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에
예수께서 나인이라는 고을에 가셨다 제자들과 많은 군중도 그분과 함께 갔다. 예수님께서
그 고을 성문에 가까이 이르셨을 때, 마침 사람들이 죽은 이를 메고 나오는데, 그는 외아들이고 그 어머니는 과부였다. 고을 사람들이 큰 무리를
지어 그 과부와 함께 가고 있었다. 주님께서는 그 과부를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에게, “울지 마라.” 하고 이르시고는, 앞으로 나아가
관에 손을 대시자 메고 가던 이들이 멈추어 섰다.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그러자 죽은 이가 일어나
앉아서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그 어머니에게 돌려주셨다. 사람들은 모두 두려움에 사로잡혀 하느님을 찬양하며, “우리 가운데에
큰 예언자가 나타났다.”, 또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찾아오셨다.”하고 말하였다. 예수님?! ? 이 이야기가 온 유다와 그 둘레 온 지방에
퍼져 나갔다.
40 여년 전 한 일간 신문에 아주 짤막한 기사 하나가 마음으로 형언할 수 없는 감동으로 지금도 가슴에 뭉클하게 남아
있습니다. 전라북도 김제 농가 근처에서 한 농부가 논에서 일을 하고 있었는데 자기 집에서 불길이 치솟는 것을 보았습니다. 급히 집으로
달려왔지만 이미 헛간은 폭삭 주저앉았고, 다시 불길이 본가로 옮겨 붙지 않도록 뛰어다니고 정신없이 동네 사람들을 모아들였습니다. 그때는
농촌에서 헛간에 재를 모아서 밭에 거름으로 쓸 때였기 때문에 꺼지지 않은 불씨가 헛간을 태운 듯 했습니다. 그 헛간에는 품고 있는
어미닭과 둥지가 있었을 뿐 다른 큰 손해가 없는 없는 것은 다행이었습니다. 농부가 나중에 불길을 잡고 쇠스랑으로 불탄 잔해를 청소하는데 완전히
까맣게 탄 어미 통닭을 들추자 그 안에서 병아리가 ‘삐약’ 거리고 나왔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과부는 지금이나 예전이나 참으로 가련한 여인으로 그 외아들이라면 삶의 전부였을 것입니다. 그의 삶을 온통
지배하고, 그의 생명을 지탱시켜주는 유일한 선물이었던 그 외아들이 죽기 전에 아픔이나 병으로 과부의 마음은 오죽 아팠겠습니까? 하나
뿐인 아들을 살리려고 속마음은 숯덩이가 되었고 아들을 대신해서 죽을 수 있다면 기꺼이 그렇게 했을 과부는 아들의 죽음 앞에 망연자실
넋을 잃고 울부짖으며 살아 있는 것이 한스러웠을 것입니다.
좌절하고
슬픔에 가득차 무덤으로 떠나 보내는 외아들의
상여를 뒤따라 가며 울고 있는 과부를 어떻게 위로를 해야 할지 몰라 사람들은 그만 할 말을 잃었을 것입니다.
과부가
된 것도 서러운데 유일한 희망이었던 외아들마저 잃고 상여 뒤를 따르는 그 처량한 여인은 제 설움에 겨워 더욱 커지는 슬픔 속에 살길마저
망막하여 아마 무덤까지도 함께 가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런 안타깝고 절절한 상황에서 그
누구도 그 여인의 슬픔을 대신할 그 어떤 말도 그 무엇도 할 수 없었을 때 생명의 주인이신 주님 만이 단호하게 "울지 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오직 그 말씀은 그
서러움을 없애 주시겠다는 희망의 말씀으로 죽은 외아들을 다시 살려 주시겠다는 확신에 찬 생명의 말씀인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지어 영혼이 죽게 되면 주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주님께서도 십자가를 지고 해골산에 오르시는
동안 세 번이나 넘어지셨다가 있어나셨습니다. 주님은 세 번이 아니라 아마 수도 없이 넘어지셨을 것이고 그 순간마다
일어나시려고 안간힘을 쓰셨을 것입니다. “나도 넘어졌다가 일어난 것처럼 너희도 일어나라.”라고 우리들에게도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세속적인 욕망으로 번번히 넘어지고 죽을 수밖에 없는 미약한 존재이지만 다시 죽음에서도
일어나라고 외치시고 살리시는 주님은 우리의 운명을 바꿔주십니다.
'반근착절'(盤根錯節)이라는
말은 작은 화분에 큰 나무를 심으면 뿌리가 땅 속 깊이 내리지 못하고 구부러지고 엉클어져서 온갖 고난을 겪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의
인생이 세상의 모진 장애에 부딪쳐 복잡해지고 죽음과 삶을 반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나무를 전지가위로 잘 다듬어 다시
살려내는 것처럼 주님께서는 구부러진 뿌리를 펴 주시고, 엉클어진 뿌리를 잘라주시고, 썩은 뿌리를 잘라내시어 우리를 다시 살려주십니다. 용기를
가지고 고난과 어려움에 도전해서 우리가 죽게 되었어도 다시 살려 주시리라는 주님께 희망을 두고 살아야 합니다.
"암탉이 제 병아리들을 날개 밑으로 모으듯, 내가 몇 번이나 너의 자녀들을 모으려고 하였던가"(루카13,34) 우리가 제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세상을 살아도 과부의 서러움을 살펴주신 주님 사랑의 품에서 용기를 내어 험난한 세상을 다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매일 죽어있는 저희를 주님의 넓으신 품에 모으시며 살려주시는 주님! 주님의 선물인 자녀들을 사랑으로 대하지 못하고
신앙교육을 소홀히 하였으며, 삶의 모범을 보이지 못하여 영혼과 육신을 허약하게 하였나이다. 이제 모든
것을 헤아리고 계신 주님께서 저희의 삶을 병들고 죽게하는 썩은 뿌리를 솎아주시고 구부러진 것들을 펴주시어
다시 생명을 주시고 기쁨과 희망으로 살게 하소서! 저희의 불찰을 다시 살펴주소서. 사랑과 자비의 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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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과연 그렇습니다. 삶의 끝에서 절망을 느낀 과부의 부르짖음을 듣고 가엾이 여기신 주님께서 오늘 얽히고 꼬인 우리 나라의 고통을 치유해 달라고 부르짖는 믿는이들의 간절한 기도를 들으시고 이 나라 백성들에게 다시 희망과 기쁨을 선사해 주시기를 기원합니다.
가엾은 과부의 처지를 눈여겨 보시고 다시 희망으로 일으켜 주시듯이 주님의 손길을 펴시어 희망의 나라를 이루어 주소서. 그 나라의 착하고 순한 백성이 되게 하소서.
당신의 날개밑으로 모이려는 어미의 심정을 헤아리는 마음으로 살겠습니다. 오늘 묵상글 너무 좋습니다. 야고보 아저씨와 수고해주시는 엘리자매님! 감사합니다.
썩은 뿌리와 굽은 뿌리를 당신의 가위로 잘라주소서. 주님
상실의 고통 속에 있는 과부에게 외아들을 되돌려 받는 일이 삶이 바로 선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삶이 선물이라고 생각한다면 상실의 고통이 새로운 의미로 바뀔 수 있을 것이고 오늘 하루의 삶이 이세상 그 무엇보다 더욱 값있게 느껴지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