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598
8월30일[연중 제21주간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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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강론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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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h3S_3dTIXJQ
(김형균 스테파노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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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예언자의 삶은 언제나 고되고 슬프고 외롭습니다!>
언젠가 예수님 입에서 직접 흘러나온 말씀들만 따로 모으고 추려서 나름 분석하고 정리해본 적이 있는데, 참으로 흥미롭고 은혜로웠습니다.
참으로 다양한 유형, 다양한 빛깔의 말씀들이 잘 어우러져 있었습니다. 때로 신음하며 죽어가는 사람들을 향해서는 일으켜 세우고 되살리시는 따뜻한 위로와 생명의 말씀을 선포하셨습니다.
때로 끝까지 회개하지 않고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사람들을 향해서는 강력한 경고의 말씀이 선포되었습니다. 말씀의 강도가 너무 센 나머지 깜짝 놀랄 정도로 직선적이고 공격적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하느님께 돌아선 사람들을 향한 어투는 더없이 자상하고 친절하며, 과할 정도로 칭찬하십니다.
제대로 배우지 못한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 어린이들을 향해서는 가르침의 내용이 너무나 쉽고 명쾌합니다. 그 누구도 당신 구원의 메시지에서 소외되는 사람이 없도록 하기 위한 예수님의 배려가 돋보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언어는 신선하고 파격적입니다. 때로 직선적이고 공격적입니다. 거의 독설과도 가깝습니다. 그러나 세상 쉽고 재미있습니다. 그래서인지, 그분 말씀에 매료된 수천, 수만 명이 언제나 그분 뒤를 따라다녔습니다.
산상설교 때 예수님은 진복팔단(眞福八段)에 대해서 가르치셨는데, 오늘은 분위기가 완전 반대입니다. 지난번은 가르침의 서두가 ‘행복하여라’였는데, 오늘은 ‘불행하여라.’입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겉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속은 죽은 이들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는 회칠한 무덤 같기 때문이다. 이처럼 너희도 겉은 다른 사람들에게 의인으로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하다.”(마태 23, 27-28)
특히 마태오 복음 23장은 제목부터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꾸짖으시다.”입니다. 23장 전체가 위선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신랄한 질책의 말씀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거듭 ‘불행하여라.’른 반복하시며, 그들의 위선과 이중성, 형식주의와 권위주의를 강력하게 경고하십니다.
2천년 세월이 지난 지금 읽고 있는 저도 섬뜩하고 가슴이 찔리는데, 예수님 시대 당사자들을 얼마나 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을까요? 또 많은 당사자는 분노와 적개심으로 이를 갈았을 것입니다.
계속되는 예수님의 강력한 경고 말씀은 적대자들의 마음속에 차곡차곡 쌓여갔을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목숨을 걸고 말씀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예언자의 삶은 고되고 슬프고 외롭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사명입니다. 거대한 구조적인 악 앞에서, 그칠 줄 모르는 불의 앞에서, 정말이지 웃픈 현실 앞에서 ‘이건 정말 아니다.’며 크게 외치는 것은 곧 예수님을 가장 가까이 추종하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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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h-18rkYjQx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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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조상은 누구입니까?”라고 물을 때 우리의 대답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위선을 꼬집으십니다. 겉으로는 회칠한 무덤처럼 깨끗하지만, 속은 죽은 이들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찼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그렇게 판단하시는 이유는 예언자들을 죽였던 이들을 자신들의 조상으로 인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우리가 조상들 시대에 살았더라면 예언자들을 죽이는 일에 가담하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비록 조상이기는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려고 하면 되는 것 아닐까요? 그러나 예수님은 조상들이 한 행위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조상들이 시작한 짓을 마저 하여라.”
예수님은 인간의 힘으로 조상의 전통 방식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여기십니다. 조상은 곧 우리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전갈이 개구리와 함께 살고 싶었지만, 결국 자신이 전갈이라는 사실을 잊지 못하여 개구리도 죽이고 자신도 죽는다는 동화가 있습니다. 자신이 전갈이었다는 믿음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결국엔 전갈의 본성이 나옵니다. 우리도 인간이라는 본성을 완전히 잊지 않으면 언젠가는 인간의 본성이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원탁의 기사’로 유명한 아서 왕에 대한 전설을 많이 들었습니다. 아서 왕의 전설은 돌에서 검 엑스칼리버를 뽑은 후 자신이 영국 왕위 계승자임을 알게 된 어린 소년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자신의 혈통을 깨달은 아서는 왕의 역할을 맡아 원탁의 기사단을 결성하고 이 땅에 정의를 가져오려고 노력합니다. 이것을 극화하여 영화로 만든 것이 ‘킹 아서: 검의 전설’(2017)입니다. 아서의 아버지는 한 왕국의 왕이었지만, 동생에 의해 살해당합니다. 그는 전설의 검 엑스칼리버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자신이 돌이 되어 자신의 등에 칼을 꽂아 죽습니다. 나중에 자신의 혈통만이 그 검을 뺄 수 있게 한 것입니다.
어렴풋한 기억으로 천하게 자란 아서는 우연히 그 칼을 뽑을 기회가 생겼고 사람들 앞에서 그가 진정한 왕족임이 증명됩니다. 하지만 어린 아서는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합니다. 그러나 이 때문에 자기 친구들이 죽어가는 것을 볼 수 없어서 검을 다시 집어 듭니다. 그러자 검에서 큰 힘이 나와 자기 부모를 죽인 왕을 이기고 새로운 왕이 된다는 내용입니다.
영화 슈퍼맨도 그렇고 듄이라는 영화화된 소설도 같은 내용입니다. 모두가 자신의 혈통을 새롭게 깨닫고 새로운 소명과 완전히 다른 삶을 살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우리는 조상의 전통적인 삶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믿음이 되고 그 믿음이 나의 본성을 형성하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모세는 자신의 혈통에 대한 믿음으로 삶이 완전히 변화된 대표적인 성서의 인물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된 새로운 존재임을 믿고, 인간이었음을 잊어야 합니다. 그 길만이 조상의 죄에서 벗어나 하늘의 백성이 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조상을 바꾸도록 초대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조상은 교회이고 그 시조는 그리스도와 성모님이십니다.
단군신화에 따르면 우리는 곰의 후손들입니다. 잘 참아낼 줄 알았던 곰이 결국 인간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인간의 후손이 되었습니다. 만약 자신을 곰의 후손으로 여긴다면 곰처럼 살 것입니다. 그러나 곰의 본성을 벗고 인간의 본성을 입었기에 우리는 곰을 닮지 않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새롭게 창조된 교회의 백성입니다. 우리 조상은 교회의 선조들입니다. 성인들이십니다. 그래서 우리 조상이 세속의 사람이냐, 교회이냐에 따라 우리 삶이 결정됩니다. 이는 우리 힘으로 바꿀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조상이 운명을 결정합니다. 왜냐하면 누구나 자기 조상의 운명대로 살 것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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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23,27-32: 겉은 그럴싸해 보이지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책하시면서 “너희가 겉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속은 죽은 이들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는 회칠한 무덤 같기 때문이다. 이처럼 너희도 다른 사람들에게 의인으로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하다.”(27~28절)라고 하신다. 의인들의 몸은 하느님의 성전이다. 언제나 하느님을 모시고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죄인들의 몸은 죽은 자들의 무덤이라고 한다. 영혼이 죽어있기 때문이다. 생명을 살리는 일을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그 몸은 이미 죽은 몸이나 다름없다. 무덤은 닫혀있는 한 겉모양은 아름다울 수 있지만, 무덤을 열면 그 광경은 참혹하다. 위선자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의 실체를 모르면 모두 칭찬받을 만한 이들로 보일 수 있지만, 그들의 실체가 드러나면 그 모습은 역겹다.
위선은 선을 가장하는 것이다. 그것은 선이 아니다. 이것은 의로움을 가장한 모든 것은 죽은 것이며, 의로움이 아니다. 하느님을 위하여 행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 때문에 거짓으로 행하는 덕은 죽은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자신이 아니면서도 그 사람과 똑같이 하는 배우들과 같다. 이런 사람들은 속은 죽은 이들의 뼈로 가득 찼지만, 겉으로는 의로움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겉만 아름답게 보이는 회칠한 무덤이 된다. 회칠한 무덤의 이야기는 우리의 삶에 있어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의 경고이다. 그렇게 보이는 행동이 아니라, 참사랑이 담긴 진정한 주님의 자녀로서의 삶의 자세를 항상 가질 수 있도록 하라는 말씀이다. 겉이 아무리 아름답다고 해도 속이 썩어있다면 그것은 죽음만이 있는 것이 아닌가? 주님께서는 인간이 살아있는 것을 원하시지, 죽는 것을 원하시는 분이 아니다. 주님의 뜻을 올바로 실천하는 그래서 주님의 참된 영광이 될 수 있는 삶이 되도록 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에게 불행 선언을 하신 것은 그들이 예언자들을 죽인 자들의 자식들로 더 나쁜 짓을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여 너희는 예언자들을 살해한 자들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언한다.”(31절) 그들은 결국 똑같이 사악한 짓, 아니 훨씬 더 사악한 짓을 벌이려고 한다. 그들은 “생명의 영도자를 죽였다.”(사도 3,15) 그리고 사도들까지도 죽였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러니 너희 조상들이 시작한 짓을 마저 하여라.”(32절) 하신다. 우리는 회칠한 무덤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에 올바로 따를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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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저녁 모임이 있어서 ‘제주도’라는 횟집으로 갔습니다. 먼저 갔던 분에게 주인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오늘 주방에 기계가 고장 나서 영업을 하지 않습니다. 비가 오는 날은 손님도 별로 없어서 오늘은 영업을 하지 않습니다.” 먼저 갔던 분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아! 오늘 여기서 신부님을 만나기로 했는데요.” 그러자 주인이 이렇게 말하였다고 합니다. “아! 신부님이랑 만나기로 하셨어요. 그럼 들어오세요. 오늘은 딱 한 팀만 손님을 받겠습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식당에 도착해서 나중에 들었습니다. 우리는 비가 내리는 오후에 탁 한 팀만 있는 식당에서 편안하게 저녁식사를 할 수 있었습니다. 저를 기억해 주고, 우리만을 위해서 영업을 해 준 주인에게 감사 인사를 드렸습니다. 나중에 식당을 나오는데 주방장이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우리 주인은 신부님이 오시면 좋아합니다. 머라도 하나 더 드리려고 합니다.” 주인은 신자는 아니었지만 사제를 존중하는 마음이 더 고마웠습니다. 자주 가는 단골이기에 주인이 특별히 배려했을 수 도 있습니다. 단골 이전에 사제를 위하는 주인의 마음이 더 컸다고 생각합니다.
식당 주인의 따뜻한 배려를 고맙게 생각하면서 예전에 읽었던 “평신도가 바라는 사제상”이 떠올랐습니다. “침묵 속에 그리스도의 향기가 드러나는 사제. 어른들에게 공손하며, 청소년을 따뜻하게 대하는 사제. 강론을 성실하게 준비하고, 고백성사를 성심껏 주는 사제. 미사 집전을 정성스럽게 하는 사제. 성체조배를 자주 하는 사제. 사제복을 즐겨 입는 사제. 본당 재정을 투명하게 운영하는 사제. 수도자와 보좌신부와 원만한 관계를 가지는 사제. 가난하고, 아픈 이들을 먼저 돌보는 사제. 특별한 일이 아니면 언제나 본당을 지키는 사제. 겸손하며,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끝까지 경청하는 사제. 후배 양성에 힘을 쓰며 생활하는 사제. 죽기까지 사제직에 충실한 사제.” 생각하면 부끄럽습니다. 저는 평신도가 바라는 사제의 모습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한 가지 있다면 사제복은 즐겨 입고 다녔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여러분 가운데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밤낮으로 일하면서, 하느님의 복음을 여러분에게 선포하였습니다. 우리가 신자 여러분에게 얼마나 경건하고 의롭게 또 흠 잡힐 데 없이 처신하였는지, 여러분이 증인이고 하느님께서도 증인이십니다.” 바오로 사도는 평신도가 바라는 사제, 예수님께서 바라는 사제의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어제에 이어서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의 위선과 가식에 대해서 제자들에게 이야기하십니다. 우리 속담에 ‘염불에는 관심이 없고 제사 밥에만 관심이 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율법과 계명의 핵심인 십자가와 희생에는 관심이 없고 율법과 계명으로 얻어지는 보상에만 관심이 있으면 안 된다고 하십니다. 본인들은 지키지 않는 율법과 계명을 다른 사람들에게만 강요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말은 따르지만 그들의 행동에서는 배울 것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겉모습만 꾸미고 내면의 세계는 텅 비어있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의 위선을 말씀하십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은 없습니다. 아기가 세상에 태어나기 위해서는 생명을 이어주던 탯줄을 끊어야 합니다. 교회가 하느님께로부터 멀어졌을 때는 세속의 권력에 취해서 십자가와 희생을 외면했을 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시대의 사목자들에게도 엄중하게 말씀하십니다. 오늘의 사목자들이 바오로 사도가 보여주었던 삶을 살아간다면 예수님께 칭찬받는 사목자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것을 추구한다면 예수님께 야단맞는 사목자가 될 것입니다.
“하늘로 올라가도 거기 당신이 계시고, 저승에 누워도 거기 또한 계시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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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회칠한 무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겉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속은 죽은 이들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는 회칠한 무덤 같기 때문이다. 이처럼 너희도 겉은 다른 사람들에게 의인으로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하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예언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묘를 꾸미면서, ‘우리가 조상들 시대에 살았더라면 예언자들을 죽이는 일에 가담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여 너희는 예언자들을 살해한 자들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언한다. 그러니 너희 조상들이 시작한 짓을 마저 하여라.”(마태 23,27-32)
무덤에 회칠을 하는 것은, 그것이 무덤이라는 것을 감추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덤이라는 것을 표시하기 위해서이고, 사람들이 무덤이라는 것을 모르고 접촉했다가 부정 타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본래의 의도를 생각하면, ‘회칠한 무덤’이라는 말은 위선자들을 가리키는 표현으로는 맞지 않는 말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관습을 모르는 이방인들이라면, 그것이 무덤이라는 것을 모르는 채로 하얗게 회칠한 모습만 보고 아름답다는 생각만 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위선자들을 가리켜서 ‘회칠한 무덤’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바로 그런 이방인들을 기준으로 해서 표현하신 것입니다. ‘회칠한 무덤’이라는 말에서, 예수님께서 성전 정화 때 하신 말씀이 연상됩니다.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라 불릴 것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드는구나.”(마태 21,13)
사람들은 건물의 겉모습만 보면서, 성전이 거룩하고 장엄하다는 생각만 하지만(마르 13,1),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이루어지는 일들을 보셨고, 그곳이 ‘강도들의 소굴’로 변질되었음을 꾸짖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 장엄한 건물들이 모두 허물어지게 될 것이라고 예고하셨습니다.(마태 24,2) 당시의 성전은 글자 그대로 ‘회칠한 무덤’이었을 뿐입니다. <교회의 ‘거룩함’은 건물이 아니라 ‘삶’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성전을 잘 짓는 것보다 교회답게 잘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개인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인의 ‘거룩함’은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 아니라, ‘삶’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신앙인은 하느님 나라를 구경하러 가는 관광객이 아닙니다. 그 나라에 들어가서 살기를 희망하는 사람이고, 들어가서 살아야 할 사람입니다. 그 ‘삶’은 지금 여기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운전할 때의 모습을 하나의 예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단속하는 경찰이 있고, 감시 카메라가 있고, 보는 사람들이 있을 때에는 교통 법규를 잘 지키면서도, 경찰도 없고, 카메라도 없고, 보는 사람들이 없을 때에는 교통 법규를 무시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바로 그런 것이 위선이고, 회칠한 무덤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보지 않아도 하느님께서 늘 지켜보신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느님을 ‘감시자’로 오해하면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늘 지켜보시는 것은 ‘감시’가 아니라 ‘보호’이고, ‘사랑’입니다. 우리가 거룩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것은 그 사랑과 보호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또 우리는 다른 사람이 위선자인지 아닌지를 함부로 판단하면 안 된다는 것도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속을 꿰뚫어보시는 분이니까 위선자를 위선자로 바로 알아보시고 꾸짖으셨지만, 우리는 남의 속을 모릅니다. 성인이 아닌데도 겉모습만 보고서 성인이라고 떠받드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고, 위선자가 아닌데도 위선자라고 함부로 비난하는 것은 죄를 짓는 일입니다.
우리는 남의 위선을 생각하기 전에 먼저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사람들이 볼 때 하는 나의 행동과 보는 사람들이 없을 때 하는 나의 행동은 같은가? 다른가?” 예수님 말씀에서, “너희가 예언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묘를 꾸미면서, ‘우리가 조상들 시대에 살았더라면 예언자들을 죽이는 일에 가담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고 말하기 때문이다.”라는 말씀은, 유대인들이 옛날의 예언자들과 의인들을 공경하는 것은 위선일 뿐이라고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유대인들은 옛날에 죽은 예언자들과 의인들의 무덤을 만들고 꾸미는 일을 잘했다고 하는데, 그들은 그렇게 하면서 자기들은 옛날의 성인들을 공경한다고 과시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보시기에 그것은 거짓, 즉 위선이었습니다. 조상들이 예언자들을 박해하고 죽인 것처럼, 그들도 세례자 요한을 죽였고, 예수님과 사도들을 박해하고 있고, 이제 곧 죽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여 너희는 예언자들을 살해한 자들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언한다.”라는 말씀은, “그 아비에 그 자식이다.”라고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너희 조상들이 시작한 짓을 마저 하여라.”라는 말씀을 원문대로 번역하면, “너희 조상들이 남겨 놓은 것을 행함으로써 조상들의 죄를 완전히 채워라.”이고, 이 말씀은, 예수님과 예수님의 제자들을 죽여서 조상들의 죄를 가득 채우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역설법’을 사용하신 말씀입니다.> 죄가 가득 차면 하느님의 심판과 벌이 내리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하느님의 심판을 받고 싶다면 조상들이 덜 채운 죄를 완전히 채워라.”라는 말씀이 되는데, 사실은 “하느님의 심판을 받고 싶지 않다면, 조상들이 했던 그런 짓은 하지 마라.”라는 뜻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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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청주교구 정용진 요셉 신부님]
옛날 이스라엘에서는 대개 바위를 깎아서 무덤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돌문으로 무덤 입구를 막아서 외부인의 침입과 약탈을 막았습니다. 시간이 흘러 무덤이 주변 환경과 어우러지면 어디가 무덤인지 분간하기가 쉽지 않아서 이것이 오히려 이스라엘의 정결법을 어기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에서는 무덤의 뼈나 시신에 몸이 닿으면 일주일 동안 다른 사람과 접촉하거나 만나는 것이 일체 금지되었기에, 사람들은 해마다 3월 초에 무덤에 회칠을 하거나 석회 가루를 뿌려 하얗게 만들고, 무덤을 주변 환경과 구별하는 표식을 만들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위선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그들을 보고 회칠한 무덤과도 같은 사람들, “겉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속은 죽은 이들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는” 사람들이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예수님 말씀을 들으며 우리가 지닌 바리사이의 성향을 성찰하게 됩니다. 다른 이들에게 자신을 꽤 괜찮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은 마음, 나아가 다른 이들에게 떠받들려 만족감을 얻고 싶은 마음은 없는지 돌아봅니다. 남들 앞에서 신심 깊고 열심인 신앙인처럼 굴며 사람들의 칭송을 얻고 거기에 즐거워하면서, 복음의 요청을 따르는 것에 무관심한 속마음과 태도는 없는지 살펴보아야겠습니다. 오늘 화답송에서는 주님께서 우리 내면을 알고 계신다고 고백합니다. “주님, 당신은 저를 살펴보시고 잘 아시나이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얼굴(모습)을 너무도 잘 알고 계십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비치는 자신의 얼굴을 생각하며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하느님 앞에서 비치는 자신의 얼굴을 생각하며 살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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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에는 우리가 안팎으로 그리스도인이기를 바라시는 주님의 마음이 엿보입니다. "너희도 겉은 다른 사람들에게 의인으로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하다."(마태오 복음 23장 28절)
오늘도 예수님께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위선을 혹독히 꾸짖으십니다. 그들은 백성들 안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부와 명예와 잇권을 누리며 영향력을 행사하는 지위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스스로 가르치는 바를 솔선해 지키면서 내면부터 차곡차곡 정의와 사랑의 덕을 채워가기를 바라십니다. 하지만 그들은 의롭게 되려고 하기보다 의롭게 보이려는 데에 더 많은 에너지를 써왔지요. 그런 이들 손에 쥐여준 율법은 사랑의 도구가 아니라 단죄와 심판, 소외의 무기가 되어 버립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가르치는 바를 실제로 살아가는 신앙인의 모범을 보여 줍니다.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밤낮으로 일하면서, 하느님의 복음을 여러분에게 선포하였습니다."(테살로니카 1서 2장 9절)
"우리가…… 얼마나 경건하고 의롭게 또 흠 잡힐 데 없이 처신하였는지"(테살로니카 1서 2장 10절)
바리사이였던 바오로는 예수님을 만난 후 새로운 길에 완전히 동화되었습니다. 그는 목숨을 바쳐 사랑을 완성하신 예수님을 알게 되자 신분이 보장하는 명성이나, 허세, 겉꾸밈, 명예 따위를 쓰레기로 여기고 오직 예수님께만 올인했지요.
그런데 우리는 겉과 속이 일치하기가 그리 쉽지만은 않다는 걸 모르지 않습니다. 알고도 제대로 실천하지 못하는 사랑의 진리가 얼마나 많은지요!
또 타인에게 충고는 잘하면서 자신의 편협한 마음 하나 건사하지 못할 때도 없지 않으니까요. 자신이 의롭고 사랑과 연민이 넘치는 그리스도인인지 자문하면서 부끄러움과 자괴감 사이를 오가는 우리에게 오늘의 말씀은 겉과 속의 틈을 줄여나갈 수 있는 좋은 길을 안내해 줍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말씀을 지키면, 그 사람 안에서 참으로 하느님의 사랑이 완성되리라."(복음 환호송)
열쇠는 바로 "말씀"입니다. 전해 받은 주님의 말씀이 그 사람 안에 머물면 차츰 그 말씀으로 물들어가지요.
말씀이신 분의 인격을 닮아가고 말씀으로 가리키시는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말씀이 내가 되고 내가 말씀이 되는 일치로 나아가면, 내면에 차오른 말씀이 나의 눈빛과 말과 행동이 되어 밖으로 흘러나갑니다. 그러면 겉과 속이 점점 같아지게 되겠지요.
"그 말씀이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고 있" (테살로니카 1서 2장 13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우리 각자가 걷고 있는 저마다의 인생길이 우리 안에 현존하시는 주님을 닮아가는 순례길이 아닐까 싶습니다. 정화되고 성화 되어 주님을 닮아가는 변형의 도가니이고 용광로이니 녹록하지 않은 건 사실이지만, 마음으로도 사랑하고, 말에도 사랑을 담으며, 행동으로 사랑을 증거하는 찐 그리스도인이 되어 가는 시공간인 셈입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향한 서슬 퍼런 꾸지람을 통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바를 알아듣고 깨닫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내면에 말씀을 품고 머물러 안팎 모두 참 그리스도인으로 영글어 가는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오늘 프란치스칸들은 성 루도비코 9세 임금 기념일을 지냅니다. 프랑스의 국왕이었으면서도 가난한 이들의 벗이 되어준 찐 그리스도인이었던 그를 기리며 주보 축일을 지내는 모든 재속 프란치스칸들에게 축하를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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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회칠한 무덤>
예수님께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꾸중하였습니다. ‘겉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회칠한 무덤 같기 때문’입니다. ‘겉은 의인으로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하다’라고 지적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 그 회칠한 무덤이 바로 저라고 생각했습니다. 신부이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은 아닙니다. 매일 미사를 봉헌한다고 성덕이 출중한 것도 아닙니다. 그에 상응하는 마음가짐과 정성을 담지 않으면 거룩한 것을 더 많이 접하기 때문에 오히려 더 불경한 잘못을 범하고 맙니다. 알면 아는 만큼 더 잘 살아야 하는데 아는 것과 사는 것은 분명 다릅니다. 사실 신부이기 때문에 더 많은 위선을 떨고 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신자들에게는 기도를 많이 하는 것처럼 말을 하지만 최소한의 의무인 ‘성무일도’조차 거르고 지나갈 때가 있습니다. 성체조배는 물론 묵주기도를 하는 것은 기본이거늘 일반 신자보다 더 많이 기도한다고 얘기할 수 없습니다. 이러저러한 인간적인 욕망에 대해서도 절제 있는 기쁨을 누리지 못할 때가 너무도 많습니다. 그러면서도 아닌 척하고 목을 빳빳이 세우고 다닙니다. 이런 모습에 주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실까? 생각하면서도 몸은 여전히 육정을 따르고 맙니다. ‘마음은 간절하나 몸이 말을 듣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겉과 속이 다른 위선자를 얘기하면서도 정작 자신이 그렇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내 눈 안에 들보를 지닌 채 남의 눈의 티를 빼주겠다고 허우적거리는 모습이 부끄럽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말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에게 다가오고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고 나에 대한 그들의 경외심은 사람들에게서 배운 계명일 뿐이니 나는 이 백성에게 놀라운 일을, 놀랍고 기이한 일을 계속 보이리라.”(이사29,13)
“마음이 똑바로 향해 있으면 행동 또한 바릅니다. 마음과 행동이 일치할 때 구원의 은혜를 입을 것입니다.”(아우구스티노) 과거는 성찰의 바탕이고 새 삶을 시작 한 날이 중요합니다. 신앙인에게 있어 과거는 걸림돌이 아니라 디딤돌입니다. 과거를 하느님의 자비에 맡기고 앞날을 하느님의 섭리에 맡겨 드리며 주어진 이 순간을 사랑으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이런 말을 하고 저런 행동을 하며 위선과 허물로 누벼놓은 이 날에 하느님의 크신 자비를 청합니다.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주님, 저의 허물을 용서하소서. 구원을 허락하소서. 아멘.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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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세계 최고봉은 ‘에베레스트’로 무려 해발 8848.86미터에 달합니다. 이 에베레스트를 많은 사람이 정복했지만, 하리 무다 마그르의 정상 도전은 사람들로부터 ‘불가능하다’라는 말을 듣기에 충분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두 다리는 무릎 위까지 절단되어 완전히 의족에만 의지해서 정상에 오를 수 없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다른 산악인보다 세 배가량 느린 속도였지만 결국 정상에 올랐습니다.
그는 네팔 용병으로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참여했고, 2010년 4월에 사제 폭탄을 밟아 안타깝게 두 다리를 잃게 되었습니다. 절망에 빠져 오랫동안 알코올 중독에 시달렸으며, 극단적인 시도도 여러 차례 했습니다.
그런 그에게 전환점이 찾아왔습니다. 자선 단체를 통해 스카이다이빙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다리가 없어도 많은 것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는 모두 저마다 약점과 장애가 있어요. 하지만 우리의 강점에 집중해야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약점에만 더 집중하는 우리가 아니었는지를 반성하게 됩니다. 약점에만 집중하면 할 수 있는 것을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할 수 없는 일만 보이면서 삶의 의미를 잃어버릴 수밖에 없게 됩니다. 결국 하느님의 창조 목적에 맞지 않게 살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향해 불행 선언을 하십니다. 겉으로는 스스로 의로운 사람인 척하면서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남들에게는 ‘죄인’이라는 무거운 짐을 지우면서 하느님께 나아가지 못하게 했지요. 약점에만 집중하게 사람들을 이끄는 것이었습니다. 과연 이런 모습을 하느님께서 좋아하셨을까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아주 강하게 “불행하여라.”라고 외치셨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제일 싫어하는 위선의 허울을 뒤집어쓴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창조 목적은 “보시니 참 좋았다.”라는 말씀처럼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 자신도 보시니 참 좋을 수 있도록 ‘강점’에 집중하면서 살아야 할 것이고, 더불어 남에 대해서도 그 사람을 통해서도 보시니 참 좋을 수 있도록 ‘강점’을 바라보고 이를 드러낼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모습은 여전히 그 옛날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의 모습처럼 약점만을 바라봅니다. 자기 약점만 바라보면서 할 수 있는 것도 하지 않고 있으며, 남의 약점을 바라보면서 깎아내리는 데만 집중합니다. 보시니 좋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 “불행하여라.”라는 말을 들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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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겉과 속>
마태오 23,27-32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꾸짖으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겉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속은 죽은 이들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는 회칠한 무덤 같기 때문이다. 이처럼 너희도 겉은 다른 사람들에게 의인으로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하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예언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묘를 꾸미면서, ‘우리가 조상들 시대에 살았더라면 예언자들을 죽이는 일에 가담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여 너희는 예언자들을 살해한 자들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언한다. 그러니 너희 조상들이 시작한 짓을 마저 하여라.”
<겉과 속>
끝까지
겉이 속을
감쌀 수 없으며
언젠가
속이 겉으로
나오기 마련이니
뭇 눈길
사로잡으려는
겉 나보다
뭇 눈길
떼지 못하는
속 나이기를
그리하여
늘 그렇게
나는 나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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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찐 복음 선포자'와 '찐 신자'>
요즘 우리말에 ‘찐 스승’이니 ‘찐 친’이니 하는 말이 유행입니다. 순우리말로 바꾸면 참 스승이나 진실한 친구라는 뜻이겠습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도 이런 관점에서 볼 수 있을 겁니다.
오늘 복음의 종교 지도자들에게 주님은 위선자라고 야단치시는데 이들은 ‘찐 지도자’들이 아닌 거짓 지도자들이라는 뜻일 겁니다.
이에 비해 오늘 독서의 복음 선포자들 곧 바오로와 동료들은 자기들이 ‘찐 종교 지도자’라고 얘기하고 있는데 이것을 듣는 우리에게 이들의 얘기가 결코 자화자찬하는 것처럼 들리지 않고 진실하게 들립니다.
사실 많은 경우 속으로는 자기를 자랑하고 싶지만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겉으론 겸손을 떨지요.
그러나 바오로 사도는 자기를 자랑할 마음이 전혀 없기에 겸손을 떨 필요도 없고 자기를 전혀 의식하지 않기에 자기 진실을 정말 있는 그대로 얘기할 수 있습니다.
어쨌거나 바오로 사도는 자기들이 ‘찐 복음 선포자’라고 하는데 어떤 면에서 자기들이 ‘찐 복음 선포자’라고 얘기하는 것입니까?
첫째로 자기들은 신자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았다고 합니다. “우리는 여러분 가운데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밤낮으로 일하면서 하느님의 복음을 여러분에게 선포하였습니다.”
손수 일하여 먹고 사는 것, 다시 말해서 놀고먹지 않는 것, 이것이 프란치스코도 그렇고 바오로 사도가 당당하게 살고, 당당하게 복음 선포를 할 수 있는 힘 또는 근거였습니다.
복음을 열심히 연구하고 그것을 열심히 선포하는 것도
사실은 놀고먹는 것이 아니기에 신자들에게 생계를 의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만 신자들과 똑같이 일할 때 더 당당하게 복음 선포할 수 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몇 년 전 막노동할 때 저는 처음으로 부끄러움이나 죄송함을 면할 수 있었습니다. 신자들은 그렇게 힘들게 일하고 고생하는데 그들의 봉헌으로 나는 호의호식하고 있구나 하는 부끄러움과 죄송함이 늘 있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같이 일하고 고생하니 신자들과 제가 같다는, 동질감이랄지 동료 의식이랄지 그런 것을 더 느꼈고 저의 복음 선포가 신자들의 현실과 겉돌지 않는다는 느낌, 신자들의 삶과 동떨어진 뜬구름 잡는 말이 아니라는 느낌이 있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어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우리는 아버지가 자녀들을 대하듯 여러분 하나하나를 대하면서, 당신의 나라와 영광으로 여러분을 부르시는 하느님께 합당하게 살아가라고 권고하고 격려하며 역설하였습니다”
도매 복음 선포와 소매 복음 선포라는 말이 있는지 모르지만 바오로 사도는 여기서 신자들을 도매금으로 그러니까 한 묶음으로 대하지 않고 하나하나 소매금으로 대하며 복음을 선포하였다고 얘기하는 것이 인상적입니다.
천 명, 만 명을 상대로 말로 하는 대중 복음 선포가 아니라 한 명, 한 명을 상대로 인격적인 복음을 선포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착한 목자의 비유에서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하나하나 이름으로 부르며 불러낸다고 하셨고, 다른 양들을 놔둔 채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 헤맨다고도 하신 그대로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을 모두 다 사랑하시면서도 나만 특별히 사랑하시는 하느님이시기를 바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않고 정말로 나만 사랑하시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고 내가 도매금이 아니라 특별히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고 싶은 것이지요.
이렇게 인격적으로 사랑하며 동시에 부르시는 하느님께 합당하게 살라고 바오로 사도가 권고하고 격려하며 역설하니 신자들은 그 말을 사람의 말로 받아들이지 않고 하느님의 말로 받아들입니다.
이런 바오로와 신자들의 관계가 참으로 아름답고 부럽지만 바오로 사도 같은 ‘찐 복음 선포자’가 없더라도 여러분은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받아들이겠다는 마음으로 제 말과 다른 사제들의 말을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로 받아들이시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찐 신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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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끄러워하고 부러워하는>
지난주 구약 판관 시대 주변 이방인들이 왕을 두고 있는 것을 부러워하여 자기들도 왕을 세우려고 하는 이스라엘에 대해 얘기를 하며 왕이란 필요악이라는 취지로 강론한 적이 있지요.
그런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정치 지도자와 종교 지도자 중에 누가 더 필요악일까요? 물론 둘 다 나쁜데 그 경우 누가 더 나쁘냐는 것이지요.
제 생각에 왕보다 성직자가 더 나쁘고 더 악입니다. 정치 지도자는 백성을 이 세상에서 불행케 하는 데 그치지만 종교 지도자는 이 세상에서부터 저 세상까지 불행케 하기 때문입니다.
그저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당대 종교 지도자들을 꾸짖으시며 자기도 천국에 가지 못하고 남도 천국 가지 못하게 문을 잠가버리는 자들이라고 하셨는데 이것보다 더 혹독한 꾸짖음이 어디 있겠습니까?
사실 이런 성찰을 저를 비롯한 종교 지도자들이 한다면 자기가 그런 존재라는 것이 두려움을 느낄 것이고 그래서 자기 직분에 합당한 선과 성스러움이 없음을 뉘우치며 겸손하게 고백할 것이고 위선은 꿈도 꾸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직자들에게 자기 직분에 대한 겸손한 성찰과 두려움이 있다면 바오로 사도가 테살로니카 신자들에게 한 것처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당대 종교 지도자들이 무거운 짐을 사람들 어깨에 올려 놓고 자기들은 손도 까딱않으며 염불에는 관심없고 젯밥에만 관심있다고 나무라시는 데 비해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여러분은 우리의 수고와 고생을 잘 기억하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여러분 가운데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밤낮으로 일하면서, 하느님의 복음을 여러분에게 선포하였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복음을 선포하면서도 폐가 되지 않으려고 손수 일하였다는 얘기를 여러 차례 하였지요.
사실 신자들이 얼마나 힘들게 사는지 아는 성직자라면 신자들 어깨에 짐을 더 올려놓지 않음은 물론 자기를 위해서 이런저런 요구를 하지 않을 것이며 할 수 있는 한 가난하고 수고하며 살려고 할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또 자기와 동료들이 경건하고 의롭게 또 흠 잡힐 데 없이 처신하면서 아버지가 자녀들을 대하듯 신자들을 대했다고 자기들의 경건하고 점잖은 처신에 대해서도 얘기합니다.
이런 바오로에 비해 저를 포함한 많은 성직자들이 신부 곧 신적인 아버지로서의 품위를 생각지 않고 세속화된 세상에 똑같이 세속화된 사제로서 살아가고 있음이 많이 부끄럽습니다.
그리고 바오로 사도가 그렇게 처신했기 때문이겠지만 바오로 사도는 신자들에 대해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다음과 같이 얘기하는데 신자들이 많이 부럽습니다.
"우리가 전하는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때, 여러분이 그것을 사람의 말로 받아들이지 않고 사실 그대로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사실 오늘날 사제와 신자들의 관계가 이런 관계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사제들은 가난하고 경건하게 살며 하느님 말씀을 선포하고 신자들은 그것을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느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그래서 오늘 복음의 주님 말씀과 사도 바오로의 복음 선포에 비춰 저를 성찰하고 부끄러워하면서도 바오로 교회를 부러워하는 오늘 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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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회개의 여정>
- 선택, 훈련, 습관 -
“주님, 당신은 저를 살펴보시고 잘 아시나이다.
당신 숨결을 피해 어디로 가리이까?
당신 얼굴을 피해 어디로 달아나리이까?
하늘로 올라가도 거기 당신이 계시고,
저승에 누워도 거기 또한 계시나이다.”(시편139;1.7-8)
엊저녁의 밤은 공기도 아주 청정하여 상쾌했고 어둠을 가로질러 나르는 세 마리의 반딧불 빛이 참 반갑고 신기했습니다. 청정지역에 밧딧불이라는데 수도원 정원이 그런가 봅니다. 형설지공(螢雪之功), 반디불빛과 눈빛 아래서 공부에 전념했다는 옛 선비의 전설같은 아름다운 일화도 생각났습니다. 어둔 세상을 밝히는 반딧불같은 강론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밤 1시 기상후 집무실을 향할 때 역시 상쾌했습니다. 침실문밖을 나서면 늘 맨먼저 보는 하늘과 불암산입니다.
“하느님 만세!”
“예수님 만세!”
“대한민국 만세!”
“가톨릭 교회 만세!”
“요셉 수도원 만세!”
나라가 있고 종교도 있습니다. 집무실 십자고상 바로 아래 붙인 태극기를 보며 성호경과 영광송 기도후 만세오창후 시작하는 하루입니다. 8년간 교편생활후 34세 늦깍기로 수도원에 입회후 만41년, 40세에 요셉 수도원에 부임하여 정주의 산이되어 산지 만35년 작금의 나이 75세, 참 쏜살같이 흐르는 세월입니다. 이제부터 산날 보다는 남은 날을 헤아려야하는 나이가 됐습니다.
이런 일이 있으리라곤 꿈에도 상상치 못했습니다. 역사의 반동도 퇴행도 도저히 이럴 수는 없습니다. 십자고상 아래 태극기를 부착하는 것은, 피정자 모임시 퇴장 성가를 애국가로, 또 강론시 애국가를 불러 보기는 사상 초유의 일로 상상도 못했던 일입니다. 그정도로 현재의 상황이 공분을 불러 올 정도로 엄중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저절로 애국하는 마음, 독립운동하는 마음으로 깨어 살아야 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회개하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늘 나라의 선포에 앞서 필히 선행되어야할 회개입니다. 신자생활의 기초가 바로 하느님께 돌아서 제자리로 돌아가는 회개입니다. 한 두 번의 회개가 아니라 기도처럼, 늘 끊임없는 기도와 함께 가야할 끊임없는 회개입니다. 그러니 우리 믿는 이들의 삶은 회개의 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무지와 허무에 대한 궁극의 답도 하느님께 돌아가는 회개뿐임을 깨닫습니다. 영적 삶 역시, 회개의 메타노이아, 친교의 코이노니아, 봉사의 디아코니아 순서입니다. 그러니 자발적 선택의 회개의 은총은 얼마나 고마운지요!
하느님께 돌아가는 회개와 더불어 사랑의 회복이요, 이어 자기를 아는 겸손에 지혜입니다. 도대체 회개 없는 겸손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2차대전이후 처절한 회개와 반성으로 새로 난 독일과는 달리 같은 전범국가로서 일본은 회개가 전무한 나라입니다. 회개하지 않은 역사는 또 반복될 수 있습니다. 철저한 회개만이 악순환의 역사를 끊을 수 있습니다. 이래서 한시도 경계를 늦춰서는 안됩니다.
고려시대이후 끊임없는 왜구의 침략으로 얼마나 고단한 한반도 민초들의 삶이었는지 역사가 증명합니다. 7년 동안의 임진왜란으로 전국토는 초토화 되었고, 35년 간의 일제의 강점기 식민지 시대로 나라 잃은 세월을 보내다가 하느님과 연합국들, 순국 선열들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세계 2차 대전후 광복을 맞이한 한반도 땅이 아닙니까? 다시 불행의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은 단호히 막아야 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흘린 피만으로도 차고 넘칩니다. 며칠전 유명 정치평론가의 결론같은 언급도 생각납니다.
“문제는 우발적 충돌과 확전이다. 대통령은 시민의 생명과 안전을 모든 정책의 중심에 놓아야 한다. 그래서 이길 수 있더라도 전쟁은 기필코 피하고 예방 외교를 적극적으로 펼쳐야 한다. 평화와 안보에는 신중과 겸손이 최대의 미덕이다.”
너무 지당하고 합당한 생각입니다. 오늘 말씀도 회개의 관점에서 보면 그 이해가 확연해 집니다. 회개를 통해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단호히 배격하는 선택이요 제1독서의 바오로 일행과 테살로니카 교회 신도들의 순수한 믿음과 사랑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불행 선언은 저주라기 보다는 회개를 촉구하는 간곡한 호소입니다. 오늘은 7개의 불행 선언중 마지막 둘입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겉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속은 죽은 이들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는 회칠한 무덤같기 때문이다. 겉은 의인처럼 보이나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하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예언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묘를 꾸미면서...너희는 예언자들을 살해한 자들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언한다. 그러니 너희 조상들이 시작한 짓을 마져하여라.”
그대로 오늘 종교인들의 민낯을 보는 듯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예언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묘를 꾸미면서 동시에 예언자들을 박해하는 자가당착의 모순된 위선적 삶을 정확히 지적하는 예수님입니다. 매국을 꾸짖으면서 온갖 합리화와 강변으로 매국 행위를 공공연히 하는 친일의 정치가들이나 식민사관에 중독된 이들도 꽤 많은 작금의 현실입니다.
예나 이제나 이런 위선적 부정적 요소는 인간의 보편적 현상입니다. 정말 깨어 회개의 삶을 통해 좋은 삶을 선택, 훈련, 습관화 하지 않으면 위선적 거짓 삶의 악순환의 질곡에서 벗어나기 힘들 것입니다. 마태복음의 이런 부정적 교회 지도자들과 신도들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바오로 일행과 테살로니까 교회의 신도들입니다.
참으로 복음적 교회의 원형을 보는 듯 회개와 더불어 이런 삶을 자발적으로 선택하고 훈련하여 습관화하는 것입니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습니다. 바오로 일행의 순수하고 진실하고 겸손한 삶의 모습을 보고 배웠음이 분명한 테살로니카 교회 신도들입니다. 얼마나 순수하고 아름다운 바오로 일행과 데살로니카 신도들의 삶인지 다음 바오로의 고백이 그대로 마음에 감동으로 와닿습니다.
“우리는 여러분 가운데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밤낮으로 일하면서, 하느님의 복음을 여러분에게 선포하였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경건하고 의롭게 또 흠잡힐데 없이 처신하였는지, 여러분이 증인이고 하느님께서도 증인이십니다. 또한 우리는 끊임없이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가 전하는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때, 여러분이 사람의 말로 받아들이지 않고 사실 그대로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이 신자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저를 통한 하느님의 말씀을 사람의 말이 아닌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일 때 오늘 강론을 통한 말씀은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면서 여러분을 정화하고 성화하며 또 위로와 치유도 선사할 것이니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기도 합니다. 또 주님의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회개의 여정에 항구하고 충실하도록 도와 주십니다.
“주님, 제가 새벽놀의 날개 달아,
바다 끝에 자리 잡아도,
거기서도 당신 손이 저를 이끄시고,
당신 오른 손이 저를 붙드시나이다.”(시편139,9-10).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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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겉은 다른 사람들에게 의인으로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하다."(마태23,28)
<두 모습!>
오늘 복음(마태23,27-32)은 지난 주 토요일부터 시작해서 세 번째로 전해지는 '위선자들에 대한 책망'입니다.
오늘은 겉모습과 속 모습이 다른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위선을 지적하십니다. 겉은 의인으로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 찬 그들의 위선을 책망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위선을 책망하시는 긴 말씀을 대할 때마다 우리 안에 그리고 내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성향(모습) 때문에 이런 기도를 바치게 됩니다.
"주님, 부끄럽습니다. 이 부끄러움에 당신의 크신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
'우리는 위선자들입니다.'
언행의 불일치를 드러내는 위선자, 겉모습과 속 모습이 다른 위선자, 하느님의 뜻과 말씀에 어긋나는 삶을 사는 위선자들입니다. 이 위선으로부터 완전 자유롭다고 할 사람이 과연 있을까? 그래서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은 '돌아감(회개)'이요 '하느님 자비에 의탁함'입니다.
어제 교구청에서 합천본당 신부님과 회장단과 사무장과 어린이집 원장으로부터 인수인계를 받았습니다. 그동안 공소사목을 하다가 본당사목의 첫 발령지여서 그런지 마음이 새로웠습니다. 합천본당에는 공소가 세 개가 있으니 공소사목은 계속됩니다.
오늘 이삿짐 싸고, 모레(9.1 금) 10시 미사를 마치고 배둔을 떠납니다. 이곳에서 2년 7개월 동안 사목했습니다. 오늘 복음묵상을 하면서 더 특별히 이곳에서 드러낸 저의 위선을 성찰합니다.
자비로우신 하느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나도 자비로운 사제가 되겠다고 '루카복음 6장 36절'의 말씀을 사제서품 성구로 택했는데, 그렇지 못했던 저의 위선의 죄에 대해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며 기도합니다.
"주님, 위선을 드러낸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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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처럼 너희도 겉은 다른 사람들에게 의인으로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하다."(마태오 복음 23장 28절)
<회개하자!>
오늘도 예수님께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위선을 책망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지적하신 '위선'은, 겉과 속이 다른 모습입니다. 겉으로만 의인처럼 행동하고, 속은 의인이 아닌 모습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삶의 자리에서 정의를 외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정의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그러니 오늘 복음은, 지금 우리의 위선, 나의 위선에 대한 강한 책망이기도 합니다. 위선에 대한 예수님의 강한 책망이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저는 그것이 '회개'라고 묵상했습니다.
'위선은 죄'입니다. 그러니 얼른 '위선의 죄에서 돌아서라는 예수님의 간절한 호소'라고 묵상했습니다. '회개'는 참으로 '기쁜 일'입니다. 주님을 참으로 기쁘게 해 드리는 일이고, 또한 나를 참으로 기쁘게 하는 일입니다.
오늘 '화답송'이 전하고 있는 것처럼, 주님은 항상 우리를 살펴보고 계시고, 주님을 피해 달아나 숨을 곳이란 하나도 없습니다.
"주님, 당신은 저를 살펴보시고 잘 아시나이다. 당신 숨결을 피해 어디로 가리이까? 당신 얼굴을 피해 어디로 달아나리이까? 하늘로 올라가도 거기 당신이 계시고, 저승에 누워도 거기 또한 계시나이다."(화답송)
그리고 무엇보다도 불순종의 죄를 짓고 달아나 숨어버린 아담을 "너 어디 있느냐?" 하고 부르신 그 하느님께서 우리를 늘 찾고 계십니다.
그러니 얼른 회개합시다! 그러니 얼른 자비로우신 주님께로 돌아가 우리도 이런 시편 기도를 드립시다!
"주님, 귀를 기울이소서. 제게 응답하소서. 당신 종을 구해주소서. 당신은 저의 하느님, 당신을 신뢰하나이다. 당신께 온종일 부르짖사오니,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입당송)
'오늘이 회개의 날'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날마다 오늘이 회개의 날'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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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IIqZ0RLh8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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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는 회칠한 무덤 같기 때문이다."(마태 23, 27)
가짜와
거짓에
기대어 살아가는
우리들 삶입니다.
가짜를 내놓고
진짜를 만나는
시간입니다.
우리 내면의
가짜를 아프게
만납니다.
양심의
질서에도
없는 가짜는
늘 시끄럽고
가짜는 늘
어수선하며
가짜는 늘
나쁜 짓만
골라서 합니다.
마음이 썩으면
이와 같이
우리의 삶도
썩어
악취가 납니다.
이제 그만
끝내야 할
가짜의
삶입니다.
진짜의 맛
진짜의 기쁨을
모른 채
살아갑니다.
하느님께
부끄럽고
죄송한
우리들
내면입니다.
하느님께
멀어지는 것은
언제나 탐욕으로
가득찬
우리자신들입니다.
생명의 질서를
깨뜨리는
저마다의
가짜를
십자가에
못박는
시간입니다.
역사는 가짜가
아니라 사랑이며
진짜의 참된
부활입니다.
더 이상
죽이는 일에
가담하는
가짜가
아니라
예언자들을
살리는 일에
가담하는
진짜의 삶이길
기도드립니다.
죽이는 삶은
가짜의
영원한
노예이지만
살리는 삶은
거센
풍랑 속에서도
자유로운
자유인의
삶입니다.
진짜는
진짜이기에
언제나
자유롭습니다.
회칠한
무덤같고
온갖 더러움으로
가득찬 삶에서
벗어나는
행복의 시작은
가짜를 멈추는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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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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