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풍경을 담다
미슐랭이 반한 한국의 길
35번 국도 안동~봉화~태백
한국관광공사 청사초롱
2018. 7+8 vol. 494
미슐랭 그린가이드 한국 편을 뒤적이다 35번 국도를 찾아간다.
미슐랭이 유일하게 별점을 매긴 한국의 길이 그곳에 있다.
write • photograph 박경일(문화일보 여행전문기자)
이달의 여정을 시(詩) 한 편으로 시작하자.
경북 안동에서 봉화를 넘어 강원 태백으로 이어지는 35번 국도.
저물 무렵 그 아름다운 길 어디쯤엔가 깃발처럼 꽂아두고 싶은
헌사(獻辭) 같은 시다.
『김수복 詩 ‘6월’
전문』
저녁이 되자 모든 길들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추억 속에 환히 불을 밝히고
6월의 저녁 감자꽃 속으로 길들은 몸을 풀었다
산 너머로, 아득한 양털 구름이
뜨거워져 있을 무렵
길들은 자꾸자꾸 노래를 불렀다
저물어가는 감자꽃 밭고랑 사이로
해는 몸이 달아올라
넘어지며 달아나고,
식은 노랫가락 속에 길들은 흠뻑 젖어 있었다
미슐랭의 미식 가이드북인 레드가이드는 식당에 별점을 매기지만, 관광안내 가이드북인 그린가이드는 여행지에다 별점을 매긴다. 미슐랭의 별점은 인색하기로 유명하다. 만점은 별 셋이지만, 별점 하나만 받는대도 훌륭한 여행지임을 인정받았다는 뜻으로 읽으면 된다. 내로라하는 여행지들 중에서도 별점을 받지 못한 곳이 수두룩하다. 이를테면 내설악의 백담사나 속초의 낙산사, 경주의 안압지, 부산의 해운대 등은 별점 하나 없이 그저 가이드북에 ‘거론’만 됐을 뿐이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린가이드 한국 편은 안동 도산서원에서 봉화를 거쳐 태백의 초입까지 이어지는 35번 국도의 구간에 별점 하나를 매겼다. 미슐랭가이드가 한국의 길에다 매긴 유일한 별점이다.
그러니 이 길은 미슐랭가이드가 정한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이라고 해도 그다지 틀린 말은 아니리라. 가이드북에서는 청량산을 끼고 굽이굽이 흘러가는 낙동강의 아름다운 경관, 그리고 강변 마을의 허리 굽은 할머니들의 노동의 모습으로 35번 국도의 매력을 설명했다. 아마도 그 길을 달리면서 청량산과 낙동강에서 맑은 기운을, 저무는 강변의 사람 사는 아름다움을 보았던 모양이었다.
예사로 지나쳤던 35번 국도. 그 길을 다시 찾아간다. 오래된 고택의 맑은 정신을 지나고, 누추해서 더 따스한 마을을 건너가고, 그윽한 천변과 낙동강의 물소리를 지나고, 뫼 산(山)자로 우뚝 솟은 청량산을 지나고, 청옥산의 깊은 숲도 지나는 길이다. 이 길을 지날 때가 마침 저물녘이라면, 시처럼 ‘산 너머로 아득한 양털구름이 뜨거워져 있을’ 그런 시간이라면, 감자꽃 만발한 길 위에서 시 속에 등장하는 ‘길들이 부르는 노래’를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별점을 받은 길은 부산에서 강릉을 잇는 총연장 421km의 35번 국도 중 경북 안동의 도산서원에서 강원 태백 초입까지의 75km 남짓 구간이다. 이 길이 낯설지 않은 건 안동 도산서원과 청량산을 오가며 마음을 닦았던 퇴계가 일찍이 ‘그림 속으로 들어가는 길’이라고 일컬었던 바로 그 길이기 때문이다.
도산서원을 지나면 길은 어깨춤까지 훌쩍 자란 담배밭과 환한 꽃밭을 이룬 감자밭, 그리고 지지대를 세워놓은 고추밭으로 가득한 부드러운 구릉을 지난다. 온혜리에서 야트막한 나불고개를 넘어 가송리에 닿으면 이제부터가 35번 국도의 하이라이트다. 퇴계가 청량산을 드나들며 걸었던 길이다. 이 길에서는 청량산이 황급히 낮춘 능선 아래로 낙동강이 군데군데 여울을 만들며 유연하게 굽이친다. 길가의 마을은 녹음과 평화로 가득하다. 그 앞에 서는 것만으로도 푸근해지는 풍경이다.
35번 국도는 가송리에서 물길을 따라 북쪽으로 올라가지만, 거기까지 가서 지척의 고산정과 농암종택으로 가는 샛길을 빼놓을 수는 없는 일이다. 낙동강의 물길 곁에 세워진 정자 고산정이 보여주는 건 ‘품격 있는 아름다움’이다. 낙동강의 너른 물길과 백사장을 정원 삼은 농암종택의 그윽한 맛도 못지않다. 여기서는 차를 두고 걸어야 마땅하다.
고산정 부근에 차를 세우고 낙동강을 끼고 농암종택까지 갔다가 되돌아 나오는 데는 1시간쯤이면 넉넉한데, 그 정도의 수고만으로 주어지는 정취와 풍광이 도무지 황공할 따름이다.
가송리를 지나면 곧 청량산이다. 이름 그대로 청량한 기운이 감도는 청량산은 암봉을 연꽃잎 삼아서 꽃술자리에 들어선 절집 청량사의 정취가 으뜸.
그러나 뒤로 물러나서 보는 산세의 아름다움도 못지않다. 무릇 산에 들면 산이 안 보이는 법. 등산을 다녀왔다고 해도 코앞에 펼쳐진 암봉으로만 기억된다. 이런 청량산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비장의 명소가 건너편 산자락에 꼭꼭 숨겨져 있다. 비탈진 시멘트 도로를 차고 올라 오래 헤매다가 찾아낸 곳인데, 운전 실력에 대한 자신감과 적당한 모험심이 있으면 당도할 수 있는 곳이다.
청량산을 물러나서 바라보는 자리. 그곳에 가려면 기억해 둘 이름 하나가 있다. ‘오렌지 꽃향기는 바람에 날리고’. 다름 아닌 펜션 겸 찻집의 이름이다. 35번 국도를 따라 청량산 들머리를 지나고 북곡보건진료소를
지나자마자 왼쪽으로 자그마한 시멘트 다리를 건넌다. 이제부터가 낙동강 너머 산자락을 치닫고 오르는 급경사의 길이다.
한참을 올라가면 거기에 거짓말처럼 마을과 너른 사과밭이 나타난다. 마을을 지나 구불구불 오르락내리락 실낱같은 길을 인도하는 건 펜션을 안내하는 표지판이다. 이렇게 4km쯤 가면 청량산 전경과 낙동강 물길을 한눈에 바라다볼 수 있는 자리가 있고, 거기에 찻집과 펜션이 있다. 김두한·이형희 씨 부부가 10년 전쯤 들어와서 지은 펜션이다. 이곳에서 보는 청량산의 경관은 낯설다. 이렇게 물러서서 보니 청량산은 거대한 ‘뫼 산(山)’자의 모습, 그것이다.
기왕 올라왔으니 능선 반대쪽에서 가송리의 낙동강을 굽어보는 자리도 찾아가 보자. 산 아래 주민들은 통신사 기지국이 들어선 능선쯤에 전직 안동군수가 땅을 사놓았다고 수군거렸는데, 안동 사정을 샅샅이 아는 군수가 노후를 보내려 잡은 땅이라면 그 터가 범상치 않으리라.
예상대로 기지국 아래 집 지을 터의 자그마한 정자에 올라서 보는 경관이 깜짝 놀랄 만했다. 저 발치 아래로 낙동강의 물길이 청량산의 석벽을 끼고 돌아가며 고산정을 지나 농암종택 쪽으로 파고들고 있었다.
35번 국도는 여기서 다시 봉화 땅으로 건너가 낙동강이 U자 형태로 굽이치는 경관을 내려다볼 수 있는 범바위를 거쳐 산의 등지느러미를 딛고 가듯 달린다. 길은 넛재를 지나 태백으로 넘어가는데 양편으로 첩첩이 이어진 산자락들이 주르륵 펼쳐지는 모습을 바라보노라니 우리 땅의 아름다움에 새삼 가슴이 뜨거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