百歲過勞死? 들어 보셨나요.
백세까지 살다가 과로로 죽는 것이 요즘 사람들 특히 늙인이 들이 살아가는 삶의 목표라고 합니다.
왜 백세까지 살아야 하는지 이유도 모르면서 .........
그러고 보니 나 자신도 어느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백세과로사 하기 위하여 살고 있는 사람들의 대열에 끼어 줄을 서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렇지 않다면야 어떻게 쓸데없이 침산만조를 찾겠디며 아무도 없는 어두운 산상에 홀로 서서 허우적데고 있단 말인가?
지난겨울 개인적인 문제로 고성동에서 지내면서 어느 맑은 날 참으로 오랜만에 침산을 올라 보았다. 그러다가 정상부에서 서거정 선생의 砧山晩照 한시 한 수를 알게 되고 그 것을 인연으로 침산의 내력을 알게 되니 참으로 사람의 한평생이 뭔지 생각하게 되고 이어서 서선생이 보신 침산만조를 보고 싶었다.
침산 오거리에서 오르는 길
주 등산로이고 산 주변의 마을에서 오르는 길이 여러 곳 있다
침산!.
예전에는 그저 친일파 박중양 소유의 산으로 보통 박작대기산으로 불리워 젔었다.
여기가 박중양의 묘와 그의 호 一笑를 따서 세운 一笑臺 누각이 있던 자리 였으나 지금은 이처럼 말끔이 굴이되고 철거되어 꽃나무를 심어 놓고 있다.
침산은 2007년 8월 13일,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조사위원회가 박중양이 남긴 36억 7,110만 원 정도의 토지 8만 2082㎡를 국가에 환수한다고 발표하고 판결을 받아 환수한 다음 침산공원을 조성하고, 정상부에 침산정이라는 정자를 세우고 그 아래 서거정 선생이 지은 대구10경 중 하나인 “砧山晩照” 한시 한 수가 새겨져 있다.
국가가 환수한 이후 박중양의 무덤과 그 부모의 무덤까지 굴이되었고, 굴이된 무덤자리에 자란 나무 위에는 까치집이 세상을 내려다 보고, 영문 모르는 산새들은 차가운 겨울 하늘만 바라다 보고 있다.
침산의 유래를 새겨담은 비석에는 슬픈 역사의 진실은 모두 감춘 채 산 등어리에 새로 만든 로변에 말 없이 서 있다.
여기서 잠깐 박중양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대구부사로 있을 당시 대구가 좋아 침산을 사들이고 그 부모의 산소를 이 곳으로 이장한 후 산 아래에 주택을 짓고 1959. 4. 23. 사망할 때까지 살았으며 그가 사망하자 부모의 묘 옆에 묘를 설치하고 그의 호 一笑를 따서 누각을 짓고 一笑臺라 하였다. 대부분 사람들은 대구사람인 것으로 알고 있으나 본래는 경기도 양주사람이다.
그는 일제시대 여러 도의 도지사 및 중추원 참의를 지낸 최상위급 친일파이지만 단순히 시류에 편승하여 친일을 한게 아니라 나름 신념에 찬 친일을 하였던 모양이다.
그가 철저한 친일파가 된 것은 자기의 모국인 조선이란 나라의 망국의 군주 고종에게 환멸을 느끼고 더이상 바랄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느낀 때문으로 보인다.
그는 개화의 소용돌이가 조선을 몰아칠 무렵 똑똑한 젊은이였고 세상 물정을 잘 알았고, 개화파에 기대를 걸었던 모양이다.
유약하고 바보 같은 망국의 군주 고종은 인간적으로 매우 집요하고 잔인한 구석이 있는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그는 망명 중이던 김옥균을 죽이려고 연달아 자객을 파견했고 마침내 성공하여 그 시신이 인천항을 통해 돌아오자 노량진 백사장에서 그 시신을 토막 내어 종로에 내어걸자 이를 본 약관의 박중양은 “이런 짓은 야만인보다도 못하다.”고 분통을 터트리며 조국을 삐딱한 눈으로 보게 된다.
거기다가 박중양은 관비(官費)로 일본 유학길에 올랐는데 자신을 유학 보낸 나라의 정부는 역적 박영효가 일본에 있다는 이유로 박영효를 찾기 위해 자객을 파견하여 유학생들 꽁무니나 쫓고 있다는 걸 알고는 더욱 정나미가 떨어지게 된다. “또 죽이고 시체 끌고 가서 토막 내려고?. 이 야만종들.”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한 번 삐딱한 눈이 영 삐딱하게 변해버린 것이다.
그럴 즈음 그는 물에 빠진 이토 히로부미의 부인을 구해낸 일로 이토의 신망을 얻어 이토의 양자라고까지 소문이 나고 중추원 참의까지 된 친일파가 되었으나 그 별명이 박작대기로 불릴만큼 웬만한 일본인들은 물론 하늘같은 판사 정도는 지팡이 끝으로 가리키며 “자네 왔냐?”고 물을 수 있던 조선 천지에서 몇 안 되는 조선인이었고, 일본인 관료들이 우습게 놀다가 박중양한테 박살을 당하기도 했다.
그는 일생에 한 번도 자신의 뜻을 바꾸거나 시세에 영합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조지훈은 수필 지조론에서 박중양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자기 신념으로 일관한 사람은 변절자가 아니다.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남한산성(南漢山城)의 치욕에 김상헌(金尙憲)이 찢은 항서(降書)를 도로 주워 모은 주화파(主和派) 최명길은 당시 민족 정기(民族正氣)의 맹렬한 공격을 받았으나, 심양(瀋陽)의 감옥에 김상헌과 같이 갇히어 오해를 풀었다는 일화는 널리 알려진 얘기다. 최명길은 변절의 사(士)가 아니요 남다른 신념이 한층 강했던 이였음을 알 수 있다. 또 누가 박중양(朴重陽), 문명기(文明琦) 등 허다한 친일파를 변절자라고 욕했는가. 그 사람들은 변절의 비난을 받기 이하의 더러운 친일파로 타기(唾棄)되기는 하였지만 변절자는 아니다.”
그는 무일푼으로 떠난 일본 유학 때부터 반민특위에서 그의 일기장을 압수하기 전날까지 일기를 썼단다. 이 일기는 윤치호의 일기와 더불어 그 내용이 몹시도 궁금해 하는 사람이 많다. 독립운동사의 감동만큼이나 그의 기록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이 많을 것 같이 생각되므로 출판 되었으면 한다.
그는 1959년 4월 23일 사망하였다. 박중양에 대한 더 많은 일화나 자료들은 인터넷에서 찾아보면 나온다.
너무 많이 지껄였다보다.
산 능선에다 대로를 내어 놓았는데 침산을 다듬이돌이 아니라 작은 돼지로 비유한다면 마치 등어리 위로 바리깡 두개가 지나간 듯하다.
산을 가급적 자연을 그대로 보존하였으면 하건만 이건 좀 너무하다 싶다.
마지막 정산 부분에 이르기 전 침산정이 보이는 곳에 광장을 만들어 놓고 운동시설을 설치해 놓았는데 사진은 운동시설을 피하였다.....
환수 후 새로 지은 침산정
산이 낮아 이 산을 오르는 사람들은 대부분 나이 많은 사람들이라 산 마저 늙어보인다. 침산정 주변을 맴도는 사람들의 걸음걸이는 거위 걸음처럼 뒤뚱거리고 그 것도 못하는 사람들은 침산만조 시비 주변 잔디에 앉아 해바라기를 한다
서거정 선생의 대구(달성)10경 침산만조를 새겨넣은 돌
砧山晩照(침산의 저녁노을)
水自西流山盡頭(수자서류산진두) 물줄기 서로 흘러 산머리에 닿고
砧巒蒼翠屬淸秋(침만창취속청추) 침산의 푸른 숲은 가을 정취 더하네.
晩風何處舂聲急(만풍하처용성급) 저녁 바람 타고 오는 방아 소리는
一任斜陽搗客愁(일임사양도객수) 노을에 젖은 나그네 시름 애끓게 하네.
노산 이은상 선생은 이를 다음과 같이 번역했다.
물은 굽이돌고 산은 끝났는데
침산 푸른 숲에 가을빛 어리었네
어디서 해 늦은 방아소리
손의 가슴 찧는고.
서거정 선생은 본관이 달성으로 아마도 젊을 시절 대구와 달성을 샅샅이 다니신듯하다.
침산만조의 시가 새겨진 돌 앞에 앉아 저녁 해바라기를 하는 노인네들
첫댓글 멋진그림 그리고 감칠맛나는 글 감사합니다. 지운 이충우 拜
또 한수 배우고 갑니다
琴松 손진언(39회)의 댓글
늘 우리 홈피 방문해 주시는 辰泉 동문님 감사합니다. 그리운 고향정경을 보여주신 聽岡 동문님 너무 고맙습니다. 귀소본능이라 할까 경부고속도로를 지나갈 때 마다 침산 쪽을 바라보면서 어릴적 無怠 강변에 소풍 가며오며 듣던 박작대기 이야기를 떠올리곤 합니다. 흔히 들 '대구는 가 볼 곳이 없다' 하는데 그렇치 않다고 생각합니다. 聽岡, 辰泉 동문님들 내내 건강 하시기 바랍니다. 거듭 감사 드립니다.(사진:무태 다리를 지나가면서 바라본 침산 2008.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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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산의 멋진 낙조 잘 감상하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聽岡,글도 좋고 침산에서 보는 노을이 너무 아름답네요.멀리 보이는 큰산은 가야산 같기도 하고. 서거정은 같은시대의인물 金時習과 대비되는 인물이다.서거정은 시대의 이데올로기에 충실했고 김시습은 그반대쪽에 서서 어디에도 얽메이지 않고 자유스럽게 살아간 인물이다.박중양도 침산에 살면서 서거정을 배웠는지 모르겠다.
서거정의 한시 부분은 인터넷에 나도는 대구10경 중에서 복사해 넣은 것인데 그 분이 舂(용)자를 春(춘)자로 잘못 알았는지, 아니면 인터넷에 舂(용)자가 없어서 그랬음인지 (인터넷에는 舂자가 없다. 이 글을 쓰면서도 아래한글에서 복사해 넣었음) 舂聲急(용성급)을 春聲急(춘성급)으로 올려놓았는데 처음 글을 쓸때 발견하고 한자는 春자는 舂자로 고쳐올렸으나 한글은 빠트리고 고치지 못하였네요. 이제사 발견하고 고쳤음을 알려 드리며 아울러 그 외에도 오자 탈자가 많았음을 미리 읽은 분께 양해를 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