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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이야기 스크랩 쓰시마해전(러일전쟁)|
베스 추천 0 조회 34 13.02.12 10:16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단 한번에 소멸되어버린 러시아 최강의 함대, 쓰시마 해전( 對馬島 海戰 )

 

| 러시아 제국의 자랑, 발틱함대의 허망한 최후! 도고 헤이하치로의 절묘한 전술, 시모세 장약의 위력 발휘! 너무나도 완벽하게 승리한 일본 연합함대!! 아시아의 2류 국가 대우를 받던 일본의 급부상 계기!! 일본 연합함대의 기함, 미카사에서 지휘하고 있는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 포탄이 빗발치는 최일선에서도 일단의 흔들림없이 침착하게 진두지휘를 하여 러시아 발틱함대를 대파하는 승첩을 거뒀다.

 

《 일본과 러시아의 충돌! 러·일 전쟁 발발!! 》 1904년 2월 8일, 뤼순에 와있던 러시아의 극동 총독 알렉세예프 대장은 황급하게 본국으로 한 통의 전문을 타전했다. 그 전문의 내용은 당시 유럽인들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소식이 담겨진 것이었고 이는 산업혁명 이래 급격하게 발전해온 유럽 중심의 세계 질서를 뒤흔들어 놓을만한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페테르부르크의 황제( Tzar ) 폐하께 황제 폐하께 긴급히 보고 드림. 2월 8일에서 9일로 넘어가던 자정, 일본 어뢰정들이 뤼순항의 외항에 정박 중이던 아군 극동함대의 전대에 기습 공격을 가함 전함 '레트비잔'과 '체사레비치', 순양함 '팔라다'가 피격되었으며 피해 정도를 조사 중임. 자세한 정보를 재정리해 황제 폐하께 다시 보고 드리겠음" 전문을 수신한 병사는 소스라치게 놀랐고 황급히 이 전문을 든 채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세계 전사에 있어 그 유례를 찾아보기가 어려웠을만큼 예측이 어려웠던, 아니 그럴 일이 없었으리라는 예상을 완벽하게 깨버린 전쟁, 러·일 전쟁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당시 뤼순항에 정박 중이던 러시아 극동함대를 기습 공격한 것은 바로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이 지휘하는 연합함대의 주력이었다.

 

▶ 오늘날에도 당시의 치열했던 혈전의 산증인으로 러시아군의 포대 자리에 서 있는 당시의 중포들. 이들 중포들이 뤼순항과 주변의 고지대의 요소요소에 구축된 포대에 배치됨으로써 일본 연합함대와 육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어야 했다. 비록 좁은 뤼순항의 지형으로 기습에 투입된 것은 배수량 372톤의 구축함 '시라쿠모'를 기함으로 하는 제1 구축함대( 사령관 : 아사이 마사지로 대좌 )를 비롯한 3개 구축함대였지만 이들이 발사한 18발의 어뢰 중 일부가 배수량 6,731톤의 순양함 "팔라다"와 전함 레트비잔, 체사레비치에 명중해 3척을 순식간에 대파한 것은 분명 놀라운 일이었다( 유명한 소설가 "시바 료타로"는 좋은 조건 하에서의 습격으로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빈약한 전과라고 평가했지만 야음에서의 기습이란 원래 그렇게 좋은 명중률을 기대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무엇보다 당시는 제대로된 조준장치 및 야시장비도 없던 시절이 아닌가? 물론 이들 구축함대가 단 한 척의 극동함대 군함을 격침시키지 못한 것에 대해 도고 헤이하치로가 실망하기는 했다 ) 이는 일본을 깔보고 있던 러시아의 오만함과 마리아 축제일을 맞아 완전히 방심해버린 극동함대의 태만함도 한몫 두둑이 했지만 전쟁을 대비해 준비를 철저히해온 일본 연합함대의 일격이기도 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피격과 함께 항구를 에워싸듯 배치된 해안포대들이 일제히 포격을 개시했음에도 3개 구축함대는 생채기 하나 입지 않고 퇴각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바로 일본 지상군이 행동을 개시한 것이다.

 

◀ 연합함대 사령관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 당시 막강한 난공불락의 요새로 탈바꿈한 뤼순항에 대한 공격에서 피해만 입고 사실상 포위만 한 상태에서 간헐적인 기습만 감행할 수 밖에 없었던 그는 육군이 하루라도 빨리 뤼순 요새를 함락시켜주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인천에 상륙한 일본 육군의 기고시 야스쓰나 소장이 직접 1개 여단을 지휘해 곧바로 한양으로 진입해 진주했지만 이것은 전투부대라기보다는 조선을 압박하기 위한 위력 시위용 부대였다.

 당시 조선은 중립을 선포했지만 수도에 일본 육군 1개 여단이 주둔하고 있는 판국이니 중립이라는 것은 씨알도 먹히지 않는 소리였다. 결국 일본과의 한·일 동맹이 수립되었고 곧바로 제12 보병사단이 상륙했다.

문제는 당시 일본 육군이 상당수의 병력을 전선으로 파병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수의 수송선이 필요했지만 그와 동시에 뤼순에 주둔한 러시아 극동함대의 주력과 블라디보스토크에 주둔한 극동 분함대가 위협이었고 이 때문에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이 이끄는 연합함대의 주력이 어떻게든 뤼순항에 주둔한 러시아 극동함대를 격파하기 위해 만전을 기했던 것이다.

그러나 뤼순항은 러시아가 대대적으로 요새화를 한 곳이었기에 청·일전쟁때처럼 기습적으로 점령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더욱이 러시아 육군의 요새 사령관 아나톨리 미하일로비치 스테셀 중장은 뤼순항 주변의 해안포대에 병력과 중포를 보충했고 극동함대 역시 해안포의 사정거리 내에서만 행동하며 도발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실제 2월 9일부터 감행된 연합함대의 공격은 러시아 극동함대에게 이렇다할 피해를 주지도 못했고 오히려 기함 미카사에 해안포대로부터 발사된 포탄 3발이 명중되는 등 연합함대의 피해만 늘어날 뿐이었다.

 

미카사의 뒤를 이어 포격을 가하던 전함 "후지"가 해안포에 피격돼 포술장이 즉사하는 등 12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전함 "시키시마" 역시 한 발이 명중돼 항해장을 포함한 17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전열의 최후미에 위치하고 있던 전함 "하쓰세" 역시 두 발이 명중돼 항해장 이하 16명이 전사하거나 부상당했다. 뤼순 요새의 위력은 대단했고 이를 함대만으로 공격한다는 것은 자살 행위 그 자체였던 것이다.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은 러시아 극동함대와 싸우고 싶을 뿐이지, 뤼순 요새와 싸우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것은 상당히 골치아픈 과제 그 자체였다. 견고한 요새에 보호받는 러시아 함대를 피해없이 격파한다는 것 자체가 우리에게 주어진 임무였고 이것은 그야말로 화약을 안고 불속으로 뛰어드는 격이기 때문이다" 결국 요새의 공략은 사실상 육군이 맡게 되었고 해군은 어떻게든 극동함대가 뤼순항 밖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봉쇄하는데 주안점을 두게 되었다.

해군의 고전에 육군은 더 이상 가만히 있지를 못했고 마침내 다음과 같은 작전안을 내놓았다. 우선 2개 야전군을 편성, 제1군으로 하여금 조선에 상륙해 한만 국경에 배치된 러시아 육군을 격퇴시킬 수 있는대로 격퇴시킨다. 이어 제2군은 랴오둥 반도에 상륙해 곧 만주 중심부를 향해 진격, 조선에서 진출한 제1군과 합류해 요양의 대평원에서 러시아 육군의 주력과 결전을 벌여 격파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요양에는 리네비치 장군이 이끄는 독립 제1 시베리아 집단군이 주둔했는데 이 집단군만 해도 일본의 제1군과 2군 병력 전체를 합친 것보다 많은 규모였다. 여기에 9일, 니콜라이 2세의 선전 포고와 동시에 러시아의 증원부대가 극동으로 파병되고 있었기에 이들이 도착하기 전에 어떻게든 육군이 최대한 서진해야 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기회를 잡게되는 것이었다.

 

 ◀ 당시 일본군의 주력 소총이었던 30년식 소총과 대검. 하지만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일본군은 소총 부족으로 결국 구식인 무라다 소총까지 동원하는 신세에 놓인다. 이리하여 규슈 사쓰마번 출신의 구로키 다메토모 대장이 이끄는 제1군은 3월 8일부터 차례로 히로시마항을 출항해 조선의 각처에 상륙했고 4월 20일 경에는 압록강에 진출했다.

그리고 4월 30일, 제12 보병사단이 압록강을 도하할 무렵 대안의 러시아군은 이미 퇴각해버린 후였다. 구로키 다메토모 대장을 비롯한 일본군은 의외의 상황에 당황했지만 진격을 계속해 곧바로 구련성에 포진한 러시아군 진지에 120mm 유탄포 20문을 동원한 포격을 퍼부었고 결국 러시아군은 구련성까지 포기하고 퇴각했다.

이 승리로 인해 러시아의 체면은 땅바닥으로 떨어졌고, 일본의 주가가 급등했다. 곧 오쿠 야스카다 대장이 이끄는 제2군이 편성되어 히로시마에 집결, 5월을 기해 일제히 랴오둥 반도를 향해 출발한 것이다. 이들을 막을 러시아 극동함대는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이 이끄는 연합함대에게 봉쇄되어 뤼순항 내부에 갇혀버렸으므로 사실상 이 대군( 제1, 제3, 제4 보병사단 및 제1 포병여단, 제1 기병여단 )의 상륙을 막을 방도가 없었다.

 5월 26일, 랴오둥 반도에 상륙하는데 성공한 일본 제2군은 우치야마 소장의 지휘 하에 일제 포격을 시작했으나 뤼순 요새로 향하는 요충지인 남산에 구축된 러시아군의 요새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여기에 우수한 성능을 자랑한 30년식 소총에 착검을 한 채 방진을 이뤄 돌격해 들어가던 제1, 3, 4 보병사단은 곧 겹겹이 쳐진 철조망 지대에 봉착했고 곧 그들을 향해 고지 정상부를 중심으로 구축된 러시아군의 중포들이 불을 뿜었고, M1893 맥심 기관총의 탄막이 펼쳐졌다. 순식간에 고지로 향하는 능선 일대는 일본군의 시체로 뒤덮였지만 지휘관들은 계속해서 자신의 부하들을 사지로 몰아넣었고 그것은 마치 믹서기에 들어가는 야채들과 같은 꼴이었다.

일본군은 이 남산 전투에서 M1893 맥심 기관총의 탄막 세례를 경험했으면서도 훗날 뤼순 공략전에서 똑같은 방식으로 공격을 감행했다. 여하튼 오전 공세는 실패로 끝났고 일본 제2군은 이 단 한차례의 총공세에서만 무려 2천명에 달하는 사상자를 내었다. 그나마 제4 보병사단장 오가와 마다쓰구 중장이 기지를 발휘해 늦은 오후, 비교적 취약한 좌익에 주력을 집중시켜 공격해 남산을 점령하지 못했다면 일본 제2군은 곧바로 도착할 제1 시베리아 집단군 병력에게 몰살당했을 것이다.

자연스레 뤼순은 점차 고립되기 시작했고 바다에서는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의 연합함대가, 육지에서는 일본 육군에게 포위될 위기였다. 자존심이 급격히 상한 러시아였지만 니콜라이 2세는 이미 이 난관을 타개하기 위해 지상전이 본격적으로 벌어지기 직전인 4월 하순, 극동으로 대함대를 파견하기로 결정을 내린 상태였다. 바로 우리들에게는 발틱함대로 알려진 대함대가 그것인데 당시 이들은 제2 태평양 전대로 불렸다. 즉, 뤼순항에 갇힌 극동함대의 주력은 자연 제1 태평양 전대가 된 셈이다. 그것은 유례없이 대담한 계획 그 자체였다. 유럽 역사상 그 어떠한 함대도 일찍이 이런 시도를 해본 적이 없었다.

스페인의 무적함대가 영국을 침공한 사례를 들 수 있겠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유럽 내의 좁은 범위였다. 이것은 유럽에서 머나먼 아시아라는 광대한 범위였고 한 편의 세계 일주와도 같은 것이었다. 자연히 1척당 승조원이 1천명에 가까운 전함들은 꾸준히 항구에 기항해 보급을 받아야했지만 당시 러시아의 편을 들어줄만한 국가는 그렇게 많지가 않았다.

 도대체 어느 국가가 중립을 깨고 제2 태평양 전대가 경유할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식민지 항구를 내주겠는가? 여기에 항로의 선정과 더불어 가장 중요한 지휘관 문제가 화두에 올랐다. 당시 후보로는 해군 사관학교 교장인 그레고리 추흐닌과 페도르 두바소프, 그리고 니콜라이 스크리들로프, 알렉세이 비릴레프가 유력했다.

 하지만 니콜라이 2세는 전혀 뜻밖의 결정을 내렸다. 바로 지노비 페트로비치 로제스트벤스키( Zinovy Petrovich Rozhestvensky, Рожественский ) 소장을 선임한 것이다. 도고 헤이하치로보다 9개월 늦은 1848년 10월 30일생인 그는 사무라이 가문에서 태어난 도고와 달리 태생이 아주 미천했다.

지노비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당시 러시아에서 지노비라는 이름은 별볼일 없는 동네 구멍가게 주인이나 사제의 아들들에게나 즐겨붙던 이름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이 두 부류에 속하지 않은 군의관이었지만 생활 형편은 사실상 동등했다. 그나마 운이 좋은 것은 자신의 보직 덕분에 로제스트벤스키를 해군 사관학교에 입학시킬 수 있었다는 점 뿐 1864년 9월, 15세의 로제스트벤스키는 해군 사관학교에 입교했고 당시 계급의 후광보다는 실력을 중시했던 러시아 해군의 분위기 덕분에 그는 단기간 내에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었고 프랑스어 역시 어렵지 않게 익혔다.

졸업 때까지 총 227일을 해상에서 보낸 로제스트벤스키는 러시아는 물론이고 발트해의 해안 지형을 손금보듯 꿰뚫을 수 있게 되었다. 결국 그는 해군 사관학교를 5등이라는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고 2년 후 소위 후보생으로 진급했다. 그리하여 해군 포병으로 병과를 선택한 로제스트벤스키는 좀더 공부를 하기 위해 미하일로프스카야 포병학교에 입교, 1873년에 졸업했는데 여기서도 그의 성적은 상위권이었고 결국 대위로 진급했다.

그는 도전을 추구했고 과학을 무척 좋아했다. 포병위원회 재직 중에는 상 페테르부르크 수송대학에서 초빙 교수로 강의를 하기도 했고 외국 신문에 실리는 새로운 해군 기술에 대한 기사들을 번역하기도 했다.

1877년, 러시아 ━ 투르크 전쟁에 참전한 로제스트벤스키는 그 해 7월, 무장 증기선 베스타호에 탑승해 터키의 전함과 조우했고 그는 침착하게 함포 사격을 지휘해 터키의 전함을 명중시켜 베스타호를 구출했다. 이 공로로 로제스트벤스키는 중령으로 진급했고 상 블라디미르 훈장과 상 게오르그 훈장을 수여받았다.

1883년에는 대령으로 진급했고 영국 주재 해군 무관으로서 2년 6개월 동안 머물렀다. 1894년 7월 로제스트벤스키는 순양함 블라디미르 모노마흐의 함장으로 임명되었고 동년 10월 14일, 크론슈타트항을 출항해 지중해로 진출하기도 했다. 그리고 1898년 12월 18일, 마침내 50세의 로제스트벤스키는 소장으로 진급했다. 하지만 더 이상의 진급은 어려웠다.

당시 러시아 해군에는 '별'들이 너무나도 많았기 때문에 더 이상 그가 들어갈 보직이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6년이라는 세월을 소장 계급에만 머물러 있던 로제스트벤스키에게 엄청난 기회가 찾아온 셈이다. 물론 니콜라이 2세의 측근들은 로제스트벤스키를 무척 싫어했다. 하지만 니콜라이 2세는 그러한 주변의 분위기는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로제스트벤스키는 처음에 이 전대를 이끄는 것을 반대했지만 황제의 완고한 태도 앞에 결국 정열적으로 이 일에 매진하게 되었다.

로제스트벤스키의 부하 장교 및 부사관들은 23시가 되어야 업무를 마치고 퇴근할 수 있었지만 다음 지시사항을 전달하기 위해 새벽 2시까지 걸려오는 상관의 전화에 시달려야 했다.

전대를 구성하는 것 또한 쉬운 일이 아니었다. 6월 29일이 되어서야 가까스로 부사령관인 드미트리 구스타보비치 펠케르삼 소장이 순양함 '아드미랄 나히모프'에 부사령관 기를 게양했다. 로제스트벤스키는 아예 8월 14일까지 신형 전함이자 전대의 기함인 "수보로프( Князь Суворов )"에 승선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는 적어도 앞으로 4주일 내에는 절대 함대를 출항시킬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또한 로제스트벤스키는 가급적 함대를 신형 함정으로 구성하기 위해 애를 썼지만 니콜라이 2세와 해군 장관 아벨란과 같은 양반들은 오히려 순양함 드미트리 돈스코이와 같이 해안 방어용으로나 적합한 구식 함정들을 다수 포함시키고 있었다.

당연히 로제스트벤스키는 이에 반발했지만 결국 두 손을 들고 말았다. 하지만 해결해야할 난제는 한 둘이 아니었다. 승무원의 훈련과 함대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식수와 식량, 석탄 공급이 발목을 붙잡았고 결국 출항은 계속 연기될 수 밖에 없었다.

▶ 전함 보로디노 그러나 그 동안 함정들은 차례차례 집결하기 시작했다. 주력은 5척의 전함으로 기함이자 신형인 "수보로프", 알렉산드르 Ⅲ세, 보로디노, 오렐, 오슬랴뱌가 그것이었다. 이 중 노후화된 오슬랴뱌를 제외한 나머지 4척은 모두 건조된 지 얼마 안된 신형으로 모두 배수량이 13,500톤급의 대형이었다.

 무장도 강력해 12인치 함포 4문과 6인치 부포 12문을 장비하고 있었고 최대 18노트라는 당시로서는 쾌속을 낼 수 있었다. 여기에 로제스트벤스키가 가급적이면 자신의 함대에 배치시키길 거부했던 구식 전함 시소이 벨리키와 나바린이 추가되었는데 이들은 운이 좋으면 최대 15노트까지 속도를 낼 수 있었다.

순양함은 총 7척으로 이 중 올레크, 오로라, 젬추크, 이줌루트는 쾌속에 무장 배치가 잘된 신예 함정이었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해안 방어용으로나 적합한 구식 순양함 "드미트리 돈스코이"는 건조한 지 21년이 넘은 상태였고 스베틀라나와 알마스는 신형이었지만 문제는 이들 함정이 신규 건조가 아닌 요트를 개조한 것이라는 점이었다.

 여기에 우랄, 쿠반, 테레크, 리온, 드녜프르 총 5척의 경무장 보조 순양함이 있었지만 경무장이라는 것에서 알 수 있듯 이들의 무장은 보조 순양함이라 하기에도 민망할 정도라 9척의 어뢰정이 자신들보다 덩치가 훨씬 큰 순양함을 호위하는 실정이었다. 이렇듯 상황이 엉망이니 당장 출항한다는 것은 어림도 없었지만 전황은 그렇게 녹록치가 못했다.

 함정들의 수리와 승무원들의 포술 훈련이 어느 정도 진행되던 차에 마침내 1904년 10월이 되었고, 니콜라이 2세는 10월 9일 함대가 정박한 레발항을 방문했고 10월 11일, 함대는 레발을 출발해 리바우에 도착했다.

그리고 10월 15일, 마침내 22척으로 구성된 제2 태평양 전대, 즉 발틱함대의 제1진은 기함 수보로프를 선두로 리바우를 출항해 뤼순을 향해 머나먼 항해를 시작했다( 항로 거리만 무려 18,000 마일에 달했다! )

 11월 16일에는 드미트리 펠케르삼 소장이 승선한 전함 오슬랴뱌를 선두로 한 제2진이 출항했다. 이들의 항해는 처음부터 영국과 일본 첩보원들의 집요한 추적 대상이 되었고 특히 영국은 러시아와 사이가 안좋은 덕분에 발틱함대의 항해는 처음부터 수월하지 않았다.

 여기에 그 유명한 도거 뱅크 사건( 로제스트벤스키의 제1진이 출항 4일 만에 북해의 도거 뱅크 해역에서 영국의 어선들을 일본의 어뢰정으로 오인해 불과 20분이라는 시간 만에 300발 이상의 포탄을 퍼부어 1척을 격침시키고 수척을 대파시킨 사건 )이 터지는 바람에 영국 정부는 격분해 러시아 왕정을 상대로 65,000 파운드의 배상금을 요구하기에 이른다.

이 사건으로 러시아는 국제적 망신을 당했고 자연히 함대의 사기는 크게 떨어질 수 밖에 없었다. 11월 14일이 되자 로제스트벤스키는 지브롤터 해협에서 함대를 둘로 나눠 전함 2척, 경순양함 3척, 구축함 7척을 펠케르삼 소장에게 배속시켜 수에즈 운하를 통과해 마다가스카르섬에서 자신을 기다리도록한 후 주력은 아프리카의 희망봉을 통과해 12월 19일, 마다가스카르의 생 마리 항에 기항했다.

1905년을 넘겨 1월 9일에는 마다가스카르 서부의 작은 섬인 노시베섬에 기항했지만 여기서 스테셀 중장이 노기 마레스케 중장의 일본 제13군에게 항복했다는 비보를 접하게 된다. 막대한 희생을 치른 끝에 마침내 일본 제13군은 뤼순 요새를 함락시켰고 이 곳에 갇힌 극동함대는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로제스트벤스키로서는 사실상 극동으로 가야할 이유가 사라진 셈이었고 여기에 수에즈 운하를 통과하는 와중에 펠케르삼 소장이 지병인 심장병이 악화되어 사실상 부사령관 임무를 수행하기가 어려워졌다. 설상가상으로 하필이면 함대의 석탄 공급에 차질이 발생해 재계약 등으로 무려 2개월이란 시간을 노시베에서 허비해야 했다.

하지만 로제스트벤스키의 시련은 아직도 남아있었으니 바로 자신이 출항한 동안 니콜라이 2세와 그 측근들이 로제스트벤스키가 그토록 자신의 휘하에 두기를 꺼려한 골동품 전함 니콜라이 Ⅰ세와 장갑 순양함 "우샤코프" 등으로 제3 태평양 전대를 편성한 것이다. 이것은 차라리 없는 것이 더 낫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실전에 투입하기가 힘든 함정들이었다.

이들이 항해하는 동안 로제스트벤스키의 본대는 3월 16일, 인도양을 통과하기 시작해 마침내 4월 8일, 말라카 해협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 험하기로 소문난 인도양의 뱃길을 22척이나 되는 함대를 이끌고 단 한 척도 손실하지 않은채 극동으로 이동한 로제스트벤스키의 능력에 유럽인들은 찬사를 보냈고 5월 9일, 네보가토프 제독이 이끄는 제3 태평양 전대의 함정 16척과 합류한 발틱함대는 약 38척의 대함대를 이루었다. 표트르 대제가 무에서 창조한 러시아 해군 역사상 이처럼 대규모의 함대가 아시아에 모습을 드러낸 일은 전혀 없었던 것을 감안할 때 이는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

하지만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의 연합함대는 그 시각 뤼순 요새 공략에서 입은 피해를 모두 복구하고 강력한 시모세 장약을 탑재한 포탄들을 정확하게 명중시키기 위한 훈련을 거의 마친 상태였다.

《 결전! 쓰시마 해전!! 》

뤼순 요새가 함락된 이상 발틱함대가 갈 곳은 오직 한 곳! 바로 블라디보스토크였다. 이 부동항으로 가기 위해서는 3곳의 루트가 있었으니 하나는 대한해협, 즉 쓰시마 해협이었고

둘째는 일본의 혼슈와 홋카이도 사이에 위치한 쓰가루 해협,

 마지막은 홋카이도와 사할린섬 사이의 소오야 해협이었다.

로제스트벤스키는 대한해협을 택했는데 그 이유는 연합함대가 대만에 위치했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오산이었다.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이 이끄는 연합함대는 바로 한국의 진해항에 집결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 일본 연합함대 수뇌부는 로제스트벤스키의 함대 진로가 어디인가를 두고 논쟁이 연일 이어지고 있었다. 오직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 본인만이 발틱함대가 쓰시마 해협을 통과할 것으로 확신하고 있었으니...

그리고 시간이 지나 마침내 5월 27일 새벽, 그 동안 무전을 봉쇄한 채 조용히 북상 중이던 발틱함대는 고지마 열도의 북서쪽 30마일 해역에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 해역은 일본 해군이 제203 지점이라 부르고 있었던 초계 지역이었는데 마침 오전 02시 45분, 이 해역을 초계 중이던 순양함 시나노마루가 발틱함대를 발견한 것이다.

 시나노마루는 단신으로 이 대함대에 맞설 수 없음을 알고 신속히 해역을 이탈해 약 60마일 북쪽에 위치한 연합함대에 제1신을 타전했다. "제203 지점에서 발틱함대 발견!! 쓰시마 동쪽 수로로 향하는 것으로 추정됨!!" 마침내 일본 연합함대는 쓰시마 해협을 통과하려는 발틱함대를 발견했고 이미 그것을 확신한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은 신속하게 전 함대에 출동을 명령했다.

이 보고를 받고 가장 먼저 해역으로 출동한 장갑 순양함 "이즈모"도 오전 06시 45분을 기해 발틱함대의 대군을 발견했고 이를 진해항에 주둔한 연합함대 본진에 타전했다. 마침내 이즈모의 보고까지 수신한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과 연합함대의 수뇌부는 신속하게 전 함대에 출동을 명령했다.

기함 미카사를 선두로 전함 시키시마, 후지, 아사히, 장갑 순양함 "카스가", "닛싱", "이즈모", "아사마", "아즈마", "야구모", "도키와", "이와데" 등 연합함대의 함정들은 대오를 갖춰 결전이 벌어질 쓰시마 해협으로 향했다.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은 미카사의 함교에서 이순신 장군의 사당 방향을 바라보며 승리를 기원했다.

당시 일본 연합함대는 대구경 함포가 발틱함대에 비해 적었지만 소구경 속사포를 다수 장비하고 있어 분당 발사속도에서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고 포탄의 탄피 두께를 얇게하는 대신 그 내부에 시모세를 비롯한 장약을 가득 채워넣어 폭발력과 화재 유발에서 러시아를 압도하고 있었다. 여기에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은 그 동안 포술의 정확도에 초점을 맞춰 승무원들을 훈련시켜왔다.

이제 그 훈련의 결과가 나타날 시간이 온 것이다. 오전 12시를 기해 오키노시마 북방 10마일 지점에 도착한 연합함대는 발틱함대의 좌측으로 진입하기 위해 서쪽으로 침로를 변경했다.

당시 59세의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은 침착한 태도로 쌍안경을 가슴에 늘어뜨린채 전방을 주시하고 있었다. 마침내 13시 45분, 남쪽 수마일 해상에서 거대한 함대의 전열이 서서히 자신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음을 발견한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은 소스라치듯 기뻐했다.

 

곧 미카사의 마스트 위에 그 유명한 "Z"기가 올랐고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은 각 함장과 승무원들에게 지시했다. "대 일본제국의 승패는 바로 이 일전에 달려있다. 각자 더욱 분투하고 노력하라!" 양 함대 사이에 긴장감이 높아졌고 마침내 양 함대의 거리는 약 8,500m로 좁혀졌다. 미카사의 포술 장교인 야스호 소좌는 초조함이 더욱 역력해졌다.

 이 정도 거리라면 당시 양측 전함의 주포인 12인치 함포의 유효 사정거리에 들어오고도 남았기 때문이다. 양측의 거리가 다시 8,000m로 줄어들자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은 참모장 가토의 얼굴을 바라보며 그 유명한 명령을 내렸다. "전 함대, 좌측으로 90도 회전하라!!" 순간, 참모 장교들과 미카사의 함장은 경악했다.

 2열 종대로 몰려오는 러시아 발틱함대를 향해 좌회전을 해 함수를 적진 속으로 들이받고 들어간다는 것은 대단한 모험이었던 것이다. 사실상 측면을 드러내는 셈이었고 양측의 거리가 너무나도 가까운 상황에서 이 진형은 대단한 모험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명령은 명령이었다. 미카사의 거대한 선체가 서서히 좌측으로 방향을 틀었고 14시 08분, 마침내 발틱함대가 일제히 12인치 주포를 사격하기 시작했다. 요란한 포성과 함께 기함 미카사 주위에 거대한 물기둥이 치솟아 올랐고 곧 수발의 명중탄이 작렬해 사상자가 속출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14시 10분을 기해 마침내 일본 연합함대가 포문을 열어 발틱함대의 선두를 이루고 있는 전함 수보로프와 오슬랴뱌를 향해 집중 포화를 퍼붓기 시작했다. 선체 주위에 거대한 물기둥이 잇따라 치솟아 올랐고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은 발틱함대의 진로를 막기 위해 지속적으로 함대를 좌측으로 기동시켰다.

이른바 발틱함대의 2열 종대에 대한 연합함대의 일자진 가로막기, 그 유명한 정( 丁 ) 혹은 T자 전법이 펼쳐진 것이다. 이는 어떻게든 블라디보스토크에 입항하려는 발틱함대와 그것을 가로막고 이 해협에서 결판을 내려는 연합함대의 사투였다. 해전이 벌어진지 10분이 지나자 기함 미카사의 우현 상갑판에 12인치 포탄이 작렬했고 순식간에 1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하지만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은 마스트를 벗어나지 않은 채 의연하게 전투를 진두지휘했다.

함대의 맨 후미에 위치하고 있던 장갑 순양함 "아사마"는 선미에 12인치 포탄 수발이 명중해 조타장치가 파손되고 침수의 수위가 전투불능 상태에 빠질만큼 심각해져 결국 14시 30분, 전열에서 이탈하고 말았다. 그러나 일자진을 펼쳐 측면의 6인치 부포들을 집중적으로 운용할 수 있게된 일본 연합함대에 비해 2열 종대를 형성하는 통에 선두의 수보로프와 오슬랴뱌의 포격만이 유효했던 발틱함대는 점차 작렬하는 명중탄과 시모세 장약으로 인한 화재로 전투력이 급격하게 상실되었다.

 기함 수보로프는 그야말로 집중 포화를 얻어맞아 사실상 전투력이 상실되었고 오슬랴뱌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나름대로 분투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점차 침수가 급격히 증가되었고 화재로 인해 결국 15시 05분, 선체가 좌측으로 기울며 침몰하고 말았다.

승무원 800명 중 600명이 수장되었으며 2일 전에 사망한 드미트리 펠케르삼 소장의 시신도 같이 수장되어 버렸다.

 결국 전함 '알렉산드르 Ⅲ세'가 새롭게 선두로 나서 수보로프를 보호하며 항진을 계속했지만 연합함대의 추격도 만만치 않았다. 쓰시마 해협 일대는 양측의 포연으로 시야를 분간하기가 어려웠고 일자진을 유지하며 발틱함대를 차단하려뎐 연합함대는 결국 쾌속으로 항진하는 발틱함대를 잠시 놓치고 말았다. 이리저리 지그재그로 기동하는 발틱함대의 항해술 앞에 기가 질린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은 대신 37척의 어뢰정들에게 발틱함대를 사냥할 것을 명령했고 16시 35분을 기해 한 척도 침몰하지 않은 연합함대를 이끌고 북쪽으로 향했다.

장기간에 걸친 항해와 치열한 해전으로 탈진한 러시아 승무원들의 한계를 노린 작전이었고 이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부상을 입고 쓰러진 로제스트벤스키 제독을 구출하기 위해 구축함 "부이니"가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수보로프로 접근했고 로제스트벤스키 제독이 이승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어뢰정으로부터 발사된 어뢰들 중 2발이 수보로프에 명중,

마침내 발틱함대의 기함 수보로프는 19시 20분을 기해 대폭발을 일으키며 선체가 전복되어 침몰했다. 승무원 900명 중 생존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는 것이 큰 비극이었다. 나머지 전함들도 수보로프 못지 않은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으니 전함 알렉산드르 Ⅲ세는 함수에 명중탄을 집중으로 얻어맞아 점차 침수가 심해지더니 결국 18시 40분 전복되어 침몰했다.

수보로프보다 40분 앞선 최후였고 승무원 830명 중 생존자는 단 4명에 불과했다.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의 연합함대 본진의 공격은 더욱 격렬해져 이제 표적은 신형 전함 "보로디노"에 집중되었다. 뤼순 요새 공략에도 참가한 전력이 있는 전함 "후지"의 12인치 포탄이 보로디노의 탄약고를 그대로 유폭시켰고 마침내 19시 20분, 수보로프가 어뢰를 맞아 대폭발을 일으킨 그 시각 이 신형 전함 역시 대폭발을 일으키며 그대로 선체가 전복되어 서서히 바닷속으로 가라앉았다.

이윽고 서서히 어둠이 깔리자 전함들끼리의 오인사격을 방지하기 위해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은 어뢰정들을 이용해 발틱함대를 타격하도록 명령했고 발틱함대는 21척의 구축함과 37척의 어뢰정으로 구성된 연합함대의 추격을 받게 되었다.

지칠대로 지친 발틱함대의 승무원들은 사실상 탈진 상태에 놓였고 하필 야음이라는 절호의 기회에 한 병사가 실수로 탐조등을 켜 자신들의 위치를 노출시켜버리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어뢰정들이 기다렸다는듯 어뢰를 집중으로 발사했고 순식간에 전함 나바린이 어뢰 4발을 얻어맞고 그대로 침몰해 버렸다.

승무원 4명만이 구조되었고 나머지 인원은 탈출할 겨를도 없이 그대로 전함과 함께 수장되었다. 전함 시소이 벨리키 역시 운이 없었다. 함미에 어뢰 1발이 작렬해 거대한 구멍이 뚫렸고 밤새도록 침수를 막기 위해 애를 썼지만 결국 28일의 아침이 밝아오면서 침몰하고 말았던 것이다. 장갑 순양함 "나히모프" 역시 함수에 어뢰를 맞고 속도가 급격하게 감소하여 결국 쓰시마 방면으로 도주하다가 나포되는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스스로 자침함으로써 그 최후를 마쳤다.

이 야간 전투는 대혼전 그 자체로 추격하던 연합함대의 어뢰정들이 서로 충돌해 3척이 침몰했다. 5월 28일, 마침내 쓰시마 해전은 사실상 종료가 되었다. 마지막으로 살아남은 전함 오렐과 니콜라이 Ⅰ세와 3척의 순양함들은 연합함대에게 완전히 포위되는 상황에 처했고 결국 이들을 지휘하던 제3 태평양전대 사령관 네보카토프 소장은 마스트에 일본 국기를 게양하고 함대를 완전히 정지시켰다.

연합함대에게 항복한 것이다. 오전 10시 34분, 네보가토프 소장은 항복의 표시로 자신의 지휘도를 넘겨주기 위해 니콜라이 Ⅰ세를 떠나 미카사에 승선했다. 그는 니콜라이 Ⅰ세를 떠나면서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남겼으니 "이미 나는 60세를 넘긴 늙은이. 더는 생사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 치욕적인 항복으로 내가 총살을 당한다 할 지라도 문제될 것은 없다. 허나, 제군들은 아직 젊다. 제군들에게는 언젠가 위대한 러시아 해군이 상실한 옛 영광과 명예를 수복하기 위해 조국의 부름을 받을 날이 반드시 올 것이다. 이 곳에는 2,400명의 고귀한 생명이 있다. 그대들의 생명은 이 늙은 패장 한 사람의 목숨보다 더 소중하다.... 오늘의 이 치욕을 절대로 잊지마라, 제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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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시아의 패권이 완전히 바뀌어버린 계기가 된 쓰시마 해전, 일본의 부상! 》

일본 연합함대와 발틱함대의 30시간에 걸친 대혈전이었던 쓰시마 해전은 이렇게 5월 28일 오전 10시 34분을 기해 사실상 일본의 승리로 끝이 났다.

 순양함 이줌루트와 구축함 2척만이 블라디보스토크에 입항했다. 그것은 38척의 함정으로 구성되었던 발틱함대의 전멸을 의미했다. 총 38척의 함정 중 19척이 격침되었고 순양함 오로라를 비롯한 3척의 순양함이 필리핀 마닐라 항에 입항해 미국 함대와 조우했고 기타 보조선박 수 척이 중국 상하이 등지로 도주했다.

전함 니콜라이 Ⅰ세와 오렐, 순양함 3척을 포함한 7척의 함정이 일본 연합함대에 나포되었다. 그것은 한 때 발트해를 지배했던 발틱함대의 죽음이나 마찬가지였고 러시아는 함정들 외에도 약 5천명에 달하는 정예 수병이 쓰시마에서 울릉도에 이르는 해역에서 최후를 맞았다.

또한 로제스트벤스키 제독과 네보카토프 제독을 포함한 6,106명이 포로가 되었으니 이는 러시아를 절망에 빠뜨려놓기에 충분했다. 연합함대의 손실은 어뢰정 3척과 사상자 700명 뿐이었으니 이순신 함대의 승첩 이후 세계 해전사에서 이처럼 완벽한 승리를 거둔 예는 찾기가 드물다. 일본은 축제 분위기에 빠졌고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은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또한 일본인들은 이 5월 27일을 해군 기념일로 정해 지금도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은 사세보의 해군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 로제스트벤스키 제독을 몸소 찾았고 로제스트벤스키는 한동안 도고의 손을 잡은 채 침묵을 지키다가 조용히 말했다. "이렇게 찾아와줘서 고맙소. 당신이 상대였으니 나는 패장이 된 것이 부끄럽지 않습니다." 세계 해전사 사상 이처럼 최정예 함대가 단 한 순간에 사라져버린 예가 과연 얼마나 있을지는 미지수이며 그 후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은 서방측과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남겼다.

"영국의 넬슨 제독은 군신에 비유될 수 없다. 해군 역사상 군신이라할 제독이 있다면 오직 이순신 뿐이다. 아니, 이순신과 비교한다면 나는 하사관도 될 수가 없다" 제2차 세계대전이 종전된 후 승전국이 되어 사할린을 포함한 쿠릴열도를 장악한 러시아! 과거의 패배를 설욕했지만 아직 그들이 찾지 못한 것이 있으니 바로 쓰시마 해전에서 침몰한 전함의 잔해들과 승무원들의 유해다.

오늘날에도 쓰시마 해협, 즉 대한해협을 통과하는 러시아 선박들은 꽃다발을 바다 위에 던져 104년전 이 해협에 가라앉은 발틱함대 승무원들의 넋을 기리고 있다.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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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작성자 13.02.12 10:39

    첫댓글 너무 장편이라 올리기가 부담&%$#*,,,,,,, 고시공부 하신다 생각 하시고 끈기잇게 &%$#*&,,,ㅎ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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