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 기도)
주님,
새 날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오늘도 예진이와 대화할 때 지혜를 주시옵소서.
저녁에 서목사님과 사모님을 만납니다.
소중한 교제의 시간이 되게 하옵소서.
말씀 앞에 나아갑니다.
십자가 보혈을 의지합니다.
정결한 마음 주시옵소서.
성령님,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본문)
27. 예수와 제자들이 빌립보 가이사랴 여러 마을로 나가실새 길에서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28. 제자들이 여짜와 이르되 세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 더러는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29. 또 물으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매
30. 이에 자기의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경고하시고
31.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
32. 드러내 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매
33.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34.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35.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3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37. 사람이 무엇을 주고 자기 목숨과 바꾸겠느냐
38.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9:1.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는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하시니라
(본문 주해)
27~28절 : 예수께서 빌립보 가이사랴 여러 마을로 다니시는 길에서(이스라엘 북쪽 끝에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면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예수님을 누구라고 하는지 물어보신다.
그러자 제자들이 예수님을 보고 세례 요한이라고 하는 자들이 있다고 한다. 세례 요한의 목을 자른 헤롯도 예수님의 활동을 보고 받고서는 죽은 세례 요한이 다시 살아났다고 하였다(막6:14).
또 어떤 사람들은 엘리야라고 한다. 구약에서 메시아가 오기 전에 엘리야가 오리라고 말라기 선지자가 예언하였던 것이다(말4:5).
또 어떤 사람들은 선지자 중의 한 사람으로 본다고 한다.
이러한 대답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약의 선지자들이 말한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다는 증거이다.
29~30절 : 그러자 예수께서는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신다.
이에 베드로가 나서서 주는 그리스도라고 대답을 한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16:16~17)
예수님은 이 대답을 들으신 후에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신다.
그것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자기들이 상상한 그리스도를 생각하고 따를 것이기 때문이었다.
31~33절 : 그동안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으시고 유대의 지도자들에게 버림을 받아 죽으실 것을 구체적으로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그런데 약 3년을 제자들과 함께 하신 후에 이제 예루살렘으로 가셔서 고난받고 버림받아 죽으실 것을 제자들에게 알리시는 것이다.
‘비로소’라는 말씀은 그때에 처음으로 말씀하셨다는 뜻이다.
“예수께서 드러내 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바싹 잡아당기고, 그에게 항의하였다.”(32절, 새번역)
“예수께서는 이 말씀을 명백하게 하셨던 것이다. 이 말씀을 듣고 베드로는 예수를 붙들고 그래서는 안 된다고 펄쩍 뛰었다.”(32절, 공동번역)
이에 베드로가 그렇게 되면 안 된다고 예수께 항변한다.
이때 예수님은 베드로를 향하여 ‘사탄아 물러가라’고 하시면서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고 나무라신다.
하나님의 일은 예수님께서 고난 받으시고 버림받고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이다. 그리고 부활이다. 그런데 베드로와 제자들과 모든 유대인들은 이런 메시아를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가시는 길은 십자가에서 죽기 위하여 가시는데 제자들은 예수님이 왕이 되면 한 자리 차지하려고 따라간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이 어떤 메시아인지 분명하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34~35절 : 예수께서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예수님을 따라오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고 하신다.
자기부인이나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말씀은 ‘네가 원하는 메시아사상을 버리라’는 말씀이다. 즉 혈과 육으로 생각한 그런 메시아나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라는 말씀인 것이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라간다는 것은 자기를 부인하는 길이 아니라 자기의 공로로 높은 자리 차지하려고 가는 길이었다. 그것은 자기를 살리려고 가는 것이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기 위하여 가는 것이 아니었다.
또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려고 하면 잃을 것이라고 하신다.
우리의 모든 행위가 나를 살리려고 하는 행위이다.
생존은 당연히 나의 목숨을 구원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생명의 문제도 나의 생명을 살리려고 교회도 다니고 예수님도 믿는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자기 목숨을 구원하려고 하면 잃을 것이요, 오히려 예수님과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고 하신다.
36~37절 : 사람은 자기를 살리기 위하여 노력을 하며 산다.
하지만 온 힘을 다하여 세상의 어떤 것을 얻었다고 해도 그 목숨을 잃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말씀하신다.
38절 :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삼 일만의 부활이 예수님이 보여주실 표적이다.
그러므로 세상의 성공이나 기적 등을 표적을 삼으려고 하고, 예수와 그의 말씀(복음)을 부끄러워한다면 그것이 악하고 음란한 세대인 것이다.
인자는 장차 심판주로 오신다. 그는 음란하고 죄 많은 세상에서 제자들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심판하신다.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예수와 그의 복음을 부끄러워한다면 심판 날 예수도 그를 치욕스럽게 생각할 것이다.
‘인자’란 예수님께서 자신을 두고 하신 고유 칭호이다. 이 인자는 에스겔서(1:26)와 다니엘서(7:13)에 언급된다.
9:1절 : 예수님의 제자들이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과 성령의 임함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게 되지만 이것은 세상이 알아보는 권세와 능력이 아니다.
그런데 그 죽으심과 부활 이전에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제자들 몇 명을 산 위에 데리고 가셔서 보여주신 것이다.
예수와 함께 변화산에 오른 베드로, 야고보, 요한은 하나님 나라를 미리 본 자들이다.
(나의 묵상)
복음을 알기 전 나는 예수님을 믿는 것이 이 세상에서 나를 더욱 잘 되게 해 주시는 것이라 믿었다. 그래서 교회중심의 여러 가지 일을 하면서 어느 정도는 착하게, 베풀면서, 약간의 손해는 감수하면서 살아야하는 것이겠거니 했다. 그렇게 살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셔서 내게 복을 주시겠지 기대했던 것이다.
그런데 복음을 알고 십자가를 보게 되었다.
십자가는 그저 고상하고 거룩한 기독교의 상징물이 아니라, 이 땅에서 영생을 사는 성도의 나아갈 길이었던 것이다. 예수를 믿는 삶이란 나를 확장해 나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자아확장의 의지를 십자가에 못 박는 삶이었던 것이다.
이것을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계신다.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34~35절)
자기부인,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은 어느 정도의 금욕적인 생활-어느 정도 착하게, 손해보고-을 뜻하는 것이 아니었다. 또 그 금욕의 궁극적인 목표가 더 많은 것을 얻기하기 위한 의도였으니 금욕이라도 사실은 금욕이 아닌 것이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은 저절로 되는 일이 아니라, 예수님 앞에 내가 완전한 죄인인 것을 알기에 ‘아멘’이 되는 일이다. 그 죄인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 주님의 은혜가 어떤 것인지를 알기에 ‘아멘’이 되는 일이다.
여전히 이 땅에서 내가 잘 되기를 바라고 나의 나라를 확장해 나가고자 한다면 절대 순종할 수 없는 말씀이다.
입이 천 개 만 개라도 예수님 앞에서 나 자신을 주장할 말이 없다는 것을 알기에 자아확장 따위의 의지를 부인하고 내버리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이 세상을 사는 동안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십자가에 못 박으며 사는 삶인 것이다.
이러한 삶이 전에는 이해되지 않았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누가 저렇게 살겠노?’ 하고 고개만 저었다. 내 방식의 신앙생활에 스스로 만족하여 나를 위한 열심을 내고 그것을 은근히 자랑했었던 것이다.
그런데 과연 사람이 할 수 없는 그 일을 주님께서 해 내신 것이다.
성령을 보내셔서 복음에 눈을 뜨게 하시고 귀를 열어주신 것이다.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예수님이 내게 물으실 때, 나는 대답할 수 있다.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주님은 만물의 창조자이시며 주인이신 분이십니다.
주님은 내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자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시고, 무덤에 장사되시고, 다시 살아나셔서, 나타내 보이신 분이십니다.
하늘에 오르신 주님은 내게 성령을 보내주셔서 십자가에 연합되는 삶을 살게 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 주님이 이 땅에 다시 오실 것을 믿습니다.
이분이 내가 믿는 예수님이십니다.”
베드로가 한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주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을 이해했기 때문이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사탄아 물러가라’ 할 만큼 큰 꾸지람을 들은 것이 내게는 너무도 고마운 교훈이 된다.
주님의 십자가는 내가 연합되어야 할 십자가임을 가르쳐주는 교훈이다.
그 십자가에 이 세상에 대한 나의 탐심과 자기의와 자기주장의지를 못 박는 것이다. 이것이 나를 부인하고 나의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나로서는 하고 싶지도 않고 할 수도 없는 일이지만, 성령께서 그 마음이 되게 하시니 매일이 기적이다.
그리고 주님이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변화산에 오르셔서 하나님 나라를 미리 보게 하신 것처럼 매일 나로 하여금 말씀 앞에 나아가 하나님 나라를 누리게 하신다.
(묵상 기도)
주님,
자기확장이 목표인 제게 자기부인의 십자가라니요!
근처엔 얼씬도 하고 싶지 않았던 십자가,
초라하고 어리석어 보이는 십자가,
저의 모든 자유를 얽어맬 것 같은 불길한 십자가였습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역사하시니
보배 중의 보배인 십자가임을 알아봅니다.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배피로 저를 덮어주시는 은혜에 감격합니다.
자기부인이란 것이 마땅하고 마땅한 것임을 알게 되고 그렇게 살지 못한 것을 회개합니다.
죄인으로 하여금 의인의 길을 가게 하시는 십자가만을 굳게 붙듭니다.
성령님, 장차도 한결같이 인도해 주실 것을 기도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