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믐밤의 괴한들 이때 조정에서는 명나라의 불 같은 독촉을 받아 참판 강홍립(姜弘立)을 오 도도원수(五道都元帥)로 정하고 평안병사 김경서(金景瑞)로 부원수를 삼은 후에 이만명의 군사를 거느려 심하(深河)에 출병케 했다. 임진왜란(壬辰倭 亂) 때 조선을 구해준 명나라의 은공을 갚자는 것이다. 명나라가 임진왜란 때 원병을 보내 가담하고 있는 틈을 타서 갑자기 세력 을 펴친 여진족(女眞族)은 그 후 점점 강성하여 건주호(建州胡)의 추장 누 루하치(奴兒哈赤)가 광해군 팔년에 드디어 자립하여 후금국(後金國)을 세 우고 연호를 천명(天命)이라 정했다. 그런 후에는 더욱 막막강병이 되어 만주의 요동 벌판은 말할 것도 없고 명나라 서울 북경(北京)이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렀다. 명나라에서는 세번 네번 구원해 달라고 청이 들어왔다. 한번 이런 요청이 들어오자 조정에서는 가장 중대한 사건으로 취급하여 묘당에서 토론하게 되었다. 전에 임진왜란 때 명나라가 우리를 구원해 주었으니 이번에 그전 은혜를 갚는 뜻에서 구원병을 보내야 한다는 사람과, 의리상으로는 응당 구원해 주어야겠지만 강대한 이웃나라인 후금국을 건드리는 것은 자는 호 랑이를 건드리는 것과 다름이 없다고 반대하는 사람과, 이렇게 의견이 두 갈래로 나뉘어서 좀처럼 결정이 나지 않았다. 한편 누루하치는 이 소식을 듣고 {금번에 귀국이 명나라를 도와서 출병한다 하니 매우 섭섭한 일이다. 우리 는 귀국과 아무런 혐의도 없다. 출병치 말고 국경을 지키며 형세만 보아 라. 만약에 귀국이 명나라를 도와 원병을 보낸다면 조선 삼천리 강산을 초 토화 시키겠다.} 하는 위협을 보내왔다. 여진(女眞)이 비록 태조대왕과 세종대왕 때 조선에 굴복해서 조공(朝貢)을 바치고 종노릇까지했지만 이제는 강국이 되었다. 여진 누루하치를 업신여 겨 볼 수 없게 되었다. 광해는 몇 달을 두고 골치를 앓았다. 광해는 마지못해서 심하(深河) 출병 을 하면서도 원수 강홍립에게 비밀히 지령을 내렸다. "형편을 보아서 향배(向背)를 취하라. 그리고 오랑캐한테 먼저 칼을 빼어 들지 마라. 누루하치한테 활을 쏠 때는 반드시 활촉을 뽑아서 허청으로 화살을 쏘게 하라. 그리하여 뒷날 말썽이 나지 않도록 하라!" 이같이 신신당부해 보냈던 것이다. 강홍립은 군사를 거느려 심하까지 갔으나 광해의 밀지(密旨)대로 살촉을 빼고 살을 쏘았다. 뿐만 아니라 대세가 명나라에 불리한 것을 알자 도원수 강홍립은 슬며시 누루하치한테 항복해 버렸다. 뒤미처 요동(遼東)과 심양(瀋陽)이 함락되었다. 명나라 조정은 조선을 의 심했다. 그러나 오랑캐는 오랑캐대로 항복한 강홍립을 앞세워 조선을 치러 들어온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떠돌았다. 서울 장안은 발끈 뒤집혔다. "큰일 났네, 오랑캐가 강홍립을 앞장 세워가지고 조선으로 쳐들어 온다 네." "그뿐인가, 명나라가 또 쳐들어 온다네, 임진왜란 때 조선을 구원해 주었 는데, 조선은 오랑캐와 내통이 되어가지고 항복해 버렸다고 노발대발하면 서 쳐들어 온다네. 큰일 났네그랴" 사람들은 만나는 대로 수군거렸다. 조정에서는 갑자기 장수감을 뽑느라고 만 사람을 뽑는 만인무과(萬人武科)를 보였다. 과연 명나라에서는 문죄사를 내보내기로 작정했다는 소식이 들리고 명나라 의 장수 모문룡(毛文龍)은 요동이 함락되자 군사 수천명을 거느리고 의주 (義州)로 넘어와서 철산(鐵山) 앞에 있는 단도(槨島)에 진을 치고 패잔병 들을 불러들이지 시작하였다. 한편 오랑캐는 오랑캐대로 의주까지 쳐들어 와서 한인(漢人)을 만나는 대 로 모조리 죽여버리고 명나라 장수 모문룡을 잡아 바치라고 공갈과 엄포가 대단했다. 광해는 양면 정책을 썼다. 비밀히 금은보화를 강홍립에게 보내어 오랑캐한 테 바쳐서 조선이 딴 뜻이 없는 것을 밝히게 하고, 한편으로는 이정구(李 廷龜)를 변무사(辯誣使)로 명나라에 가서 오랑캐와 통한 일이 없다는 것을 변명하라했다. 원래 이정구는 글 잘하는 재상으로 이름이 명나라에 자자했으므로, 그가 전에 폐모(廢母) 때 조정에 참예하지 아니했다고 귀양을 보냈던 것을 풀고 그의 명성을 이용하여 명나라 조정의 노한 것을 늦추자는 것이었다. 이같이 온 나라가 소란스러울 때 이이첨, 유희분의 집 기둥에는 화살에 십 자로 붙잡아맨 협박장이 들어와 박혔다. 새로 영의정이 된 박승종(朴承 宗)의 집에도 들어왔다. 협박장의 내용은 이러했다. {빨리 대비를 복위시키지 않으면 너희들은 명나라의 문죄사가 나올 때 나 라에 공론이 일어나서 육시처참을 당하리라. 곧 서궁의 대문을 활짝 열어 놓고 다시 대비로 받들어 모시게 하라.} 하루는 유희분과 이이첨이 만나 이 협박장에 대해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먼저 유희분이 말을 했다. "살에 협박장을 붙들어매서 대청 기둥이 아니면 문설주에 화살을 박아놓으 니 범인을 잡을 도리가 없습니다. 필시 대비편 사람들의 하는 짓이 분명합 니다." 이이첨은 고개를 숙이고 대답이 없다. "장차 명나라 문죄사가 들어온다면 어찌하지요? 그리고 누루하치가 또 온 다면?" 말을 마친 유희분의 얼굴은 노랗게 질려 있었다. "서궁(西宮)이 복위되는 날에는...?" 이이첨의 가슴도 조마조마한 모양이다. "대감이나 나는 죽음을 당하고 말 것이외다. 더구나 대감은 죄상이 더욱 크니까." 유희분의 말을 듣는 이이첨은 입술이 바르르 떨린다. "어찌해서 내 죄가 더 큽니까? 죄를 당하면 다같이 당해야지요." 이이첨의 목소리는 독이 들었다. "불을 질러 영창을 죽이고, 대비를 서궁으로 쫓아낸 일은 대감이 한 짓이 니 나나 박승종보다 책임이 더 큽니다." 이이첨의 눈에는 별안간 핏줄이 빨갛게 섰다. 유희분은 이이첨의 살기 띤 독한 눈을 피했다. 이이첨의 살기를 당해낼 도리가 없었다. 말을 부드럽 게 붙여 본다. "나는 책임을 회피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아까 말은 내가 잘못 했소이다. 좌우간 속히 일을 피워볼 길을 생각하십시다." 이이첨도 조금 수그러졌다. "유대감의 생각은 어떻게 하면 일이 피게 되리라 생각하십니까?" "빨리 복위를 시킵시다. 그저 일은 무사한 것이 제일입니다." "유대감은 정신이 나가셨소? 도로 복위를 시키면 대비의 원망이 풀릴 줄 아시오?" "그럼 이대감의 생각에는 어떻게 했으면 좋겠소?" 이이첨은 대답 없이 필묵을 당겨서 왼편 손바닥에 글자를 썼다. 손바닥 안에는 글자가 두 자가 씌어졌다. 소리 없이 유희분 앞에 내민다. 《 滅 口 》 두 글자다. 유희분은 이이첨의 눈을 빤히 살펴보다 묻는다. "멸구(滅 口)란 죽이라는 뜻입니까? 어떻게 죽이란 말요? 어떤 방식으 로?" "한밤중에 자객(刺客)을 서궁으로 들여보내기는 쉬운 일입니다." 이렇게 대답하며 이이첨은 간드러지게 웃는다. 임술년(壬戌年) 십이월 그믐날 그 해의 마지막을 알리는 방포(放砲) 소리 를 군호삼아 이이첨의 심복 백대형(白大珩)과 이위경(李偉卿) 등은 건달패 십여명을 거느리고 북과 장구를 치며 어지러이 서궁에 돌입하였다. 한편 그날 초저녁에 대비가 꿈을 꾸니 선조대왕이 생시와 조금도 다름없는 복색으로 나타나서 대비를 보고 "도적의 무리가 곧 들어올 것이니 피하지 않으면 목숨을 보전하지 못할 것 이요." 하고 조용히 말한 다음 사라졌다. 대비는 꿈을 깨어 흐느껴 울었다. 옆에 모시고 있던 궁녀가 그 까닭을 알 자 "선대왕의 혼령이 나타나셔서 이르시는 말이오니 반드시 까닭이 있겠습니 다. 대비께서는 저와 옷을 바꾸어 입으시고 얼른 후원으로 몸을 감추십시 오." 궁녀는 대비의 소복을 벗기고 자기 옷을 입힌 후에 머리에 얹은 첩지까지 바꾸었다. 그리고 대비의 소복을 자기가 입고 스스로 가짜 대비가 되어 단정하게 앉아 있었다. 밤은 점점 깊었다. 섣달 그믐날 밤이라 거리는 웅성거렸다. 삼경(三更) 때쯤 되니 서궁 대문 앞으로 건달패들이 별안간 소고와 꽹과리를 두드리며 들이닥쳤다. 문 지키는 군사들이 물었다. "뭣하는 놈들이냐?" "섣달 그믐에 잡귀를 쫓는 탈춤패들이요. 서궁에도 액막이를 하라고 위의 분부를 받들어 나왔소." "출입패(出入牌)를 보여라." 탈막을 쓰고 앞에 선 자가 출입패를 군사한테 보였다. 틀림없는 궁중 출 입패다. 군사들은 문을 열고 탈춤패를 들여보냈다. 꽹과리와 소고 치는 소리가 요란한 속에 탈춤패들은 춤을 추면서 대비가 거처하고 있는 침실 앞까지 들어갔다. 대비와 옷을 바꾸어 입은 궁녀는 침착하고 대담했다. "누가 이렇게 소란을 떠느냐?" 큰 소리로 꾸짖었다. 앞장을 선 건달패 두목은 대비의 목소리라고 생각했다. 그는 한 손을 번 쩍 들어서 탈춤패들한테 말없는 군호를 보낸다. 탈춤패들은 우르르 대비 의 침실로 몰려들어 왈칵 미닫이를 열어 젖혔다. 앞에 섰던 한 자가 "오늘은 섣달 그믐이라 잡귀를 쫓아내라는 위의 분부를 받고 들어왔습니 다." 이렇게 말을 마치자 소매 안에서 비수를 뽑아 거침없이 대비를 찔렀다. 순간 구슬픈 비명소리가 일어나며 가짜 대비는 푹 고꾸라졌다. 이때 마침 영의정 박승종이 대비를 해하려는 이이첨 등의 음모를 눈치 채 고 '만약 대비를 해하는 일이 생긴다면 비록 자기가 손을 아니 댔다 해도 영 의정의 책임으로 누명을 뒤집어 쓰고야 만다. 어떻게 해서든지 이 일은 훼방을 놓아야겠다.' 결심하고는 친히 군복을 갖추고 군사를 지휘하여 서궁으로 뛰어들었다. "저놈들을 잡아라!" 군사들은 일제히 허리에 찬 육모방망이를 뽑아들었다. 그러나 탈춤패들은 벌써 일을 저지른 뒤였다. 그들은 재빨리 어둠을 타고 담을 뛰어 넘어 도 망을 치고 말았다. 탈춤패들이 도망 간 후에 박승종은 전상으로 올라가 방문을 열어 보았다. 피비린내가 왈칵 코를 스쳤다. 박승종의 가슴은 탁 내려앉았다. 눈같이 흰 소복을 입은 여인의 몸에는 홍건히 피가 흘렀다. 틀림없는 대비였다. "조금만 일찍 왔다면 대비의 목숨을 구했을 것을! 이놈은 만대의 역적놈 이 되겠구나." 박정승은 우두커니 시체 앞에 서서 쓴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숙였다. 대비가 죽었다고 믿은 것은 박승종 뿐이 아니었다. 이이첨도 탈춤패들의 보고대로 대비가 죽었거니 하고 믿고만 있다가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있던 날 대비가 나타남을 보고 여태껏 살아 있었는가 하고 놀래었다고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