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진년 만력 32년, 선조 37년(1604년)
봄 왜인 귤지정(橘智正)이 또 와서 통신하기를 간청하였다. 정부는 승 통섭(統攝) 유정(惟政)을 일본에 보내어 적의 정세를 상세히 탐색하도록 명하였다. 당시 사람들의 시가 있으니.
조정에 세 원로가 있다 말하지 마오 / 莫道廟堂三老在
안위는 오직 한 사람의 중에게 달렸는걸 / 安危都付一僧歸
하였다.
○ 무원(撫院) 요동의 대관(大官) 에서는 원임 유격(原任遊擊) 유흥한(劉興漢)을 본국의 변경에 파견하여 왜적의 정세를 정탐해서 더디고 급하고를 가릴 것 없이 수시로 급히 알리도록 하였다. 《고사(攷事)》
○ 통영을 고성(固城)의 두룡포(豆籠浦)로 옮겼다.
6월 왜국의 큰 배 한 척이 경상도 당포(唐浦)에 왔는데, 우리 수병에게 나포되었다.
12월 평안 감사의 서장은 다음과 같다.
신천 군수(信川郡守)의 치보(馳報)에, “경내에 괴이한 사람이 있어 산비(山非)의 집에서 접대받고 있었는데, 소위 괴이하다는 사람인 강가시(康加屎)와 그 처 향이(香台) 등을 잡아서 구금하였습니다. 이들을 접대하였던 산비와 그 남편 김형복(金亨福)이 자진 출두하여 고하기를, ‘강가시는 본래 구성(𪛃城) 읍내 사람인데, 아내를 거느리고 지난 10월에 와서 자고 인하여 우리 집에서 머물면서, 자신의 기괴한 아들 셋이 또 곁집에 있는데 하늘에서 내려왔다면서 집을 소제하고 기다리라 하였습니다. 그 말대로 몸채를 비우고 자리를 펴는 사이에 과연 소위 기괴한 남자 세 사람이 있는데 들어온 형적은 보이지 않았고, 다만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집안에 들어와 앉았는데, 장남은 수염이 한 자가 넘고 눈이 크며 얼굴은 쟁반같고 앉은 몸이 장대하며, 차남은 수염이 5촌 남짓에 얼굴은 넓고 좋으며 앉은 몸 역시 장대하였고, 삼남은 수염이 4촌 남짓에 얼굴도 넓고 좋으며 앉은 몸 역시 장대하였습니다. 모두 검은 관을 썼는데 3남은 황관(黃冠)에 복장은 검은 색인데 가장을 한 것도 같으면서 매우 엄하게 보였습니다. 한번 본 뒤로는 감히 다시 보지를 못하였는데, 마시고 먹는 것은 한결같이 보통 사람과 같아서 차린 음식은 거의 다 먹고, 구운 꿩고기와 닭고기도 먹으며, 수저를 놀리는 소리도 보통 사람과 같고, 저녁밥도 또한 이처럼 하였습니다. 이들은 사람의 형상과 같은데 언어가 가늘어서 듣기 어려웠습니다. 그 어머니가 옆에 앉아 있기에, 물어보니, 세 아들의 칭호는 성선(聖仙)ㆍ신인(神人)ㆍ생불(生佛)이라고 한답니다. 다음날 새벽에 나갔는데 방안에서 유연히 사라지고 다만 집을 나가는 형상만 보였을 따름이었습니다. 그 어머니의 말로는, 장남은 음문(陰門)에서 나왔고, 다음 두 아들은 갈빗대 사이로 낳았는데 모두가 금년생으로 1년이 못 되어 이처럼 장대하게 되었다는 것이며, 또 넷째 아이를 가졌다 하였습니다. 우리집에서 하루를 묵고 그의 거처인 구성에 돌아가서 그 넷째 아이를 오른쪽 갈빗대 사이에서 출산하였는데 며칠이 안 되어 장대하여졌습니다. 얼마 안 되어 우리집에 돌아왔는데 세 아들은 이미 결혼하여 아름다운 여자들을 거느려 아들을 낳았다 하였습니다. 넷째 아들을 데리고 와서 전과 같이 들어가 앉았는데 집밖에서 들어온 흔적은 보이지 않았으니, 정말로 허황된 일입니다.’ 하였습니다.
강가시를 문초하니, 자기의 조부는 진주 사람으로 죄를 짓고 선사포(宣沙浦)에 와서 살았는데, 자기도 선사포 태생인데, 떠난 지가 대략 5ㆍ6년 되었다는 것입니다. 양가 여자 향이를 처로 삼았으며, 11개월째 되는 금년 4월에 음문으로 아들을 낳았는데 곧 어디론지 가버렸고, 다시 둘째 아들을 밴 지 3삭만인 6월에 왼쪽 갈비로 출산하였고, 또 셋째 아들을 밴 지 3삭만인 8월에 왼쪽 갈비로 출산하였는데 뒤에 세 아들이 곧 다 나가버리고 간 곳을 알 수 없으니, 부자(父子)의 분의(分義)가 없어 매우 한스럽다는 것입니다. 세 아들이 천상(天上)에서 이미 결혼을 하였다 하며, 아름다운 여자들을 거느렸는데 복색은 보통 사람과 같다는 것이며, 자기는 처를 거느리고 구성으로 돌아와 넷째 아들을 밴 지 3삭만에 또한 오른쪽 갈빗대에서 나왔는데, 구름과 하늘 사이를 왕래하는데 가고 오는 것을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의 처 향이 또한 그와 같이 공초하니 해괴하기 짝이 없어 함께 구금하였습니다. 이는 허탄하고 근거없는 일에 불과하나, 혹 요사스러운 일이 생기고 민중을 미혹되게 하는 폐단이 있을까 두려워 이처럼 계를 올립니다.” 하였습니다.
○ 참판 한준겸(韓浚謙)을 도원수(都元帥)에 명하고, 조즙(趙楫)과 강홍립(姜弘立)을 종사로 삼았다. 한준겸은 영남을 순찰차 내려갔다.
ⓒ 한국고전번역원 | 김종오 권덕주 (공역) | 19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