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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민족역사정책연구소 원문보기 글쓴이: 승희야
북한의 주체사상과 기독교 비교
▣ 들어가는 말
지금까지 기독교를 비롯한 여타 종교단체들은 탈북자들을 돕는 일방적인 북한 선교를 위해 많은 노력을 해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현지 상황을 제대로 분석하고 연구하기보다는 의욕이 앞서 시행착오가 적지 않은 것으로 생각된다. 북한이 신격화된 정치지도자를 중심으로 획일화된 사회라는 사실은 이미 우리에게 널리 알려져 있다. 이렇게 막연하고 개략적인 이해 속에 있던 사람들은 북한의 구체적인 현실에 대한 설명을 듣거나 교육을 받으면서 의문과 회의를 제기하며 잘못된 지식에 기초함으로써 결국 임무를 다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다시 말해 북한지역 선교나 통일문제와 관련된 활동에 앞서 우리는 상대방에 관하여 좀더 바르게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우선 북한에서는 신격화된 지도자에 대한 숭배의식과 집단적 조직생활 면에서 기독교인들의 그것을 훨씬 능가한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제반 행동에서 만심(慢心)을 경계할 필요가 있다.
북한에 복음을 전해야 하는 우리들의 사명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하지만 그 중요성을 강조하기에 앞서 이 사명이 매우 특이하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 이유는 일찍이 복음이 널리 전해져 동방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리던 지역의 동포에 대한 선교와 우리의 소원인 통일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점이다. 형식상으로는 기독교 종교양식과 흡사한 통치체제 속에서 신앙적 삶을 살고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기독교와 너무나도 거리가 먼 신념과 의식(意識)을 지니고 있는 형제들에 대한 선교임무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북한에 대한 선교는 중요하고도 매우 특이한 사명이며, 따라서 다른 어떤 지역에 대한 선교보다도 더 많은 연구와 노력 그리고 열정을 필요로 한다.
북한정권은 절대 권력자 김일성에 의하여 수립되었고 구체화되었으며 유지되어 왔다. 오늘날의 북한통치체제란 바로 그 정권이 기독교 종교양식을 기초로 하여 놓은 특이한 정치 메카니즘이다. 따라서 이를 검토하기 위해서는 먼저 절대권력자 김일성의 기독교 경험과 기독교관을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이에 따라 기독교적 종교양식으로 짜여진 것이라고 인정되는 북한의 통치체제에 관하여 언급하고자 한다.
I. 절대 권력자의 기독교 경험 및 기독교관
1. 김일성의 성장과 기독교 경험
가. 모태신앙인 김성주(金聖柱: 김일성의 본명)
김일성의 본명은 김성주이며 1912년 4월 15일에 기독교 신앙을 가진 아버지 김형직(金亨稷)과 어머니 강반석(姜盤石) 사이에 큰아들로 태어나 초등학교까지는 비교적 신실하게 신앙생활을 했다. 그러나 중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아버지를 여의고 유랑에 가까운 생활을 했으며 그 후 공산주의 운동에도 참가했다. 그는 모태신앙인으로써 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였지만 독실한 신앙인은 아니었다. 이제 우리는 김일성과 기독교라는 명제를 가지고 좀더 상세히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아버지 김형직은 고향의 신망(信望)학교를 마친 후 1911년 평양에 있는 기독교 계통의 숭실중학에 입학하여 1913년에 졸업했다는 설과 중퇴했다는 주장도 있다. 숭실중학은 미국계 미션스쿨로서 한국에서 기독교를 전파할 지도자 양성 교육기관이었다. 1911년이면 아직 한반도에 기독교가 대중화되지 않은 시대였는데 이때 김형직이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숭실중학교에 입학한 것은 신망학교 설립자인 임재훈이라는 선각자의 권고를 받아드린 데 기인한다. 김형직은 숭실중학교를 수료한 후 고향으로 돌아와 모교인 신망학교와 서당에서 교사생활을 하며 몇 해를 보내고 김성주가 8세 되던 해에 만주로 이주하여 한의원(漢醫員)으로 생계를 이어 갔다.
어머니 강반석은 창덕학교(彰德學校: 초등학교 급) 교장이었던 강돈욱 장로의 둘째딸로서 장로교 계통의 기독교 집안 출신이다. 그리고 고향 칠골교회에서 신실하게 교회를 섬기던 기독교 신자였다. 따라서 강반석은 기독교 가정에서 출생하여 비교적 신실하게 신앙생활을 한 것으로 보인다.
김성주는 자신의 회고록「세기와 더불어」에서 외할아버지가 교장으로 있던 창덕학교에 다니면서 어머니와 함께 매 주일 송산에 있는 장로교계통의 교회에 참석했던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그리고 김성주는 가족이 만주 무송(撫松)으로 이주한 후에도 초등학교 5학년을 전후한 2년 동안은 평양에 사는 외할아버지 강돈욱의 집에서 학교를 다녔다고 한다. 이는 만주의 학교교육이 부실했거나 아니면 만주로 이주한 김형직이 경제적으로 어려워 잠시 외가에 의탁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때 외할아버지 강돈욱은 김성주에게 성경을 가르쳤으며 강돈욱의 육촌동생인 강양욱이 김성주의 담임이 되어 김일성을 지도했는데, 강양욱은 해방 직전까지 감리교계통의 평양 암정교회 목사로 활동했다. 이러한 점으로 보아 강양욱은 담임시절 김일성에게 기독교적인 교육을 했음이 확실하다. 한편 강양욱은 해방 후 김일성이 북한에 나타나 권력을 획득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던 때로부터 등극할 때까지 적극 협력하며 후일 부주석으로 영화를 누렸는데, 이 과정에서 기독교를 배신함으로써 "한반도의 유다"가 되어 일생을 마감했다.
나. 김형직의 사망과 김성주의 유랑
김성주의 중학교과정 학력은 북한에서 발행한 7가지의 공식적 출판물에도 그 내용은 전혀 다르거나 상치하는 대목이 아주 많다. 개정된 출판물이 나오면 이전의 것은 모두 회수하여 폐기 처분했다.
김성주는 3곳의 중학교를 전전하는데 이는 모두 아버지 김형직의 죽음에서 비롯되었음이 확실시된다. 김형직의 사망연도에 관한 기록은 일정치 않은데 1926년 김성주가 14세 때 만주의 화성의숙(華成義塾)에 입학한 해에 죽은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왜냐하면 김성주는 화성의숙에 입학한 해인 1926년에 화성의숙을 중퇴하고 유랑의 길을 걸었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이러함에도 북한에서 발행된 김일성의 회고록과 전집들에는 중학과정 교육에 관한 한 길림의 육문중학(毓文中學)만 언급되어 있다. 이때 손정도 목사의 보살핌으로 교회생활을 하였고, 학생성가대의 지휘를 맡을 정도로 교회활동을 활발하게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손정도 목사는 김형직과 같은 숭실중학교 출신으로 3.1운동 직후 중국으로 망명하여 상해임시정부에서 의정 및 농공부장으로 활동했다. 이러한 사실 또한 김성주가 짧은 기간이지만 중학생 시절에도 기독교적인 교육을 받았음이 확실시 된다.
그러나 김성주의 육문중학 입학은 최초 입학한 화성 의숙을 중퇴한 몇 년 이후의 일이다. 최초 화성의숙에 입학한 것은 사실이나 입학 후 얼마 안되어 아버지가 사망하자 중퇴한 후 육문중학에 입학할 때까지 그 사이의 행적이 분명하지 않다. 이때 14세에 불과한 가장 격인 김성주의 생활은 평탄치 못했을 것이 분명한데 북한에서는 이에 관하여 애매모호하게 언급할 수밖에 없겠지만, 김일성의 이념적 성향이 변화되고 고착화하는 과정을 알아보려는 이 글에서는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즉 모태신앙인으로서 초등학교까지는 착실한 기독교적 가정에서 성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던 김성주가 갑자기 철저한 공산주의자로 변화된 이유가 무엇이며 어떤 과정을 거쳤는가 알기 위해서는 이 기간에 걸친 김성주의 행적을 좀더 자세히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김성주는 경제적 사정 때문에 더 이상 학업을 계속할 수 없었고 어머니 강반석과 동생 철주, 영주와 함께 살아갈 길이 막연해지자 무송 일대를 떠돌아다니는 마골(馬骨)이라는 무리에 끼어 심부름을 하면서 생활했다고 전해진다.
다. 마골단 생활에서 육문(毓文)중학생으로
만주의 한인사회에 공산주의 사상이 전파된 것은 1920년경 부터이며, 그 전파의 속도가 빨라서 1925~6년을 고비로 해서는 아주 왕성해졌고 1928~9년에 이르면 계급혁명을 부르짖지 않는 자는 설자리가 없을 정도의 형세로 발전해 갔었다. 그런데 그 초기의 공산혁명운동이라는 것은 아주 유치한 것이어서 몇몇이 작당하여 흉기를 들고 구호를 부르짖으며 다소간의 여유가 있는 사람이면 찾아가서는 의당 부르주아반동이라 지목하고 금품을 털어 내곤 하는 것이었다. 마골단이란 그런 공산혁명가를 자처하는 부류의 패거리였다.
당시 중국 동북정권의 지방치안력은 매우 미약해서 이런 마골단의 행패를 잘 다스리지 못했다. 이때 만주의 한인 독립운동 단체와 독립군은 정의부(正義府)라 호칭하는 사령부 통제 하에 항일활동을 하는 일반 재만한국교포를 돌보는 행정부의 기능도 함께 수행하고 있었다. 이 정의부(正義府)에 무송 일대에서 마골단의 행패가 심각하다는 정보가 전해진 것이다. 정의부 중앙에서는 소속부대의 이종낙(李鍾洛) 소대장으로 하여금 이 지역 마골패를 토벌케 했다. 이종낙은 명을 받들어 마골패를 평정했는데 그 가운데 김성주라는 어린 소년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데려다 심문했다. 김성주가 가정환경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을 알고 불쌍히 여겨 마골패 생활을 청산하고 학업을 계속하라 이르고 봉천에 있는 중국인 학교인 평탄중학(平旦中學)에 입학시켜주었다. 이렇게 해서 김성주는 이종낙과 인연을 맺게 된다.
한편 이종낙의 은혜로 평탄중학에 입교한 김성주는 잘 적응하지 못했던 것으로 전한다. 어찌했건 김성주는 평탄중학교를 졸업하지 못하고 중도 하차했다. 그 즈음 김성주의 가족은 무송에서 동북으로 4백리 가량 떨어진 안도(安圖)로 이주했는데 이 이주사실도 북한에서는 모호하게 처리하고 있는 부분이다. 다만 김성주 일가가 안도로 이주한 주된 동기는 김성주가 안도 경찰대장 중국인 「무」씨의 양자로 들어가 그의 보호를 받게 되었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김성주는「무」씨의 덕택으로 비로소 길림의 육문중학(毓文中學)에 입학하게 된 것이다. 어머니 강반석은 1932년 안도에서 죽어 그 곳에 묻혔으니 김성주의 나이 20세 때이다. 그로부터 15년 후 정권을 장악한 김일성은 1947년 어머니 강반석의 무덤을 평양으로 이장했다.
라. 공산당조직과 첫 접촉
육문중학에 입학한 김성주는 길림에 있는 우리 동포 소년들이 대부분 가입하고 있는「조선인길림소년회」에 가입했으며,곧 회장이 되었다. 소년회 회원들은 길림 북산(北山)에 올라가 놀았는데 우리 소년들은 독립운동의 영향을 받아 놀이는 으례 유격전 놀이었다. 대장은 회장인 김성주였고, 그는 남녀회원들을 거느리고 으스대며 뛰어 놀았다고 한다. 그러나 시대의 광풍은 소년 김성주를 가만 내버려두지 않았다. 길림 일대 청소년들 사이에 공산주의가 침투한 것이다.
1929년 5월초 김성주는 한 공산당원으로부터 길림 대동문밖 어느 한인 집의 한 모임에 참석하라는 연락을 받았다. 이 모임의 발기인은 ML(주: 마르크스-레닌의 영문 첫 글자)파의 고려공산청년회 회원인 허소(許笑)였다. 이날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은 그 지역의 공산청년회를 조직할 것에 관해 의논했으며, 동년 5월 8일과 10일에 다시 회합하여, 다음부터는 매달 첫 일요일에 모이기로 했었다. 이것이 김성주의 공산주의조직과의 첫 접촉이다. 그러나 일본영사관 경찰이 이를 탐지해냄으로써, 이들은 다음달 첫 정기회합을 갖지 못한 채 그 대부분의 회원이 체포되고 말았다. 체포를 면해 길림을 빠져나온 김성주는 장춘에 있는 3년 전 마골패에서 자기를 구해준 이종낙 부대를 찾아갔다.
한편 이종낙은 민족주의 독립운동단체를 탈퇴하여 극좌모험주의적 노선에 입각하여 활동했는데, 자연히 이들은 민족주의진영과 대립하게 되었으며, 그럴 때면 언제나 무력행위를 서슴치 않았다. 1930년 이들 좌익모험주의 단체들이 간도와 돈화에서 폭동을 일으켜 파괴와 약탈을 일 삼고 심지어 살인을 서슴없이 자행하자 중국의 동북정권은 공산주의 운동에 대한 철저한 단속에 나섰다. 이종낙 부대도 단속 대상이었고, 마침내 이종낙은 1931년 만주 동북정권에 체포되어 조선총독부에 넘겨져 신의주 감옥에서 복역했다. 김성주는 이종낙이 체포될 때까지 그의 부대 대원으로서 활동했다.
마. 성년이 된 김성주의 활동
김성주가 성인이 되어 본격적인 사회활동을 하게 되는 이 시기는, 1931.9.18. 일본군이 만주 사변을 일으켜 청조(淸朝) 최후의 황제 부의(溥儀)를 내세워 괴뢰정권을 만들어 놓고 배후에서 만주일대를 지배하던 시기에 해당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1931년 20세의 김성주는 이종락이 체포되자 용하게 도주하여 전전하다가 무송(撫松) 일대에 이르러서는 몇몇 동료들과 작당하여 군자금 모금이라는 명목으로 강제징발 행위를 일삼았다. 이러한 행위에 대하여 한인은 물론 중국인들이 거세게 항의함으로 우리 독립군인 조선혁명군에서는 김성주 일당을 제재하고자 유하현 삼원포(柳河縣 三源浦)에 주둔한 고동뢰(高東雷) 소대장을 파견했는데, 위기를 간파한 김성주는 오히려 고동뢰 소대장 일행을 살해하고 도주했다. 김성주는 동년 여름 다시 나타났다. 이때 조선혁명군 사령관 양세봉(梁世奉)은 “항자는 불살(不殺)”이라는 병가의 도리에 입각하여 김성주를 살려 참회의 기회를 주었다. 그러나 김성주는 자기의 죄과가 얼마나 큰 것임을 잘 아는 터라 불안한 나머지 조선혁명군을 떠나 어디론지 자취를 감추었다. 이렇게 1932년 여름 조선혁명군을 떠난 이후 김성주의 발자취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는 극히 미미하다. 이때 김성주의 나이는 불과 20세였다.
일본 경찰은 일제 지배하의 만주에서 항일활동을 해온 지사들에 관한 정보는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확보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 김성주에 관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보아 필시 김성주는 기록에 남을만한 존재가 못되었던 것이 분명하다. 수년 후인 1937년 초 만주에 있던 중공당 유격대인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의 한 대원이었던 것은 확인되나 동북항일연군에서의 김성주의 지위는 한낱 말단 대원에 불과했던 까닭에 일본이나 중국공산당의 기록에는 남아 있지 않다. 그 후 1945년 10월에 이르러서야 평양에 나타난 김일성으로 행세하는 소련군 소좌 김성주의 기록을 다시 보게 된다. 북한 자료들은 이 기간에 있었던 김성주의 행적을 최대한 과장하고 있을 뿐 아니라 남의 업적을 이용하고 나가서 조작하기를 서슴치 않았다. 이러한 북한의 행위에 대해서 중국공산당은 시인도 부인도 하지 않는 태도를 보이고 있으며 물론 공식적인 자료에도 그 같은 내용은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다.
여하간에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본명이 김성주였던 김일성은 기독교 가정에 태어난 모태신앙인으로서 부친을 여읠 때까지 기독교적 환경 속에서 성장했다. 따라서 비록 신실한 기독교인은 아니었고 기독교에 대한 지식이 깊지는 못했을지언정 기독교에 관하여 무지하지는 않았다 할 것이다. 그러나 소년이 된 후 특히 아버지가 사망하자 한 때 마골패를 따라 다니는 유랑생활을 했고 이종낙 부대원으로 활동하는 등 이전과는 완연히 궤도를 달리하는 생활 속에서 기독교 신앙은 망각되고 변질될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성년이 된 후에는 오히려 반기독교적인 사회와 조직 속에서 생활하고 활동해야만 했으니 그의 기독교 신앙에 대한 신념과 태도가 어떠한 형태로 변질되고 고착되었을 것인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2. 김일성의 기독교관
그러면 모태 신앙인으로 태어났고 초등학교 시절까지 기독교적 교육을 받았으나 그 후 공산주의자가 된 김성주, 즉 김일성의 기독교관을 보다 자세히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김일성은 스스로 본인이 받았던 기독교적인 교육에 대해서 극히 부정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다. 물론 이 같은 행위는 기독교인이었음에도 어느 날 갑자기 달라진 자신의 사상과 행동을 합리화하려는 어쩔 수 없는 변명일 수도 있다. 어머니를 따라 장로교계통의 교회에 다녔다고 말하는 그는, "동심에 맞지 않는 엄숙한 종교의식과 목사의 단조로운 설교에 싫증을 느낀 다음부터는 례배당에 잘 다니지 않았다."라고 회고록에 기록하고 있다.
이렇듯 그는 종교적인 변절을 합리화하기 위해 자신의 행위를 부정적으로 비판하지만 통치에 이용하기 위해 몇 가지 점에 있어서는 이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였다.
가. 민족주의적 활동과 노력을 호평
김일성이 집권과정과 집권 초반에 기독교를 반민족적인 것으로 규정하고 매우 신랄하게 비판하고 탄압한 것은 마르크스-레닌주의적 정치이념 하에서 어찌 보면 당연하고 불가피한 태도라 하겠다. 집권초기에 정치적 경쟁자였던 북한의 민주당에 대해 비판을 제기하면서 보인 기독교에 대한 증오심은 매우 높게 나타나 있다.
"미국선교사들은 조선사람들에게 설교하기를 '왼뺨을 치거든 오른뺨을 돌려대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미국이 조선인민들의 자유를 침해한다 하더라도 조선인민은 반항할 것이 아니라 복종하여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조선의 애국자들과 인민들은 미국선교사들의 이러한 기만적인 설교에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11면에 계속>
<10면에서 이어짐>우리 인민은 미국 놈들에게 '네놈이 한번 치면 우리는 두 번 갈기겠다'고 대답하였으며, 또 실지로 그렇게 하였습니다."
이러한 초기의 태도와는 달리 권력기반이 강화되고 기독교와 기독교인들을 정치적으로 활용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자, 김일성은 점차 모든 종교가 갖는 민족주의적이고 애국주의적인 활동과 노력에 대해서는 호평을 했다.
"종교를 아편이라고 한 마르크스의 명제를 나는 물론 부정하지는 않소. 그러나 이 명제를 어떠한 경우에나 적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오산이오. 일본에 대한 천벌을 내리고 조선민족에게 복을 내려달라고 비는 데 그래 아편이라는 감투를 함부로 씌울 수 있겠소? 나는 천불교를 애국적인 종교라고 생각하며, 이 교의 신자들을 다 애국자라고 생각하오. 우리가 할 일이 있다면 이 애국자들을 하나의 력량으로 묶어 세우는 것뿐이오."
물론 종교 교리자체를 모두 인정하고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집합체인 국가에 대한 종교인들의 우호적인 태도만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것이다.
나. 투철한 사상과 신념을 찬양
김일성은 기독교가 인민의 혁명성을 고취시키는데 장애물이 된다고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우리나라가 청소년들이 례배보러 다니는 것을 경계하고, 그들이 미신의 포로가 되지 않도록 부단히 교양한 것은 청소년들이 미신에 빠지고 예수의 교리를 절대화하게 되면 혁명에 아무 쓸모도 없는 나약하고 무기력한 존재로 될 수 있기 때문에, 그 것을 방지하자는 데 목적이 있었다. 신자라고 하여 혁명을 못한다는 법은 없지만 종교가 내포하고 있는 무저항주의적인 요소들로부터 부정적인 영향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어려운 가정환경을 극복하고 항일운동에 투신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사상과 신념의 결과라고 여러 번 강조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사상과 신념의 중요성에 대한 그의 확고한 믿음은 기독교적인 생활을 통해 체득한 것이라 생각되며, 후일 주체사상이라는 이념을 만들고, 또한 이를 근거로 강력한 통치체제를 확립한 것이다.
다. 선교에 대한 인식과 의지를 호평
기독교인들이 복음을 전파하며 선교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분투하는 자세를 높게 평가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즉 공산주의의 혁명완수를 위해서는 어떠한 어려운 환경도 이를 적극적인 자세로 활용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혁명을 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감옥은 하나의 투쟁무대라고 할 수 있다. 감옥을 단순히 죄인들을 가두어 두는 곳이라고 생각하면 피동에 빠져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러나 감옥을 세계의 한 부분이라고 여기게 되면 그 비좁은 공간 속에서도 혁명을 위해 유익한 일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같은 강조 점은 사도 바울의 행적을 기리며 원용하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라. 궁극적인 세계 - 이상촌을 흠모
김일성은 비록 기독교에 대하여 극히 적대적인 이념과 그 이념의 세계를 주관하는 소련의 지지를 받아 집권했지만, 기독교의 사랑과 구호(救護)를 기반으로 한 궁극적인 세계의 건설에 대해서는 매우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같은 이상향을 건설하겠다는 생각은 실력 양성론을 주창한 도산 안창호 선생의 “이상촌 건설운동”이 먼 배경에 자리잡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특히 소년시절에 직접 혹은 간접으로 경험했던 기독교적인 공동체에 관한 지식이 큰 영향을 미쳤다고 판단되는 근거가 여러 곳에 드러나 있다.
지금까지 검토해 본 바와 같이 김일성의 기독교에 대한 인식과 태도, 즉 그의 기독교관은 철저히 현실적이고 마키아벨리즘적인 면모를 지니며 한 걸음 더 나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적절하게 변화 조절하는 융통성을 보여 왔다. 그리함으로써 기독교적 종교양식과 매우 흡사한, 어쩌면 더 세련되고 더 철저한 현재의 통치체제를 구축하기에 이르렀고 자신은 신적인 존재로 군림한 것이다. 그러면 다음 장에서 북한 통치체제의 기독교적 종교양식화 실태에 관한 내용을 자세히 검토하기로 한다.
Ⅱ. 통치체제의 기독교적 종교양식화 실태
종교를 구성하는 보편적 요소는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첫째, 모든 종교는 성(聖)과 속(俗)을 구분하고 성스러움을 그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다. 그리고 이 같은 신앙의 대상을 설명하고 명시하기 위한 교리와 신념체계를 지니고 있다. 둘째, 모든 종교에 공통되는 요소는 의식(儀式)과 행위규범이다. 의식은 성물(聖物)에 대한 명예를 부여함으로써 신앙심을 불러일으킬 뿐만 아니라 행위규범과 더불어 신자와 믿음의 대상과의 관계를 돈독히 해준다. 셋째, 종교는 일종의 사회공동체를 형성하는 특징을 지닌다. 즉 집단내 구성원들간에 지켜야 할 윤리와 도덕률을 갖고 있으며 공동체 조직을 유지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를 갖고 있다.
그런데 주체사상을 근간으로 하는 북한의 통치체제는 위에서 언급한 세 가지의 종교적 성향을 모두 담고 있다는 것이다. 기능주의의 관점에서 보면 북한의 주체사상은 종교적 기능을 하고 있음이 확실하며 특히 형식면에서 기독교의 그것과 완전히 일치한다. 즉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념을 대체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주체사상은 종교적 신앙으로 발전되어 샤머니즘 같은 원시신앙의 현상도 엿보이며 윤리 종교적 특성도 발견된다. 그러나 주체사상은 단순한 윤리체계는 아니며 기독교적 유신(有神) 종교에 비유될 만큼 강렬한 숭배를 요구함으로써 배타성을 지닌 신앙체계를 지니고 있다.
그러면 북한 통치체제의 종교양식화 실태를 기독교 교리와 비교하여 검토해 보기로 한다. 먼저「교리 및 신념체계」를, 다음은「종교의식과 행위규범」 그리고 「공동체의 윤리와 도덕」의 순서로 고찰할 것이다.
1. 교리 및 신념체계
기독교의 교리와 신념체계를 포괄하는 조직신학의 내용은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다. 즉 신론, 기독론, 인간론, 구원론, 교회론, 종말론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기독교 교리체계의 내용을 기준으로 각각의 영역에서 북한의 통치체제가 어떻게 체계화 되어있는가를 살펴보기로 한다.
가. 신론 - 기독교의 하나님 : 공산주의의 공산사회
기독교의 하나님은 신으로서의 절대적 속성과 인간과 공유할 수 있는 보편적 속성을 동시에 지닌다. 하나님은 영원하시며, 모든 것을 지배하시며, 전능하시며 모든 곳에 계시며, 전적으로 거룩하시고 의로우시고, 자비로우시며, 사랑이시며, 결코 변하지 않는 분이시며, 완전한 분이시다. 또 기독교의 하나님은 본질적 존재에 있어서는 한 분이지만 이 한 분 안에 성부, 성자, 성령이라는 삼위가 존재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북한의 주체사상은 유물론적 가치관과 진화론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인간의 경험영역을 초월하는 추상적인 신의 영역을 인정하지는 않는다. 즉 주체사상은 기독교의 하나님과 같은 인격체의 개념은 갖고 있지 않다. 대신 공산사회의 도래에 대한 신념과 확신이 기독교가 신봉하는 하나님의 영역을 차지하고 있다. 형이상학적인 하나님의 존재는 경험으로는 확신할 수 없는 허구이지만 공산주의의 실현, 즉 공산주의적 이상향의 도래는 역사법칙에 의해 경험적으로 보증할 수 있는 과학적 실체라고 주장한다.
김일성은 “공산주의에 대한 신념은 공산주의자들의 고상한 정신적 풍모입니다. 공산주의자들은 인류 최고의 이상인 공산주의의 승리를 굳게 믿고 그것을 위하여 자기의 모든 것을 바쳐 투쟁하는 고상한 품성을 가지고 있습니다.”라고 설파했다. ‘공산주의의 승리를 굳게 믿고 자기의 모든 것을 바쳐 투쟁....’ 운운하는 주장은 신학적으로 볼 때 종교적인 색채를 띠고 있음이 분명하다. 다시 말해서 기독교에서 하나님의 존재와 섭리를 확신하는 것과 동일하다. 다만 보수 기독교 신학이 주장하는 하나님이라고 하기 보다 현재 천국의 실현과 사회구원을 신망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현대신학의 신론과 맥을 같이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신론에 입각해서 보면 북한의 주체사상이 도래를 믿고 그래서 강력히 지향하고 있는 ‘공산사회’란 다름 아닌 기독교의 하나님과 동일한 것이다.
나. 기독론 - 기독교의 예수 : 북한의 김일성
기독교에서 하나님은 예수라는 인간으로 우리에게 오심으로 누구나 볼 수 있는 하나님으로 환원되어 이 지구상에서 우리들과 함께 하신다. 북한은 바로 김일성을 기독교의 예수처럼 지상의 하나님으로 상정(想定)했다. 따라서 출생과 성장과정, 청년시절의 투쟁과 집권 후 정치활동에 이르기까지 신분과 행적을 예수의 것과 같이 보이도록 만들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이 것이 김일성 신성화 작업인 것이다. 이 신성화 작업의 내용을 보면, 부모를 비롯하여 모든 조상들이 성인으로 자리 매김 하였고, 성장 때에도 범상하기 이를 데 없어 불과 10세 미만에 도산 안창호 선생님의 연설을 듣고 질문을 해 선생을 당혹하게 하였고, 항일독립투쟁 때 솔방울로 폭탄을 만들어 사용했고, 천리 밖을 내다보며 축지법을 썼고, 낙엽을 타고 강을 건너고 하늘을 마음대로 날아다녔고, 해방될 때까지 10만회의 전투를 해서 모두 승리했고, 무한한 지식과 끝없이 풍부한 혁명투쟁 경험을 가지고 인민을 영도해왔고, 그 누구도 가질 수 없는 비범한 예지와 과학적 통찰력을 지니고 사상이론활동과 실천활동을 벌인다는 것이다. 이같은 내용들을 문서로 만들어 전파하고 주지시켰다. 그리하여 북한에서 김일성은 오병이어 등의 이적과 표적을 행한 기독교의 예수와 같은 존재로 만들어진 것이다.
예수와 같은 신적인 존재로서의 김일성의 위상을 공고화하기 위해 북한이 내세운 또 하나의 주장은 김일성의 무오설(無誤說)이다. 김일성의 생각은 언제나 옳고 오류가 없다는 것이다. 이를 증명하기 위해 잘못된 일에는 언제나 악역을 따로 두어 무오류성에 흠이 생기지 않도록 보호한다. 이렇게 수령의 결정에는 오류가 없으며 그 권위를 무조건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점에서 북한의 김일성은 기독교의 예수와 같은 존재이다.
기독교에서 예수는 참 하나님이면서 완전한 인간인 까닭에 인간으로 슬플때 눈물을 흘리고 고통 당할때 괴로워하는 신인 동시에 인성을 지니고 있는 존재로 설명된다. 마찬가지로 김일성도 신인 동시에 정이 넘치는 인간으로 묘사된다. ‘자애로운 지도자’, ‘인민을 위해 한 생을 바친 인자로운 수령님’ 등으로 백성이 고통 당할 때 같이 괴로워하고 슬플 때 함께 눈물을 흘리는 인간이며 또한 신성을 겸비하여 외경심을 불러일으키는 신적 존재이기도 하다. 주성과 창조성, 의식성을 가진 사회적 존재로 규정된다. 하지만 주체사상은 개체로서의 사람의 존재를 가정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한 인간이 개별적으로 절대자 하나님과 의미있는 관계를 형성한다는 기독교의 인간론과는 다르다 할 것이다. 그러나 주체사상이 개체로서의 사람의 존재를 가정하지는 않지만 나 아닌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인간존재의 본질을 파악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인간의 사고 작용을 단순히 뇌의 물질적 작용으로 간주하는 종전의 유물론과는 다르다고 할 수 있으며, 이러한 점에서 주체사상은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비교할 때 기독교와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겼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주체사상이 인간의 본질을 선과 악으로 구분하고 있지는 않지만 기본적으로 인간의 속성을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으로 규정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을 매우 긍정적이고 낙관적으로 이해하는 일종의 성선설을 가정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주체사상의 이러한 낙관론적 인간관은 기독교가 말하고 있는 에덴동산에 살던 죄를 짓기 전의 인간과 유사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주체사상에서 사람은 가장 귀중한 존재로서 만물은 인간을 위해 존재하며 인간은 다른 것의 수단으로 되지 않는 유일한 존재라 한다. 한편 기독교에서는 신이 전지전능한 존재로서 높이 평가되며 인간은 무력한 존재로 되어 있다. 따라서 북한은 기독교의 인간론에 대하여 비판을 서슴치 않는다. 즉 인간이 신에 의해 지배당하는 존재들 가운데서 제일 높은 자리를 차지한다고는 하지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볼 때 하찮은 노예나 하인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하지만 북한이 기독교를 잘못 이해했을 뿐 인간 존중이라는 점에서 기독교와 주체사상의 인간관은 매우 유사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주체사상에 의하면 사람이 만든 사회관계나 사회제도 또한 사람을 위해 존재한다. 사람이 사회제도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제도가 사람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는 예수가 안식일 논쟁에서 안식일의 제도가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인간이 제도를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인간의 귀중함을 설파한 대목(마가:2-27)과 맥을 같이한다.
나. 기독론
기독교의 예수:북한의 김일성
기독교의 하나님은 영적인 존재로 예수 이외에는 누구도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연결시킬 수 없다. 따라서 예수를 통해서만 인간은 구원을 받고 영생을 얻을 수 있다(요한:14-6, 사도행전:4-12). 즉 예수는 하나님과 인간의 중보자로서의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북한의 철학사전은 수령을 “혁명과 건설에서 절대적 지위를 차지하고 결정적 역할을 수행하는 당과 혁명의 탁월한 지도자”라고 정의한다. 이렇듯 주체사상의 교리에서도 사회주의 혁명과 건설의 성취, 즉 공산주의의 이상향인 공산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인민의 역량을 통일적으로 지도할 중보자 격인 수령의 존재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김일성은 조선의 공산주의 혁명을 승리로 이끌어 주는 절대적인 중보자로서 기독교의 예수와 같은 존재이다.
기독론의 견지에서 예수의 부활은 매우 중요하고 핵심적인 내용이다. 예수의 부활은 예수가 지상에서 행한 모든 사역에 대한 하나님의 확증이기 때문이다. 북한에서 예수에 해당하는 김일성이 살아있을 때에 부활의 문제는 논외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매우 주목되는 명제일 수 밖에 없었던 것은 김일성이 죽은 후 부활의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에 따라 북한이라는 체제 자체의 운명이 절대적으로 좌우되기 때문이다. 많은 북한 전문가들은 김일성이 사망하자 북한은 불과 수개월 후 혹은 최대한 3년 후면 붕괴할 것이라고 예단했었다. 그런데 북한 사회는 좀처럼 동요를 모른채 집단주의적 성향이 더욱 공고화되어 가고 있다. 북한 통치체제의 종교적 특성을 통찰하지 못한 전문가들은 모두 오판의 우를 범했던 것이다. 한편 북한 통치체제의 기독교적 종교양식화 실태를 통찰해온 전문가들은 신적 존재인 김일성이 죽으면 부활이라는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가 큰 관심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북한은 김일성 사망 후 김일성과 부활이라는 문제를 기묘하고도 매우 현명(?)하게 처리해 가고 있어 기독교인으로서는 여간 흥미로운 것이 아니다.
예수의 부활은 곧 하나님은 살아 계시고 그의 피조물과 세상만사에 대해서 신실한 분이라는 증거가 된다. 그리고 부활한 예수는 기독교인들에게 절대적인 권위를 지닌다. 이같은 부활의 원리에 따라 북한은, 김일성이 일단 사망한 후에는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부활한 예수와 같은 존재로 만들어 가고 있다. 이에 관하여 좀더 상세히 검토해 보기로 한다.
먼저 거대한 자금을 들여 사망한 지배자의 시신을 보존하기 위한 기념시설을 마련하고 참배하게 하는 것은 흔한 상징조작사업의 하나이며 북한도 예외 없이 그 같은 투자를 했다. 이 사실은 세상에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북한이 취한 조치는 보다 독특하고 예상을 뛰어넘는 것이다. 일차적으로 선보인 상징조작은 소위 “유훈통치”라는 기상천외한 통치방식이다. 다른말로 죽은 자가 계속 통치를 한다는 것이다. 정치이론상 한 국가에서 최고 권력자의 공백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인데 북한은 국가원수인 “주석” 직위를 공백으로 놔둔 채 3년상을 치렀다. 그러면서 모든 명령은 김정일이 유훈이라는 명분하에서 행하였기 때문에 형식적으로는 죽은 김일성 주석이 계속 통치를 하는 것과 같다. 특히 1997.8.4. 김정일은 소위 “8.4 로작”을 발표했는데, 김일성 주석이 생전에 제시한 '조국통일 3대원칙, '전민족대단결 10대강령,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립방안' 등 세 가지를 하나로 묶어 '조국통일 3대헌장'으로 규정하고 이를 주석의 “통일유훈”이라하여 반드시 실현할 것임을 천명하는 내용이었다. 따라서 앞으로 김정일의 통치는 이를 근거로 하게 되며 그 결과 김일성은 주석으로서 죽은 후에도 계속 통치를 하게 되는 것과 같다. 이는 죽은 주석의 위상을 부활한 예수와 같이 영속화하기 위한 일련의 조치라 할 것이며, 마태복음 마지막 장절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를 연상하게 하는 조치라 할 것이다.
긴급한 현안을 처리하는데 성공한 북한은 다음 단계로 김일성 사망 후 4년이 지난 1998.9.5. 헌법을 개정하였다. 그런데 이 개정헌법에서 “주석”직위에 관한 일체의 내용을 아예 삭제해 버리고 법 이론이나 상식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이상 야릇한 권력구조를 만들었다. 이전 헌법 주석직위를 설명하는 조항에 “...주석은 국가의 수반이며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대표한다.”라고 임무와 권한이 기술되어 있었다. 이 주석에 관한 조항을 모두 제거해 버린 것이다. 그리고 국가기구를 입법, 행정 및 군사 등 3분야로 나누어 입법 담당이 대외적으로 국가를 대표하나 권력은 국방위원장이 행사하도록 했다. 이같은 개헌조치는 김일성이 살아생전 지녔던 “주석” 직위를 다른 사람이 승계하지 않음으로써 주석은 오직 김일성 한 사람뿐임을 확인한 것이며, 그 결과 법 이론상으로는 국가원수가 없는 것이라 할 수 있으나, 실제적으로는 사망한 김일성이 주석으로서 계속 국가원수의 직위에 군림해 있는 것과 같다. 그렇게 함으로써 지상에서 주석으로서의 위상을 훼손치 않고 영속시킴과 동시에, 나아가 김일성을 부활하여 하늘에 있는 신적 존재로 정립한 것이다.
개정된 헌법을 “김일성 헌법”이라고 명명한 것도 죽은 김일성의 위상을 영속화하기 위한 조치의 하나이다. 또한 이 개정된 헌법에는 이전의 헌법에는 없었던 서문이 첨가되어 있는데 이 서문에 사망한 “김일성”의 명칭이 모두 17번 나온다는 사실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내용들과 더불어 김일성의 존재를 영속화하려는 의도를 가장 명확하게 나타낸 것은 헌법서문의 다음과 같은 구절이다. “...조선인민은 조선로동당의 령도 밑에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를 공화국의 영원한 주석으로 높이 모시며 김일성동지의 사상과 업적을 옹호 고수하고 계승발전시켜 주체혁명위업을 끝까지 완성하여 나갈 것이다...”
이어서 북한은 금년 사망한 김일성의 생일(生日)에 출생기념행사를 대대적으로 거행한 바 있다. 죽은 자와 관계된 행사는 기일에 추모행사를 갖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북한이 죽은 자의 기일이 아닌 생일에 대대적인 기념행사를 개최한 것은 기독교에서 예수의 탄생을 기념하는 것과 같은 의도인 것이며, 생존시의 이미지를 영속화하려는 조치이다. 즉 북한은 2002.4.15. 김일성 90회 생일을 기념하기 위한 행사를 대대적으로 치렀는데 이 행사들 중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것은 대형 야외종합공연물인 "아리랑"이었다. 이 "아리랑"은 인민배우를 비롯해 인민예술가, 공훈배우와 공훈예술가, 체육선수들과 청소년 학생 등 그 출연자가 10여 만 명이었으며 종전에 볼 수 없었던 새로운 공연장르로서 집단체조와 예술공연을 혼합한 초대형 작품이었다. 이 아리랑은 최초 “위대한 태양”이라는 이름으로 김일성의 이미지 영속화를 위해 기획되었는데 대외적인 홍보효과를 고려해 명칭만 변경한 것이라 한다.
그리고 금년 7월 김일성 사망 8주년을 맞아 평양과 지방의 영화관에서는 추모행사의 일환으로 수령의 혁명생애를 형상화한‘조선의 별’,‘화성의 숙에서의 한 해 여름’,‘밀림이 설레인다’등의 영화를 일제히 상영한 바 있고, 전국의 문화회관에서는‘위대한 생애 1994’,‘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는 영생불멸 할 것이다’ 등 기록영화를 대대적으로 상영했다.
이 외에도 북한은 죽은 김일성을 지상의 예수에서 하늘에 오른 신과 같은 존재로 자리매김 하기 위한 작업을 조직적이고 철저하게 계속 진행시켜 갈 것이 확실하며, 어느 순간 보존하고 있는 시신을 적절히 처리하고 예수와 같이 승천을 사실화하는 연극을 연출할 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이론적 측면에서도 주체사상 속에 기독교의 신론과 같은 신학적 이론을 발전시킬 가능성이 매우 높은 것으로 전문가들은 전망한다.
다. 인간론-기독교의 인간론 : 주체사상의 인간본질
기독교의 인간론이 지닌 핵심적인 내용은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아 하나님을 닮은 인격체라고 하는 점이다(창세기 1:26). 그래서 지니게된 사랑의 심성, 창조적 능력, 질서와 도덕의식은 하나님이 지닌 속성의 일부이다. 따라서 인간이 그 자신의 본성과 일치하는 행동을 하려면 결국 하나님의 법을 순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과의 독특한 교제(交際)에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이 수반되어야 한다.
북한의 주체사상과 주체철학은 1980년 이전까지는 변증법적 유물론에 기초를 두고 있었다. 그러나 인간의 본질 규명을 둘러싸고 북한 내부 지식인 사이에 갈등이 있었고 김정일은 1990.10.25. 담화에서 주체철학과 유물론과의 차별성을 상세히 설명했다. 즉 주체사상의 세계관이 변증법적 유물론을 따르고 있기는 하지만 인간만은 유물론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고 탈유물론적 주석(註釋)을 첨부해서 과거의 경직된 유물론적 인간개념을 근본적으로 수정했다. 주체철학에 대한 이같은 논쟁과정을 상술하는 것은 이 글의 목적이 아니므로 생략하기로 한다. 다만 오늘날 북한이 주장하는 인간개념을 기준으로 하여 기독교의 그것과 비교 ·고찰하고자 한다.
주체사상은 인간을 자연과 사회의 주인이며 모든 것을 결정하는 주체로 인식하는 인간중심의 철학원리에 기초하고 있다. 인간을 모든 사고의 중심에 놓고 인간과 세계의 상호관계를 밝히는 철학이며, 세계의 개조자인 인간의 실천적 역할을 강조함으로써 인간을 위해 기여하는 철학이라고 설명한다. 여기에서 인간은 자주성과 창조성, 의식성을 가진 사회적 존재로 규정된다. 하지만 주체사상은 개체로서의 사람의 존재를 가정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한 인간이 개별적으로 절대자 하나님과 의미 있는 관계를 형성한다는 기독교의 인간론과는 다르다 할 것이다. 그러나 주체사상이 개체로서의 사람의 존재를 가정하지는 않지만 나 아닌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인간존재의 본질을 파악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인간의 사고 작용을 단순히 뇌의 물질적 작용으로 간주하는 종전의 유물론과는 다르다고 할 수 있으며, 이러한 점에서 주체사상은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비교할 때 기독교와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겼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주체사상이 인간의 본질을 선과 악으로 구분하고 있지는 않지만 기본적으로 인간의 속성을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으로 규정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을 매우 긍정적이고 낙관적으로 이해하는 일종의 성선설을 가정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주체사상의 이러한 낙관론적 인간관은 기독교가 말하고 있는 에덴동산에 살던 죄를 짓기 전의 인간과 유사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주체사상에서 사람은 가장 귀중한 존재로서 만물은 인간을 위해 존재하며 인간은 다른 것의 수단으로 되지 않는 유일한 존재라 한다. 한편 기독교에서는 신이 전지전능한 존재로서 높이 평가되며 인간은 무력한 존재로 되어 있다. 따라서 북한은 기독교의 인간론에 대하여 비판을 서슴치 않는다. 즉 인간이 신에 의해 지배당하는 존재들 가운데서 제일 높은 자리를 차지한다고는 하지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볼 때 하찮은 노예나 하인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하지만 북한이 기독교를 잘못 이해했을 뿐 인간 존중이라는 점에서 기독교와 주체사상의 인간관은 매우 유사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주체사상에 의하면 사람이 만든 사회관계나 사회제도 또한 사람을 위해 존재한다. 사람이 사회제도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제도가 사람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는 예수가 안식일 논쟁에서 안식일의 제도가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인간이 제도를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인간의 귀중함을 설파한 대목(마가:2-27)과 맥을 같이한다.
라. 구원론 - 기독교의 개인구원 : 북한의 사회구원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죄로부터 구원을 받는다는 구원사상은 기독교를 특징짓는 중요한 교리다. 인간들은 전적인 타락과 부패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죄인이 되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리스도라는 죄 없고 온전한 형상으로 세상에 오시어 인간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 죽음으로 대가를 치렀다. 그래서 인간이 죄로부터 벗어나 영생을 얻는 것은 인간적인 수양이나 교육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북한은 수령인 김일성이 일제의 압제로부터 인민을 해방시키고 구원했다는 일종의 구원신화를 갖고 있다. 우리 민족이 일제 식민통치에 신음하고 있던 상태에서 항일 무장투쟁을 통해 조선인민을 구원했다는 것이며 이 같은 내용을 과장하여 주민에 대한 교양학습을 대대적으로 실시했다. 그 결과 북한 주민들은 ‘조선사람들의 구세주, 탁월한 수령, 민족의 태양, 백전불굴의 강철령장, 전 세계 피압박 민족과 인민의 붉은 태양’ 등으로 김일성을 추앙하면서 구원에 관한 믿음을 갖고 있다.
주체사상은 구원의 초점을 개인영혼에 두지 않고 사회전체의 구원에 둔다는 점에서 전통적인 기독교 교리보다는 현대 기독교신학의 주장과 유사성을 갖는다. 해방신학은 짓밟힌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하며 가난하고 억눌린 자들을 해방하기 위하여 투쟁하는 것이 기독교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이 지상에 공의롭고 우애가 넘치는 사회, 곧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북한은 김일성이 일제식민통치의 억압으로부터 민족을 해방시켰고 미제의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구원했다면서 사회전체의 구원을 주장하며 강조한다.
주체사상은 이러한 과거의 주장과 더불어 미래에 대한 구원도 언급한다. 인간에게는 두 가지 생명이 있는데, 개인의 육체적 생명과 구별되는 사회정치적 생명이 있다는 것이다. 이 사회정치적 생명은 수령, 당 및 대중의 통일체인 사회정치적집단 내에서만 영원하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육체적 생명은 부모가 주지만 사회정치적 생명은 수령이 준다고 한다. 개인은 오직 이러한 사회정치적 집단의 한 구성원이 됨으로써만이 영생하는 사회정치적인 생명을 소유할 수 있다. 그리고 육체적인 생명은 죽음으로써 끝나지만 사회정치적 생명은 다른 사람들의 머리 속에 영원히 남는 까닭에 육체적 생명보다는 훨씬 소중하다고 가르친다.
주체사상은 또한 자본주의를 버리고 사회주의 체제에 들어오면 영생을 얻는다고 선전하는데 이는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영생을 얻는다는 기독교 교리와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남한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행했던 잘못을 회개하고 뉘우치면 용서를 받을 수 있을 뿐 아니라 누구든지 북한의 사회주의 집단에 소속되어 수령에 대한 믿음을 가지면 사회정치적 생명이 부여되고 영생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가르친다.
마. 교회론
-기독교의 몸된 교회 : 북한의 사회
정치적 생명체
기독교의 교회는 예수가 베드로에게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태:16-18)라고 하신 말씀에 따라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형성한 공동체인 것이다. 기독교는 이 공동체를 교회라고 부르며 교회는 곧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공동체 내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유기적으로 연결 혹은 연합된다고 확신한다.
북한에서는 “하나는 전체를 위하여, 전체는 하나를 위하여“라는 집단주의 구호를 통해 사회전체가 하나의 공동체로 이루어져 있음을 강조한다. 이 공동체에 관한 주체사상의 이론은 수령.당.대중이 하나가 되어 통일체를 구성한다는 사회정치적 생명체론에서 절정에 이르는데, 김일성은 수령으로서 신체의 뇌수이며, 당은 혈관이고 인민은 신체의 각 부분이라고 설명한다. 이 사회정치적 생명체론은 사도 바울의 지체론이나 요한복음(15장)에 나타나 있는 예수의 포도나무 비유와 동일하다. 이렇게 북한이 북한사회를 하나의 사회정치적 생명체로 표현하는 것은 기독교의 교회론과 일치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수령.당.대중이 하나가 된다는 사회정치적 생명체론은 예수님이 머리가 되고 신자는 각 지체가 된다는 기독교의 유기체적 설명임과 동시에 성부.성자.성령 삼위일체의 개념이 혼합을 이룬 이론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기독교의 삼위일체론은 하나님의 속성을 설명하는 교리이며 교회공동체에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북한에서 수령.당.대중은 분리시키거나 대치시킬 수 없는 단일한 생명체라고 말하며 삼위일체의 개념도 원용하고 있다.
바. 종말론
-기독교의 새 하늘, 새 땅 : 사회주의 지상낙원
기독교는 종말론에서 세상과 인류의 역사는 불명확하고 끝이 없는 과정이 아닌 하나님이 정해 놓은 종말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실제의 역사라고 한다. 역사의 끝에는 새 하늘과 새 땅이 창조되는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는 것이다. 이러한 종말은 거대한 위기로 임하게 되는데 예수의 재림이 이러한 위기를 종식시키는 역사적 계기가 되며 예수의 재림과 함께 전체적 부활이 진행되고 최후의 심판과 더불어 하나님 나라가 완성된다고 한다.
주체사상은 사회주의의 종국적 승리를 믿고 있으며 동시에 이 땅에서 사회주의의 지상낙원이 도래할 것을 믿는다. 북한이 도래를 믿고 있는 “공산사회”는 일종의 종교적 성격을 갖는 내세이자 천국이며 곧 기독교의 새 하늘과 새 땅인 것이다.
종말론적 사상은 예수의 재림이 실현되기 이전에 극심한 갈등과 고통이 따를 것을 예고하면서 언젠가 도래할 낙원을 기대하며 종국적 승리를 내다보고 현재의 고난을 인내로서 극복할 것을 강조한다. 즉 마태복음 24장 1절~12절에서 예수의 재림이 실현되기 이전에 극심한 갈등과 고통이 따를 것이며 그 때에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12절).”라고 사랑이 없는 비참한 세상을 예고한다. 그리고 13절에서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라고 환난을 참고 견디면 구원을 얻는다고 말한다.
북한은 이상향인 공산주의 사회의 도래를 기대하며 현재의 경제, 사회적 어려움을 참고 견디도록 가르친다. 이 같은 지상낙원의 제시와 인내의 요구는 6.25전쟁이후 재건과정에서 반복적으로 강조돼 온 바 있지만 특히 김일성이 죽은 후 1995년 대홍수 때부터 1997년까지 “고난의 행군” 캠페인을 대대적으로 전개할 때에 절정에 달했었다. 이때 수백만 명이 기아와 질병으로 사망했고 그 보다 훨씬 더 많은 주민들이 생지옥과 같은 삶 속에서 고통에 시달렸다. 그런데 1998년부터는 소위 “강성대국”이라는 공산사회의 낙원을 상정하고 이것이 도래할 것을 믿고 현재의 고난을 견디어 내야 한다고 역설한다. 이렇게 북한이 개혁?개방을 거부하는 가운데 “가는 길 험난해도 웃으며 가자”라는 구호를 내걸고 강성대국이라는 미래의 낙원을 믿어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은, 기독교의 종말론적 사상을 주체사상의 이름으로 원용하는 정치적 방편임을 알 수 있다.
기독교의 종말론은 죄와 사탄의 세력과의 싸움에서 그리스도가 승리한다는 것이다.
사탄은 끊임없이 인간을 타락의 길로 유혹하지만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사탄을 물리치고 하나님의 왕국을 건설한다. 이 사탄은 인간을 끊임없이 하나님으로부터 떠나도록 유혹하는 악의 근원이다. 사탄은 사람들을 집어삼키려고 공격하고 있기 때문에 사탄의 공격을 막아내기 위해 인간은 강력한 전투태세를 갖추고 단호한 자세로 투쟁할 것을 권유하고 있다.
이와 같은 사탄과의 싸움에서 승리함으로써 하나님의 왕국을 건설한다는 종말론적 구도는 북한의 통치행위에서도 여실히 엿보인다. 북한이 상정하고 있는 죄와 사탄은 다름 아닌 “제국주의”이다. 선과 악, 절대자와 사탄의 대결 구도를 가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체사상은 기독교의 교리와 일맥상통한다. 김일성저작집 도처에 기술된 제국주의를 사탄으로 매도한 내용의 한 예를 들어 본다.
“제국주의는 오늘날 와서 국가독점 자본주의에 기초한 현대제국주의로 변모되어 그 침략적 본성과 야수성이 전례 없이 강화되었으며 피압박 인민대중의 민족적 해방과 독립, 사회주의 위업에 악랄하게 도전해 나서고 있다. 제국주의자들은 신식민주의에 매여달리면서 보다 은폐되고 교활한 수법으로 다른 나라 인민들을 략탈하고 예속시키기 위한 정책을 집요하게 추구하고 있다. 미제국주의자들은 특히 조선에서 새 전쟁을 일으키기 위한 책동을 더욱 로골적으로 감행하고 있다.”
이렇게 기독교에서 사탄이 모든 악의 근원으로 간주되듯이 북한에서 보는 모든 악의 원천은 미 제국주의이다. 그리고 기독교와 마찬가지로 북한은 제국주의에 대해 전투적인 태도로 임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미국을 악의 본질로 규정하고 투쟁적 태도를 가지도록 하는 선전선동은 특히 아동교육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어린이 교육의 중요성은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것이기도 하려니와 성경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소결론
이상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주체사상을 근간으로 하는 북한의 통치체제는 「교리 및 신념체계」의 형식에 있어 기독교의 그것과 일치한다. 중보자 예수를 모형으로 하여 김일성의 위상을 신격화하는 과정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며, 근간에는 사망한 수령의 이미지를 영속화하기 위해 그 위상을 부활한 예수에 버금가는 형태로 계속 구성해 가고 있다. 인간의 의식활동과 관련하여 주체사상이 마르크스의 유물론적 사상에서는 수용할 수 없는 내용들을 과감하게 도입하여 재구성한 것도 기독교적 인간상을 의식한 획기적인 조치다. 과장된 구원신화를 간직한 수령이 당과 인민과 더불어 사회정치적 생명체를 이룬다는 이론은 예수님이 머리가 되고 신자는 각 지체가 된다는 교회론의 유기체적 설명임과 동시에 삼위일체 개념도 원용한 이론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개혁?개방을 거부하는 가운데 아무리 어렵고 힘들더라도 강성대국이라는 미래의 낙원을 믿어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은, 기독교의 종말론적 사상을 주체사상의 이름으로 활용하려는 정치적 방편임을 알 수 있다. 이렇게 「교리 및 신념체계」의 형식면에서 북한 통치체제와 기독교는 완전히 일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 의식(儀式)과 행위규범
가. 교회당 : 김일성혁명사상연구실
북한의 통치체제가 종교와 같은 차원에서 그 기능을 발휘하고 있다는 사실의 객관적이고 외형적인 증거는, 기독교의 교회당 혹은 예배당과 같이 북한 사회 내에는 김일성혁명사상연구실이라는 시설이 도처에 마련되어 있고 그 안에서 예배에 준하는 의식을 행한다는 사실이다.
기독교에서 예배당은 종교적 회합이나 공식 예배를 드리기 위한 장소 및 건물을 지칭한다. 그리고 이 예배당은 구약시대의 성막이나 '시나고게'(회당)와 같이 속된 세상과 분리된 성스러운 장소로 인식되고 있다. 이 예배당은 공동체 구성원이 예배를 드리는 거룩한 장소이며 신앙의 정체성을 유지시키는 매우 중요한 기능을 수행한다.
북한에서는 김일성혁명사상연구실이 그 같은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북한의 정치사전은 김일성혁명사상연구실에 대해 "김일성 동지의 불멸의 혁명사상, 주체사상과 영광찬란한 혁명력사로 당원들과 근로자들을 무장시키는 당 사상교양사업의 거점이다." 라고 설명한다. 다시 말해서 주민들을 김일성의 혁명사상과 주체사상으로 무장시키기 위한 회당으로서의 기능을 발휘하고 있으며, 여러 가지 면에서 기독교의 교회당 혹은 예배당보다 더 훌륭한 장소로 되어 있다.
이어 사전은 "이 연구실은 전 지역의 당 및 국가기관, 공장, 기업소, 협동농장들과 교육문화·과학기관, 인민군부대 및 경비대 등 인민생활의 모든 부문에 갖추어져 있다." 라고 기술하고 있다. 이에 근거해 보면 이 연구실은 전국적으로 약 45만여 곳에 이를 것으로 판단된다. 북한의 군(郡)단위 지방에서 김일성혁명사상연구실은 그 지역의 가장 좋은 건물이며 이 건물은 당에서 규격화한 표준설계에 맞추어 건축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건물이 비슷한 형태를 띤다. 리(里)단위에는 단층, 군소재지인 읍에는 2~3층, 도단위에는 3~4층 건물로 되어 있다.
내부에는 각종 모임과 집회를 개최할 수 있는 여러 방들이 있다. 기관과 직장내 구성원들이 모두 모일 수 있는 대형 교양실과 소그룹으로 모일 수 있는 작은 방들도 갖추어져 있고 학습을 할 수 있는 책상과 의자를 비치하여 모든 사람들이 편히 학습할 수 있다. 가장 주된 방에 김일성·김정일 초상화가 걸려있고 측면에는 혁명역사에 관한 사진을 수록한 도록이 전시되어 있으며 도서를 진열하는 서가가 있다. 서적들이란 김일성의 교시집과 로작, 혁명전통연구자료 등 김일성 혁명역사 연구에 필요한 자료들이다. 도록은 1미터의 넓이로 되어 있고 1판에 약 30개의 그림이 수록되어 있는데 김일성 도록은 약 70판, 김정일 도록은 약 30~40판 전시되어 있다.
연구실에서 실시하는 사업은, 김일성동지혁명사상의 학습, 수령님의 로작과 교시 연구토론회, 위대한 수령님의 교시주년모임, 혁명전통연구발표모임, 정치학습, 학습강사들의 연구수업, 수령님의 교시 관철을 위한 당조직들과 근로단체들의 회의 등이 조직적으로 진행된다. 학습활동 이외에 각종 선서모임과 충성의 편지전달모임, 축전전달모임 등 여러 행사를 진행한다.
이 연구실은 신성시되는 곳이므로항상 깨끗이 청소하고 곱게 치장하여야 하며 이 곳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항상 복장을 단정히 하고 김일성·김정일 초상휘장을 달아야 한다. 이 곳에서는 담배를 피울 수 없을 뿐 아니라 가래침을 뱉거나 어떠한 다툼도 벌일 수 없고 상스러운 말을 해서도 안 되고 물론 소란스럽게 해서도 안 된다. 일반 주민들은 여가시간을 이용하여 자발적이라는 명분으로 이곳을 청소하도록 권고 받는다.
이 연구실은 각급 사회조직의 특성에 따라 다음과 같이 운영된다.
◇ 모든 중앙급 기관의 직장 및 공장, 3급 기업소와 공장 이상에서는 자체적으로 갖추어 놓고 있다. 초급 당 조직이 결성되어 있는 기관이나 단체는 독립된 연구실을 갖추고 있다. 당원이 30명을 넘는 경우에 초급 당을 조직할 수 있도록 되어 있으므로 도시에서는 대략 100여 명 이상 되는 기업소는 독립된 연구실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
◇ 농촌의 경우에는 농민들 가운데 당원이 적은 대신 넓은 지역을 포괄하고 있기 때문에 1~2개 혹은 3개 리가 협동농장 단위로 초급 당 조직을 구성하고 부락 당을 만들어 각 지역별로 자체적인 연구실을 운영한다.
◇ 각급 인민학교와 고등중학교, 혁명학원과 학생소년궁전, 소년당야영소 등에는 김일성원수님혁명활동연구실이 조성되어 있다. 연구실에는 김일성의 석고상 또는 초상화가 있으며, '위대한 수령 김일성원수님을 따라 배우는 학습회', '김일성원수님혁명사상해설모임', '회상기연구발표모임' 등이 조직되어 있다. 또 연구실을 직접관리하기 위한 소조가 학교별로 10명 정도의 인원으로 조직되어 있는데 이 소조는 학업성적이 우수하고 몸가짐이 단정하며 학교생활에 성실한 학생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 소조 요원은 일단 선발되면 모내기, 추수 등 모든 작업동원에서 제외되는 특권을 누린다. 오로지 연구실을 가꾸는 일에만 전념하라는 뜻에서 그렇게 하고 있다.
◇ 대학에 건립되어 있는 김일성혁명사상연구실은 규모도 크고 연구실을 관리하는 소조활동도 철저하다. 평양외국어대학의 경우, 연구실은 김일성관이 5개, 김정일관, 김정숙관이 각각 1개로 모두 7개의 관으로 되어있는데 방 하나에 소조원 한 사람씩 배정된다. 소조원들은 다른 학생들보다 1시간 일찍 등교하여 연구실을 청소하고 창문을 모두 열어 환기시킨 다음 비품과 전시물을 정리한다. 그리고 약 15분간 아침 독보를 하는데 주로 노동신문 사설을 읽는다. 학교수업이 끝나면 다시 연구실로 돌아와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위생검열에 대비하여 낮 동안 사용한 방을 대청소한다. 청소가 끝나면 자물쇠로 잠그고 도장 찍은 종이로 봉한다. 방학 때가 되어도 소조원은 연구실을 관리하기 위하여 등교한다.
◇ 일반사회에서는 기업소 단위별로 김일성혁명사상연구실을 갖추고 있다. 평안북도 영변군 한 연합기업소의 경우 4층으로 지어져 있다. 독립건물로 갖추어 있지 않은 기업소의 경우는 건물 한 칸을 사용하는데 독립건물에 버금갈 만큼 매우 방대한 규모로 조성한다.
◇ 군대의 경우, 중대와 대대에는 교양실과 혁명사상연구실을 겸하여 사용한다. 연대 이상 단위에는 혁명사상연구실이 독립적으로 갖추어져 있다. 연구실 관리자들은 인물과 체격도 좋고 특히 성분이 좋은 병사들 중에서 선발하여 임무를 맡긴다. 어떤 부대에서는 유사시 도록과 김 부자 초상화가 파괴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지하땅굴을 파 놓고 대비한다. 그리고 밤에는 특히 경계를 강화한다.
결론적으로 김일성혁명사상연구실은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에게 예배를 드리는 것과 같이 북한 주민들이 김일성과 김정일을 예배하는 장소이며 기독교의 예배당보다도 그 양과 질의 면에서 더욱 체계적이고 조직적이며 그리고 거국적으로 구축되어 있다.
나. 주일예배와 각종 모임 : 주간총화와 각종 집회
기독교에서 실시하는 각종 모임과 같이 북한에서도 일정한 기간과 조직 단위로 △주간총화 △수요강연회 △인민반회의△독보회△철야작업 △새벽참배 등 여러 종류의 회의와 집회를 갖는다. 각종 집회와 모임을 항목에 따라 자세히 검토해 보기로 한다.
주간총화
‘총화’란 사업이나 생활의 진행과 그 결과를 분석하고 결속지으며 앞으로 사업과 생활에 도움이 될 경험과 교훈을 찾는 것이다. 총화 중에서 주간생활총화는 모든 총화의 기본이 되며 기독교의 주일예배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북한에서 매우 중요하게 취급한다. 이 주간총화는 비교적 소규모 단위로 실시되는데 전 동맹원이 평등한 자격으로 참가하기 때문에 직책을 부르지 않고 ‘동무’라는 호칭을 사용한다. 따라서 총화가 각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은 절대적이고 심대한 것이다.
주간총화 때 교시와 말씀을 먼저 인용하고 나서 자신의 생활을 비판한다. 자아비판은 기독교의 예배에서 먼저 하나님께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고 새롭게 출발할 것을 다짐하는 기도의 형식과 매우 흡사하다. 그러나 자아비판은 공개적이고 강제적이라는 점에서 기독교의 회개와는 큰 차이가 있다. 생활총화 시에 자신의 잘못 뿐만 아니라 주변 동료의 결함을 비판해야 한다. 대개 1~2명을 대상으로 선정하여 동료의 행동을 구체적으로 비판하는데 이러한 상호비판은 기독교의 예배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것이다.
생활총화에서 지적된 결함은 그 경중에 따라 벌이 내려진다. 벌은 당에서 내린다. 벌을 받으면 소정 기간 내에 원인을 시정해야 하며 철직이나 출당은 자녀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친다. 월생활총화 때에 월급의 1~3%를 “맹비”라는 명목으로 당에 바치는데 이는 기독교의 십일조와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인민반회’는 직장이나 학교 등 조직에 포함되어 있지 않은 인민들이 참여해야 하는 생활총화에 해당된다.
‘수요강연회’는 시사적인 문제에 대한 해설이 주가 되며 기독교의 삼일예배에 해당하는 것이다.
‘독보회’는 기독교의 QT에 해당하는 모임이라 할 수 있다. 독보회는 가족단위와 직장단위로 실시되는데 특히 직장독보회는 출근하여 7시30분부터 30분간 실시하며, 매일의 작업현장에서 교시와 말씀을 실천하기 위한 다짐과 하루 실천계획을 세우기 위한 모임이다. 이를 주관하는 선동원이 작업반마다 파견되어 실시함으로 가족 독보회와는 달리 철저하게 진행되고 있다. 이외에‘철야작업’, ‘새벽참배’등도 기독교에서 실시하는 요령으로 시행한다.
다. 성경과 찬송가 :
교시와 찬양가(혹은 칭송가)
기독교가 성경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는 것처럼 북한사회도 기독교의 성경과 같은 주체사상의 경전 즉, 김일성 교시를 갖고 있으며 이것이 없이는 북한사회도 존재할 수 없다. 현재 사용하고 있는 김일성 교시와 문헌은 로작으로 분류되어 해방 후 지금까지 수 차례에 걸쳐 수정.보완하여 편집되었다.
북한에서도 김일성에 대한 찬양을 노래로 부르며 이를 “김일성찬양가” 혹은 “칭송가”라고 부른다. 공식행에서도 국가(國歌)보다 이 찬양가와 칭송가를 더 자주 부르고 국기보다는 김일성초상화에 더욱 지극한 경의를 표한다.
라. 성경 공부 :
주체사상 학습
학습은 주로 김일성혁명사상연구실에서 실시하며 학습내용은 혁명역사, 혁명사상, 교시, 말씀, 로작 등이며 기독교의 성경 교육방식과 유사하다. 일반주민들은 교시노트, 말씀노트, 혁명역사노트, 혁명사상노트를 비롯하여 최소한 8개의 학습노트를 가지고 있다.
마. 기타 몇 가지 점에서 -
기독교 : 북한
언어와 행동 면에서도 많은 유사점을 발견하게 된다. 성경구절을 인용하여 설교, 간증, 글쓰기를 하는 것은 기독교인들의 일상적인 태도이다. 북한사람들도 글의 중간 중간에 김일성.김정일 어록을 인용함으로써 어록에 대한 해박성을 과시하고 자랑한다. 김일성에 대해서는 “교시하시었다”라는 표현을, 김정일에 대해서는 “지적하시었다”라고 해야 한다는 등.
언어에 있어서 북한사람들은 은혜, 사랑, 믿음, 구속, 구원, 영생 등 기독교적 용어를 빈번하게 사용한다. 물론 그 개념은 기독교의 것과는 다르다. 예를 들자면 북한에서 사용되는 “사랑”이라는 말은 개인적 감정으로서의 사랑이나 남녀간의 애정과는 다른 수령과 조국 그리고 인민에 대한 충실성이란 뜻으로 사용한다. “수령을 사랑하고..”, “조국을 사랑하고..”, “인민을 사랑하고...”라고 가르치고 사용한다. 남녀간의 애정은 “좋아한다”, “생각한다”, “각별한 사이다”라는 식으로 표현한다. 기독교에서의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북한에서의 “김일성.김정일에 대한 믿음”은 동일한 것이다.
3. 공동체의 윤리와 도덕
종교는 하나의 집합체를 형성하여 이 집합체와 구성원들과의 관계를 규정하는 윤리와 도덕적인 행동규칙을 마련하고 이의 준행을 강조한다. 북한의 주체사상도 공동체 형성을 위한 이론을 제시함과 동시에 공동체 유지를 위한 윤리의 실천을 지극히 강조하고 있다. 그래서 종교적 윤리와 도덕으로 결속된 집합체라는 점에서 기독교 공동체와 북한사회는 공통성을 지닌다. 뿐만 아니라 북한사회라는 공동체는 기독교의 그 것보다 더욱 조직적이고 말할 필요 없이 전국적인 조직이다.
그러나 집합체를 구성하는 윤리와 도덕은 내용과 성격 면에서 각기 특색을 지니며 현저한 차이가 있는데, 주목해야 할 점은 자유의지에 대한 인식 여부에서 극단적인 대조를 보인다는 점이다.
기독교의 윤리는, 인간을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자녀로서 성경을 통해 주어진 생활원칙을 준수하며 예수를 닮아 가는 삶을 살도록 인도하는 내용으로 구성된다. 그리하여 형성된 공동체는 사랑을 근간으로 하는 자율적인 사회인 것이다.
주체사상의 윤리는 사람이 사회적 존재라는 명제로부터 출발한다. 사람은 단순히 생물학적 존재가 아니라 사회적 존재라는 것이다. 그래서 최초 사회의 한 성원에 불과한 이 생물학적 존재는 각기 그 육체에 사회적 속성을 지님으로써 비로소 완전한 사회인 즉 사회정치적 생명력을 지닌 인간이 된다고 한다. 자연히 그 같은 공동체는 인간의 개성을 등한히 하고 자유보다는 통제와 복종을 중요시함으로써 피동적인 사회가 될 수밖에 없다.
북한이 공동체 형성에 있어 인간의 개성보다는 집단성을 절대시하고 있음은, 헌법상에 집단주의 원리와 가치의 구현을 공민의 권리이자 의무로 규정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북한 사회주의헌법 제63조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공민의 권리와 의무는 「하나는 전체를 위하여, 전체는 하나를 위하여」라는 집단주의 원칙에 기초한다”라고 기술되어 있다. 또 제81조는 “공민은 조직과 집단을 귀중히 여기며 사회와 인민을 위하여 몸바쳐 일하는 기풍을 높이 발휘하여야 한다”라고 명시해 놓고 있다.
금욕주의적 정신은 기독교 윤리의 중요한 한 부분을 이룬다. 북한 사회에서도 이 점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물질에 욕심을 부려 자기 이익을 챙기는 행위를 “자본주의 한다”라고 하며 이런 행위는 혹독하게 비판받는다.
김일성은 모태 신앙인으로서 소년 시절에 교회를 다니며 신앙생활을 하였지만 독실한 믿음의 사람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김일성은 북한의 통치 체제를 수립하여 다져 가는 과정에서 기독교 교리를 십분 활용했다. 그리하여 오늘날의 북한통치체제는 「교리 및 신념 체계」, 「의식(儀式)과 행위 규범」 그리고 「공동체의 윤리와 도덕」이라는 종교의 보편적 구성 요소들을 모두 내포하고 있다. 기능주의적 관점에서 북한의 주체사상은 종교적 기능을 하고 있으며 특히 기독교적 유일신(有一神) 종교 이상으로 강렬한 숭배를 요구함으로써 배타성을 지닌 신앙 체계를 지니고 있다. 북한의 정치 체제를 ‘신정(神政)체제’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북한의 통치 체제란 비록 기독교의 양식을 모방하여 원용하고 있다 하지만, 기독교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공개적인 자아 비판과 상호 비판 그리고 비이성적이고 강제적인 제반 제도와 그로 인해 형성된 공동체의 성격을 보건대 인간의 자율성을 인정하고 인격을 존중하여 자아 실현의 길로 인도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직 수령이라는 절대 지배자의 전제적 통치를 위한 수단으로 주조된 것임이 확실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인위적으로 조성한 신적 존재의 한계성을 우리들은 잘 알고 있다. 아무리 과거를 미화한다 해도 하늘의 생명책에 기록된 죄과를 어쩔 것이며, 섭리를 거역할 수 없어 죽었고 예외 없이 한 움큼의 흙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인간의 숙명을 어쩔 것이랴. 그리고 인간의 부활, 그 또한 허구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은 분명 세습된 권력자의 작품에 불과한 것일 터이니 말이다. 그러하건만 북한 동포들은 오늘도 날조된 신성을 숭배하며 헐벗고 굶주림 속에 의미 없는 구호를 연호하면서 황당한 신앙적 삶을 살아가고 있다.
이러한 북한 동포의 신앙적 삶을 우리 기독교인들은 그저 바라보기만 하면 되는 것인가 자문해 보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해답은 명확하다. 복음을 전해야 하는 기독교인들의 사명은 절대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측은히 여김 받아야 할 무리들은 말할 나위 없으려니와 패역한 자와 불의한 자들까지도 무조건 안아들어 새 인간으로 거듭나게 하는 은혜의 법을 전파하는 일이다.
다만 복음 전파에 앞서 해야만 할 일이란, 우선 주체사상을 근간으로 주조되어 종교 교리화된 통치 체제에 대한 진지한 연구와 검토, 그러한 정치 체제 속에서 반세기를 살아온 사람들의 심성에 관한 분석적 탐구, 그리고 그들이 기독교의 복음을 어떻게 수용할 것인가에 대한 사례 연구를 충분히 해야 하며 이에 따라 효과적인 선교 방책을 수립하는 일련의 노력이다. 그때 비로소 북한에 대한 선교 활동의 기초가 마련되었다 할 것이다.
- 연재를 마치며 -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북한 지역은 본래 복음이 널리 전해져 있던 곳이다. 불행히도 지금은 불과 수백 명의 관제 기독교인들이 예배를 보고 있을 뿐..... 대부분의 북한 동포들은 정치 지도자의 날조된 신성을 믿으며 종교적 암흑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북한 동포들의 마음속 어느 한 곳에는 지난날의 신앙 생활에 대한 동경이 도사리고 있으리라 확신한다. 이러한 북한의 종교적 현실은 마치 천지가 창조될 때에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을 때에 하나님의 신이 수면에 운행하시는 현상과 너무나도 흡사하다 할 것이다. 언제인가 “빛이 있으라” 하실 날을 학수고대하면서...
그런데 이미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셨음이 확실하다. 다름이 아니라 그 주체사상-집권자들이 백성들을 지배하기 위해 만든 그 주체사상이 오히려 체제를 이탈하는 체제 저항 이론으로 작용하는 징후가 발생하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놀라운 역설의 섭리! 이 복음을 전하는 필자의 마음은 여간 설레는 것이 아니다.
주체사상은 대체로 다음과 같이 3단계의 변천과정을 거친다.
첫 단계로 스탈린 사망 후 공산 진영에서 일어난 개인 숭배와 독재를 배격하는 움직임과 국가의 주인은 인민이라는 민주적 사상의 물결이 북한에도 이르게 되자 위협을 느낀 김일성이 큰 나라가 하는 대로 따라하는 것은 사대주의라고 비판하면서 마르크스ㆍ레닌주의의 대안으로 내세운 사상이다. 따라서 이때 주체라는 개념의 핵심 내용은 “반 사대주의” 혹은 “자주 노선”이었다.
다음 단계로 70년대에 황장엽의 인간중심론적 철학에 의한 주체사상이다. 그는 “주체사상이란 혁명과 건설의 주인은 인민대중이며 혁명과 건설을 추동하는 힘도 인민대중에게 있다는 사상이다. 다시 말하여 자기 운명의 주인은 자기 자신이며 자기 운명을 개척할 수 있는 힘도 자기 자신에게 있다는 사상이다.”라고 했다. 첫 단계에서 주체의 개념은 ‘반 사대주의’ 혹은 ‘자주’가 주된 내용인데 비해, 황장엽에 의한 주체의 개념은 ‘주인’ 혹은 ‘주도자’라는 개념이다.
세 번째 단계의 변화는 김정일이 황장엽의 인간중심의 주체사상 위에 수령중심론을 덧씌운 것이다. 수령, 당 그리고 대중은 하나의 사회정치적 생명체라는 생물 유기체적 이론을 제시하고, 그 중 수령은 생명체의 뇌수로서 집단을 대표한다고 했다. 비록 인민이 주인 혹은 주도자라 할지라도 뇌수에 해당하는 수령이 없이는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이 같은 주체사상을 통하여 북한 집권자들은 주민들을 혁명과 건설의 주인으로서의 자각성을 높여 정치와 경제에 동원하는 일방 집단의식을 강화하고자 꾀했다. 그러나 이 같은 집권자들의 의도는 빗나갔다. 그 이유는 지배자의 의도와 피지배자인 인민의 인식이 일치하지 않고 괴리된 데 기인한다. 괴리란 지배자들이 생각했던 것과는 반대로 인민들은 주체사상을 통해, 첫째 주권재민의 민주주의적 사상을 터득하게 되었고, 둘째 개인주의적 인권의식에 눈뜨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 같은 괴리가 발생하게 된 경위는 끊임없이 계속되는 강제적인 인력동원과 배급 중단으로 식량난에 직면한 가운데, 자기 운명의 주인은 자기 자신이며 자기운명을 개척할 수 있는 힘도 자기 자신에게 있다는 교육을 받다 보니 자연적으로 그와 같은 의식이 스며들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제 북한 주민들 간에는 주체사상을 오히려 체제를 이탈하기 위한 이론으로 활용하는 경향마저 보이고 있다.
그리하여 비록 공식적으로는 주체사상을 폐기한다는 선언이 나오지는 않았으나 “불변의 영원한 진리”라고 떠받들던 주체사상이 퇴조하고 있다. 대신 새로운 정치구호 및 이념체계가 형성되어 동원되고 있는데 다름 아닌 ‘붉은기 사상ㆍ선군정치ㆍ강성대국’ 등이 그 대안의 것들이다. 특히 강성대국은 이제 주체사상을 대체하는 새로운 이념으로 기능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물론 김정일이 국정의 최고 책임자로 취임하기 위하여 새로운 통치이념을 등장시켜야 할 필요가 있었겠지만, 주체사상을 퇴출시켜야만 했던 주된 이유는 위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주체사상의 인간주의적 요소가 가져다 준 결과 때문이다.
독재를 위한 지배 이념으로 창안된 주체사상이 북한 주민들로 하여금 민주와 인권 의식에 눈뜨게 한 사실은 참으로 역설적이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섭리 앞에 겸허하게 무릎 꿇고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다. 이후로는 우리들이 복음의 햇볕을 비추어 줄 차례이다. 아홉 번에 걸친 연재의 글은 이 일에 작은 힘을 보태고자 함이었다. 정치적 압제자의 머리 위에 얹혀 있는 날조된 신성을 벗기고 살을 에는 찬바람 속에 참혹한 삶을 살아가는 저 북녘 동포들의 머리 위에 참 사랑이신 하나님의 신성이 빛나는 그 날을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