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혼 초 24평짜리 서민아파트 시절, 호박죽을 끓여 이웃 노인 내외분에게 대접한 답례로 받았던 걸작품을 편액으로 만들어 이사 때마다 잊지 않고 들고 와서 한 쪽 벽면을 장식하였는데 이상하게도 저 놈은 우리 부부가 싸움할 때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가 싸운 후에야 타이르곤 했다.
오늘처럼 바람이 스산하게 부는 12월의 휴일저녁에는 어묵국물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쿵, 하고 문을 여닫는 소리가 들리고 아르바이트로 한 달 치 근로의 대가를 거머쥐고 개선장군처럼 딸이 돌아와 외식을 하잔다.
그런 딸이 대견한 지, 아내는 마냥 웃고 있고 이미 바늘이 아니라 실이 된 내 자신이 어색하여 벽을 쳐다보니 8년 전에 찍은 사진 속에서 가족들은 저마다 행복에 충만해 웃고 있고 가벼운 말다툼의 여파로 아내만 유독 어눌하게 웃는다
천정에 매달린 형광등 불빛이 오늘따라 방안가득 따뜻하게 비추고 사진 옆에 걸려있던 저 놈이 어묵국물 같은 기운을 흘리며 또 내게 말을 한다. 서기만당瑞氣滿堂, 저 놈은 꼭 내게 후회만 가르쳐 준다.
첫댓글 오래 살아온 부부일 수록 서로가 서로에게 길들여져.. 누가 승자요, 누가 약자라는 사실조차 잊고 살아가나 봅니다...그것이 잔잔한 행복일테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