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의 무희
이어진
구름은 말을 눈 안 깊숙이 감추네 내 앞에선 길어진 그림자만 떨구고
봄의 웃음을 얼굴에 쓰고 채소가 늘어선
정오의 시장에 가네
내 눈동자를 빼내어 지폐의 주머니에 넣고
흔들흔들 시장 안을 걸어봤으면
구름의 눈 속에 내 집요한 문자를 한 획씩
집어넣을 수 있다면
이빨들을 빼내어 장미의 주머니에 넣고
산들산들 공원 안을 산책하고 싶어
장미가 얹힌 붉은 담벼락 봄의 말 없는 입처럼 고요하지만
시간은 고개 숙인 태양으로 벽돌의 어깨만 흘리고
나는 봄의 머리를 얼굴에 달고
책의 문장 안에 스며들고 싶어
엎드린 동경과 싱그러운 연민 활활 타오르는 언덕을 지나
온종일 물결을 서성이는 파랑과 하양의
파장이 차오르는 바다를 지나
오지의 정글을 회오리로 스쳐 가는 나무들의 뿌리를 오르며
봄의 눈동자에 내 눈동자를 포개 얹고
바람 위를 나직히 흘러가고 싶어
공기의 말을 기둥에 넣고 안으로만 타오르는 촛불의 무희
내 날개를 접어 봄의 날개에 끼워 넣고
화창한 풍경 속을 날아봤으면
붉은 태양이 걷고 있는 오후의 거리
구름의 시간을 충분히 빌려 올 수 있다면
―이어진 시집, 『사과에서는 호수가 자라고』(여우난골, 2023)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 졸업
2015년 계간 《시인동네》로 등단
시집 『이상하고 아름다운 도깨비 나라』 『사과에서는 호수가 자라고』
연구서 『1980년대 한국 현대시의 멜랑콜리의 정치성 연구』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