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결혼 선물.
나는 74년 2월에 결혼을 하였다. 서울대학병원 내과 전공의 2년차로 바쁘게 수련 중이었고, 무의촌 해소란 거창한 구호 아래 파견근무가 4월로 예정되어 있었다. 지금 같았으면 헌법 제 10조 국민의 행복추구권과 제 14조 거주이전의 자유를 침해하였다고 헌법소원이라도 내어 볼 수 있는 건이 아닐까. 결혼 후 첫 한 달 간 처는 대구 본가 시집살이, 그러니 나 역시 병원 부근 명륜동에서 하숙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다. 이 집에서 연탄가스 중독으로 서울대학병원 응급실로 업혀가 고압산소탱크 치료에도 불구하고 하루 동안 혼수상태에 있다가 간신히 깨어났다. 나중에 처가 ‘자기가 그해 신수가 정말 좋아서 그 덕에 당신이 살았어.’ 라고 말하곤 하였다.
첫째가 삼선교에 집을 한 채 사주셨다.
그 때 분양 중이던 여의도 시범아파트 작은 평수 아파트의 두 배 값으로. 거기를 택한 것도 나의 생가가 보문동에 있었고, 선친은 서울대학병원에 근무하셨기 때문에 돈암동에서 출발하는 전차로 출퇴근 하시면서 지나치는 삼선교란 동네를 잘 아시었고, 대학동기분이시자 나의 신장내과 지도교수인 김교수님 댁 바로 뒤편. 이 분은 집도 가까이, 사이도 가까웠다. 온갖 집안 대소사, 세 딸의 결혼함을 내가 모두 받았었고, 아드님은 나의 중앙의대 제자로 사제지간이 단숨에 처지가 역전되었다. 마지막 영결식에서 조사를, 장지에 따라가 하관까지 지켜보았고, 1년 후 추모식에도 초청되었다. 나로서는 서울에 계시는 선친의 대리이셨다.
삼선교는 서울의 북쪽으로 가는 모든 버스가 여길 통과하니 교통이 편리하였으나 너무 편리해서 탈인 지라 병원의 동료들, 중고등학교 동기나 후배 들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다가 핑계거리만 있으면 쳐들어왔다. 긴급조치 1호 위반으로 안양교도소에서 1년간 복역한 서울의대 후배 세 명의 환영식도 이 집에서 내가 베풀어 주었다. 신혼 초의 아내는 불쑥 찾아온, 아니면 초청한 손님들에게 정성을 다하여 음식을 장만해 올리니까.
볕바른 남향 대지 30여 평에 위채가 10평으로 방 두 개에 마루, 그리고 부엌, 아래채가 방만 두 개인 나무대문이 달린 지은 지 한참 된 전형적 서울식 한옥이었다. 무의촌 근무를 마친 9월 나의 집에 들어왔다. 세를 산 사람은 참, 아니 이럴 때는 너무. 로 써야지, 악질이었다. 이사를 가며 온 집안을 어질러 놓았고 천장과 벽지도 하나 성한 곳 없이 찢어 놓고 나갔다. 뭐 이렇게 하여야 자기네들이 잘 산다는 그런 말이 있다고. 급한 대로 위채는 도배전문 에게 맡겼지만 아래채는 나의 몫. 내가 고른 벽지보다는 추천하는 벽지가 더 나은 걸 처음 알았고, 천장을 도배하며 목이 아파 보름간은 생고생을 하였다.
이 집에서 76년 4월 내과 수석 전공의 때 처가 기다리던 아들을 낳았고, 선친이 산모해산 구원하라며 올려 보낸 당신의 몸종 소덕이. 아마 이런 말을 들으면 그 시절에 무슨 종이야기 하고 고개를 갸웃거릴 것이나 사실은 사실. 출근 때 마당에서 머리를 조아리며 기다렸고 밥도 우리와 같이 먹질 않고 부엌에서 해결. 77년 2월 입대, 4월 말 명예스러운 대한민국 육군 대위로 임관, 전방 근무 중 6월에는 귀여운 딸을 얻어 네 명이 한 가족을 이루었다. 서랍에서 무슨 자료를 찾다보니 삼선교 집에서 장모님이 아들을 안고 찍은 사진을 보고 얼마나 반가웠던지.
대청마루에 초록색 카페트를 깔고, 군대에서 어렵게 구한 면세품 독수리표 전축을 들으며 보낸 시간들. 겨울철 난로에 얹은 작은 양은 냄비, 거기에 끓인 라면은 어찌 그렇게 맛이 있었을까. 이 집에서 보낸 몇 년은 꿈같은 나의 신혼 시절이었다.
그 후 6개 월 간의 전세 생활을 겪고 78년 새로 분양받은 아파트로 이사를 와서 38년 째 같은 곳에서 살고 있다. 누가 나에게 우편 주소를 묻는다. ‘아직 그대로야.’ 반문한다. ‘아직도 그대로야.’ 이 때 준비된 나의 답변은 ‘74년에 결혼한 처와 아직 같이 살고 있어.’
둘째는 백색전화를 놓아 주셨다.
지금 백색전화라면 젊은 사람들은 아는 사람이 드물다. 당시 그 동네에서 전화를 신청하고 접수순으로 놓아주기를 기다리려면 최소한 2년은 걸릴 때. 요즈음은 신청 즉시 가설이 되는 시절이지만. 전화 값이 무려 60만원으로 1년 치 전공의 월급에 해당하였다. 객지에서 사는 아들가족의 소식이 늘 궁금하신 부모님이 수시로 안부를 확인함이 목적이었다. 강남으로 이사를 와서 그 전화는 웃돈을 얹어 팔수가 있었다.
셋째로는 소화기이다.,
2차 대전 말기 일본의과대학에 수학하시던 선친은 동경대폭격을 견뎌내셨다. 폭격에 따른 끔찍한 화재를 목격하시었기 때문에 우리 집은 어릴 적부터 화재 예방에는 철저한 집. 고로 A, B, C 급 화재, 즉 종이와 나무 같은 A 급 화재, 유류화재인 B 급, 그리고 전기화재인 C 급에 두루 쓰이는 소화기, 국산 분말 소화기와는 다른 미 군수품인 압축 이산화탄소 소화기를 하나 사 주셨다. 내 아파트 다용도실 구석에는 그 빨간 색깔의 몸체가 통통한 소화기가 떡 하니 버티고 있다.
하지만 아버지가 어머니와 우리 가족들에게 보여준 사랑과 헌신보다 더 큰 선물이 어디 있을까?
첫댓글 소화기도 유효기간이 있을껍니다. 탱크가 부식되었을수도 있고...
난, 고등학교시절부터 거주지를 여러번 옮겨 살았네요. 종로구 통의동, 성동구 약수동, 종로구 사근동, 성동구 충현동, 서대문구 모래내, 대학 시절에, 성북구 동선동, 동대문구 이문3동, 그리고, 군대 가서 인제군 북면 원통리, 그후 원주시 중앙동, 그리고 제대 후, 다시 원주시 학성동, 그 후, 원주시 반곡동에서 아파트 2번 바꾸고, 지금 다시 원주시 학성동에서 살고 있습니다. 아마, 앞으로 한 두번은 거주지를 옮길 가능성이 있을 것 같고요....
나도 하숙할 때는 수도 없이 옮겨 다녔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