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넨의 전수염불 이은 신란 유배 후 간토에서 염불 전법 10만여명 아미타불에 귀의 ‘악인부터 구한다’는 이론에 반도덕적 사건 발생 잇따라 신란, 아들 보내 해결 모색 오히려 왜곡해 갈등 부추기자 부득이 아들과의 절연 선택
“젠란은 내가 말한 적도 없는 것을 한밤중에 자신에게만 가르쳤다고 말하면서 간토(關東)의 동행(同行)들을 혼란시키고 있다. 그러니 이제 부득이 부모와 자식의 연을 끊을 수밖에 없구나.” 1256년, 84살의 신란(親鸞, 1173~1262)은 깊은 상실감에 빠졌다. 그토록 믿었던 아들 젠란(善鸞, 1216?~1286?)이 불법을 어지럽히고 정토업을 닦는 동행(同行)들을 분열시키고 있음을 안 것이다. 신란은 그동안 동행들에게 “지금 그대의 눈앞에서 누군가가 그대 아이를 살해한다고 하더라도 그대는 살인자를 용서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해왔다. 신란의 말과 행동에는 늘 자비가 깊이 묻어났다. 오래 전 산중에서 신(神)을 모시던 벤엔(弁円)이 칼을 빼들고 달려들 때도 신란은 눈 하나 깜짝 않았다. 오히려 한없이 따뜻한 눈길에 당황한 벤엔이 결국 귀의하는 일까지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아들이었다. 승려도 아니고 속인도 아닌 비승비속(非僧非俗) 생활 속에서 낳은 자식이었다. 젠란은 남들 손가락질에도 아랑곳 않고 묵묵히 아버지 길을 따랐다. 아미타불 본원(本願)에 자신을 내맡겨 염불하는 젠란을 볼 때면 내심 흐뭇했다. 신란은 4년 전 그 때 젠란을 간토(關東)로 보내지 말았어야 했다는 회한에 휩싸였다. | | | ▲ 신란이 83살 때 모습을 그린 초상화. 농어민과 사냥꾼 등 하층민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던 신란의 모습에서는 가죽으로 만든 샌들과 짐승가죽 깔개 등 독특한 물품이 등장한다. 이 초상화는 니시혼간지에 소장돼 있다. |
간토는 신란에게 각별한 곳이었다. 1211년, 4년간의 유배가 끝난 뒤에도 그는 에치고(越後)를 떠나지 않았다. 3년 뒤, 42살의 그가 향한 곳은 자신이 자라고 머물렀던 교토(京都)가 아니라 간토였다. 스승 호넨(法然, 1133~1212)이 정토로 떠났기에 교토에 가더라도 더 이상 스승을 볼 수 없었다. 궁벽한 지역의 업장 두터운 하층민들에게 염불이 더 절실하다는 점도 그의 발걸음을 교토에서 멀어지도록 했다. 신란에게 유배는 시련이자 전법의 시작이었다. 동쪽 해안에 위치한 에치고는 교토와는 확연히 달랐다. 하루 끼니를 잇기 위해 사냥과 낚시를 해야 하는 빈민들이 대부분이었다. 한문으로 된 불경을 읽는다거나 공덕을 쌓기 위해 보시할 여력도 없었다. 그들에게 불살생계는 죄책감을 부추겼고, 간경이나 보시공덕은 무기력감을 더할 뿐이었다. 신란은 스승 호넨이 그토록 강조했던 전수염불(專修念佛)의 위대함을 새삼 깨달았다. 스승은 계정혜 삼학(三學)을 돌아볼 필요 없다고 했다. 이것저것 한눈팔지 않고 염불만을 정토왕생의 업으로 선택해 오롯이 닦으면 왕생한다고 강조했다. 염불이야말로 아미타불의 본원(本願)에 의해 선택된 최고의 행위라는 것이다. 신란에게 호넨은 최고의 성인(聖人)이었으며, 진리의 화현이었다. 신란은 29살 때까지 겪어야 했던 고통조차 어쩌면 호넨을 만나기 위한 통과의례라 여겨졌다. 신란은 몰락한 하급귀족 출신이었다. 4살 때 아버지와 헤어지고 4년 뒤에는 어머니마저 세상을 등졌다. 9살 때 숙부의 손에 이끌려 히에이잔(比叡山)으로 향한 것도 가난 때문이었다. 천태종 본산이었던 그곳에서 신란은 당승(堂僧)으로 지냈다. 권력이나 돈 있는 이들이 죽으면 염불공덕으로 그들이 좋은 곳에 태어나라고 며칠 간 쉬지 않고 염불을 해주는 역할이었다. 3일 내지 7일 동안 줄곧 아미타불의 명호를 외워야 하는 부단염불(不斷念佛)은 횟수를 거듭해도 고되기는 마찬가지였다. 허나 신란을 괴롭힌 것은 육체적인 힘겨움에 있지 않았다. 불쑥불쑥 치솟는 애욕 등 ‘죄악심중 번뇌치성(罪惡深重 煩惱熾盛)’한 자신의 모습에 신란은 절망을 넘어 심한 죄책감에 사로잡혔다. 현세이익을 위해 기계적으로 행해지는 염불방법이 그의 번뇌를 해결해줄 수는 없었다. 그 즈음 신란에게 호넨이 전수염불을 주장한다는 얘기가 들려왔다. 잡행(雜行)을 버리고 오로지 염불만 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호넨은 지금 말법시대이기에 간경도, 계율도, 예불도 잡행이라고 했다. ‘무량수경’의 법장보살 48대원 중 ‘내가 만약 부처가 되어서 시방세계 중생들이 지극한 마음으로 믿고 즐거워하며 나의 땅에 태어나고자 열 번 염불[十念]했는데도, 나의 국토에 태어나지 못한다면 나는 정각을 얻지 않으리라’는 서원을 세웠기에 범부중생인 우리는 아미타불의 본원과 자비에 전적으로 내맡기면 된다고 했다. 교단들은 호넨의 주장을 일제히 비난하고 나섰다. 자신들의 교파 이론과 수행체계를 전면으로 부정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신란은 호넨의 주장에 깊이 공감했다. 전수염불이 계율을 무시하고 도덕적 타락을 초래한다고 비판했지만 설득력이 없어보였다. 득도와 수계과정을 거쳐 정식승려가 되면 세금을 면죄 받는 특권계급에 편입될 수 있었지만 ‘승니령(僧尼令)’ 탓에 일반 서민에게 불법을 설할 수조차 없었다. 출가해 계율과 승니령을 따른다는 것은 청빈한 삶이나 중생구제와는 동떨어진 안락함을 선택한 것이나 다를 바 없었다. 폭풍우와 지진, 화재, 전염병, 기아, 혹한으로 사람들이 속절없이 죽어갔다. 법당에 모셔진 불상을 땔감으로 훔쳐가는 이들도 있었다. 어떤 해는 기근과 전염병으로 두 달 사이 무려 4만2000명의 시신이 길거리에 나뒹굴었다. 그런데도 사찰은 이들을 구제하기는커녕 명리에만 골몰했다. 창과 칼로 무장하고 세속적 이익을 위해 권력층과의 싸움을 마다하지 않았다.
1201년, 신란은 20년간 지속했던 천태종 승려의 길을 접고 호넨에게로 향했다. 얼마 전 교토 롯카쿠당(六角堂)에서 백일기도가 끝날 무렵 “호넨을 찾으라”는 쇼토쿠태자(聖德太子, 574~622)의 계시도 신란의 마음을 굳히는데 한몫했다. 29살 신란이 호넨을 찾았을 때 그는 69살의 노승이었다. 호넨은 신란에게 법장보살 본원이 있기에 선인이나 악인, 부자나 빈민, 출가자나 재가자, 남자와 여자, 노인과 아이 그 누구라도 ‘나무아미타불’만 외우면 왕생한다고 했다. “염불이 최우선이네. 염불을 방해하는 것은 떠나도록 하게. 출가 승려로 염불하기 어려우면 결혼해 염불하게. 결혼 때문에 염불할 수 없다면 떠돌이 승려가 돼서라도 염불하게. 오직 염불이 있을 뿐이라네.” 호넨에게는 염불과 정토왕생이 삶의 유일한 목적이었다. 동시에 염불은 모든 사람들이 지향해야할 지고지순한 선이라고 보았다. 계율을 지키느냐 마느냐, 결혼을 하느냐 마느냐는 본질적인 문제가 될 수 없었다. 신란은 그토록 찾던 가르침이 전수염불에 있음을 알았다. 그는 다짐했다. 비록 호넨 성인에게 속아 자신이 지옥에 떨어질지라도 후회하지 않겠다고. 신란은 호넨 처소를 부지런히 오가며 그의 가르침을 익혔다. 호넨은 비밀리 유통되던 자신의 저술 ‘선택본원염불집(選擇本願念佛集)’을 신란에게 서사할 수 있도록 허가했다. 거기에 직접 책 제목과 ‘나무아미타불 왕생지업 염불위본(南無阿彌陀佛 往生之業 念佛爲本)’이라는 글자까지 써주었다. 호넨이 젊은 수행자에게 보내는 깊은 신뢰였다. 신란은 크게 감격했다. 그 만남은 6년 뒤 두 사람이 유배될 때까지 지속됐다. 1207년 전수염불 금지령이 떨어졌다. 몇몇 제자들의 풍기행위를 문제 삼아 전불염불이 사회적 불안을 초래한다는 게 이유였다. 호넨과 7명의 제자들은 유배형에 처해졌고, 제자들 4명은 사형을 당했다. 신란은 더 이상 기존 교단의 질서에 얽매이지 않기로 맹세했다. 계율의 무거운 짐도 과감히 던져버렸다. 중요한 것은 오로지 아미타불에 자신의 전부를 내맡긴다는 철저한 신앙뿐이었다. 그는 9살 아래인 에신니(惠信尼, 1182∼1268)와 결혼생활을 시작했다. 철저한 자기부정을 통해 자유로워지려는 그의 종교적 확신에 따른 선택이었다. 신란은 아미타불의 세계로 침잠했다. 그리고 마침내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르렀다. “아미타불께서 오겁(五劫)에 걸쳐 사유해 세우신 서원을 곰곰이 생각해보면 오직 신란 한 사람을 위해서였다. 그 엄청난 업을 지닌 나를 구하고자 하신 아미타불의 본원이 얼마나 감사한가!” 그것은 신란의 자만심이 아니었다. 자신처럼 큰 악업을 지닌 범부조차 아미타불이 도와준다는 것으로, 아미타불 구제 대상은 고통 받는 모든 ‘개인’이라는 점에 대한 깊은 자각이었다. 신란은 오직 염불만이 진실하다고 확신했다. 선과 악도 우리 자신의 판단을 넘어서 있으며, 악의 고리에서 구제해주는 것은 오직 아미타불의 자비뿐이었다. 신란의 사상은 하층민과의 삶 속에서 더욱 성숙해져갔다. 그는 스승 호넨을 떠올리며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스승이 유배당하지 않았다면 자신이 이곳에서 법을 펴지 못했을 것이 분명하니, 이 또한 스승의 은덕이라 여겼다. 1214년, 신란의 유배가 풀리고 승적이 복권됐다. 그는 간토로 옮기면서 본격적인 전법의 길에 나섰다. 신란은 스스로를 어리석은 까까머리라는 뜻의 ‘우독(愚禿)’으로 칭하며, 사냥꾼, 뱃사람, 장사꾼, 도축자, 나병환자 등 가난하고 무지한 사람들에게 법을 전했다. 신란은 외쳤다. “누구든 아미타불 명호를 부르면 반드시 구제받습니다. 염불은 인간이 생각해낸 것이 아니라 아미타불의 본원에서 비롯됐기 때문입니다. 염불을 하면 남녀노소, 빈부귀천, 출가재가의 차별이 없이 모두 한 가족입니다.” | | | ▲ 정토진종 최대 사찰인 교토의 니시혼간지(西本願寺)는 ‘현세 이익’을 추구하지 않겠다는 신란의 선언에 따라 지금까지 부적이나 기왓장 등을 팔지 않는다. 왼쪽에 보이는 어영당은 신란의 목상을 안치한 곳으로 3600명이 한꺼번에 들어가 법회를 볼 수 있다. |
신란은 아미타불의 본원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신심과 구제에 대한 감사의 응답으로 ‘나무아미타불’ 명호를 부르는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그는 악한 사람들이야말로 아미타불이 먼저 구제한다는 ‘악인정기(惡人正機)’를 주장했다. 자비로운 부처님이 선한 사람보다 지옥행이 예정된 중생들을 더 가엾게 여겨 구제의 손길을 편다는 것이었다. 마치 강에 빠진 사람이 있다면 헤엄을 잘 치는 사람보다 헤엄을 못 치는 사람을 먼저 구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논리였다. 대중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신란의 가르침은 억압을 숙명처럼 안고 살아왔던 이들에게는 처음으로 평등의 의미를 깨우쳐주었다. 직업으로 인한 열등감과 내세에 대한 불안감도 해소시켜 주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법을 듣기 위해 찾아왔다. 그 중에는 제자가 되겠다는 이들도 많았다. 신란은 그들에게 자신은 제자를 두지 않는다고 했다. 자신의 노력에 의해 사람들이 염불을 했다면 제자로 삼겠지만 아미타불 본원에 의해 염불하는 이들을 제자라고 부를 수는 없다고 했다. 신란은 그들을 함께 같은 길을 가는 도반이라는 의미로 ‘동행(同行)’ ‘동붕(同朋)’이라 불렀다. 그렇더라도 그들에게 신란의 존재는 절대적이었다. 신란을 찾는 이들이 감당할 수 없이 많아지자 신란은 속 깊은 동행들에게 사찰은 세우지 말고 주거지를 개조해 법을 전할 수 있도록 이끌었다. 그렇게 신란이 간토에서 법을 펼친 지 20년. 신란이 교토로 돌아올 무렵 그의 가르침을 따르는 이들이 무려 10만여 명에 이르렀다. 농민, 어민, 상인, 수공업자 등을 비롯해 무사와 호족세력들도 있었다. 간토는 민중들이 중심이 된 새로운 신앙운동의 진원지였다. 동행들이 크게 늘자 문제점도 하나둘 생겨나기 시작했다. 아미타불을 믿고 염불만 하면 구제받는다는 사상은 도덕불감증으로 이어져 사회문제를 일으키고는 했다. 심지어 어떤 악행을 저질러도 왕생에 지장이 없다고 말하는 이들까지 생겨났다. 신도(神道)의 신들을 비방하거나 아미타불 외의 부처들을 헐뜯는 일들도 잦아졌다. 신란은 그들에게 진정 정토를 사모한다면 감각적 탐닉을 일삼는 부도덕한 행동을 하지 않으며, 해독제가 있다 해서 마음대로 독약을 먹어서는 안 되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지적했다. 그럼에도 논란은 완전히 종식되지 않았다. 신란이 교토로 돌아온 뒤에는 더 많은 문제들이 불거졌다. 종종 동행들의 반사회적 행동으로 막부가 개입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신란이 나쁜 사람이 먼저 구제받는다는 ‘악인정기설’을 주창한 것은 살아가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천한 일을 해야 하는 이들을 구제하려는 의도였다. 이는 ‘악인들’의 노동에 전적으로 기대 고고한 척하는 ‘선인들’의 위선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이기도 했다. 선란이 무계(無戒)를 공공연히 선언했던 것도 계율을 통해 성불하려는 ‘자력의 행위’에 의탁하려는 마음을 경계했던 것이지 방편으로서의 계율까지 부정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잘못된 이해는 여기저기로 확산됐다. 신란은 보다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80대 고령의 신란이 고민 끝에 선택한 인물이 아들 젠란이었다. 그라면 자신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전달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1252년 젠란이 간토로 내려갔다. 한동안 논란이 수그러드는가 싶더니 더 큰 문제들이 불거지기 시작했다. 젠란이 전혀 엉뚱한 얘기로 불법을 어지럽히고 동행들을 분열시켰다. 아버지가 한밤중에 자신에게 몰래 법을 일러줬으니 진실은 자신만이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아미타불 본원은 법장보살 18원이 아니니 이제 버려도 좋다는 터무니없는 말을 유포했다. 게다가 젠란이 신을 모시고 기도하고, 사람들의 길흉을 예언했으며, 부적을 가지고 재난을 치료한다는 얘기까지 들려왔다. 심지어 힘없는 이들을 등지고 막부의 권력자들과 결탁했다는 소문도 공공연히 나돌았다. 그해 9월 간토의 추타로(中太郞)에게서 온 편지는 이 같은 얘기들이 사실임을 입증하고 있었다. 추타로는 신란의 가르침을 전하는 방주들 중 하나였다. 그는 젠란이 감언이설로 자신을 따르는 동행 90명을 빼내가는 등 간토지방을 혼란으로 치닫게 하고 있음을 전했다. 신란은 개탄했다. 그는 젠란에게 이같은 행위를 당장 그칠 것을 명했다. 다른 동행에게도 젠란의 말을 따르지 말라고 전달했다. 그런데 젠란은 아버지가 계모의 말에 미혹해 분별을 잃었으니 이제 정통성은 자기에게 있다는 주장까지 버젓이 하고 다녔다. 신란은 비탄에 젖었다. 동시에 자신의 죄업이 끝이 없음을 거듭 통감했다. 신란은 지금까지 부모를 위해 한 번도 염불을 한 일이 없었다. 일체 유정(有情)이 모두 윤회를 거듭하는 과정에서 맺어진 부모형제였다. 다음 생에서 부처가 되어 이들 모두를 구제해야 할 일이었다. 신란은 아들을 위해서도 염불하지 않았다. 선과 악을 판가름하는 것은 자신의 영역을 넘어서 있었다. 단지 자신은 인정(人情)이 아닌 불법(佛法)을 선택할 수 있을 뿐이었다. | | | ▲ 신란이 젠란에게 보낸 의절장. 신란에게서 배웠던 겐치(顯智, 1226~1310)가 옮겨 쓴 것으로 현재 센주지(專修寺)에 보관돼 있다. |
신란은 젠란에게 절연장(絶緣狀)을 써내려갔다. “이제 부모와 자식의 연을 끊을 수밖에 없겠구나”라는 진한 안타까움이 묻어났다. 아버지를 속이고 폄하하는 것은 아버지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기에 이제 부자지간의 의도 더 이상 없음을 분명히 했다. 얼마 후 신란이 젠란에게 절연장을 보냈다는 소식이 간토지역에 퍼졌다. 간토는 폭풍이 지나간 것처럼 동요가 점차 잦아들었다. 그럼에도 젠란은 자신의 고집을 끝내 꺾지 않고 세속화의 길을 걸었다. 이후 신란은 집필에 더욱 몰두했다. ‘서방지남초(西方指南抄)’ ‘일념다념문의(一念多念文意)’ ‘여래이중회향(如來二重廻向)’ ‘정상말화찬(正像末和讚)’ ‘자연법이초(自然法爾抄)’ ‘미타여래명호덕(彌陀如來名號德)’ 등도 이 시기의 저술이다. 1260년 신란은 삶의 마지막을 친동생이자 천태종 승려였던 진우(尋有)와 함께 했다. 막내딸 가쿠신니(覺信尼)도 아버지 곁에 머물렀다. 그해 11월, 몸에 불편한 기운을 보이기 시작한 91살의 신란은 더 이상 세상사를 입에 담지 않고 오직 부처님의 명호만 불렀다. 11월28일 정오, 신란은 얼굴을 서쪽으로 향하고 누운 채 염불의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평생 악인범부를 자처하며 악인이 될 수밖에 없는 이들을 위한 가르침을 펼쳤던 일본 정토진종(淨土眞宗)의 개조 신란. 깨닫는 불교가 아니라 철저히 타력에 의해 구제되는 불교를 주창했던 그는 누군가의 스승이 되기조차 거부했다. 만년에 그는 자신을 따르는 동행들에게 “나로서는 단지 염불해 아미타불에 의해 구원받는다고 하신 좋으신 분[호넨]의 가르침을 받아 믿는 것 외에는 별다른 것이 없다”고 말하고는 했다. 하지만 그의 가르침을 따라 만들어진 정토진종은 오늘날 신도 1350만명, 말사 2만1000여개의 일본 최대 종파로 우뚝 섰다. 그의 제자 유이엔(唯圓, 1222~1288)이 정리한 신란의 ‘탄이초(嘆異抄)’는 일본인이 가장 사랑하는 책으로 꼽히고 있다. 신란이 아들에게 보낸 절연장은 현재 일본 센주지(專修寺)에 보관돼 있다. 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참고자료 : ‘일본의 정토사상’(길희성, 민음사), ‘일본불교사’(가와사키 츠네유키 외, 우리출판사), ‘일본불교의 빛과 그림자’(김호성, 정우서적), ‘신란과 그의 정토교’(A.블루움, 이문출판사), ‘탄이초’(전대석 옮김, 경서원), ‘신란의 타방정토사상 연구’(송재근, 동아대대학원 박사논문), ‘신란의 악인관’(송재근, 일본불교사연구 제7호), ‘신란 정토교에 있어서 계율의 문제’(송재근, 동아시아불교문화 제9집), ‘親鸞’(草野顯之, 吉川弘文館) |
첫댓글 보현님도 여러차례 말씀하셨지만 정토종은 단순하고 상/중/하근기 모두 통하기때문에 대중적이기는 하나 부작용이 있지요. 또 일본은 다른 나라 사상을 자기식으로 별나게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아 위 처럼 이상한 모습이 되기도 하고요.
글을 읽고 저의 소견으로는 지혜가 조금 부족하다는 느낌이 듭니다. 카페에서도 늘 들었듯이 지혜와 자비가 같이 가야 원만한 공부가 됨을 다시 배웁니다. 나무마하반야바라밀_()()()_
마하반야바라밀._()()()_
제가 일본 불교는 문외한이지만, 일본불교는 어두워요. 그리고 법연은 일본 불교를 오늘처럼 만든 장본인일 겁니다.
지금도 일본 불교는 죽은 이는 무조건 부처가 된다(?)는 이상한 믿음이 있고, 아무리 악행을 저질러도 극락에 갈수있다는 등등, 미신적 요소가 아주 강합니다. 오죽하면 16세기(?)에 선교를 위해 일본에 상륙한 선교사가, 예수님이 이미 일본에 다녀가셨나?하는 의문을 일으켰다고 할까요. 그만큼 당시 일본불교는 카톨릭과 아주 닮아 있었던 것입니다.
아미타불이 아니 계신 것도, 극락정토가 없는 것도 아니에요. 그러나 죽어서 정토만 바라고 내가 이번 생에 아미타불이 되지 못하고 아미타불 본원만 의지하고 죽어서 아미타불 만날 것만 염원한다면 그건 그 즉시 어두운 불교가 되어버립니다. 그래서 염불이 잘못하면 呼佛이 되어 버리기 십상이지요. 만해스님도 조선 말기의 염불당이 호불당이 되었다고 한탄하셨습니다.
일본불교가 어둡기에 임진왜란과 조선말기 조선 침략에 일본 승려가 앞장 서고 마침내 이차대전을 일으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눈밝은 수행자들이 있었다면 권력자들에게 아마 처절히 잘못을 일깨워 주셨을 겁니다. 유명한 선사 스즈끼만 하더라도 일제에 협력하고 미국 가서는 금욕계를 깨트리고 아마 결혼했을 겁니다. 우리 조선의 스승님들 같았으면 어림도 없는 일이지요!
현재 일본불교는 교학은 발달했을지 몰라도 견처가 열린 분들은 별로 없을 겁니다. 일본 임제종, 조동종도 제가 볼땐 엉터리에 가깝습니다. 이런 일본 불교를 스승님으로 모시고 따르는 어느 분도 계시지만, 그 분도 참 안타까와요. 모든 걸 버리고 가셨지만 헛짚은 것 같더군요.
감사합니다.마하반야바라밀.._()()()_
고맙습니다.
마하반야바라밀..._()_
고맙습니다. 마하반야바라밀 _()()()_
고맙습니다. 마하반야바라밀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