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의 사서부터는...
일본의 명칭을 잠자리란 뜻의 청령국(蜻蛉國)이라고도 표기하는데...
그 땅의 형상이...잠자리모냥이라 그런단다.
몸통이 유선형에...꼬리가 가늘고 길며 마디마디 잘렸단 의미다.
전에도 거론했듯이...조선의 부산포인 현 푸첸성에서 대만인 대마도로 가서...
동북으로 점점의 일기도 라인인...오키나와 라인의 섬들을 타는게 잠자리의 꼬리부분이라 보인다.
이 라인엔 작은 섬까지 합해 160개의 섬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다.
반면 주변 해양의 수심이 깊어...파도가 엄청 험하여 늘상 조난의 위험이 따르는 해양이란다.
려몽연합군이 일기도를 통해..왜들의 극동 아지트인 현 일본열도 깊숙히 치고들어가다가...
일기도의 중심인 평호도와 오키나와인들을 도륙하고...
나가사끼(長技)에 이르러 상륙을 시도하다가....오사카만으로 들어가는 좁은 해협에서 왜놈들의 거센 저항에 부닺혀...
상륙을 완전히 못하고...날이 저물어... 다시 일기도 라인의 군도들로 정박하길 반복하기 몇일후...
거센 태풍이 불어와 려몽연합군의 배는 죄다 난파당하고...
살아남은 군사들과 일부 배들이 오키나와등에 정박해 수리를 하던 도중...
왜놈들의 공격을 받고 전멸하다싶이 하고 포로들은 모두 참수를 당했다 합니다.
성호사설을 보니...
가다말고 일기도에서 전멸한게 아니라...
나가사끼에 거의 상륙을 성공하다 빠지다를 반복하며...왜놈들이 절제절명의 순간였는데...
태풍(가미가제)로 인해 갸오 모면했단게 왜놈들역사에 있답니다.
만군(蠻軍)인 10만의 인도군들만 태풍만나지 않고 도착했으면 왜놈들은...
무식헌 스키타이인 몽골늠덜의 동복(톡,독)...즉,가마솥에 삶아졌을 겁니다.
이 전투에 대비해서...
서해도의 비전, 축전... 특히, 살마주의 전 군대를 다 동원했다 나오니...
왜놈들이 무지하게 쫄긴 쫄았던 겁니다.
이후, 몽골내의 대칸계승권 내전만 없었다면...일본은 바로 무너졌을 겁니다.
전에도 주장했듯이...
고려가 한반도라면...현재의 대마도란 쓰시마섬에서...현재의 일기도(一岐島)라는...
큐슈 서북쪽에 바짝 붙어있는 여의도만헌 섬이라면...
궂이 왜군들이 틀어막고 있는 그 코딱지만헌 섬으로 갈것도 없이...한나절이면 ...쓰시마섬 출발해서...큐슈에 도착해...
왜군들 없는 큐슈의 드넓은 해안 포구들 어디든 골라서 펼쳐 상륙했을게 뻔 합니다.
그러나 기록을 보면...고려군함과 몽골군함은...점점의 일기도 섬들을 점령하며 몇일을 갑니다.
궂이 적들의 좁은 해안포구에 집결한 라인으로 부러 들어갑니다...?
그럴수 밖엔 없는 지형였던 겁니다.
그런 지형이... 동아시아에서 딱 한군데 있습니다.
대만에서 요즘 시끄러운 다오위다오등의 섬들을 타면서...오키나와 등을 일단 거쳤다가...나가사키로 쏘는 유일한 라인입니다.
왜놈들은 나가사키 앞바다에서...오사카만으로 들어오는 뱃길에 총 집결해 있었던 겁니다.
다시, 청령국(잠자리 나라)으로 돌아가서...
밑의 고지도들 보십시오...현 열도의 생김새와 대만까지 이어지는 점점의 섬들 형상여...
현 열도가 잠자리 몸통이고...오키나와등의 160개 섬들이...마디마디의 가늘고 긴... 잠자리 꼬리 형상입니다.
그럼, 대륙조선 연구자님들은...
무슨 멍멍이소리냐...왜(倭)들의 특산물엔 빈낭,파초,후추,귤..등등...엄연히 동남아 특산들이 기록됀다 하실겁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어느 기록들엔...대마도(대만?)에서...남쪽의 섬들을 타고 축전, 축후주인지..
비전, 비후주인지들로 왜놈들 땅에 도착했단 글도 있습니다.
누가 봐도 서남아나 동남아가 왜놈들인데...
려몽연합군과 조선 통신사들의 동사록(東使錄)등등의 왜놈들 황도로 찾아간 루트는...동북으로 가지...
서남으로 갔단 말이 없는 골머리 아픈 상반됀 두가지 기록들 때문에...
왜놈들 찾기를 아예 보류해 버리고...
어떤 분들은...
왜가 흑룡강에 있는 선비의 단석괴의 노비가 돼었단 대목은...
흑해의 동북 러시아일대에 왜의 하이(빨간머리)여진이 있었고...거기부터 길~~~~게...
현 태국등의 인도차이나반도까지 왜노들이 있었던 거라 하시는데...
이는 서역에 조선을 두겠다는 미련을 못 버리셔서들...
어거지로,,, 맨발에 빤쓰도 안입던 난쟁이 해양왜들을...그 추운 대륙 시베리아에다...가져다 놓는 횡포라 생각합니다.
그럼, 왜놈들 고초 다 동상으로 떨어져 나가고...발은 다 얼어터져 아이스케키가 됐을 겁니다.
그리고... 그럼, 그 동쪽의 현 신장성과 중원대륙은...?
당연, 왜들이 그리 강력하니...왜들의 속국였겠구만여...?...그럼, 서역조선이 대륙의 천자국이 아니라...
왜(倭)들이 명실상부한 유라시아의 천자국이 돼는 겁니다...?
억지입니다...억지...
역사연구는 무슨 종교가 아닙니다.
일단, 확신을 가지고 주장해 보지만...아무리 봐도...
내 연구가 아니다... 싶으면... 바로 내걸 포기하는 것이 연구의 진정한 자세입니다.
단지,어느기록 달랑 몇개에...
일본과 조선 사이의 바다를...대하(大河)등의 하(河)자로 오기한 것 한두개만을 근거로...
고려사와 조선사 수 만 건에.. 한결같이 표기한...일본&왜(倭)는...천길(2,400m)이 넘는 깊은 바닷속의 섬이라는 걸...
그 앞시대인 선사시대에... 대륙에 머물렀던 서식지로 같이 덮어씌워서...해(海)는 넓은 땅을 이른다 둘러댑니다.
땅을 수백척의 배를 타고 파도에 난파당하며 몇일을 건너댕기나...?...강물이라면 강가에 대면 고만이지...?
삼국 이전의 기록들을 보면....
삼한(三韓)인 진국(辰國=진나라=지나)의 맨 남쪽 가야지역인 변한(弁韓)은...
동북의 진한인 신라와 함께..서북의 마한인 백제와 함께...개이빨 모냥...즉 톱니모냥으로 ...들쑥날쑥한 경계선으로
국경을 왜(倭)들과 마주한 나라라 나옵니다.
삼한의 통칭인...진국(辰國=진나라=지나)의 남쪽이면...
현 중원의 남쪽...인도차이나반도밖엔 없습니다.
운남성..광동,광서성...베트남...태국...말레이등이 가야의 연맹이며...
신라지역 복건성과 함께...인도지나반도 남부해안에 대륙왜들의 기지들이 있었단 얘기로 들립니다.
그게 바로 훗날 임라일본부등의 전신이라 봅니다.
일본의 시조격인 천조대신이란 여신은...신라땅에 내려왔다가 맘에 안들어 왜로 들어가 다 점령하고 개국했단
그 고구려 음악을 만든 천조대신이자...원래는 고조선족인 북방 스키타이였을 겁니다.
진한의 남부인 광동성이나 복건성등에서...열도로 들어간 겁니다.
그리곤 남중국해 전 해양의 난쟁이 왜족들에겐...극동의 마고야산의 서왕모격인 즉, 동황모격인...
마고할머니이자...천조대신으로 떠받들어진 걸 겁니다.
열도일본은...세력이 안정돼고 힘이 강하면...필리핀 수마트라섬 경유해...말레이나 베트남 등지를 칩니다.
대마도(대만?)거처 복건성 푸첸(원조부산?)도 칩니다....그게 임나일본부라 보입니다.
그게 나중에 왜관이 돼는 이치고여...
첨엔 신라의 가야(인도차이나반도)지배가 타격을 받으나...후대 기록으론...
일본 깊숙히...황도근처인 산성부와 오사카 앞바다까지 신라군이 처 들어가...항복의 의식을 치른...
백마를 잡은 묘도 유적으로 남았다니...
종국엔 신라가 이긴 겁니다.
고려는 그 역사의 신라가 정복한 루트를 상고해서 간 겁니다.
물론, 열도왜(일본)가 신라에게서 가야(인도지나반도)를 구했단 때는...
지들 혼자가 아니라...당연 마한인 백제가 신라를 쳤기에 가능한 것이겠고여...
고 백제를 왜놈들이 기록에서 궂이 밝히질 않은 겁니다.
또 사설이 늘어졌습니다.
오늘의 주제인 청령(잠자리)으로 다시 돌아가서...
밑의, 청령국지엔...일본은...땅모냥이...잠자리(청령)가 교미하는 형상이랍니다.
이걸 학자님들은 모르겠으니...현재의 구주(큐슈)쪽이 상대적으로 넓으니...머리가 커다란 잠자리를 의미헌다...
대충 둘러대는 주책들이신데...
내 생각엔...
큐슈는 잠자리의 궁뎅이고...동경등의 긴 열도가 잠자리 몽통...북해도가 잠자리 머리...
잠자리 궁뎅에에서 시작하는 가늘고 길며...마디마디 끊어진 꼬리는...점점의 일기도라인인...오키나와 주변 군도들...
이게 고려의 동남해안인 부산에서...
대마도(대만?)건너...동쪽으로... 점점의 일기도를 타고 왜왕늠의 아지트로 몇날을 갔단 그 부상국 일본입니다.
해가뜨는 극동이자....그 동북의 맨 끝엔...하이(蝦夷)라는 머리가 빨간 원조아니누가 있고...
다시 그 동북엔...
베링해가 있고...그 동쪽엔 아라사의 점령지인 알류사(극동 악라사)가 있고...
그 동쪽엔 원조 부상국인 아묵리가(아메리카)가 있는 ...
사록과 딱 일치하는 대륙의 극동... 해가뜨는 부상국의 위치가 현 열도가 맞단 기록들입니다.
그런데 밑의 청령국지 타이틀엔...
그냥 잠자리(蜻蛉)가 아니라...잠자리가 교미하는 형상이라 했습니다...?
대만(대마도?)을 깃점으로 다시 남쪽으론 필리핀으로 이어지는 점점의 섬들이 또 있습니다.
이게 잠자리 숫늠의 꼬랑지입니다.
잠자리 숫늠의 몸통이 필리핀...이게 일본의 서남부 별지인 비전,비중,비후도나...축전,축후도 같습니다.
구한말기에 양이들과 교섭해서 다 철수해 열도로 슬슬 지명을 옮긴거라 봅니다.
이 동북아의 여왕 왜잠자리와...서남아인 필리핀의 숫컷잠자리가 교접하는 주요 부위를
"19금" 마크인 나뭇잎으로 가린게...대만(대마도?)의 위치입니다.
사는 땅덩어리도 "19금"으로 생긴 애들의 자손이라서...일본애들이 변태들이 많은듯 합니다.
대부분의 고려와 조선 남부 해안을 해적질 하던 왜구들은...
필리핀을 중심으로 인도네시아,수마트라, 등지에서...활약하던...말라카해협의 해적늠들일 겁니다.
원조 가야지역인 탐라(탐모라)지역의 군대들이 벌인 토벌이 강할땐...역시 필리핀으로 철수합니다..
더 쫒끼면...대마도 경유해 현 일본열도로 튑니다...아주 얄미운 물건들입니다.
당대 대륙의 해양력들론..그래 이 왜구들을 완전소탕하기 어려웠던 겁니다.
그 접경지였던 수마투라가...섬라도이자 왜놈들의 최 서남단이란 ...조선 전라도에 접경했단...
중국 복건과 50리(중국치수론 500리) 접했단...왜놈들의 살마주일까 합니다.
이들이 강하면...인도네시아 필리핀의 통제까지 맘대로 했단듯 싶습니다.
현재의 살마주는...큐슈일대 나가사키 서남부방향의 조그만 지역이라는데...거긴 일본의 최 서남단도 아니고...
중국은 커녕...현 한반도 전라도의 남단과 접한지역도 아닌 반대편입니다.
현 열도내에서 역사서대로 서남단에 지명을 이식시켜 조작하려니..이리 허접해진 겁니다.
다시 정리하면...
왜의 여왕(천조대신)이 먼저 자리를 틀었단 곳은...현 오사카를 중심으로한 일본영토입니다.
그 윗대의 뭔 신이란 추장애들 자손들은..북부여계 천조대신에게 도륙당한 겁니다.
그 여왕의 잠자리꼬리는...나가사키에서...오키나와...대만을 잇는 160개의 크고 작은 점점의 섬들입니다.
그걸 대륙에서 들어온...
즉, 가야(인도차이나반도)에서 쫒끼거나 정복나온 자들이..
수마트라(원조섬라?)...인도네시아...필리핀을 타고 도주하거나..점령해 정착하면서...
인도네시아를 머리로...필리핀을 몸통으로...필리핀에서 대만으로 이어지는 점점의 섬들을..잠자리 숫늠의 꼬리로...
동북의 열도 여왕잠자리에게 껄덕대는....교미형상의 일본지도가...
역사가 말한 잠자리가 교미하는 형상의 그 왜놈들 땅의 형상였던 겁니다.
아마도..대륙조선도... 양이들이 보충해서 그린 왜놈들의 극비지도를...
양이들이 동방진출시기인 임란전후에..자랑하다가...그걸 명나라가...다시 조선에서 입수했을 겁니다.
세계 최초의 완전한 세계지도는 원나라나 고려가 먼저 그렸지만...
이 왜놈들 남중국해 해적루트& 양이 무역품들 교역루트는... 왜놈들만의 특허비밀이라 내내 비밀유지가 됀건데...
자랑하기 좋아하는 양이들이 항해하며..
고려&원나라 세계지도에 없는 이 왜놈들 서해도의 비밀지도를 마저 완성해서...다 공개해 버린겁니다.
여기서 테클 들어오시겠져...?
정약용선생의 기록으론...
자신이 외가로부터 물려받은 가로 3m가 넘는 대형 지도엔...
일본의 최 북단이란 땅의 동북각 위도는...우리 제주도(탐라)와 같다 하셨다고여...?
맞습니다...
태국 베트남이 원조의 조선 제주도고...탐라부입니다.
그걸 정약용선생도 일본의 최 북단이란 하이국으로 착각하신 겁니다.
양이들이 그려 중국이 전한 지도만으로 유츄하니 오류가 생긴 겁니다.
그 주변 하이난이나 ..수마트라가...바닷속 섬인 탐라도나 섬라도겠고여...
마얀마와 태국을 나누는 다우나산맥이...
바로 고려도경의 저자인 서긍이 말한... 송나라(남송)와 오랑케(고려)를 나누던 선상입니다.
히말라야 낭가프르나가...그 조종이고...그 남쪽맥이 다우나산맥으로 말레이반도까지 이어지면서...
유라시아대륙 남단의 동서를 나눕니다.
원래 미안마나 방굴라데시는...변한이자 가야국인데...가야 패망후엔 곤륜국(히말라야국)으로 불려...
남쪽으로 쫒겨난...당나라 잔당인 남송과... 고려의 중간을 나누던 자리같습니다.
그래 왜놈 사절단이 당나라 남부로 조공갔다가 돌아오는길에 표류해서 곤륜국(히말라야&파미르)에 들어갔다가 죄 살륙당하고...
몇늠덜이 포로로 있다가...티벳넘어 등주(청해성 서부?)로 토망처 발해로 들어가...
발해사신편으로...극동의 루트로 일본에 돌와왔단 겁니다.
이 당나라에게도 안하무인이던 곤륜국여...나중엔 남송의 잔당과 합류하는데...
그들이 바로 힌두교와 불교의 잡탕인 라마교 비슷한 류의 도교인...명교(明敎)의 일당으로...
빨간색 걸래를 디집어쓴 주원장이의 홍건왜적입니다.
살마주왜들과 고향이 비슷합니다.
왜놈들이...필리핀 통해 살마주를 거처 탐라도로 전라도로 처들어 오지못한 것은...
임란 초기에도 평수길이는...이 살마주를 먹지 못하고...명분상의 군대만 착출했기 때문이며...
탐라도(인도지나반도) 자체가... 이 살마주(수마트라) 왜놈들의 본향인...금관가야와 임라국(야마토)의 성지였기 때문였다 봅니다.
그래, 남송은 곤륜지역이 이젠 자기들 속지영토니...
인도 어디(明州)서 출발해...강을타고 내려와 방글라데시등의 옛 곤륜국인 동부 속령들을 거치고...
남쪽으로 계속 내려와 말레이반도를 타고...말라카해협 따라...
남송의 극동남 전초기지이자...고려의 극서남부 전초기지인 싱가폴라인의 수도없이 많은 섬들과 암초들을 경유해서...
현 광동성의 고려 광주(廣州)에 다다른거라 봅니다.
기록을 보면..송나라 신주(神舟)란 70M내외의 선박은...서양식 돋을 사용한 아랍식 배입니다.
뭔 돛 뭔 돛...돛의 종류가 엄청 많습니다.
위와 같은 이유로...
조선사신단이 왜왕을 만나러 동쪽 구텡이로 다녀오는 갈에...
살마주애들은 우리구역이 아니니...우리 근위병 않 보내겠다 버텼던 것이고...
그래, 조선 사신단이...
이 대마도 서남으로도 왜들이 말하는 해적들인 서해... 二島니...三島니...五島니의 왜구애들이 있는것 같다...
그러지 않곤 저 조그만 섬에서...어찌 수백척의 선단이니 수많은 병사들이 서식할 수 있겠냐고 의심했던 겁니다.
이 서해의 왜구 본거지들은...
왜들만의 아주 중요한 해양 교역로이고..대륙침략로였기에...
양이들이 눈치없게 지도 막 그려대기 이전까진 아주 비밀의 항해로 지도였던 겁니다.
조선도 양이들이나 명나라의 지도때문에...나중에나 슬슬 알기 시작하는 걸 겁니다.
그리고 정약용 선생이 그랬다져...왜(倭)의 땅덩어리는...대형 지도로 봐도...틀림없이 人"자나 入"자 형태다..라고여...
그건 부상국(일본)인 현 열도가 아니라...왜구들의 본거지인...필리핀을 이른 겁니다.
밑의 지도들 잘 보세요...불륜을 저지르는 숫컷잠자리의 몸통이 필리핀이고...入"자 형태입니다.
일본(부상국)이 비파(키타)형태로 생겼다 할 땐...또 현 일본열도입니다.
밑의 고지도들 보세요...
불법 펌 했는데 괸 찮을라나 모르겠습니다...?
살마주...
임란때도 가장 잘 싸웠던 난폭한 자들이라져...?
유구가 강하다지만...왜(倭)를 못 당하고...왜가 강하다지만...살마인들을 못 당한다고했을 정도랍니다.
금관가야국인 태국등이 가까워...체격이 해양 왜노들보다 컷을 것이며...
탐라지역인 가야국들과의 오랜 전쟁으로 단련돼어...난폭하기 그지없었던 거고...
역시, 구한말기 태평천국의 난때 양이들의 주구가 돼어...중원으로 다 겨 들어온 인도차이나반도의 짱께족들대신...
그 비어버린 인도지나반도를 점유하고 있어서...
본거지인 수마트라(살마주)는 토인들만 남은 형상이라..현재는 별볼일 없는 겁니다.
예전엔 굉장한 교역로의 핵심인 말라카해협 통행세를 받던 해적들 자리입니다.
고려&조선 제주(탐라=베트남)인들과 함께여...
애초부터 현 열도의 왜들은...그리 난쟁이도 아닌...
고구려의 윗대인 단군조선의 딸래미가 신라를 거처 들어간 족속들과...극동해양의 족속들과의 혼혈족이고.,.
서해도의 왜들은...필리핀,인도네시아등지에 있었던...난쟁이 지구원주민들과 섬라(태국)등지의 가야국 유민들의 혼혈인...
해양 왜구(倭寇)들...고려시기 삼별초들이 다시 몰려들며 훨 강해진...살마주(수마트라)애들과...
그 속령인 필리핀 인도네시아 난쟁이 왜노들의 혈통은 근본부터 조금 달랐다 봐야 합니다.
열도고 필리핀이고 모두 삼국의 유민들이 들어가 에리트가 됀건 다 마찬가지겠고여...
그 늠덜이...구한말기에 양이들과 협상해...지들 서식지를 양이들에 분양하고...
주인님의 땅인 열도 천황지역으로..한반도와 동북삼성으로 처 들어간게 명치유신이고...
탐모라지역인 인도지나반도도 차지하고...
남명(무굴)의 잔당들과 같이 양이들의 주구가 돼어...대륙조선인 현 중원도 처 들어가면서...
오랜 역사의 천민들이...대륙의 새주인으로 거듭난...대박을 터트렸던 겁니다.
그게 현재의 중원 짱께 홍건왜적입니다.
현재의 중국어 들어보세여...우리와 몽골 중앙아가 유사한데...
그 중간의 현 중국어만 이상하에...띵똥땡똥~ 허잔어여...남쪽으로 갈수록 더여...
중원은 근세에 주인들이 상당수가 바뀐 정황입니다.
다시 살마주...
현 열도의 나가사키 반대방향 서남해안의 쪼그만 지역이 살마주인 사스마번이라...?
멍멍이 수작입니다.
중국접경이든 조선 전라도접경든간에 그 살마주가 아닙니다...
현재의 사스마번은 조선과 중국방향인 서북에서 제일 먼 반대방향입니다.
그리고 조선사에서 이른 살마주는여...
관백(쇼군)보다도 더 많은 군대를 소유한 지역입니다.
관백이 친위대 50만인데...
살마수는 일본의 녹봉받는 부대 15만에...자기가 관리하는 친위부대 50만이랍니다.
물론, 과장이 많겠으나...상대적인 군대수가 절대권력이란 관백늠보다 많단겁니다.
현재의 사스마번에서...그 옛날에 몇십만 군대를 소유했다...?
우리집 누렁이가... 대화상대하자 찾아갈...바로 그 소리입니다.
옛 방글라데시 늠덜이나... 미안마늠덜이 홍건왜적인건...담에 글을 올리겠습니다.
혼신을 다했더니...글쓰기가... 정말 진이 빠집니다....ㅡ.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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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충렬왕(忠烈王)이 원 세조(元世祖) 때를 당하여 공주를 맞아 들여 부마가 되었으므로 그 말하는 바를 모두 좇았으니, 비록 나라 일을 주장하지는 못했으나 국운(國運)이 장원하였던 것은 또한 그 힘이 아니라고 할 수 없다.
이보다 앞서 원 나라가 일본에 사신을 보내면서 우리나라 사람으로 향도(嚮導)를 삼았는데, 왜인들이 의심하고 모두 죽이려하여 간신히 도망하여 살아 돌아온 자가 있었다. 이에 왜적을 정벌할 계획을 세워 충렬왕 7년(1281) 신사(辛巳)에 원 나라는 크게 군사를 동원하여 동정(東征) 길에 나서니, 전함이 3천 5백 척이요, 만군(蠻軍)이 10여 만 명이며, 우리나라에서도 전선 9백 척과 군사 초공(梢工)수만여 명으로써 이에 협조하였다. 일기도(一岐島)에서 양군이 회합하고 이어 참획(斬獲)이 있었는데, 마침 태풍을 만나 만군(蠻軍)이 모두 죽어 시체가 포구를 매워 밟고 다니게 되었으므로 이에 철병하여 돌아왔다.
내가 근자에 《일본외사(日本外史)》를 얻어 읽어보니 거기에도 또한, “거의 함몰하게 되었는데 요행히 태풍을 힘입어 모면하였다.”고 했으니, 그 징창(懲創)했던 것을 볼 수 있다.
이로부터 왜적의 환란이 지식(止熄)되었으니 이는 원 나라를 두려워한 때문이었다. 원 나라가 쇠약해지자 왜적은 또 다시 침략하였다.
충렬왕 7년으로부터 충정왕(忠定王) 2년(1350) 경인(庚寅)은 원 순제(元順帝) 지정(至正) 10년에 해당되는데, 이에 이르러 왜적이 고성(固城) 지방을 침략했다. 왜적의 환란은 이로부터 시작하여 해마다 약탈이 없는 해가 없었다.
우왕(禑王) 원년(1375) 을묘(乙卯)에 이르러 왜인 등경광(藤經光)이 그 무리를 이끌고 귀화하였으므로 순천(順天)ㆍ연기(燕岐) 등지에 거주하게 하고 관가에서 물자와 양곡을 지급(支給)하였다. 얼마 후에 전라도 원수(元帥) 김선치(金先致)에게 지령(指令)을 내려 등왜(藤倭)를 유인하여 주연에서 죽이려 하다가 기밀이 누설되어 경광(經光)은 무리를 이끌고 바다를 건너 달아나고 겨우 3명 만을 잡아 죽였다.
이에 앞서 왜적들이 우리 지방을 침략해도 인명은 살해하지 않았었는데 이로부터 격노하여 그들은 이르는 곳마다 부녀자와 어린 아이를 남김없이 죽이니, 전라도와 양광도(楊廣道)의 해변에 가까운 고을은 어수선하여 마을이 텅 비었다.
다음해 겨울에 나흥유(羅興儒)가 일본에서 돌아오고 일본에서는 중[僧] 양유(良柔)를 회신사(回信使)로 보내왔으니, 대개 충렬왕 7년 신사(辛巳)에 동정(東征)한 후로부터 절교한 지 거의 1백년이 되었다. 이에 이르러 일본은 중 주좌(周佐)가 글을 보내왔는데, “오직 우리 서해도(西海道) 일로(一路)인 구주(九州)는 난신(亂臣)이 웅거하여 공물과 부세를 바치지 않은 지 거의 20여 년이 되었습니다. 이 서해도(西海道)의 완만한 백성들이 틈을 엿보아 귀국 지방을 침략한 것은 우리가 한 일이 아니었으므로 조정에서 장수를 보내어 토벌하여 깊이 그 지경에 들어가 두 진영이 날마다 교전하여 거의 구주(九州)를 수복하게 되었는데, 저들이 해를 가리키며 하늘에 맹세하기를 다시는 해적 행동을 않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하였다.
우왕 3년에 안길상(安吉常)을 일본에 보내어 비적(匪賊)을 금지할 것을 청했는데 길상은 병으로 일본에서 사망하였다.
또 구주 절도사(九州節度使) 원요준(源了浚)이 중 신홍(信弘)을 시켜 군사 69명을 이끌고 비적을 토벌하게 했으니, 구주는 곧 서해도(西海島)를 가리킨 것이다. 신홍(信弘)이 비적과 싸워 적선(賊船) 1척을 나포(拿捕)하여 모두 참수(斬首)하였다. 우리나라에서 또 이자응(李子膺)ㆍ한국주(韓國柱) 등을 일본에 보내어 비적을 금지할 것을 청하였다. 그 돌아옴에 미쳐 해도포착관(海盜捕捉官) 박거사(朴居士)가 군사 1백 86명을 거느리고 계림부(鷄林府)에 침입한 왜적과 싸웠는데, 원수(元帥) 하을지(河乙沚)가 구원하지 않았으므로 거사(居士)가 패전하여 겨우 50여 명이 살아 남았다. 이 후에 날로 잔폐하여 연해(沿海)의 3면이 왜적의 침해를 입지 않은 곳이 없었다.
우리 태조[我太祖 조선태조를 가리킴]가 군사를 거느리고 왜적을 토벌함에 미쳐 토동(兎洞)과 황산(荒山)의 승전에서 국위를 약간 떨쳤으나 저들이 바다에 출몰하여 틈을 타서 침입하니, 이를 어떻게 방어하겠는가?
그 후에 대마도(對馬島)를 정벌한 일이 있었으나 전승을 거두지 못하였고,
삼포(三浦)의 토벌에도 오히려 남은 앙화가 있었으며, 임진년(壬辰年)에 이르러서는 그 극도에 달했다. 그러나 왜인들도 크게 상처를 입어 수길(秀吉)로써 징계를 삼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조금 편안한 틈을 얻었으니 다행이었다.
정포은(鄭圃隱)이 일본에 사신 갔다 돌아올 때 우리나라 사람 수백 명을 데리고 돌아왔고 또 이도(二島)의 침략을 금지했다 하였으니, 이른바 이도는 어디를 가리킨 것인지 알 수 없다.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의 계사(啓辭)를 상고해 보면, “오도(五島)에서 사로잡은 자의 말에 의하면 오도는 대마도의 우편에 있는데 땅이 적고 토지가 척박하여 호수는 1천 호 미만이요, 백성들은 일정한 직업이 없어 장사로써 생업을 삼는다 합니다. 이들이 각처에 출몰하여 약탈이 우심하였고 평시에 우리 변방을 괴롭혔던 소수의 비적(匪賊)은 태반이 이 섬에 있는 왜적들이었습니다. 그 침입하는 노정은 오도(五島)에서 동남풍 편에 배를 타고 삽도(三島)에 이르러 유숙하고 선산도(仙山島)를 거쳐 곧장 고금도(古今島)와 가리포(加利浦) 등지에 다다르며, 대마도에서는 동북풍 편에 배를 타고 연화(蓮花)ㆍ욕지(欲智) 두 섬에 이르러 유숙한 후 곧장 남해의 미조항(彌助項)ㆍ방답(防踏) 등지에 다다르게 됩니다. 물길이 멀기 때문에 비록 순풍을 만난다 해도 아침에 떠나 저녁에 당도하지 못하며, 순풍도 연일 있는 것이 아니므로 바다 가운데에서 정박하고 다시 순풍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하였다.
포은(圃隱)의 이른바 이도(二島)는 오도(五島)와 삼도(三島)를 가리킨 듯한데, 이 두 섬은 곧 서해도(西海島) 구주의 변방에 속하니 우리나라와 가장 가까우며, 그 밖에 크고 작은 여러 섬이 널려 있는데, 이는 모두 구주의 서쪽 변방에 속하는 것이다. 근자에 일본의 신지도(新地圖)를 얻었는데, 신숙주(申叔舟)와 강항(姜沆)의 두 지도에 비교하면 지극히 자세하니, 이를 상고하면 알 수 있다.
서해(西海)의 구주 가운데에 오직 살마주(
薩摩州)가 가장 서남쪽에 있다. 30년 전에 우리 통신사가 일본에 갔을 때에 왜경(倭京)에서 전례에 의하여 공궤의 경비를 배당하니 살마주에서는, “조선의 사행이 우리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 하고 명령을 좇지 않았다 하니, 이들도 또한 이도(二島)와 다름이 없다.
고려 때 진포(鎭浦)의 전역(戰役)에서 왜선이 5백 척에 이르렀다 하는데 저 작은 섬에 어떻게 허다한 함선이 있었겠는가? 주좌(周佐)의 이른바, 서해도(西海道)에 웅거했다는 말이 옳은 듯하니, 나라의 중대신(重大臣)들은 이런 일을 소상히 알아야 할 것이다.
또 생각건대 삼포(三浦)의 왜적을 토벌한 후에도 그 종자가 아직도 많아 지금도 연해에 향화촌(向化村)이라고 이르는 마을이 이루 손꼽을 수 없으니 고려 때의 글안장(契丹場)과 같은 것이다.
이미 우리 강토에 거주하는 이상 마땅히 우리 백성이 되어야 할 것인데, 이제 들은즉 거주(居住)가 별달리 구분되어 있고 남혼 여가(男婚女嫁)도 서로 통하지 않으며 예조 서리에 소속되어 부세도 제멋대로 결정한다고 한다. 저들은 우리나라 사람과 심리가 같지 않으니, 만약 일조에 변란이 일어난다면 너와 내가 판연히 갈리어 단결하여 그들에게 호응할 것은 분명한 일이니, 어찌 심복(心腹)의 걱겅거리가 아니겠는가? 진(晉) 나라 때 오호(五胡)의 일로써 징험해 본다면 알 수 있는 것이다. 혹자의 말에는, “만약 당시에 우리 백성과 혼동하여 거주하게 하고 항오(行伍)에 편입하여 정의가 상합하게 했다면 수세(數世) 후에는 변화하여 우리 백성이 될 것인데, 어찌 반드시 구분할 필요가 있겠는가?” 하지만, 이것도 또한 심사숙고(深思熟考)한 말은 아니다.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왜인의 성질이 표독하여 원수가 있으면 반드시 보복한다.” 한다. 중종(中宗) 5년(1510) 경오(庚午)에는 전역(戰役)에서 왜인의 죽은 자가 심히 많았는데 인하여 삼포(三浦)의 왜인을 모조리 섬멸하고 왜관(倭舘)을 혁파하였으니, 이것이 저들의 골수에 맺힌 원한이 된 것이다.
임진왜란 때에
선ㆍ정(宣靖) 양릉(兩陵)이 참화를 입었고, 그 후 통신사가 돌아올 때에 국서(國書) 가운데 어휘(御諱)가 들어 있어 그 옳지 않음을 쟁론했으나 듣지 않았으며, 얼마 후에 사행을 먼저 떠나게 하고 추후해서 고쳐 보냈으니, 나라의 치욕이 이보다 더할 수 없는데, 이는 또한 무심중에 우연히 생긴 일은 아니었다.
임진의 싸움에 수길(秀吉)의 사위가 진주의 싸움에서 전사했는데, 정유년에 다시 전쟁으로 들어가자 왜인이 비밀히 귀띔해 주는 자가 있더니, 과연 진주(晉州)를 도륙하여 계견(鷄犬)도 씨를 남기지 않았다. 이 두 가지 일로써 보더라도 알 수 있는 것이니, 왜적의 정세를 연구하려 하는 자는 상고가 될 것이다.
안백순(安百順)의 말에 “오도(五島)는 일기(一岐)와 평호(平戶) 두 섬 사이에 있는데, 서해도(西海道)의 비전주(肥前州)에 속했으니, 남북이 3백 리요 동서가 혹은 10리 혹은 50리가 된다.”고 하였다.
군병(軍兵)의 제도를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대개 3년에 한 번씩 군적(軍籍)을 고치는데, 장정은 20세부터 군적에 예속되어 공름(公廩)의 것을 먹으며 40세가 지나면 제적됨. 66주(州)의 태수들이 각기 그 1년에 받는 것을 가지고 자기 부하에 소속해 있는 장관(將官)들에게 나누어 주고, 장관들은 또 그들의 받는 것을 가지고 부하에 소속해 있는 군병에게 나누어 줌. 양곡 1백 석을 받는다면 기병(騎兵) 4인을 기르고 기병 1인에게는 보병 5인의 것을 급여하니 우리나라 보인(保人)의 법과 같은 것으로 그 식읍(食邑)에서 받는 것을 들추어 보면 그 기병과 보병의 액수를 짐작하게 됨. 다만 해가 오래 되어 사람의 체대(遞代)와 녹봉(祿俸)의 가감이 없지 않지마는, 군량의 원 장부는 일정하여서 남고 모자람이 없으므로 다음에 아울러 적지마는 과장된 말이어서 그대로 믿을 수는 없음.1백 19만 석,
기르는 기병 4만 7천 6백 명, 보병 23만 8천 명.송평대선(松平大膳)
소속해 있는 장관(將官) 4인 이하에도 모두 장관이 있으나 인원 수가 많기도 하고 적기도 하여 낱낱이 기재하지 못함.62만 석,
기병 2만 4천 8백 명, 보병 12만 4천 명.미장대납언(尾張大納言).
61만 5천 석,
기병 2만 4천 6백 명, 보병 12만 3천 명.송평육오수(松平陸奧守).
60만 6천 석,
기병 2만 4천 2백 40명, 보병 12만 1천 2백 명.도진살마수(島津
薩摩守)
따로 친병(親兵) 50만 명이 있음.60만 석,
기병 2만 4천 명, 보병 12만 명.송평하야수(松平下野守).
55만 5천 석,
기병 2만 2천 2백 명, 보병 11만 1천 명.기이대납언(紀伊大納言).
55만 석,
기병 2만 2천 명, 보병 11만 명.준하대납언(駿河大納言)
귀양 가서 죽었기에 이제는 관백의 장입(藏入)이 되었음. 대관ㆍ총령 이하도 귀양 가 죽은 자의 것은 같음.54만 석,
기병 2만 2천 6백 명, 보병 10만 8천 명.가등비후수(加藤肥後守)
죽은 뒤 후손이 없으므로 녹을 증가해 주는 데에 이속(移屬)되었음.50만 2천 8백 석,
기병 2만 1백 12명, 보병 10만 5백 60명.송평우위문좌(松平右衞門佐).
46만 석,
기병 1만 8천 4백 명, 보병 9만 2천 명.송평이예수(松平伊豫守).
42만 4천 석,
기병 1만 6천 9백 60명, 보병 8만 4천 8백 명.천야단마수(淺野但馬守).
40만 석,
기병 1만 6천 명, 보병 8만 명.가등좌마(加藤左馬).
36만 9천 석,
기병 1만 4천 7백 60명, 보병 7만 3천 8백 명.모리장문수(毛利長門守).
35만 7천 석,
기병 1만 4천 2백 80명, 보병 7만 1천 4백 명.과도신농수(鍋島信濃守).
32만 석,
기병 1만 2천 8백 명, 보병 6만 4천 명.송평신태랑(松平新太郞)ㆍ등당화천수(藤堂和泉守).
31만 5천 석,
기병 1만 2천 6백 명, 보병 6만 3천 명.송평궁내소(松平宮內少).
30만 석,
기병 1만 2천 명, 보병 6만 명.상삼탄정소(上杉彈正少)ㆍ세천월중수(細川越中守).
28만 6천 석,
기병 1만 1천 4백 40명, 보병 5만 7천 2백 명.굴미산성수(堀尾山城守).
28만 석,
기병 1만 1천 2백 명, 보병 5만 6천 명.수호중납언(水戶中納言).
25만 7천 석,
기병 1만 2백 80명, 보병 5만 1천 4백 명.송평아파수(松平阿波守).
25만 5천 석,
기병 1만 2백 명, 보병 5만 1천 명.송평선천대(松平仙千代).
25만 석,
기병 1만 명, 보병 5만 명.정이소두부(井伊掃頭部)ㆍ송평이두수(松平伊豆守)ㆍ조거좌경(鳥居左京).
24만 석,
기병 9천 6백 명, 보병 4만 8천 명.송평중서(松平中書).
23만 석,
기병 9천 2백 명, 보병 4만 6천 명.굴전장인(堀田莊人)
가하수(加賀守)의 아들로서 그 아버지가 순사(殉死)하였기에 이제 2천 석을 더 줌.22만 7천 석,
기병 9천 80명, 보병 4만 5천 4백 명.삼미작(森美作).
21만 석,
기병 8천 4백 명, 보병 4만 2천 명.유간현번두(有間玄蕃頭).
20만 2천 석,
기병 8천 80명, 보병 4만 4백 명.송평토좌수(松平土佐守).
20만 석,
기병 8천 명, 보병 4만 명.좌죽우경대부(佐竹右京大夫).
17만 1천 8백 석,
기병 6천 8백 72명, 보병 3만 4천 3백 60명.생구일파수(生駒一波守).
15만 석,
기병 6천 명, 보병 3만 명.본다미농수(本多美濃守)ㆍ아부풍후수(阿部豐後守).
14만 석,
기병 5천 6백 명, 보병 2만 8천 명.토정원강수(土井遠江守)ㆍ아부일지진(阿部一之進)
대마수(對馬守)의 아들로 그 아버지가 순사하였기에 이제 2천 석을 더 줌.13만 6천 석,
기병 5천 4백 40명, 보병 2만 7천 2백 명.주정궁내소(酒井宮內少).
귀양 가 죽음.12만 3천 석,
기병 4천 9백 20명, 보병 2만 4천 6백 명.사택지마수(寺澤志摩守).
12만 석,
기병 4천 8백 명, 보병 2만 4천 명.송평하총수(松平下總守)ㆍ판창주방수(板倉周防守)ㆍ내등좌마(內藤左馬).
11만 7천 석,
기병 4천 6백 80명, 보병 2만 3천 4백 명.송평은기수(松平隱岐守).
11만 6천 석,
기병 4천 6백 40명, 보병 2만 3천 4백 명.주정아악두(酒井雅樂頭).
11만 3천 석,
기병 4천 5백 20명, 보병 2만 2천 6백 명.경극약협수(京極若狹守).
11만 2천 석,
기병 4천 4백 80명, 보병 2만 2천 4백 명.오평미작수(奧平美作守).
11만 석,
기병 4천 4백 명, 보병 2만 2천 명.아부비중수(阿部備中守).
10만 9천 5백 석,
기병 4천 3백 80명, 보병 2만 2천 9백 명.입화비탄수(立花飛驒守).
10만 석,
기병 4천 명, 보병 2만 명.본다중무수(本多中務守)ㆍ송평비탄수(松平飛驒守)
귀양 가서 죽었음.ㆍ수야일향수(水野日向守)ㆍ소립원우근(小笠原右近)ㆍ이달원강수(伊達遠江守)ㆍ남부신농수(南部信濃守)ㆍ단우오랑좌위문(丹羽五郞左衞門)ㆍ송평식부(松平式部)ㆍ굴단후수(堀丹後守).
8만 7천 6백 석,
기병 3천 5백 4명, 보병 1만 7천 5백 20명.영정신농수(永井信濃守)
7만 8천 2백 석,
기병 3천 1백 28명, 보병 1만 5천 6백 40명.경극채녀정(京極采女正).
7만 4천 4백 석,
기병 2천 9백 76명, 보병 1만 4천 8백 80명.중천내선(中川內膳).
7만 2천 석,
기병 2천 8백 80명, 보병 1만 4천 4백 명.목야준하수(牧野駿河守).
7만 석,
기병 2천 8백 명, 보병 1만 4천 명.송평단파수(松平丹波守)ㆍ주정하내수(酒井河內守).
6만 5천 석,
기병 2천 6백 명, 보병 1만 3천 명.지내비중수(池內備中守).
6만 3천 2백 석,
기병 2천 5백 28명, 보병 1만 2천 6백 40명.송포비전수(松浦備前守).
6만 석,
기병 2천 4백 명, 보병 1만 2천 명.진경월중수(津輕越中守)ㆍ선석병부(仙石兵部)ㆍ석천주전두(石川主殿頭)ㆍ호택우경(戶澤右京)ㆍ송창풍후수(松倉豐後守).
7만 7천 석,
기병 2천 2백 80명, 보병 1만 2천 4백 명.이달수리(伊達修理).
5만 5천 석,
기병 2천 2백 명, 보병 1만 1천 명.고전병부(古田兵部)ㆍ구귀장문수(九鬼長門守)ㆍ협판담로수(脇坂澹路守).
5만 3천 석,
기병 2천 1백 20명, 보병 1만 6백 명.덕영좌마(德永左馬)ㆍ안등우경(安藤右京)ㆍ야마보시(野馬普施).
5만 2천 석,
기병 2천 80명, 보병 1만 4백 명.직전상심(織田常心).
5만 석,
기병 2천 명, 보병 1만 명.송평출우수(松平出羽守)ㆍ천야채녀정(淺野采女正)ㆍ본다이세수(本多伊勢守)ㆍ정상주계(井上主計)ㆍ도엽언육(稻葉彥六)ㆍ구구백기수(溝口伯耆守)ㆍ송평주방수(松平周防守)ㆍ호전좌문(戶田左門)ㆍ본다갑비수(本多甲斐守)ㆍ강부내선(岡部內膳)ㆍ일유감물(一柳監物)ㆍ송평산성수(松平山城守)ㆍ추전하내수(秋田河內守)ㆍ내등기이수(內藤紀伊守)ㆍ상마대선(相馬大膳)ㆍ소출태화수(小出太和守)ㆍ송평갑비수(松平甲斐守).
4만 8천 석,
기병 1천 9백 20명, 보병 9천 6백 명.편상출운수(片相出雲守).
4만 5천 7백 석,
기병 1천 8백 28명, 보병 9천 1백 40명.도엽담로수(稻葉淡路守).
4만 3천 석,
기병 1천 7백 20명, 보병 8천 6백 명.대촌주선(大村主膳).
4만 석,
기병 1천 6백 명, 보병 8천 명.송평단후수(松平丹後守)ㆍ본다비탄수(本多飛驒守).
3만 8천 석,
기병 1천 5백 20명, 보병 7천 6백 명.금삼출운수(金森出雲守)ㆍ송평석견수(松平石見守).
3만 7천 5백 석,
기병 1천 5백 명, 보병 7천 5백 명.주정비후수(酒井備後守).
3만 6천 석,
기병 1천 4백 40명, 보병 7천 2백 명.직전형부(織田形部).
3만 5천 석,
기병 1천 4백 명, 보병 7천 명.경극수리대부(京極修理大夫)ㆍ송평월중수(松平越中守)ㆍ주정찬기수(酒井讚岐守)ㆍ산기갑비수(山崎甲斐守).
3만 2천 석,
기병 1천 2백 80명, 보병 6천 4백 명.수야비전수(水野備前守).
3만 1천 4백 석,
기병 1천 2백 56명, 보병 6천 2백 80명.수곡이세수(水谷伊勢守).
3만 석,
기병 1천 2백 명, 보병 6천 명.송평주전(松平主殿)ㆍ추월장문수(秋月長門守)ㆍ보료비후수(保料肥後守)ㆍ본다하총수(本多下總守)ㆍ관소직부(管紹織部)ㆍ조진좌마조(鳥津左馬助)ㆍ소출신농수(小出信濃守)ㆍ목하우위문(木下右衞門)ㆍ정이병부(井伊兵部)ㆍ고력섭진수(高力攝津守)ㆍ추방인번수(諏訪因幡守)ㆍ신장준하수(新庄駿河守)ㆍ좌구간비전수(左久間備前守)ㆍ송평태화수(松平太和守).
2만 8천 석,
기병 1천 1백 20명, 보병 5천 6백 명.대촌민부(大村民部).
2만 6천 7백 석,
기병 1천 68명, 보병 5천 3백 40명.원등단마수(遠藤但馬守).
2만 6천 5백 석,
기병 1천 60명, 보병 5천 3백 명.본다대우수(本多大隅守)ㆍ상목가하수(桑木加賀守).
2만 5천 석,
기병 1천 명, 보병 5천 명.목하궁내소(木下宮內少)ㆍ판원백기수(板原伯耆守)ㆍ송평토좌수(松平土佐守)ㆍ본다인번수(本多因幡守).
2만 3천 석,
기병 9백 20명, 보병 4천 6백 명.송평소칠랑(松平少七郞)ㆍ도엽내장(稻葉內匠)ㆍ도원섭진수(稻垣攝津守).
2만 2천 2백 석,
기병 8백 88명, 보병 4천 4백 40명.송평장감(松平將監).
2만 8백 석,
기병 8백 32명, 보병 4천 1백 60명.송하석견수(松下石見守).
2만 석,
기병 8백 명, 보병 4천 명.송평화천수(松平和泉守)ㆍ송평기이수(松平紀伊守)ㆍ수야준인(水野隼人)ㆍ송평우위문(松平右衞門)ㆍ토옥민부소(土屋民部少)ㆍ소립원약협수(小笠原若狹守)ㆍ서미우경(西尾右京)ㆍ내등대도(內藤帶刀)ㆍ토방소부(土方掃部)ㆍ산석성수리(山石城修理)
죽은 뒤 대신 했음.ㆍ육강병고수(六江兵庫守)
죄로 감등(減等)됨.ㆍ죽중채녀(竹中采女)ㆍ모리이세수(毛利伊勢守)ㆍ분부우경(分部右京)ㆍ시교이두수(市橋伊豆守)ㆍ조거이하수(鳥居伊下守)ㆍ주정아파수(酒井阿波守)ㆍ대구보신십랑(大久保新十良)ㆍ종대마수 평의성(宗對馬守平義成).
1만 8천 석,
기병 7백 20명, 보병 3천 6백 명.상량좌병위(相良左兵衞).
1만 7천 석,
기병 6백 80명, 보병 3천 4백 명.굴미작수(堀美作守)ㆍ대관우위문(大關右衞門).
1만 6천 석,
기병 6백 40명, 보병 3천 2백 명.세천현번(細川玄蕃)ㆍ상목좌위문(桑木左衞門)ㆍ청산대장(靑山大莊).
1만 5천 석,
기병 6백 명, 보병 3천 명.송평대선(松平大膳)ㆍ별소풍후수(別所豐後守)ㆍ오도담로수(五島淡路守)ㆍ편상주선(片相主膳).
1만 4천 석,
기병 5백 60명, 보병 2천 8백 명.내도우위문(來島右衞門).
1만 3천 석,
기병 5백 20명, 보병 2천 6백 명.경극선주(京極膳主).
1만 2천 석,
기병 4백 80명, 보병 2천 4백 명.고목주수(高木主守)ㆍ삼택월후수(三宅越後守)ㆍ평악우우위문(平岳牛右衞門)ㆍ나수미농수(那須美濃守)ㆍ주정우근(酒井右近)ㆍ근등석견수(近藤石見守)ㆍ토방단파수(土方丹波守).
1만 1천 6백 석,
기병 4백 64명, 보병 2천 3백 20명.판창내선(板倉內膳).
1만 1천 5백 석,
기병 4백 60명, 보병 2천 3백 명.추본단마수(秋本但馬守).
1만 1천 4백 60석,
기병 4백 58명, 보병 2천 2백 90명.소굴원강수(小堀遠江守).
1만 1천 석,
기병 4백 40명, 보병 2천 2백 명.대전원비전수(大田原備前守).
1만 5백 석,
기병 4백 20명, 보병 2천 1백 명.원산충병위(遠山忠兵衞).
1만 석,
기병 4백 명, 보병 2천 명.단우식부(丹羽式部)ㆍ호전인번수(戶田因幡守)ㆍ부전우근대부(符田右近大夫)ㆍ장곡천식부(長谷川式部)ㆍ직전하내수(織田河內守)ㆍ삼포감물(三浦監物)ㆍ수야태화수(水野太和守)ㆍ굴담로수(堀淡路守)ㆍ일근직부(日根織部)ㆍ청목민부(靑木民部)ㆍ북조미농수(北條美濃守)ㆍ건부삼십랑(建部三十郞)ㆍ궁성주선(宮城主膳)ㆍ직전단후수(織田丹後守)ㆍ굴이하수(堀伊賀守)ㆍ서택약협수(西澤若狹守)ㆍ전전태화수(前田太和守)ㆍ성뢰이두수(成瀨伊豆守)ㆍ진전외기(眞田外記)ㆍ이등단후수(伊藤丹後守)ㆍ북조출우수(北條出羽守)ㆍ지전월전수(池田越前守)ㆍ토파산성수(土波山城守)ㆍ주정산성수(酒井山城守)ㆍ도엽단후수(稻葉丹後守)ㆍ인하보병고(仁賀保兵庫)ㆍ구구이두수(溝口伊豆守)ㆍ협판주수(脇坂主水)ㆍ도전탄정소(島田彈正少)ㆍ도전월전수(島田越前守)ㆍ구패인번수(久貝因幡守).
위의 것은, 향량미(餉糧米) 1천 9백 91만 8천 8백 60석.
기갑병(騎甲兵) 79만 6천 7백 54명.
보포병(步砲兵) 3백 98만 3천 7백 70명.
관백 친병(關白親兵) 50만.
살마수 친병(
薩摩守親兵) 50만.
총합 5백 78만 5백 24명.
첫댓글 솔직히 대륙조선이사실이라 가정하에 복건성쪽이 왜구들이 거처했다가 조선이 한반도로 이식되면서 일본도 열도로옮겨간것같습니다
복건성 부주는,,그냥 임라일본부의 땅이었다가...왜관도 됐다가..그랬던 지역이고...
현 열도일본은.. 고구려계 천조대신...필리핀등지는...금관가야계인 현 인도차이나반도의 변한인들...
이들이 대륙에 있던 왜들과 함깨 이동해 ...그 지역 해양토인들과 섞여 만들어진거라 봅니다.
물론 이후 삼국의 류민들이 계속 유입됐겠져...
중요한건 근대까지도 대륙에 토왜가 있었단 건데...
그건 미얀마와 방글라네시등의 동인도계열 힌두&불교계통으로...
식인종 홍건적과 유사계열들이고...남명(南明)잔당들이고...그게 현 중원 공산당들의 조상님들이란 추정입니다.
토왜도 옮겨갔을수도있죠 지금한반도가 대륙에있던 양반들이 옮겨간것처럼
그 토왜가 제 생각엔 상당수의 현 중국인들이라고요...
우리 조상들은 근자에 거길 빼앗낀 것이고...그게 태평천국의 난(원조동학난?) 싯점이란 예상입니다.
한반도로도 꾀 섞여 들어왔기에 문제인듯 하고여...
한반도에서 모렴치하고 해괴한짓 하는자들이 대게 토왜들이 조상일지 싶습니다.
잠자리-둘-이층집
잠자리-셋-삼층집
한가지 궁금 대륙에 조선이 있었다면 위화도 회군은 왜 하지요?
위화도를 어디로 보시는데요...?
학자란 분들 보면여...
이미 일제와 친일파들이 구한말기에 다 만들어논 틀 안에서...
요동은 요녕성이 아니다 북경 근처다...아니다 북경을 넘어간다 날리고...
고 틀 안에서 자랑스런 우리 배달계레의 무슨 종교가 있었는데 아느냐...?
숙신은 동북삼성... 고구려도 동북삼성...고려도 동북삼성과 한반도였는데 이성계가 위화도회군으로 한반도로 쭈그러들었는데 이를 모르느뇨...?
라고들 한탄들 하시는 식인데...
결국 이도 왜놈들과 친일파들이 정해준 틀 안에서의 몸부림이란걸 잘 모르시는 듯 해서 답답할 때가 많습니다.
민족사학의 거두이신 신채호 선생님도...현 동북삼성을 단군의 개국지라 하신건데...
신채호선생님 어린 시절도...이미 조선의 서부영토가 다 날라간 구한말기부터입니다.
쎔플의 다양성이 지금보다 훨 좁았단 거죠..
현재 해석되는 여러 조선사들을 다 비교해 봐도...일단 조선의 북쪽끝이란 백두산도...
북으론 사막지대에 접해있다 나옵니다.
아예 기본부터 틀이 잘 못 잡힌겁니다...존경하는건 떠나서...수정은 물가피하단 겁니다.
진실이 아니니여...
진실이 아닌 바탕에서...그를 바탕으로 지아무리 화려한 철학적 학문적 예술적 서술들을 붙여봐야...
허무한 짝퉁의 민족철학과 민족문학들이 돼고 만단 것이니요...
영토도그렇지만 그때 기후 풍토 이런것들을봐야하고 리단위나타내는것도 지금기준이아닌옛날기준으로봐야죠
거리측정을 벌써부터 디테일하게 들어가다간 순차적인 오차로 끝지점에선 엄청난 오차가 발생합니다.
먼저 영토의 맨 경계를 뜻한 상징적인 장소들이 어디인지 구획부터 정확히 찾아(보편적 검증,동의를 받아)놓고 그걸 분할하는 방식이 오차가 없다 봅니다.
열도는 하나님의 땅 한반도를 보호하는 병풍지대다.
객관적 역사공부에 제일 걸림돌이 되는게..집안 족보들과 종교,철학 개입니다...ㅡ. .ㅡ
그냥 전... 짭새가 증거찾듯 무미건조하게 가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리고 많이 배웁니다..^^
사실 많이 고민하고 밤새 올린 글입니다...ㅡ. .ㅡ
감사합니더...
고인돌.옹관문화는 고인돌의 천국 한반도 서남해 지역을 중심으로 해안을 따라 열도와 중국 동해안.동남아.인도.지중해.유럽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는 고대 서남해 지역이 세계문명의 중심지역이였음을 의미하며, 해양을 개척한 세력이 한반도 해양세력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왜는 지나어이고, 우리말로는 해다. 바다를 한자로는 우리말로 해로 표기한다. 바다가 된 서남해가 바로 고대에는 온누리를 환하게 비추던 해였다는 의미다. 그 해를 숭상하다 보니 해양세력은 마고를 섬기고 제사를 지냈던 것이다. 서해바다를 지키는 할머니가 마고이듯이 말이다. 따라서 세계 바다를 누비던 해(왜)세력의 황도 역시 서남해 지역이 된다.
고인돌은 흉로(스키타이)지역인 북방에도 많습니다.
제가 중학교 1학년때여...
미술시간에 풍경화를 그렸는데...미술선생님이...
야~~~이 구도 명암...지룰할까봐 원색을 가한 지붕색깔...
이건 배워도 한참 배운 솜씨인데...이거 누구야...?...어디서 배웠어...?
이래 물으시더군여...
난 그냥 그린건데...ㅡ. .ㅡ
고대 초기 유물들은...디테일한 후대의 역작들이 탄생하기 전엔...
어떤 철학적 종교적 의미를 부여해 만들었다기 보단...그냥 필요해서 만들었다 보는게 정확할 듯 합니다.
고인돌...일단 땅을 깊이파서 매장하기 어려운 영구동토의 추운지방에서,,,
또는 겨울엔 엄청 두깝게 얼어 거죽도 팔 수도 없는 추운 동토에서...
그 시신을 그냥 들개밥으로 놔둘수 없을땐...돌무더기로 덮어 시신의 회손을 막는...돌무더기로 발전합니다.
그게 몽골등지의 오보(돌탑)인데...뭔 표시를 해 놓으려 말뚝이나 나뭇가지..표식을 올려놓습니다.
그게 유명한 용사든 왕이든...이럴땐 더 커지고...더 종교철학적 표식이 가미돼고...
돌무더기도 더 반듯반듯해 지는게...피라미드...
그 피라미드 탄생 이전엔...고인돌위의 반석에...들집승들 못오르게 시신을 높이 올려...
독수리나 까마귀등만이 시신을 깨끗이 바르게 하여...나중에 유골만 그 밑의 석곽에 눌러 보관하고...
대개 가족들의 유골을 이 고인돌에 같이 안치한다.
전 이렇게 시작됀게 고인돌과 피라밋의 시초고...조건적으로 매우추워 매장이 아려운 북방에서 많이 필요했던 방식이라 봅니다.
안그러면 추운 시베리아나 알타이지역에선...지금도 얼음공주들이 고대로 냉동돼어 나오듯...
온 산하가 얼음공주 시신들로 섬뜩하게 장식됄 터이니...
그걸 방지하기 위한 조장풍습에서 고인돌이 나왔다 생각합니다.
나중의 철학 종교적 고차원은 고인돌과 피라밋 말고 처음 시작이 이리 생활의 필요로 인해 시작됐다 봅니다.
오보(돌탑)를 빙빙돌고 돌을 하나 올려놓고 가는것도...
유골이나 시신이 뭇힌 주위 땅을 다져서...들짐승이 파고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필요에 의한 땅다짐이고...
무너진 돌무더기의 돌을 더 보강한단 극히 당연한 의미로 시작한 풍습이...
나중에 기원,기복이란 종교적 의미도 가미됀거라 봅니다.
그리고 저도 대륙조선은부정하지는않지만 연구해볼가치있다고생각합니다 우선 대륙조선을 이해하려면 좀 좁은시각이아닌 넓게봐야하고 中國이라는 단어를 이해해야되는것이 대륙사의 연구의 입문이라봅니다 지금 20살인 제식견이 모자랄수는있지만요 대륙조선사연구를하고싶으시면 태양해님, 최두환씨나 러브선님과 같은분이랑 얘기해보시는게어떨까요?
중국(中國)은 기내(畿內) 천리의 중심...사방의 봉토를 갖은 천자의 중심...
주나라의 이런제도를 고려나 조선도 썼으니...고려나 조선은 유일한 대륙의 천자다...이게 그분들 지론이신데...
고려시대로 치면...고려는 4경밖엔 없는데...
발해는 5경6부...거란이 그걸 그대로 찬탈하고...천자라 자타공인하고...고려는 당을 이어 남송을 천자라 하고...
거란에게 망한 발해의 부흥국들인 1년밖에 못간 동진국들도..자체연호와 황제를 자칭하고...
다 이렇습니다.
천자제도 용어하나 조상들이 썼다고...우리 조상이 대륙의 유일한 천자가 됄 순 없는 거고...
모든건 남의족보 따지듯 냉정하게 봐야 진실에 가까와 진다고 전 믿습니다.
저도 그분들 같이 한가지의 증거만 가지고 ..그것만을 쎔플로 적용해 유리한 대로만 확대해석하는 식이면...
대륙조선을 달나라에도 가져다가 놓을 수 있습니다.
사실 그분들 서역으로 아메리카로 마구 가시게 충동질한 글은...제가 먼저 쓴 글입니다.
제 책음도 큽니다.,,ㅡ. .ㅡ
중앙아의 유목민들은 태반이 B형 혈액형인데...
아메리카 순수 원주민들일수록..거의 100%가 O형 혈액형이 나옵니다.
고조선이나 고구려등의 직계완 다르단 겁니다.
차라리 시베리아 소수민족들이 더 아메리카 인디언들과 같으며...그걸 역사는 추운 동토의 숙신족이라 한거고...
숙신족이 무조건 조선과 동일한게 아니란 겁니다.
이런 분류도 없이...유사점만 하나 있으면 다 그게 곧 우리다 라는 식이니...조선의 영토가 한없이 넒어지는 겁니다.
제가 예상하는 이씨조선의 중세부터의 직접통치영토는...위 지도의 딱 중국 중부지역자립니다.
하남성 ,산서성...산동성...섬서성...사천성...호남 호북성...관동 광서성...귀주성...복건성...절강성...한바도는 직접통치와 간덥통치 줄타기하건 동국(東國)이자...고려(코리아=삼국,발해 거란 금나라...유민들...)...이리 봅니다.
한반도와 동북삼성은...중원조선이 차지했다 ...청나라에 빼앗겼다 왔다갔다하며...
결국, 중앙아의 청나라 유민들과 대한제국 유민들이 뒤섞인 어용만주국이 됐다 봅니다.
감숙 천해성 운남성,,,을 청나라에 날리고...탐라(원조제주)는 남명유민들인 장께들에게 말렸다 봅니다.
영토는 순차적으로 줄면서 자연스럽세 지명도 이동돼고 챙피해서 스스로 왜곡도 돼는 것이지...
무조건 일제시대 같이 모두 한방에...악의적으로 이동됀건 아니라 봅니다.
서역에서 구한말기에 한방에 한반도로 이동시켜 역사왜곡해 쇄뇌시킨들,,,말도 않통하고 앞뒤나 맞았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