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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당이 인기 있되, ‘한국 보수주의’가 인기 없는 이유
1. 보수세력에 필요했던 것은 짝퉁 ‘선군정치’ 스타일의 조갑제표 ‘상무정신’ 전쟁 용맹증이 아니라, ‘심판의 날’을 두려워 하는 마음이었다. : ‘보수세력 내부’가 ‘보수세력 내부’에 전쟁 불감증을 부추기고, ‘전쟁불감증’은 보수담론의 권위를 파괴한다.
‘보수세력’의 ‘정체성’논쟁을 통한 열린당 공세 전략 없이는 ‘정권 쟁취’가 어렵다. 집권 여당이 경제를 전부 장악했기 때문에, 여권이 낙점한 야당내의 ‘어용’인사를 제외하고서는 ‘경제’를 이슈로 내걸 입장도 되지 않는다.
보수세력이 국민에 신뢰를 얻는 기본은 무엇인가?
국민의 자유와 생명과 재산권을 지켜주는 정당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국민의 자유와 생명과 재산권은 어떻게 지켜주나? 반대 편 이미지로서 구약성경의 구석 구석에 있는 ‘멸망이미지’들을 두려워 하는 바탕일 것이다. ‘멸망이미지’에 대한 두려움이 국민들에 박히지 않고는, 국민의 자유와 생명과 재산권을 지켜주는 정당에 대한 신뢰감은 생기지 않는다.
조지 레이커프의 [도덕의 정치]와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가 말하는 공화당은 ‘엄한 아버지’모델이라 한다. 세상은 살기 어렵다는 바탕이 공화당 지지자의 권위를 세운다는 것이다. 북한의 위기를 전략전술적으로 강조한다는 것은 좌익의 접근 법이겠지만, 북한공산집단의 대한민국 자유 박탈에 대한 ‘6.25’전쟁의 기억에 대한 또다른 재앙을 두려워 하는 마음이 보수 세력의 정치담론들의 ‘권위’를 높였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북한민주화운동에 대하여 헌법 전문 하단부를 사용하면, 국민들에 항시 경계 태세 없이는 재앙에 떨어질 수 있다는 경계심 속에서 북한인권에 관심갖게 할 수 있다. 바다를 건너다가 조갑제기자와 장기간 충돌을 보였는데, 그것은 국가안보를 절대로 말하지 않는 조건으로 북한인권에 관심 갖는 차원 때문이었다.
우리가 사는 사회가 원칙과 도덕에 맞춰 살지 않을 때, 언제든지 재앙에 떨어질 수 있다는 바탕 없이는 ‘보수세력’지도자 담론의 권위가 생길래야 생길 수가 없다.
미사일 국면에서 언제든 터질 수 있는 위기조짐이 있었고, ‘정체성 논쟁’은 보수 세력 지도자 담론의 권위가 생겼어야 마땅했다. 그러나, 오히려 역풍이 불었다.
(1) 대한민국 국민이 죽건 말건 북한인권 만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일반인들의 감수성에 비해서 과장되게 용감무쌍하다.
이들은 자기 안에 드러나는 전쟁지옥에 대한 두려움에 대한 자발적 복종이 아니라, 일본 소당파 정파주의의 ’의리‘와 ’연줄‘주의의 저학력사회의 미신논리를 끌어서 권위를 만든다.
(2) 친북좌파들의 시점에서 생산된 정보를 믿어서, 정말로 미사일이 북한과 일본을 겨냥하지 북한육군이 한국 침략하기 위한 것이란 사실까지를 생각하지 못하고 있다.
정말, 중요한 것은 북한을 북벌 섬멸할 수 있다는 극소수 수준의 사무라이적(대한민국 역사에서 단 한번도 찬양되지 못한) 배포 자랑 수준으로 전쟁에 담담한 군인정신을 외부에 따라 배워라 하는 바가 아니다. 그러면 그럴 수록 ‘좌익정보’믿는 이들과 양쪽에서 ‘전쟁불감증’을 조장한다.
따라서, 보수주의정당이 지켜낼 수 있다는 신뢰감 부여하는 전략은 원천적으로 차단된다.
전쟁 용감증 보다는 오히려 ‘전쟁공포증’이 더 필요한 시점이다. 전쟁 용감증을 보여서 지도자됨을 과시하는 것은, 과도하게 ‘깡패 건달적 사유’요 보수주의 사유에서 단 한번도 있었던 바가 없던 바이다. 설사 지도자가 전쟁 결단을 할 수 있어도, 항시 ‘전쟁 공포증’의 국민을 생각했어야 한다. 그러한 배려 자체도 없는 경우를 왕왕 만난다.
자신들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를 결코 반성하지 못하는, 철저하게 한나라당 인기 쇠퇴를 꿈꾸는 우파 지도자가 있다.
열린당을 이기려면 ‘멸망위주’로 좌익사상이 이끈다를 말해야, 한나라당의 보수성을 증명할 수 있다. 그런데, 전쟁 공포증이 어디에서도 일어나지 않고 있다. 그러니, 자연스레 한나라당의 반공보수성이 인기가 없다.
2. 90년대 이후 보수파 리더의 성령*정신 중심 거부=보수의 고루한 이미지 장착.
헤겔 변증법의 정신이 성령 하나님이라고 신학과 교수가 쓴 책을 보았다. 하나님의 역사가 끝이 있을까? 멈추고 고루하게 있을까?
보수주의자의 시점에서 현대사를 볼 때 코끼리를 어느 시점에서 보느냐에 따라서 그려진 그림처럼 분명한 그림이 있다. 반면에 좌파 세력의 시점에서 볼 때도 그 시점에서 그려진 그림이 있다.
1988년 이전의 헤겔은 국민윤리교재의 중심설계 철학자이며 ‘마르크스 없는 철학사’(신학사)의 중심인물이었다. 그러나, 1988년 이후의 헤겔은 마르크스 공산혁명을 예비한 프랑스혁명의 철학자였다.
성령중심주의를 근본적으로 거부하는 물질중심적인 아리스토텔레스적인 다소 애니미즘적인 사고관으로 나아가면, 성령중심은 ‘물활론’의 죽음이 된다.
1956년에 집필된 한경직 목사의 [기독교란 무엇인가]의 ‘과학주의 비판’은 프랜시스 후쿠야아마의 [부자의 유전자와 가난한 자의 유전자]에 드러난 바에서도 고스란히 반복된다. 마르크스가 성령중심의 헤겔사상을 교회의 고리타분한 부자유로 보는 지점은, 박수무당을 교회에 억지로 다니게 했을 때의 모양과 비슷하다.
조갑제기자께서 자신의 현대사 해석을 ‘과학적’이라고 평가했던 바는, 인터넷 상에서 조갑제기자 지지자 다수가 동의할 것이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원래 역사는 그게 아니다. 대한민국이 하나님이 도와주는 세계사의 빛이면서, 대한민국의 역사는 하나님의 역사이다. 대한민국 역사는 ‘국민국가 대한민국의 정신’의 역사인 것이다.
보수의 고루한 이미지는 결국 맑스가 바라보는 헤겔의 고루한 이미지와 동일하다. 중립적 역사학자는 [사상계]라는 함석헌 인맥이 [조선일보]에 기고하기 시작한 1990년대부터 국민정서의 부패가 있었다고 본다. [뜻으로 보는 한국 역사]는 해방신학이라는 중심골격에 이탈요소의 구절들을 엄청나게 내포하고 있다.
보수세력 내부를 장악한 여론지도자는 맑스주의를 쓰길 포기하지 않는다. 하물며, 인터넷 모 네티즌들은 현상 분석에서 맑스주의는 유일한 절대불명의 도구라고 보수 사이트 게시판에 올린다.
보수세력은 철학적 기반이 약하다. 특히, 보수주의자들이 이상형으로 보는 모든 방향에 달관한 사람의 숫자는 더더욱 찾기 힘들다.
보수세력들 중 일부는 확실히 보수당의 우위 시절에 몇 몇 구절로 사람 붙잡고 못 살게 하는 데에 재미 들린 이들이 분명히 존재한다. 이는 바다를 건너다만의 자의적 느낌이 아니다. 그러나, 그러한 이들의 존재를 핑계로 회개하여 사고 바꾸지도 않고, 계속 마르크스주의 프레임 안에서 좌익이 절대 유리하게 논의를 굳게하는 이들의 존재는 문제적이다.
반공논쟁을 하면서도 문민정부의 장점을 누린다면, 뉴라이트 어느 누구 하나라도 눈물 콸콸 흘리면서 ‘보수당 지지자’의 여론을 받는다면서 절대로 보수당에 불리하도록 맑스를 버릴 때를 지나서 아직도 사랑했습니다, 잘못 했습니다 하는 반성이 ‘말로 해서’나와야 된다.
뉴라이트를 중심으로 하는 반공논쟁의 핵심은 사람 못살게 굴기나 정적 배제하기의 수단이 아니라, 정말로 보수당의 정체성을 파괴하는 종교상에서의 ‘이단세력’으로서의 존재를 알고 각성하고 모두가 같이 주의하자는 바에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역사도 정말 움직이면서 약동한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대형 서점 교회책들에 서 있는 사람 거의 없고, 그러한 독서인구 미약만큼 약동하는 역사의 증거할 사람은 없다. 오직, 좌익맑스주의 시점의 고루한 보수만 남는다.
3. 맑스주의의 헤겔 보수주의 고루한 이미지를, 대원군 쇄국에 대한 민비의 개혁성으로 덧씌우는 개발. 이것은 명백하게 심판의 날에 심판되어야 할 지식사기극이면서, 정치사기극!!!
문민정부가 가장 많이 썼던 ‘개혁’이란 말에서 사회변화를 놓고 보면, 지나놓고 보면 종교인 신분을 정치사기극에 이용한 경우로 정리된다.
성령중심주의를 거부하는 맑스주의의 혁명성을 대원군에 반대하는 민비의 개혁성에 덧씌우는 조갑제기자의 논법은, 북진자유통일을 통해서 북한에 집문서 있는 사람들의 열광을 이용하면서도 황장엽씨의 변형적 현상유지론에 동의의 인장을 찍게 하는 전략을 내세운다. 황장엽씨는 변형적 현상유지론을 내세웠음에도 북한에 집문서 있는 사람들의 기대감을 이용하는 정치적 세력을 받았으면, 법률적 의미의 ‘사기극’에 해당된다.
한나라당 중심 지지자가 대다수가 반대하는 한나라당에 연속되는 ‘뽑아놓으면 좌익’이란 담론은, 공산주의 담론의 공산주의 지향성과 민비의 근대성 담론을 교묘하게 짜깁기 연결해놓은 조갑제기자 담론의 탓에 원인된 바 크다.
황장엽 주장으로 김정일이 중국처럼 개혁되어야 한다는 바탕에 대부분이 민비처럼 개방근대화 할 것으로 알지만, 그것은 황장엽 주장의 변형적 현상유지론을 보수정치를 위한 것처럼 사기극을 벌이는 바의 중심 논리가 된다.
4. 문민정부 때 믿었던 한나라당을 도와준다는 좌익지식인에 완벽하게 사기당하고, 대한민국에 반대되는 정체성으로 국민교육에 성공되었다.
6.3 운동을 놓고서 한일회담의 굴욕성에 반대한 선량한 세력과 분명히 경우를 달리한 공권력에 대하여, 공권력의 정당한 집행 조차도 틀어서 거꾸로 트는 것에 대한 명백한 반대 입장이, 당권 선거를 놓고 존재한다.
김영삼 대통령 때 ‘권력’이 역사를 어떻게 고쳐쓰는 지 너무 배웠다. 김영삼 대통령 때 좌파 지식인들은 표면적으로는 보수적 지식을 내놓으면서 자 안심해라 했지만, 일관되게 체계적으로 좌파적 수준으로 길들였다.
통일을 준비한다면서 대한민국 정체성과 단결력을 거부하는 차원으로서의 변화를, 개혁이며 진보며 온갖 긍정적 이름으로 규정되었다.
[서울 1945]는 건국의 정당성의 완벽한 거부이다. 북한인권운동론에서도 곳곳에서 김영삼표 역사 다시 쓰기에 접속되며 건국의 정당성을 원천적으로 거부한바의 의미가 크다.
보수세력들은 문민정부 기득권 세력들이 장악한 언론계를 통하여, 국민을 세뇌하는 좌익지식인을 비판하지 못한다.
대한민국의 중심사의 흐름을 이야기하려면 하나님의 임재를 받는 현대사와, 대한민국의 역사가 일제 36년과 6.25전쟁을 거쳐 생겨난 ‘국민적 정신’의 역사라는 동의가 필요하다. 그러나, 어피니언 리더로서 선명하게 그러한 입장을 강조하는 자가 적다.
한나라당은 인기가 있다. 즉 열린당은 정말로 국민 기대의 최악이다. 그러나, 보수이념은 인기가 없다.
‘들판형’ ‘책상형’을 나누며 ‘투쟁형’을 강조하는 보수담론의 가장 핵심어구조차도, 불순오염의 싹이 담겨 있다.
어디 보수담론이 ‘들판’을 좋아했던가? ‘가정’과 ‘안식’을 좋아했다. 그것은 맑스주의의 비전향자가 만든 웃기는 논리이다. 보수담론이 ‘투쟁’을 좋아했는가? 아니다. 사랑이다! 그러나, 확 엎어버리는 세력에 대해서는 무슨 이유로 주장하나? 진리나 정당성과 형이상학적 명분을 이유로 한다.
들판형 책상형 나누며 투쟁형을 강조하는 그 바탕에서, 한나라당이 인기 있되(잔챙이 선거 최강자)이되, 보수담론이 인기 없는(대선을 찍기에는 믿음이 약한) 바의 기초이다.
바다를 건너다는 ‘일상언어’의 힘이 세다는 신앙을 가진다. 이는 개별 개인 생각일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은 보편담론을 택한다. 그만큼 많은 시간을 사용하여 글을 쓰기도 한다.
‘대한민국 헌법’에 대한 ‘헌법교과서 해석’을 무시하는 자의적 해석을 통해서, 개별 사인간의 의리 문제로 인정해달라는 식의 주장들에 대해서, 왜 군인정치가 나왔는가를 느끼게 된다. 하나님은 그것을 인정하라 했는가? 아니다! 아니어야 하는데, 끝까지 고집 부리면?
박정희 대통령의 지성은 뛰어난 지성 몇 사람 이상보다도 더 훌륭했다. 최강의 지성들의 도움을 넉넉히 종합하는 바가 있었다.
박근혜대표가 대권을 쟁취하게 될 때, 군인 어르신에 말 버릇 없는 공성진의원보다는, 이승만정권 처럼 ‘인재획득’을 위한 좌파정권 봉사자들의 제한적 타협이 있을 것이다. ‘역사 고쳐 쓰기’란 상징적 단절을 빼면 원만한 연속이 되는 연착륙 중심이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이승만 정권이 ‘정치범’에 비타협적인 수치만큼은 명확히 그래야 할 것이다.
‘진리’를 믿지 않고 ‘효율’이란 측면에 또다시 유혹에 빠지면, 결국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대한민국에 대한 믿음을 버리는 것이다. 국민의 안보가 풍전등화인데, 국민의 위기를 나몰라 하는 정부에 대해서, 이것은 아니잖아 하는 진리지향적으로 마침내 붕괴될 것이란 기대감과 열망!
5. 전두환 노태우에 과도하게 가혹했던 김영삼 정부출신들의 ‘하나님의 뜻’을 다했던 군사정부의 권력 놓으면 큰일 났다는 바탕의 ‘분파주의적 문제제기’..... ‘씨너지’는 사라진다.
공권력 집행에서 피해자였던 이들에 대하여 ‘선거’를 통한 무분별한 면죄부는 하나님과 함께 하는 대한민국 정신의 ‘공의’를 중대하게 훼손했다. 이제, 6.3의 운동가 상부층을 허락하면 대한민국 공권력은 남김없이 불법 부정의 역사가 된다. 대한민국 공권력을 비아냥대는 국가인권위원회와 과거사위 수준을 넉넉히 초과한다.
한나라당에서 박근혜는 안된다는 바탕이 일찌감치 나왔고, 그 발톱은 쉽게 잊혀질 수준이 아니다. 그러한 일이 있고 보면서 문민정부 봉사지식인 백낙청교수의 6.15반역질이 있고 나니 정말로 문민정부에 한나라당 지지자 전체가 사기당한 바를 느끼게 된다.
하나님의 뜻은 사라지고, ‘김영삼의 마음’이 보수당 지지자들 사이에 차지했다. 그와 동시에, ‘김영삼의 마음’과 반대로 결속되는 파벌이 창출될 수 밖에 없어진다. 보수당에 보편원리의 자유민주주의보다는 일본식 파벌 정치에서의 최악의 난장판(기원은 일본이되 일본에선 절대로 없을)을 본다.
기독교 근원 모델로서의 ‘법’중심이 있는 만큼, 김영삼의 마음 중심으로 왜곡되며 헌법에 대한 법학교재들의 보편적 해석을 거부하는 바에서는, 중대하게 보수당 지지자들에 좌절감을 준다.
‘왕조’란 말은 하늘을 버리고 땅의 인간의 세상을 세웠다는 측면의 죄악성이 강했다. ‘세습’의 반대는 일반인들에 똑같이 임재하는 하나님의 섭리의 존중으로 드러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