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ull Name: Oscar Palmer Robertson
Born: 11/24/38 in Charlotte, TN
High School: Crispus Attucks (Indianapolis)
College: Cincinnati
Drafted by: Cincinnati Royals, 1960
Transactions: Traded to Bucks 4/21/70
Height: 6-5 Weight: 220 lbs.
Nickname: Big O
Honors: Elected to the Naismith Memorial Basketball Hall of Fame (1980); Rookie of the Year (1961); NBA MVP (1964); NBA Champion (1971); Nine-time All-NBA First Team (1961-69); All NBA Second Team (1970,'71); 12-time NBA All-Star (1961-72); Olympic gold medalist (1960); NBA 35th Anniversay Team (1980); One of the 50 Greatest Players in NBA History (1996).
'Big O' 오스카 로벗슨은 '올-어라운드'하다고 불리는 다른 모든 선수들에 AGAINST한다. 그리고 로벗슨은 아마도 영원히 표준(STANDARD)로 남을 것이다.
수치상으로, 61-62시즌 로벗슨이 세운 기록 하나만 보면 충분하다. 리그에 들어와 2번째 시즌을 보낸 그는 30.8PPG 12.5RPG 11.4APG으로 시즌 평균 트리플 더블이라는 어마어마한 기록을 남겼다. 매직 존슨이나 래리 버드조차도 이런 수치를 따라가지 못한다.
신시내티 로얄스와 밀워키 벅스에서 뛰며 14시즌 동안 26,710득점을 올려 당시 가드로서는 역대 최다 득점을 올린 선수가 되었다. 카림 압둘자바, 칼 말론, 윌트 체임벌린, 마이클 조던, 모제스 말론, 엘빈 헤이즈, 하킴 올라주원만이 로벗슨보다 통산 득점이 높다. (*주:결국 가드 중에는 조던 담이네요)
그의 25.7PPG은 은퇴한 선수들 중 역대 6위이며 6시즌 30득점 이상을 올렸다. 존 스탁턴과 매직 존슨의 로벗슨의 9,887어시스트 기록을 넘어섰지만, 어떤이는 로벗슨이 뛰던 시기는 현재보다 어시스트 숫자를 기록하기가 어려웠다고 주장하기도 한다.(*주:어시스트 인정 범위에 관한 이야기겠죠?) 또한 그는 통산 7.5RPG을 올렸고 가드로서는 드물게 팀 내 리바운드 1위를 기록한 시즌도 있었다.
로벗슨의 플레이메이킹과 뛰어난 득점력은 계속해서 극찬을 받았고 마침내 그의 선수생명의 절정인 NBA 타이틀 획득을 맛본다. 60-61시즌 올해의 신인상을 받았고 12년 연속 올스타 출전에 9시즌 연속 올NBA퍼스트팀 선정, 63-64시즌 MVP수상, 71년에는 벅스를 챔피언에 올리는데 일조했다. 이후 79년에는 명예의 전당에 올랐고 96-97시즌, 50주년 행사를 맡아 위대한 50인 중 하나로 뽑혔다.
6피트 5인치 신장에 210파운드 체중이었던 로벗슨은 역대 첫번째 'big guard'였다. 매직 존슨은 로벗슨이 NBA에서 첫번째 어시스트, 리바운드, 득점을 기록했을 때 1살에 불과했다.
얼마나 로벗슨이 뛰어났느냐고? 셀틱스 감독이었던 레드 아워백은 이렇게 말했다. "그는 너무 위대해서 나를 겁나게 했다." 전 팀 동료 제리 루카스는 인디애나 스타와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그는 확실히 믿을 수 없는, 시대를 훨씬 앞서 나간 인물이다. 오스카보다 더 완벽한 선수는 없다."
1938년 태어나 미네아폴리스의 더럽고 가난한 격리 주택 단지에서 자란 로벗슨은 그곳에서 살면서 농구를 배웠을뿐만 아니라 우선 인종차별과 경제적 불평등에 대해 깨달았다. 그는 야구 대신 농구에 관심을 가졌는데 농구는 '가난한 아이들의 경기'였기에 동네에서 더 인기 있었다. 테니스 공을 토스하고 복숭아 바구니에 고무 밴드를 집어넣으며 어떻게 슛을 던지는지 익혔다.
로벗슨은 흑인들로만 구성되더 체육관도 없으며, 로벗슨이 오기전까지 백인 학교로부터 경기하는 것을 거절 당했던 크리퍼스 어툭스 고교에 진학했다. 그곳에서 그의 타고난 신체능력과 본능은 농구 경기의 기초를 가르치는 것에 생각이 사로잡힌 레이 크로우 감독에 의해 세련되어 진다.
로벗슨은 부드럽게 그의 거리에서 배운 똑똑함과 감독의 기초를 융합시켰다. 4학년 시절 24PPG으로 인디애나주 미스터 배스켓볼에 뽑혔다. 55년 팀은 31승 1패, 56년에는 31전 전승을 기록했으며 이 기간에 주 기록인 45연승을 올리기도 했다. 물론 2년 연속 주 챔피언. 모두 흑인들로만 구성된 학교가 인디애나폴리스 주 역사상 처음으로 챔피언이 된 것이다.
하지만 지역 유지들은 팀이 축하 파티가 제대로 열리는 것에 대해 uneasy하게 여겼다. 선수들은 파티를 열기 위해 도시 밖으로 나가야만 했다. 그 이유에 대해 로벗슨은 인디애나폴리스 스타에 이렇게 말했다. "그들은(유지들) 흑인들이 downtown을 tear up 할 것이라고 말했다"
로벗슨의 코트 위에서의 뛰어남과 코트밖에서 당한 인종 차별은 신시내티 대학 시절까지 이어졌다. 대학 시절, 그는 믿을 수 없는 그 자체였다. 거의 블로킹 당하지 않는 원핸드 슛 스타일을 바탕으로 33.8ppg을 올렸고 3회 전미 득점 1위, 1회 올어메리컨과 올해의 대학 선수 상을 기록했다.
3년간 신시내티 베어캣츠를 79승 9패의 성적으로 2번 파이널4에 진출시켰고 70년 피트 마라비치에 의해 깨지기 전까지 NCAA 역대 득점 1위 자리에 그의 이름이 있었다. 2학년 시절 메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열린 토너먼트 경기에서 56점을 넣기도 했고 62점을 넣은 경기도 있었다.
하지만 신시내티는 이전에 흑인 선수를 보유하고 있던 적이 없었다. 50년대 후반 중서부지역으로의 원정 경기는 끔찍했다. 3학년 시절까지 barred from hotels 했다.(*주:숙박을 거부당했다는 뜻이겠죠?) 로벗슨은 종종 대학 기숙사에 머물러야만 했다. 수년후 그는 인디애나폴리스 스타에 "나는 그들을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60년 올림픽 금메달 팀의 공동 주장이었던 로벗슨과 제리 웨스트는 60년 드래프트에서 각각 1,2순위로 NBA에 입성했다. 로벗슨은 신시내티 로얄즈의 지역 PICK(팀이 지역 대학 스타을 지역 드래프트권으로 데려오면 1라운드 지명권을 포기)이었다. 웨스트는 미네아폴리스에서 LA로 연고지를 옮긴 레이커스행이었다. 어린시절 너무 가난해 농구공을 가질 수 없었던 로벗슨은 연봉 33,000달러 계약을 맺는다.
60-61시즌 로벗슨은 30.5PPG으로 득점 3위에 올랐고 신인왕을 타며 NBA scene을 explode했다. 'Big O'는 올스타전에서 23득점에 밥 쿠지가 종전에 올린 것보다 하나 많은 14어시스트로 올스타전 기록을 세우며, MVP에 올랐다. 또한 정규시즌 9.7APG으로 이 부문 1위에 올라 쿠지의 8년 연속 어시스트 왕 기록을 차단했다. 25.3PPG을 올린 포워드 잭 트와이맨과 함께 팀을 이끌었으나 33승 46패에 그쳤다.
로벗슨이 진정한 NBA 스타덤에 오르는 데는 2번째 시즌만으로 충분했다. 그는 61-62시즌 평균 트리플 더블 기록을 세웠고 팀의 6년 연속 플레이오프 진출 기록(이 시즌이 첫번째 시즌)의 시작을 이끌었다. 11.4APG으로 어시스트 1위를 수성했고 899어시스트로 2년 전 쿠지가 세웠던 715어시스트 기록을 깼다. 샤프슈팅을 자랑하는 로벗슨은 47.8% 야투로 이 부문 리그 4위였고 12.5RPG은 개인 통산 최고 기록이다. 하지만 성공은 PO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1라운드에서 3승 1패로 디트로이트 피스톤즈에 패했다.
다음 시즌 28.3 ppg, 10.4 rpg, 9.5 apg, .518 field goal percentage로 맹활약했고 트와이맨의 성적도 뛰어났다. 신시내티는 디비전 준결승에서 시라큐스 내셔날즈를 꺾고 보스턴 셀틱스와 만난다. 로벗슨의 활약으로 7차전까지 가는 접전을 펼쳤으나 패했고 파이널에 진출한 셀틱스는 우승했다.
60년대 중반까지 보스턴과 식서스로 인해 로얄즈는 파이널 진출에 실패했다. 로벗슨과 셀틱스의 쿠지, 식서스의 할 그리어 클래식 매치업은 라이벌 관계를 형성한다.
1963-64시즌 로벗슨은 리그의 도미넌트 플레이어 중 하나가 된다. 그는 올스타전과 정규시즌 MVP를 독식했고 로얄즈를 55승 25패 성적으로 이끌었다. (동부 디비전 2위) 리그 어시스트 1위 (11.0 apg), 자유투 성공률 1위(.853)에 올랐고 득점 2위(31.4 ppg)를 기록했다. 당시 로얄즈는 트와이맨, 루키 제리 루카스와 웨인 엠브리 프론트 코트와 애드리안 스미스와 로벗슨이 백코트를 형성하는 막강 라인업이었다. 또한 로얄즈가 로체스터에 연고지를 두던 시절에 팀 소속으로 뛰었었던 잭 맥마혼을 신임 감독으로 영입했다.
포스트시즌에서 식서스를 4승 1패로 누르고 디비전 결승전에서 셀틱스와 만난다. 로얄즈가 최상의 전력을 갖췄고 로벗슨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보스턴의 상대가 되지는 못하고 스윕당한다.
10년간 로벗슨은 최소한 25PPG 6RPG 8APG을 기록했다. 당시 리그에는 웨스트, 체임벌린, 러셀, 엘진 베일러, 윌리스 리드, 존 하블리첵과 같은 수퍼스타들로 가득찼었던 시기다.
이런 전설적인 스타들과 동급-혹자들은 더 나앗다고 하는-의 활약을 펼쳤다는 것은 로벗슨의 위대함을 증명해준다. 60-68년 동안 로벗슨은 체임벌린이나 러셀 외에 MVP를 수상한 유일한 선수이다. 그리고 체임벌린의 어마어마한 총득점으로 인해 로벗슨은 득점왕에 오르지 못했다.
로벗슨처럼 많은 방면에서 뛰어났던 선수는 없다. 농구 관찰자들은 그의 하드워킹 플레이 스타일에 감탄했다. 닉스의 가드 딕 바넷은 이렇게 말했다."If you give him a 12-foot shot, he'll work on you until he's got a 10-foot shot. Give him 6, he wants 4. Give him 2 feet and you know what he wants? That's right, man, a layup."
레드 아워백은 농담처럼 그의 선수들에게 로벗슨을 막을 때면 손가락을 STRETCH OUT하라고 말했다. "오스카는 그들 손가락 사이로 샷을 던진다"
69-70시즌 전, 로벗슨이 선수로서의 전성기가 막바지에 다다렀을 때, 로얄즈는 쿠지를 감독으로 임명한다. 신시내티는 2년 연속으로 포스트 시즌 진출에 실패했었고 관중 동원은 형편없었다. 팬을 모으고 재미를 추구하기 위해 41세 쿠지는 심지어 유니폼을 입고 로벗슨과 백코트를 이루어 7경기에 출전하기도 했다.
그리고는 70-71시즌이 시작되기 전, 로얄즈는 로벗슨을 밀워키 벅스의 플린 로빈슨, 찰리 폴크과 트레이드 하여 농구계를 경악시킨다. 많은 사람들은 쿠지의 로벗슨에 대한 질투심이 이 트레이드를 성사기켰다고 말했다. 로벗슨은 쿠지의 여러 기록들을 깼고 신시내티는 갑자기 그둘에게 너무 작았다. 로벗슨은 이후 이렇게 말했다. "그의 이유가 무엇이었던, 그가 틀렸다고 나는 생각하고 그것을 절대 잊지 않을 것이다"
또한 1970년 로벗슨은 농구 역사상 가장 중요한 부분 중 하나인 CASE가 된다. NBA 선수 협회가 리그를 상대로 제기한 The landmark Oscar Robertson suit, NBA와 ABA 합병에 관한 것이다. 이 ANTI-TRUST SUIT는 당시 선수 노조위원장이던 로벗슨의 이름을 딴 것이다. 합병에 반대했고 대학 선수 드래프트에 관한 규률과 FA 규정에 관한 것이다. 소송이 제기된 지 6년 뒤 NBA는 마침내 합의점을 찾았으며 합병은 이뤄졌고 드래프트에 관한 것은 유지 되었다.
하지만 드래프트 된 선수는 그들의 prospective employers에 대해 1년간 거부할 권리를 갖게 되었다. 덧붙여, 더이상 팀은 FA와 계약할 때 보상을 제공할 것을 요구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것은 더 많은 FA계약을 조장했고 결과적으로 모든 선수들의 연봉 상승을 이끌었다.
31세지만 여전히 챔피언을 원했던 로벗슨은 2년차 센터 압둘자바(당시 루 앨신도)와 팀을 이끈다. 자바가 MVP와 득점왕에 올랐고 60-71시즌 밀워키는 리그 1위 성적인 66승 16패를 올렸다. 로벗슨은 19.4PPG 8.2APG 5.7리바운드를 기록했고 단 1경기만을 결장했다.
신시내티에서의 어려웠던 포스트시즌과 비교해서, 벅스는 상대적으로 순항했기에 71년 포스트 시즌은 로벗슨에게 익숙치 않은 경험이었다. 밀워키는 샌프란시스코와 LA를 제압하고 파이널에 진출해 볼티모어 불릿츠를 상대했다. 벅스는 웨스 언셀드와 거스 존슨으로 구성된 강력한 프론트 코트를 보유한 불릿츠를 눌렀고, 이는 12년만에 처음 나오는 파이널 스윕이었다.
챔피언십 링이 로벗슨의 유명한 FINGERS 중 경배할 만한 것 중 하나인 가운데, 리그 사람들은 이렇게 질문하기 시작했다. "Big O가 역대 최고인가?" 분명히 객관적으로 답변하기 어려운 질문임에도 불구하고 전국에 걸친 여러 스포츠 기자와 농구 전문가들에 의해 강력한 CASE들이 만들어졌다.
로벗슨은 노쇠함에 따라 은퇴를 고려했다. 그는 하지만 3시즌을 더 뛰었고 벅스에게 각각 디비전 타이틀을 안겼다. 72, 73 포스트시즌에서 고전한 뒤, 벅스는 로벗슨의 마지막 시즌인 74년에 파이널 진출에 성공한다. 클래식 시리즈 중 하나로 꼽히는 이 파이널에서 자바의 스카이 훅샷이 6차전 더블 오버 타임의 승부를 결정지었고 벅스는 벼랑 끝에서 기사회생하며 시리즈를 7차전으로 몰고갔다. 하지만 데이브 코웬스의 28득점 14리바운드 활약에 밀려 보스턴은 15점차 대승을 거둔다.
그것은 미국 역사상 가장 뛰어난 선수 생활을 한 선수 중 한명의 EMOTIONAL한 END였다. Big O는 위대한 가드로서 매직 존슨과 같은 선수의 기초였다. 하지만 아마 그 누구도 로벗슨의 전체적인 위대함을 따를 수는 없을 것이다.
통산 26,710득점 9,887어시스트 7,804리바운드 1,040경기 출전을 기록했고 48.5% 야투 성공률 83.3% 자유투 성공률을 올렸다. 플레이오프 86경기 동안 평균 22.2 points, 8.9 assists and 6.7 rebounds를 기록했다. 그는 6회 어시스트 1위 2회 자유투 성공률 2위에 올랐다. 그가 소속되었던 팀은 그의 14시즌 선수 생활 동안 10번 포스트시즌에 진출했다.
은퇴후 로벗슨은 그의 고향 인디애나폴리스의 흑인 거주 환경 개선에 힘썼다. 그는 소외 계층, 특히 흑인에게 적대적인 성향을 가진 사회 정책에 대해 엄격한 비판자로 남아있다.
첫댓글 정말 아트군요.. 간만에 big O 관련글 읽으니 ... 플레이를 못봐서 뭐라 할 순 없지만, 저런 득점에, 어시에, 리바에.. 야투율까지... 퍼펙트하네요..
평균트리플더블을 세우다니...차원이 다른 선수군요..
로벗슨을 본 사람이 조던을 보았다면 그사람은 로벗슨을 위로 놀수도 있는거겠죠??;
백과사전 게시판에 있는 TheSHOT 님의 번역 글이군요.^^;
mr. perfec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