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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을 바꾼 이건희 회장의 신경영 대장정⑤"
이건희 회장, 인재 유치 부진한 사장에게 "전용기 띄워서라도 핵심 인력 데려와라"
학력-지역 차별 철폐하고 '열린 채용'도입
핵심인재 발굴이 삼성 경쟁력의 한 축
"21세기 환경을 감안한 숫자입니까? 2000명을 양성하세요.”
1989년 사장단 회의에서 5년간 500명의 지역전문가를 양성하겠다는
보고가 올라오자 이건희 회장이 소리를 버럭 질렀다.
이 회장이 화를 낸 것은 숫자도 숫자려니와
지역전문가 양성을 얘기한 지 십여 년이 흘렀기 때문이었다.
이 회장이 지역전문가를 육성하자고 처음으로 외친 것은 1973년이었다.
하지만 주위의 어느 누구도 그를 이해하지 못했다.
회장에 취임한 후인 1988년에도 다시 한번 글로벌 인재양성을 소리쳤지만 이뤄지지 않았다.
결국 진노한 이 회장이 사장단 회의에서 호통을 치자 그제서야 보고가 올라 온 것이었다.
삼성의 현지 마케팅의 근간이면서, 급성장의 원천이 된
지역전문가 제도는 이렇게 이 회장의 오랜 관심 속에서 만들어졌다.
전 세계 주요 지역에 파견된 지역전문가는 1년 간 업무에서 완전히 벗어나
현지의 생활과 문화를 익히고, 다양한 인물과 교류했다.
이를 통해 향후 삼성이 해당 지역에 진출하는데 필요한 정보와 인적 자원을 확보해 나갔다.
1990년 39명을 시작으로 현재까지 전 세계 80개국,
170여 개 도시에서 4699명의 지역전문가들이 활동했다.
오늘날 삼성이 전세계 소비자들에게 호평을 받을 수 있고, 전세계에 생산 공장을 짓고,
지역에 맞는 현지경영을 성공시킬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지역전문가들의 노력이 밑바탕이 됐다는 평가다.
글로벌 인재 육성 통해 미래 대비
이건희 회장은 신경영을 선언하기 이전부터 인재를 매우 중요하게 봤다.
특히 미래를 대비하기 위해서는 글로벌 인재 육성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앞으로 국제화에서는 서로 어울려서 같이 잘 살아야지 나만 잘 살겠다고 해서는 안 된다.
절대 일방통행이 없다. 그러려면 상대방 문화도 받아들일 줄 알아야 되고,
우리 문화도 상대방한테 소개를 하고 흥미를 가지도록 유도할 노하우가 있어야 된다.”
이 회장은 삼성의 인재들이 세계 일류를 목표로 하기 이전과는
다른 체계에서 양성되고 다른 능력을 갖출 것을 요구했다.
신경영 일꾼을 양성하기 위해 1991년 9월 삼성인력개발원에 창조관을 개관했다.
더불어 삼성 고유의 교육체계를 갖췄다.
이른바 삼성 3대 교육 프로그램으로 불리는 SVP, SLP, SGP이다.
신입사원을 대상으로 하는 SVP(Samsung Shared Value Program)는
삼성의 경영철학과 핵심가치를 공유하는 과정이다.
SLP(Samsung Business Leader Program)를 통해서는
우수한 인재를 조기 발굴해 삼성의 차세대 리더로 키운다.
SGP(Samsung Global Talent Program)는
글로벌 전문인력 양성과 글로벌 역량 강화를 위한 프로그램이다.
특히 SGP에서는 외국어와 매너 교육을 비롯해서
국제금융, 국제법규, 해외 마케팅 등에 대한 수준 높은 교육이 이뤄진다.
우수 인재 확보에 심혈 기울여
삼성이 1995년 7월부터 도입한 ‘열린채용’은 신경영 인사의 결정판이었다.
학력과 성별을 이유로 기회조차 주지 않던 닫힌 제도와 관행을 모두 없앴다.
대신 능력과 의욕만 있으면 모든 사람에게 문호를 개방했다.
‘대졸’ 신입사원 채용이라는 명칭도 ‘3급’신입사원 채용으로 바꿨다.
이 회장은 이 같은 열린 채용을 통한 인재확보 노력 못지 않게
비범한 능력을 가진 우수 인재 확보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그는 1995년 5월 아시아 정·재계 인사들이 모인 닛케이 포럼 기조연설에서
“한 사람의 비범한 천재가 수만 명을 먹여 살린다”고 말했다.
이때부터 삼성은 전 세계를 대상으로 핵심 인재 확보에 본격적으로 나서게 된다.
1995년부터 정기적으로 석·박사급 우수인력을 확보해오던 삼성은
1997년 해외 MBA 과정을 마친 우수한 외국인 인력들로 구성된 삼성미래전략그룹을 출범시켰다.
이들은 삼성이 추진하는 미래전략과 사업 방향을 검토하고 조언하는 싱크탱크 역할을 했다.
이를 통해 삼성은 글로벌 전략의 실효성을 높인 반면 리스크를 제거하는 기반을 마련했다.
이 회장은 다가올 21세기에 세계 일류기업들과
경쟁하기 위해서는 핵심 인재 확보가 관건이라고 생각했다.
“앞으로는 두뇌가 경쟁력이다.
국제 경쟁력을 갖춘 인재 한 명은 사업부 하나와 맞먹는다.
인재 육성에 시간과 비용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앞으로 다가 올 지식사회에서는 창조적 천재들이
역사를 발전시키고 세계를 이끌어 가게 될 것이다.”
인재의 저변이 넓지 않았던 시절이었던 만큼
해외에서의 인재 영입에 공을 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를 위해 삼성은 핵심인재확보위원회를 구성하고
글로벌 채용 담당 전문가를 해외에 파견했다.
하지만 좀처럼 성과가 나타나지 않았다.
핵심 인력을 제대로 확보하지 못해 이 회장으로부터
질책을 받은 CEO는 한둘이 아니었다.
삼성 계열사의 한 CEO는 2002년 5월 경부고속도로
상행선 기흥 부근에서 이 회장의 전화를 받았다.
그 CEO는 갓길에 차를 세우고 이 회장과 1시간 30분 동안 통화를 했다.
주력 사업의 추진 현황을 챙기던 이 회장이 마지막으로
강하게 지적한 것이 바로 핵심 인재 확보가 미진하다는 점이었다.
다른 계열사 CEO들의 상황도 마찬가지였다.
이 회장 “내 일의 절반 이상은 핵심 인재 모으는 것”
참다 못한 이 회장이 2002년 6월 사장단을 긴급 소집했다.
30여명의 계열사 사장단이 참석한 ‘S급 핵심인력 확보·
양성 사장단 회의’는 찬물을 끼얹은 듯한 분위기였다.
이 회장은 어떤 산업을 톱3 또는 톱5 안에 들게
만들 수 있는 S급 인재의 중요성을 역설하기 시작했다.
“S급 인재 10명을 확보하면 회사 1개 보다 낫다.
그런 S급 인재는 사장이 직접 발로 뛰어다녀도 찾을까 말까 한데
아랫사람 시켜서 몇 번 왔다 갔다 하며 만나는 정도라니….
S급은 찾는 데만 2~3년이 걸리고 데려오려면 1~2년이 더 걸린다.
업무 절반 이상을 S급, A급 인재를 뽑는 데 할애하라. 이게 안되면 일류 기업은 불가능하다.”
이 회장은 “내 경영업무의 절반 이상을 핵심인력 확보와 양성에 쏟겠다”며
“사장단 인사평가 점수의 30점은 핵심 인력을 얼마나 확보했느냐에 둘 것”이라고 강조했다.
핵심인력의 확보가 유임의 기준이 되면서 사장단은
핵심인재를 찾아 전 세계를 직접 발로 뛰기 시작했다.
핵심 인재 한 명을 데려오기 위해 회사 전용기까지 띄웠다.
1~2년이 지나면서 서서히 성과가 나오기 시작했다.
사장보다 연봉이 높은 S인력이 들어왔다.
S급 인재는 이 회장이 직접 인터뷰
핵심 인력은 S·A·H의 3등급으로 분류돼 특별 관리를 받는다.
본인에게 통보하지 않기 때문에 자신이 핵심 인재인지, 몇 등급인지는 알 수 없다.
S(Super)급은 최고경영자급 대우를 받으며 핵심사업을 진두 지휘한다.
특정분야에서 최고의 전문성을 가진 인물이다.
외부에서 영입하는 S급 인재는 이 회장이 직접 인터뷰하기도 했다.
주로 한남동 승지원에서 이뤄지는 면접은 식사를 포함해 하루 종일 걸렸다.
간혹 너무 오래 걸리는 면접 도중 불시의 생리현상으로
낭패를 겪은 S급 인재도 있었다고 한다.
A(Ace)급은 S급 정도의 의사결정권을 갖고 있지는 않지만,
소단위 사업을 자기 책임 아래 확실하게 챙길 수 있다.
상무에서 전무급에 폭넓게 포진해 있다.
H(High Potential)급은 S급이나 A급으로 육성할 수 있는 인재를 말한다.
평사원 중에도 H급이 있다.
핵심 인재 확보뿐 아니라 스카우트한 인력에 대한
관리와 지원에도 이 회장의 관심이 이어졌다.
핵심 인재를 확보하지 않는 것도 문제지만,
이미 확보한 S급·A급 인재를 내보내는 않는 것이 더 큰 문제라는 이유에서다.
이에 따라 삼성은 채용 대상자가 입사하면 채용 과정에서
접촉해 온 실무자를 일정 기간 해당 조직에 함께 배치했다.
외국인 직원을 위한 도움 전담조직인 콜센터도 운영했다.
본인은 물론 가족들의 불편사항을 해결해 핵심 인력이 회사에 적응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
여성 인력 활용 확대
여성 인력 활용의 확대는 이 회장이 오래 전부터 강조해온 인재경영의 한 축이다.
그는 1980년대 초반부터 “냉장고, 세탁기를 누가 사용하는가? 가정주부다.
그런데 디자인 설계 개발 과정에 여성이 한 명도 없는 게
말이 되는가?”라며 여성 인력 채용을 독려했다.
하지만 여성 인력 확충은 좀처럼 이뤄지지 않았다.
여성의 인력풀이 부족하기도 했지만 보육 문제 등으로 퇴사하는 경우도 많았다.
여성 인력 양성을 위한 다양한 전략과 노력은 신경영 선언을 전후해 본격적으로 실천됐다.
삼성은 1992년 여성 전문직제를 도입하고
비서 전문직 50명, 소프트웨어 직군 100명을 공개 채용했다.
이듬해인 1993년에는 국내 기업 최초로 500명의 여성 전문 인력을 채용했다.
당시에는 1년에 대략 1500명 정도의 여성인력이 대기업에 채용되던 시절이었다.
삼성은 그 중 3분의 1에 해당하는 인력을 채용했다.
2002년에는 신규 채용 인력 중 30% 이상을 여성으로 뽑도록 했다.
1993년 신경영 선언 당시 8명에 불과했던 여성 임원이
2013년에는 52명을 돌파했고, 삼성전자는 40%가 넘는 여성 인력이 이끌어가고 있다.
"삼성을 바꾼 이건희 회장의 신경영 대장정⑥"
이건희 회장,삼성 직원이 경쟁사 제품 몰래 촬영하다 발각되자…
밀라노로 사장단 불러 "디자인이 마지막 승부처"라며 충격
남들 원가 절감할 때 "디자인에 혼 담아라" 주문
제품 개발 과정에서 디자인 부서의 발언권 강화
"다가올 21세기는 문화의 시대이자 지적자산이 기업의 가치를 결정짓는 시대다.
기업도 단순히 제품을 파는 시대를 지나
기업의 철학과 문화를 팔아야만 하는 시대라는 뜻이다.
디자인과 같은 소프트한 창의력이 기업의 소중한 자산이자
21세기 기업 경영의 최후의 승부처가 될 것이다.”
신경영 선언을 통해 어느 정도 질(質) 경영이 궤도에 오르자
이건희 회장은 1996년 디자인 혁명을 선언했다.
질로의 혁신이 과거의 관행을 떨치고 삼성을 신경영 체질로 만들어내는 것이었다면
디자인 혁명은 보다 먼 미래를 향해 현재는 부족한 능력을 키워
새로운 성과를 얻어내겠다는 것이었다.
그야말로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혁명을 일으키겠다는 원대한 포부였다.
디자이너가 제품개발 주도하는 일본 기업 보고 깜짝 놀라
이건희 회장이 디자인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나선 것은 회장 취임 직후인 1988년부터다.
그 해 일본 S사를 방문한 이 회장은 이 회사의 카세트 생산 실무 회의를
주재하는 직원이 디자이너라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랐다.
당시 삼성전자의 디자이너는 상품기획 부서의 허드렛일을 하는 말단 직원에 불과했다.
디자이너는 제품개발 과정에 겨우 참여해 의견을 개진하는 수준에 그쳤고,
디자이너가 머릿속에 그렸던 아이디어는
이 사람 저 사람이 간섭하면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기 일쑤였다
이 회장은 1993년 신경영 당시 이러한 현실을 강하게 질타하고 나섰다.
“앞으로 세상에 디자인이 제일 중요해진다. 개성화로 간다.
생산공장은 자꾸 자동화된다. 제품의 개성을 어떻게 표현하느냐,
디자인을 어떻게 하느냐가 관건이다.”
당시 대부분의 한국 제조기업들이 원가 절감이나 품질에 매달릴 때
디자인을 경영 키워드로 내세운 것은 상당한 파격이었다.
그러나 삼성 내부에서는 이러한 예견을 소화시키지 못하는 분위기였다.
경영진들은 우왕좌왕했고, 디자인 핵심 인력도 부족했다.
디자인 혁신을 위해 일본인인 후쿠다를 고문으로 초빙했지만
그의 컨설팅을 쉽사리 받아들이지 못했다.
결국 후쿠다는 자신의 고문 자리를 걸고서
이 회장에게 직접 보고서를 올리는 지경에 이른다.
신경영 선언이 터져 나오게 된 과정에서
촉매 역할을 했던 일명 ‘후쿠다 보고서’가 그것이다.
그 보고서로 인해 당시 삼성 임직원들의 저조한 디자인 인식 수준이 낱낱이 드러났다.
급기야 이 회장이 디자인 경영을 가속화하게 된 사건이 터졌다.
1995년 삼성 모 계열사 직원이 경쟁사 제품을 촬영하다 발각된 것이다.
이 회장은 즉각 “남의 것을 도둑질하지 마라.
전무급 이상은 무조건 디자인을 공부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따라 삼성전자 전무급 이상 50여명이 도쿄로 날아가
일본 기업들의 디자인 경영을 직접 체험하는 기회를 가졌다.
이들은 1만 엔씩을 지급받아 디자인이 우수한 제품을 사오기도 했다.
이를 계기로 삼성은 디자인에 대한 전폭적인 인식의 전환을 이뤘다.
삼성 디자인 학교인 SADI를 설립(1995년)했으며,
또 해외 디자인 거점을 3곳에서 6곳으로 확대했다.
세계적인 디자인 전문가들로 구성된 ‘글로벌 디자인 자문단’을 통해
글로벌 디자인 역량 강화에도 나섰다.
디자이너와 엔지니어 싸우면 디자이너 손 들어줘
이와 함께 삼성은 디자인 혁신을 이루기 위해
확보한 디자인 인력들이 제대로 일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했다.
‘선 디자인, 후 개발’ 원칙도 세웠다.
한 마디로 디자인에 맞춰 제품을 개발하라는 얘기였다.
처음에는 디자이너와 엔지니어 간에 얼굴을 붉히는 일이 많았다.
디자인에 맞춰 제품을 개발하기에는 기술적 어려움이 많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이 회장을 비롯한 최고경영진들은 항상 디자이너의 손을 들어줬다.
디자이너가 그려온 대로 개발하라고 교통정리를 한 것이다.
‘디자이너의 창의성은 존중돼야 한다’는 철칙이 견고히 자리잡게 된 사건이 있었다.
삼성은 산업디자인 인력을 육성하기 위해 1996년 외국인 교수 5명을 채용해
IDS(Innovative Design of Samsung)를 설립했다.
초대원장으로 관리 전문가가 임명됐다.
하지만 얼마 안돼 초대원장과 교수 간의 불협화음이 생겼다.
디자인 마인드가 부족한 원장이
외국인 교수들을 관리하려 하자 외국인 교수들이 반발한 것이다.
참다 못한 교수들은 이 회장에게 “디자인을 잘 모르는 원장이
사사건건 간섭해서 도저히 학습 분위기가 조성되지 않고 있다.
이런 분위기에서는 도저히 못한다.
차라리 미국으로 돌아가겠다”는 장문의 편지를 보냈다.
편지를 읽은 이 회장은 “어렵게 뽑은 인력들을 왜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가.
저렇게 억누르면 경쟁력 있는 디자이너가 어떻게 나오냐”며 즉각 개선토록 지시했다.
이건희 회장이 직접 디자인 관련 아이디어를 내놓기도 했다.
사운드 디자이너의 도입이 대표적이다.
이는 “동남아 등 기후가 습한 지역에서는 소리가 다르게 들리고,
유럽도 지역에 따라 선호하는 소리가 다르다.
이를 반영해보면 어떨까”라고 한 그의 말이 계기가 됐다.
얇고 넓게 만들어 보라는 그의 지시로 탄생한 일명 ‘이건희 폰’과
벤츠 자동차의 컬러를 휴대폰에 응용해보라는
조언에 따라 만들어진 ‘벤츠폰’도 좋은 사례다.
이 제품들은 모두 1000만대 이상 팔렸다.
밀라노에서 제2의 디자인 혁명 선언
그러나 이러한 노력을 기울인다고 해서
하루 아침에 디자인 경쟁력이 일류에 올라선 건 아니었다.
디자인 경영의 성과는 이 회장에게는 여전히 미흡했다.
1993년 신경영 선언에 이은 또 한번의 충격요법이 필요했다.
이 회장은 2005년 4월 삼성전자를 포함한
주요 계열사 사장들을 밀라노로 불러모았다.
밀라노는 디자인의 글로벌 트렌드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곳이다.
밀라노에서 열린 디자인 전략회의에서 이 회장은 이렇게 말했다.
“삼성 제품의 디자인 경쟁력은 1.5류다.
제품이 소비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시간은 평균 0.6초인데
이 짧은 순간에 고객의 발길을 붙잡지 못하면 승리할 수 없다.”
‘제2의 디자인 혁명’을 알리는 순간이었다.
이 자리에서 이 회장은 제품의 기능과 기술을 고려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감성의 벽’까지 넘어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이때 언급한 눈 깜빡 할 새인 ‘0.6초’라는 통찰을 통해서
서서히 삼성 고유의 디자인에 눈 뜨기 시작한다.
이 회장이 강조한 디자인경영은 삼성만의 독창적 디자인과
아이덴티티 구축, 디자인 우수인력 확보, 창조적이고
자유로운 조직문화 조성, 금형 기술 인프라 강화 등 4대 전략으로 구체화됐다.
디자인이 단순히 눈에 보이는 것만이 아니라 개발과
생산 전반에 걸쳐 일어나는 것을 반영한 전략이었다.
삼성전자는 밀라노 디자인 전략회의 후 디자인 관련 조직을 대폭 보강했다.
디자인 경영 센터 내에 ‘선행 디자인 그룹’을 신설했다.
100여명의 조직 구성원 중 40여명이 디자인과 전혀 관련 없는
철학, 역사, 기계공학 등의 전공자였다.
이들은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디자인 영감을 얻었다.
이 회장은 특히 디자인 혁명을 주창하면서 ‘아이덴티티’를 모토로 내세웠다.
“왜 소니는 멀리서 봐도 소니고,
파나소닉은 멀리서 봐도 파나소닉인데,
삼성 제품은 아직도 이름을 보고 확인해야만 하는가?”
상품 기획 단계에서부터 디자이너가 참여하고
새로운 디자인 마인드로 제품을 개발하게 되면서
한 눈에 봐도 삼성 제품이라고 할 만한 제품이 드디어 세상에 나온다.
바로 ‘보르도 TV’다.
이는 단순히 디자인적인 성공에 머문 것이 아니라
기구설계, 금형, 마케팅에 이르기는 전반적인 과정에서
디자인 중심의 개발이 이루어낸 성과였다.
그리고 그 결과는 초대박이었다.
1년간 전세계에서 300만대가 판매되는 기록을 수립한다.
디자인 통해 TV시장 제패
이러한 성공은 가전 제품이라는 고정관념을 깨고
TV가 인테리어 소품이 되는 새로운 가치를 창조해냈기 때문이다.
소비자들은 단순히 보는 TV가 아니라
보르도 TV로 거실을 아름답게 꾸밀 수 있다는 점에 크게 만족했다.
이후 삼성은 세계 시장 제패를 이어가면서 TV 신화를 써내려 갔다.
삼성은 세계적인 권위의 디자인상인 IDEA와 iF 등에서
누적수상 1위에 오르면서 글로벌 디자인 트렌드를 선도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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