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주 조소앙기념관을 탐방하다.
양주하면 왠지 멀게만 느껴진다. 수원에서 1시간 반 남짓 거리인데도 체감거리는 더 멀게 느껴지는 건 왜일까? 조소앙이란 이름만 알고 있었고 선생의 항일독립운동에 대해 그동안 관심이 부족하여 낯설다는 느낌으로 다가왔다.
마을입구에는 봉암저수지가 있고 저수지 건너편 넓은 터에 조소앙기념관이 자리하고 있다. 850여 년 동안 마을을 지켜온 느티나무가 눈에 들어온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느티나무는 긴 세월 이곳을 지키고 있었다.
맨 처음 우릴 맞이한 건 조소앙 선생 동상이다.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100주년 되는 해인 2019년은 독립운동가에 대해 기억하고 기록하는 시간으로 집중되었다. 추모공간으로 마련된 동상 앞에서 묵념을 하며 독립운동가들의 숭고한 희생에 고마운 마음을 새겨본다.
동네가 한적하다. 각 학교들은 단기 방학이고 직장인들은 긴 연휴라 많은 사람들이 놀러 나가는 이 시점에 우리는 경기도 항일유적지 탐방으로 조소앙기념관에 왔다.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아 기념관이 있는 주변은 너무나 조용하다. 조소앙 선생의 본가 옆에 기념관을 짓고 그 앞에 작은 연못을 만들어 관람객을 맞이하고 있다.
조소앙은 할아버지로부터 한학을 배웠다. 16세에 성균관에 입학하여 그곳에서 신채호와 함께 친일 행위를 성토하는 격문을 돌리기도 했다. 이것은 선생의 최초의 학생운동으로 꼽는다. 성균관을 졸업하고 국비유학생으로서 일본 도쿄부립제일중학교에 입학하였다. 을사늑약 후 일본인 교장은 한국 학생들에게 고등교육이 무리라고 발언한 데 항의하여 동맹파업을 단행하고 퇴학하였다. 이후 메이지대학 법학부에 입학하여 한인 유학생 활동으로 한일합방을 규탄하는 성명서를 내는 등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1912년 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하여 경신학교, 양정의숙 등에서 교사로 재직하고 애국계몽 운동에도 가담하였다.
1913년 조소앙은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였다. 그곳에서 신규식, 박은식, 신채호, 김규식을 비롯한 인사들이 설립한 동제사에 합류하였다. 동제사는 상하이 첫 독립운동단체였다. 1919년 2월 지린에서 여준, 박찬익, 김좌진 등과 함께 무장투쟁과 의혈투쟁을 전개하기 위해 대한독립의군부를 조직하고 부령의 직책을 맡았다. 대한독립의군부에서 국외 독립운동가 39인의 명의로 발표한 ‘대한독립선언서’를 기초하였고, 그해 3월 대한독립의군부 대표로 독립자금 2천원을 갖고 상하이로 와서 임시정부 수립 작업에 참여하였다.
1919년 4월 10일과 11일에 29명의 의원이 참석하여 임시정부 조직을 위한 회의가 개최되었는데 ‘임시의정원’이라 명칭 하였다. 임시의정원에서는 해방 될 때까지 입법. 의결기관으로 임시정부의 정책을 수립 결정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민주공화제에 입각한 임시정부의 헌법을 제정하는데 큰 공을 세웠고 국무위원 비서장에 선임되었다.
조소앙은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한 김규식 대표의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유럽으로 갔으나 이미 회의는 끝났다. 하지만 이에 좌절하지 않고 유럽에서 독립외교 활동을 전개하였다. 스위스 루체른에서 개최된 만국사회당대회에서 한국사회당 대표 자격으로 참석하여 ‘한국독립승인결의안’을 통과시키는 외교적 성과를 거두는 등 유럽에서 활발한 활동을 해 나갔다.
1940년 김구의 한국국민당, 지청천의 조선혁명당과 통합하여 한국독립당을 창당하였고, 1930년 창당한 한국독립당의 삼균주의적 독립운동 노선이 그대로 계승될 수 있도록 하였다. 2차 세계대전 종전을 앞두고 연합국들 사이에서 한국문제 처리방안으로 국제공동관리 방안이 거론되었다. 이에 국제공동관리의 부당성을 주장하고 한국의 즉시 독립의 당위성을 밝히는 다양한 외교언론 활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하였다. 1943년 11월 이집트 카이로에서 미국.영국.중국 3국의 정상이 모여 회의한다는 소식을 듣자 중국 국민당의 장제스를 통해 한국의 독립을 승인받기 위한 외교활동을 진행하여 1943년 12월 카이로선언에서 한국을 독립시키겠다는 국제적 약속이 발표되었다.
1945년 임시정부 요인 2진으로 귀국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중심으로 건국 작업을 진행하고자 하였으나 미군정이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자 한국독립당 명의로 활동을 하였다. 해방되자 미국과 소련은 신탁통치를 내세워 완전한 독립을 꿈꾸던 국민들을 실망시킨다. 이에 조소앙 선생은 신탁통치 반대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1946년 삼균주의 청년동맹, 학생동맹을 결성하여 삼균주의 국가건설 작업을 추진하였다. 그러던 중 1948년 김구와 김규식이 추진한 남북협상운동에 참여하여 평양에 다녀왔다. 1948년 5.10 선거에는 참여하지 않았으나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서울 성북구에 출마하여 전국 최다 득표로 당선되었다.
1950년 6.25전쟁으로 납북되어 1958년 평양에서 별세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묘소는 평양 애국열사릉에 안장되어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9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고 경기도 양주군 남면 황방리 선영에 의관장으로 묘소를 만들고 주변 성역화작업을 하였다. 또한 2015년 경기도 양주시에 선생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조소앙기념관을 건립하였다.
아이들에게 이 많은 걸 설명해 주었을 꺼라고 생각하면 큰일 난다. 잠시도 가만히 있지를 못하는 아이들을 옆에 잡아두기엔 뭔가가 필요하다. 가족과 함께 탐방을 왔는데 어른들과 아이들을 따로 분리하여 아이들을 돌봐주는 동안 어른들은 잠시 편안하게 설명도 듣고 즐기시길 바랬고, 아이들은 어른들 틈에 끼여서 괜스레 잔소리나 들으면서 설명을 들을 필요는 없다. 아이들은 따로 인솔하면서 눈높이에 맞게 하나하나 차분히 설명해 주었다.
전시관을 살펴보면서 아까 밖에서 설명들었던 것들을 짚어가며 다시 복습해 주었다. 어른들이 영상을 보는 동안 아이들은 냅다 뛰어서 수호문인 뒷문으로 들어간다. 툇마루에 앉아서 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조소앙은 ○ ○ 이다” 또는 “조소앙‘ 으로 삼행시 짓기, ”조소앙 선생님께 편지쓰기“ ”탐방느낀점 쓰기“ 등 종이를 나눠주고 활동 시작, 아이들은 뭘 어떻게 써요? 라고 묻기 시작하더니 금방 무언가를 쓱쓱 써 내려간다. 결과가 중요한 것은 아니고 잘 몰랐던 것에 대해 알아보고 생각하는 시간이 의미있는 것이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 중
조소앙은 ‘기부자’다. 왜냐하면 조소앙은 자유를 우리에게 주었기 때문이다.
조소앙은 ‘설계자’다. 왜냐하면 기미독립서의 기초와 대한민국 건국의 기초를 설계하셨기 때문이다.
이 외에도 짧은 시간에 다양한 의견들이 나왔다.
참가자 아빠는 ‘가족과 함께 합심해서 뭔가를 생각하고 활동하는 기회가 많았으면 좋겠다’ 라고 하신다. 뜻 깊은 시간을 만들어 주셔 고맙다고 한다.
김구선생님과 함께 독립운동 노선을 같이 해왔는데 지금까지 김구선생님 보다 덜 알려진 것은 아마도 북한으로 납북되어서 그랬을 것 같다. 기념관 옆으로 새롭게 복원된 본가를 둘러보았다. 집의 기둥에는 소앙선생님을 기리기 위해 조갑제가 쓴 주련이 걸려 있다.
靈山精氣 素昻輩(영산정기 소앙배) 신령이 엉긴 명산 감악은 소앙을 품어 배출하고 영웅을 길러낸 곳이다.
靑雲之望 玄海灘(청운지망 현해탄) 젊은 청춘에 대망을 품고 황실유학생으로 현해탄 건너 명치대 법대 유학하여 졸업하다.
上海臨政 外務長(상해임정 외무장) 상해임시정부 외무총장 중직이라, 대동단결선언, 대한독립선언서(무오독립선언서) 상해임시정부 수립 시 대한민국국호, 임시헌장(대한민국 헌법 효시), 건국강령 등 대한민국의 설계자
三均主義 制憲楚(삼균주의 제헌초) 대한민국 건국이념 삼균주의 차시 국가헌법 제헌의 주춧돌 위에 기둥이 되었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