을 전하는 말씀'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에 앞서 파견된 선구자로서, 그분의 길을 닦고 준비한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요 위대한 예언자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공정과 정의를 외치다가 순교했습니다. 헤로데가 그의 동생 필리포스의 아내를 차지한 불의를 보고, 그 불의를 외치다가 순교했습니다.
요즘 너도나도 공정과 정의를 외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불의 앞에서 침묵하거나 아예 불의를 따라가기도 합니다. 진리가 아닌 가짜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무엇이 진리이고,
무엇이 공정과 정의인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가 바로 진리이며, 그분의 생각과 말과 행위가 공정과 정의입니다. 그 안에 계시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공정과 정의는, 모두가 함께 잘 사는 공동선의 실현이요, 하느님의 피조물들을 포함한 사회적 약자들이 소외되지 않는 것입니다. 요즘 우리 주위에서 일어나고 있는, 특히 정치권에서 외치고 있는 공정과 정의와는 많이 다릅니다. 달라도 많이 달라 보입니다. 높은 사람과 넉넉한 이들을 바라보고 있는 공정과 정의여서 더욱 그렇습니다. 방향이 위로 향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회적 약자들은 낮은 곳에 있고, 더 낮은 곳에 있습니다.
우리도 세례자 요한처럼 공정과 정의를 따라갑시다! 하느님의 진리를 믿고 증언합시다! 거짓과 불의 앞에서 침묵하지 맙시다! 그리고 그것을 따라가지 맙시다!
사회적 약자들을 무시하지 맙시다! 오히려 그들을 바라보고, 그들이 있는 곳으로 나아갑시다!
예수님처럼.
"너는 허리를 동여매고 일어나, 내가 너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말하여라. 너는 그들 앞에서 떨지 마라. 그랬다가는 내가 너를 그들 앞에서 떨게 할 것이다."(예레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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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_43xQvBGEq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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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요한의 머리를 가져오라고 명령하였다."(마르 6, 27)
먼저 생명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참담한 현실을
보게됩니다.
너무나 쉽게
무너져내리는
생명의
가치입니다.
모든 생명은
소중합니다.
소중한
생명 앞에서
너무나
이기적인
우리들의
욕망을 만납니다.
이웃을 위하는
마음이 곧
나 자신을 위하는
마음입니다.
추악한 욕망에
쓰러져가는
우리들
생명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릇된 욕망을
바로잡으십니다.
인간의 역사는
수많은 살인의
역사로 얼룩져
있습니다.
생명의 가치를
바로잡을
때입니다.
요한 세례자의
숭고한 희생을
기억합니다.
그 희생이
생명의 존귀함을
되찾아 주는
하느님을 향한
헌신이길
기도드립니다.
사람이
되어간다는 것은
생명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진실로 아는 것입니다.
생명은
살인과
폭력이 아닌
사랑과 나눔의
소중한 관계임을
믿습니다.
누군가의
수난과 십자가로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음을
기억하는 참된
기도의 시간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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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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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3284-9295 | 카톡ID jijive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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