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태왕비연구에서 우선하여 각국 위치 연구가 먼저되어야 비를 해석할수 있고 민족사관도 정립될 수 있다.
유물이나 유적에 있어서 1차 연구는 형태와 상태 그리고 재질 등 물질로서의 연구이다.
그 다음에 유물 유적에 어떤 시대를 대입하려면 선행되어 있어야 할 것이 바로 서지학으로 역사가 정리되어 있어야 정립된 역사 인식을 토대로 유물 유적에 혼을 불어넣을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서지학적인 역사 연구가 되어 있지 못하다면 유물 유적의 발굴에 상식으로 알고 있는 시대 역사를 검증 없이 잘못 추정하여 전체 역사의 흐름을 바뀌게 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정확하지 않은 역사를 대입하고 있는지 조차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문자로 기록된 역사 기록을 종합하여 전체 역사를 규명하고 그리고 그 증거로 유물 유적으로 그 때를 밝혀 주고 전체 역사의 흐름을 정상적으로 흐르게 정립시켜야 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호태왕碑 연구는 남북한 중국 일본의 근대 국가사관을 바탕으로 연구되어 왔으며 이는 각국의 史書가 아무런 문제도 없이 완벽하게 연구되어진 것으로 단정하고 현재와 같은 歷史를 알려 왔기 때문이다.
즉 한, 수, 당(漢 隋 唐)이 황해 서쪽 현 중국 땅에 있었고 신라 백제 가라는 남북한에 있었고 왜(倭)는 현 일본열도에 있었다는 명, 청, 근세조선, 일본의 각 국가사관으로 본 것을 현대 국가 위치에 있었다는 전제조건이 완전한 것으로 본 이후의 호태왕碑 연구 결과이다.
그러나 이 전제조건이 완벽한 것인가를 검증하여야 지금까지의 호태왕碑연구가 문제가 없었는가를 밝힐 수 있는 것이다.
백제는 2백성을 보유하고 있었고 호태왕 때에 58성을 점유하였다고 하였다.
성(城)이 있어야 한다. 백제땅으로 알려 온 경기 충청 전라도에 200성이 있는가 또는 충청 이북에 58성이 있는가 우리나라에는 근세조선 시대의 성터 외에는 그 이전의 성 또는 성형태를 알아볼 수 있는 城이 거의 없다.
城이 없다는 것은 서지학으로 보나 금석문으로 보나 백제 위치가 한국에 있었다고 보기에는 많은 문제점이 있다. 그러므로 호태왕시 각국 위치를 연구하고 나서 호태왕碑를 연구해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호태왕碑는 장안 중심으로 국가를 건국했던 진, 한(秦, 漢)의 역사를 계승하였던 위, 오, 촉(魏, 吳, 蜀)이 망하고 진(晉)이 쇠약해지면서 5호16국 시대라는 혼란 시기에 있을 때,
진, 한이래로 번성하여 온 고구려에 광개토태왕이 있었고, 호태왕 붕어후 장수왕이 부왕의 업적을 기록한 碑를 다른 부족의 해(害)를 피하여 평양(平壤) 동황성과 한성(漢城)의 중간에 새웠다고 보여지는 것이 바로 호태왕비이며 만주 집안에 있다.
북평 태원에 가까운 평양성과 남북한의 한성(평양) 사이의 중간에 비를 세웠을 것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외형을 보면 사면석비로 1.35-2미터 높이6.39미터에 달하는 큰비이며 개석이 없다.
이 비는 19세기에 재발견되어 비문 연구를 하는데 있어 문자 해독이 판이한 것은 훼를 칠하여 변조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가져왔다.
물론 세월의 풍상에 마모되었다고는 하지만 碑에 훼를 칠하여 문자를 알아보기 어렵게 변조된 것이 많다고들 말하고 있다.
특히 신묘년 기사는 한 중 일의 해석이 분분하다. 문자의 해독에 앞서서 먼저 호태왕시대 각국의 위치에 대하여 먼저 연구된 이후 碑文을 해석해야 한다.
1) 호태왕碑의 재발견과 사관의 문제
414년에 건립된 호태왕碑가 高句麗의 흥망 이후 세월 속에 묻혀 있다가 高句麗碑로 재발견된 것이 19세기라고 전하여지고 있다. 그러나 이 碑가 발견된 것이 19세기는 아니었다.
근세조선 초기에 만주 집안에 碑가 있었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으나 연구되지 못한 것은 바로 사관의 문제였다.
서영수 교수와 서길수 교수의 논고에서 발취하면 호태왕碑는 발해가 멸망한 이후 근세조선 문헌에 다음과 같이 등장하고 있었다.
① 高麗가 멸망하기 25년전인 1370년 당시 高麗의 장군이었던 이성계가 명나라에 망한 원나라 잔존 세력 북원의 동령부를 정벌하러 갈 때 이 집안을 통과한다.
고려사에서는 이곳을 황성이라 하였고 근세조선 왕조 실록에는 이 황성을 여진 황제의 성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② 세종27년(1445)찬술되고 세종29년 해석을 붙인 용비어천가(39장 : 주해)에는 집안 = 대금의 황제성, 태왕비 = 성 북쪽 7리에 있다고 하여 누구의 碑인지는 밝히지 않았다.
③ 성현의 시(成俔의 詩)
성종18년(1487) 평양감사 성현이 집안에 가서 지은 황성 들판을 바라보며(望黃城郊 : 망황성교)에서 집안 = 황성(皇城), 태왕능 = 황제능(帝陵) 태왕비= 높은 비(간척비 : 干尺碑)라고 했는데 글 읽을 수 없다. 지금도 황성이라고 불리고 있네(지금유위황성기 : 至今猶謂皇城畿), 명.청(明, 淸)에서도 문헌에는 황성(皇城)과 같은 음의 황성(黃城)을 사용
④『동국여지승람』중종25년(1530)에는 집안 = 황성평(금나라수도), 태왕능 = 금나라 황제의 묘, 태왕비 = 농석이 있는데 높이가 가위 10장은 된다.
⑤ 심언광 중종31년(1538) 집안 주변에 몰래 살고 있는 여진족에게 압록강 가에서 퇴거하라고 타일렀던 시에서 집안 = 황성(荒城) 태왕비 = 황제 유적의 큰비(황제유적거갈 : 皇帝遺蹟巨碣)로 되었다.
⑥『지봉유설』에는 능비(陵碑)가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 시조비(始祖碑)로 오인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근세조선 초기부터 碑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음에도 연구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가 또 여진족의 碑로 알았다면 이 또한 근세조선 국가사관이 빚은 문제로 보아야 한다.
아메리카 인디언의 수천 년의 역사가 있었어도 역사를 찾고 가꾸고 미래의 지표로 삼지못하였으므로 지금은 유럽인 후예의 독립 운동사를 배우고 있고 역사를 지키지 못한 인디언은 그들의 역사도 잃고 뒤안길로 밀려나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우리도 지리교과서에서 만주에는 여진족이 있다고 하는데 역사 교과서에서는 만주에서 고구려가 건국되었으며 우리역사라고 가르친다.
민족 기준을 조선(고조선)으로 하면서 삼국중 하나인 고구려후예(後裔)를 여진족이라고 하여 다른 민족으로 보면서 역사만을 취하겠다는 근세조선국가사관으로 호태왕碑를 보았으며 그것이 高句麗碑인줄을 알지 못하였던 것이다.
토문강 압록강 이남을 영역으로 생각했던 조선, 이 두 강을 북쪽에는 조선족과 다른 여진족이 있다고 인식하고 있으며 그곳에 있는 碑는 당연히 여진족의 것으로 인식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만약 그 碑가 있는 지역이 근세조선 영역이던지 아니면 근세조선 영역에 碑가 있었다면 연구의 방향은 전혀 달랐을 것이지만 조선족과 다른 여진족 유물로 보았기 때문에 호태왕碑를 소흘히 하였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관의 문제인 것이다. 즉 근세조선국가사관이 碑연구를 늦게까지 방치하게 만들었다. 삼국이 우리민족이라면 고구려후예가 여진족이 아니라 만주족 여진족 조선족이라고 부르는 시각이 아니라 하나로 묶는 민족사관으로 사관이 정립되어야 모든 유물에 대하여 우리 민족사관으로 연구되어야 할 것이다.
2) 서지학에서 동이(東夷) 민족사관으로 정리하여야 학자적 양심으로 호태왕비문(碑文)이 정리될 것이다.
현재 동양 3국은 자국의 국가사관으로 호태왕碑를 풀이하려고 하니 해석하는데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만약 진, 한(秦 漢).삼국.왜(倭)가 하나의 동이(東夷)민족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9세기 이전을 바라보며 호태왕碑연구를 하였다면 전혀 달랐을지도 모른다.
즉 고구려 백제 신라 가라 왜가 동이로 기록되어 있고 지나족(한부족)의 시조 헌원도 동이로 기록하고 있으니 고구려 호태왕碑는 우리 모두의 조상 유물이다.
즉 고구려 백제 신라 가라의 후예가 동이 후예(東夷 後裔)라는 인식이 있었고, 진,한(秦.漢)의 시조라는 헌원의 후예인 순(舜)이 동이인(東夷人)이니 헌원도 동이인일 수밖에 없으며 그들의 후예라는 중국인도 東夷 후예이며, 왜(倭)도 東夷로 기록되어 있으니 모두 같은 민족의 후예 국가라면 민족사 연구로써 현 국가사관으로 국가 이익에 일치하게 字, 句를 변형시키거나 왜곡하게 연구하여 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기준(基準)을 조선(고조선)으로 하고 고구려 백제 신라 가라를 계승한다는 남북한인이 고구려의 후예를 여진족으로 부르고 인식하는 상황에서 결코 바른 호태왕碑 연구가 있을 수 있겠는가 ?
결국 사관의 정립이 碑의 연구 방향을 다르게 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 광개토경호태왕비문 연구현황 요약비교 >
< 순 서 >
① 번호 : 내 용
- (舊) : 현재까지 연구실태 - (新) : 새로이 진행되고있는 연구경과
---------------------------------
① 비를 판독하기전 꼭 필요한 사서
- (舊) : - (종합검토 미흡 또는 없음) - (新) : 삼국지, 후한서, 삼국사기 중 503년 이전 사서의 기록
첫댓글구,신 당서와 삼국사기및 유사를 통해 전성기가 아니 멸망시 고구려의 호수를 보면 대략 69만호 이고 백제는 76만호로 결코 뒤지지 않는다. 조선시대 경기 충천 전라도의 총호수가 대략 7만호 정도로 보고 있는데 이 통계치만으로도 백제가 결코 고구려 못지 않는 대국이며 200개의 성터의 유물적 고찰을 언급하지 않더라
세종실록지리지의 충청도 설명 글 처음에는 '본래 백제의 영토다'..호수 2만호, 인구 10만 790. 경상도 서두 '본래 신라땅...'호수 4만호 인구 17만 3천 759. 전라도 서두 '본래 백제의 땅..'호수 2만 4천호 인구 9만 4천. 대략 호수 8만호 가량되는군요. 총인구는 40만가량...
첫댓글 구,신 당서와 삼국사기및 유사를 통해 전성기가 아니 멸망시 고구려의 호수를 보면 대략 69만호 이고 백제는 76만호로 결코 뒤지지 않는다. 조선시대 경기 충천 전라도의 총호수가 대략 7만호 정도로 보고 있는데 이 통계치만으로도 백제가 결코 고구려 못지 않는 대국이며 200개의 성터의 유물적 고찰을 언급하지 않더라
도 한반도 남부 그것도 반쪽으로만 몰고 가기에는 대단히 이해 되지 않는 결과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현재의 모습으로 일제의 식민사관으로, 그리고 이병도,신석호 계열의 주장들로 풀기에는 고고학적으로나 서지학적으로도 큰 모순이 초래되고 있다고 하겠지요.
총호수가 7만호?? 그런 말은 첨들어보는디..실록을 찾아봐야겠군요.
세종실록지리지의 충청도 설명 글 처음에는 '본래 백제의 영토다'..호수 2만호, 인구 10만 790. 경상도 서두 '본래 신라땅...'호수 4만호 인구 17만 3천 759. 전라도 서두 '본래 백제의 땅..'호수 2만 4천호 인구 9만 4천. 대략 호수 8만호 가량되는군요. 총인구는 40만가량...
삼국사기의 백제 인구 76만호가 나오는 백제지리서술에서는 남쪽으로는 신라와 접하고 북으로는 고구려와 접하며 서로는 대해를 끼고 있다라는 기록... 본인은 백제의 산동요서 진출경영설에는 긍정적이지만 아예 대륙에 가 쳐박혀 있었다에는 동의하지 않음.
또한 76만호의 인구는 한반도 남부가 충분히 수용가능. 일단 조선시대 인구조사의 경우 기록보다 3배 정도 뻥튀기를 해야함(노비나 천민, 화전민이나 떠돌이등은 포함되지 않았으므로. 게다가 여자, 미성년도 제외) .
또 어디서 이런 판타지물이....산둥과 요서에는 분명 진출했었습니다. 허나 이건뭐 거의 대륙에 백제의 근원을 두니..ㅡㅡ; 이들이 주장하는 내용의 근거가 얼마나 조잡한지는 조금만 조사해봐도 같잖을 정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