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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호산아] ☆ 낙동강 1300리 종주 대장정 (29)
생명의 물길 따라 인간의 길을 생각한다!
☆ [낙동강 종주] * 제12구간 (구미→왜관) ② 매학정→구미대교 (동락서원)
2020년 10월 29일 (목요일) [독보 32km]▶ 백파
☐ [구미]→ [감천] 방초정- 직지사- 매학정→ 숭선대교→ 구미 산호대교→ [구미대교]→ 동락서원→ 남구미대교→ 낙동강 동안 수변공원→ [칠곡보]—[낙동강 철교]→ [왜관]
매학정→ 숭선대교→ 산호대교→ 구미대교
☆… 구미시 고아면 예강리 낙동강 매학정을 둘러보고, 숭선대교를 건넜다. 오늘의 낙동강 종주는 숭선대교 앞에서 시작하여 낙동강 동안(東岸)의 바이크로드를 따라 걷는다. 숭선대교에서 산호대교까지의 제방 길은 10.3km이다. … 숭선대교에서 1.5km 정도 강변의 길을 따라 내려오면, 낙동강 강안에 ‘해평습지’가 있다. 그리고 해평의 습문천을 통과하기 위해 25번 국도의 교각 아래를 지나 하천을 조금 거슬러 올라가 다리를 건너 습문천을 따라 다시 낙동강 강안으로 내려왔다. 낙동강 제방 길은 직선으로 이어져 있다. 강안에는 둔치이고 좌측은 들판이다. 조금 아래로 내려오면 강안의 모래사장이 해평철새도래지가 있다. 안내판이 있으나 오늘 따라 철새는 보이지 않았다.
해평습지와 철새도래지
구미의 ‘해평습지’는 세계적인 철새도래지이다. 해평면 해평리 일대에 시원하게 펼쳐진 낙동강 중류의 수변공간인 해평습지는 4만평에 이르는 넓게 펼쳐진 곳이다. 낙동강 숭선대교 아래 1km 지점에서부터 습문천 아래까지의 낙동강 강변 유역이다. 맑은 강물, 깨끗한 모래톱, 안락한 습지(濕地)가 넓게 형성되어 있고 강 양쪽에 약 1,500ha에 달하는 농경지가 있어 먹이공급원의 기능을 하고 있다. 그래서 매년 겨울이면 수많은 철새들이 모여들어 이곳에서 월동(越冬)을 한다. 주요 서식 조류 및 서식 현황은, 텃새인 독수리, 원앙, 왜가리, 백로, 까치, 비둘기, 황조롱이 등이 있고, 철새로는 재두루미, 흑두루미, 고니, 기러기, 오리류 등이다. 특히 해평습지의 독수리, 원앙, 재두루미, 흑두루미, 고니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길은 성수천을 지나 강변의 너른 수변공원을 끼고 내려왔다. 강안에는 교량 건설 공사가 한창이었다. 선산읍에서 구미시 양포동 33번 도로와 연결하는 도로이다. 내년 2021년 개통을 앞두고 있다. 휘어지는 강변 길을 돌아 선호대교로 연결되는 도로에 올라섰다. 교량의 가장자리에 바이크로드가 시설되어 있었다. 산호대교는 구미시 동쪽의 양포동과 서쪽의 비산동 사이를 잇는 교량이다,
구미 비산동 산호대교
산호대교는 앞에서 좌측의 산록에 1979년에 설립된 국립금오공과대학이 있다. 그 이전 구미에는 1972년, 구미 국가산업단지를 조성하면서, ‘동양 최고 기능인을 양성하기 위해’ 구미시에 동양 최대의 규모의 국립 ‘금오공업고등학교’를 설립했다. 전국 각지 중학교에서 최고의 수재(秀才)들이 입학하여, 학비는 물론 기숙사비, 생필품 비용까지 모두 정부로 부터 지원받은 '100% 국비 장학생'들 이었다. 이후 금오공과대학은 반도체 등 첨단산업의 기술 인력을 양성하기 위해 1979년에 설립되었다. 처음 사립이었으나 국립대학으로 전환되었다. 산호대교를 건넜다. 숭선대교에서 산호대교까지의 제방 길은 10.3km이다. 산호대교에서 남구미대교까지 6.3km가 구미 제1-2 공단구간으로, 직선의 낙동강 제방 길(바이크로드)이다.
12시 30분, 산호대교를 건너 교각 아래로 돌아서 이어지는 비산동 강안의 제방 길로 들어섰다. 여기서부터 낙동강의 서쪽 제방 길을 걷는 것이다. 산호대교를 건너 낙동강 서로(西路)의 제방 길에서 트레킹이 이어진다. 길의 왼쪽은 낙동강이 흐르고 오른쪽을 구미공업단지 제1·2공단이 있다. 지금은 낙동강을 중심으로 강의 좌우에 거대한 구미국가산업공단이 자리하고 있다.
구미시(龜尾市)
구미시(龜尾市)는 대한민국 경상북도 서남부에 위치한 첨단산업도시이다. 대한민국 최대의 내륙 산업단지를 보유하고, 서울로부터 277km, 부산으로부터 167km 거리에 있다. 구미시는 인구 42만명이고, 선산읍, 고아읍, 산동읍을 비롯한 3읍, 5면, 18개 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도립공원인 금오산과 천생산, 태조산(냉산) 등이 도시를 병풍처럼 싸안고 있고, 낙동강(洛東江)이 도심 중앙을 흐르는 아름다운 도시이다. 천혜의 자연환경 속에서 국내 유수의 산업단지가 있는 창조적 변화를 추구하는 도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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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의 진산 금오산(金烏山)]▶ 구미의 진산인 금오산(976m)은 1970년 한국 최초의 도립공원으로 지정된 산으로, 동화산, 수양산, 와불산, 대본산, 남숭산, 거인산 등으로 불리는데 모두 그 연원을 지니고 있다. 금오산(金烏山)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이곳을 지나던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저녁 노을 속으로 황금빛 까마귀가 날아가는 모습을 보고, 태양의 정기를 받은 산이라 하여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금오산(金烏山)은 백두다간의 산줄기가 영남지역으로 내려오다가 추풍령에서 동으로 뻗어서 구미와 김천, 칠곡 3개 시군에 걸쳐 있는 산으로 각 지역에서 보는 시각에 따라 다르게 불려왔다. 선산 방면에서 보면 붓끝 같다 해서 ‘필봉(筆鋒)’, 김천 방면에서는 부잣집의 노적가리 같다고 ‘노적봉(露積峰)’, 낙동강 건너편 인동 방면에서 보면 선비가 관을 쓴 모습이라 해서 ‘관봉(冠峰)’ 등으로 불렀다고 한다.
산 주변 문화유적은 금오산성이 있으며 둘레 약 3500m로 성안에 3개의 연못과 4개의 샘에서 계곡물이 흐르는 요새로 고려 때부터 내려오는 고성이다. 현재 성벽의 흔적은 곳곳에 남아있고 성루 지붕으로 보이는 기와도 찾아볼 수 있다. 또한 금오산에는 고려말의 충신 길재 선생의 채미정이 있고, 선비 강혼과 성주기생 은대선의 사랑 이야기, 주천자 전설, 노촌 이약동과 약사암에 얽힌 전설도 전해 내려오고 있다.
* [구미의 유서 깊은 정신문화]▶ 원래 구미는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가진 정신문화의 산실이다. 구미 지역은 낙동강 주변으로 가야시대 고분군과 유적이 발굴되고 있는, 역사적으로 고대문화가 발달했던 지역이다. 신라시대에 한반도에서는 처음으로 불교가 전해진 곳[신라불교초전지]이고, 해동 최초의 가람인 도리사(桃李寺)가 있는 곳이다. 조선시대에는 성리학을 꽃 피운 지역으로써 야은 길재, 강호 김숙자, 점필재 김종직, 여헌 장현광 등 학자와 사육신 하위지, 생육신 이맹전, 한말 의병대장 허위 등 숱한 우국지사를 배출하였다. 근래에 와서는 과감한 수출 정책을 추진하고 새마을운동을 창시하여 국가 번영의 기틀을 다진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의 출신지이기도 하다.
구미 국가산업단지
과거 구미는 선산군 중심의 농업(農業)이 산업의 주축이었으나, 1970년대 초 정부의 수출드라이브 정책에 힘입어 구미국가산업단지가 조성되면서 내륙 최대의 첨단 수출 산업단지를 보유한 도시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구미 국가산업단지(國家産業團地)는 경상북도 구미시와 칠곡군에 위치한 국가산업단지로, 전자·반도체 산업의 중점 육성을 중심 목적으로 하여, 1969년 3월 4일에 처음 (제1단지)가 설립되었다. 초기에는 섬유나 가정용 전자제품 생산이 중점이 되었지만, 삼성전자 등의 휴대전화 생산 단지가 들어서면서 반도체·디지털 산업이 주로 육성되었다. 삼성전자나 LG전자, LG생활건강의 자회사인 LG유니참 등의 기업을 중심으로 중소기업과 연대하여 형성되어 있다.
주변과 비교할 때 지대가 비교적 평탄하고, 단지를 관통하는 낙동강(洛東江)을 수원(水源)으로 하여 하루에 33만톤 이상의 물을 공급하고 있어, 공업단지로 최적의 요건을 갖추고 있다. 2005년에 단일 산업단지 최초로 300억불 수출을 달성하였으며, 이는 대한민국 수출액의 11퍼센트, 무역 수지 흑자액의 84퍼센트에 해당한다.
구미국가산업단지(제1공단동)는 총면적이 10.4㎢로 1973년에 완공되었으며, 섬유, 전자 산업이 들어서 있다. (제2공단동)는 2.3㎢로 1983년에 완공되었고, 주로 반도체산업과 전자산업이 입주해 있다. 그리고 1992년에 완공된 국가산업단지 제3단지(구미시 시미동)는 면적이 4.8㎢로 첨단전자산업이 들어서 있다. 입주 업종은 일반 전자 공업 및 연관 공업, 반도체 및 기타 중요 산업체로 비공해 업종이어야 하며, 수출업체는 우선권을 주도록 되어 있다. 2006년 말에 조성이 완료된 제4단지(구미시 산동읍)는 디지털 산업 단지 및 외국인 기업 전용 단지로 조성되었다. 제1·2단지는 낙동강 서쪽 구미시 도심에 인접해 있고, 제3·4단지는 낙동강 동쪽에 있는 용포동, 옥동, 인동 등에 새롭게 조성된 신도시 산업단지이다.
구미시 미래 첨단산업을 열어갈 산동읍·해평면 일원 제5공단 하이테크밸리와 구미국가산업단지 확장단지 등이 조성되면 구미시는 38.1㎢의 거대 산업도시로 거듭나게 된다. 이제 구미시는 모바일, 디스플레이 등 첨단IT산업에서 탄소소재, 자동차부품, 전자의료기기, 국방산업, 신재생에너지 등 신성장 동력산업으로 산업 다각화를 이루고 있다.
직선의 제방 길
남으로 뻗어 있는 긴 제방 길, 아스콘으로 포장된 바이크로드는 아주 깔끔하게 정비되어 있다. 좌측의 낙동강 강안의 너른 둔치에는 잔디와 편의 시설이 갖추어진 수변공원이 잘 조성되어 있고, 오른쪽은 많은 차량이 다니는 33번 도로, 왕복 4차로의 널찍한 ‘낙동강변로’가 제방 길과 나란히 이어지고 있다. 주변이 모두 공단지역이어서 그런지 도로에는 각종 화물차나 콘테이너차량이 많이 눈에 띄었다. 그리고 공단 지붕 너머 멀리 구미의 진산 금오산이 거대한 실루엣으로 시야에 들어왔다.
구미대교
오후 1시 구미대교에 이르렀다. 산호대교에서 2km 내려온 지점이다. 구미대교는 이곳 서쪽의 공단동과 낙동강 동쪽의 구미시 인동을 잇는 다리이다. 제1·2산업단지와 제3단지와 연결되는 교량이다. 그런데 인동의 구미대교 낙동강 강변에 인동향교와 여헌 장현광을 모시는 ‘동락서원’이 있다. 인동 장씨(仁同張氏) 여헌 장현광은 앞서 탐방했던 금오서원에도 종향(從享)되어 있는 분으로, 여기 구미시 인동(仁同)은 바로 그의 본관(本貫)이다. 아직 앞으로 갈 길이 멀지만, 구미대교를 건너 동락서원을 찾았다.
동락서원(東洛書院)
☆… 동락서원(東洛書院)은 구미대교 건너서 바로, 다리 옆 강가에 자리 잡고 있었다. 강안까지 물이 차오른 서원 앞, 강가의 둔덕에 은행나무 거목이 서원을 지키고 있었다. 강가의 팔각정(八角亭)은 호수처럼 넘실거리는 강물을 바라보며 조용히 세월을 삼키고 있었다. 거기 팔각정에 올라서 낙동강을 바라보며 은연히 치열한 생애를 살았던 여헌 장현광선생의 학덕을 생각하며 가슴이 뜨거워졌다. 여헌 선생의 생애를 생각해 보면 선생은 성품이 개결하고 상당히 의기가 강한 분이었다. 벼슬보다는 산림(山林)에 머물면서 학문에 정진하고, 국난의 위기에서는 결연히 일어섰으며, 병자호란(丙子胡亂)의 치욕을 듣고 분을 삭이지 못해 세상을 떠나셨다. 강 건너 멀리 금오산이 보이는 인동(仁同) 마을은 선생의 세거지이다. (지금은 인동마을 낙동강 강안으로 세계적 ‘LG Disply’ 공장 등 제3단지의 공단이 들어서 있다) 생전 선생의 의분을 씻어주기라도 하듯이 낙동강 언덕 위에 ‘경덕사(景德祠)’를 짓고 선생의 위패를 모셨다.
동락서원(東洛書院)은 1655년(효종 6)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장현광(張顯光)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고 영정과 위패를 봉안하였다. 1676년(숙종 2)에 ‘東洛’(동락)이라는 편액을 받아 사액서원으로 승격되어, 선현 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다가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71년(고종 8)에 훼철되었다. 1904년(광무 8) 영당을 건립하였다. 동락은 ‘동방(東邦)의 이락(伊洛)’의 준말로 ‘이락’은 북동의 대유학자 정호(程顥) 정이(程頤)의 유적지이다.
그 뒤 지방유림에 의하여 다시 복원됨과 동시에 장경우(張慶遇)를 추가로 배향하였다. 경내의 건물로는 3칸의 경덕사(景德祠), 6칸의 중정당(中正堂), 각 3칸의 동재(東齋)와 서재(西齋), 신문(神門), 3칸의 문루(門樓), 4칸의 고사(庫舍) 등이 있다.
묘우 경덕사(景德祠)에는 장현광과 장경우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중정당(中正堂)은 서원의 강당으로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로 되어 있는데, 마루는 원내의 행사와 유림의 회합장소로 사용되며, 협실의 동쪽 방은 헌관실(獻官室), 서쪽 방은 재석실(齋席室)로 사용된다. 신문(神門)은 제관의 출입문이고, 동재와 서재는 유생들의 공부하는 숙소이다.
서원의 강당 중정당(中正堂)은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유물로는 장현광의 유품 및 문집 7권 등이 있다. 매년 2월 중정(中丁 : 두번째 丁日)과 8월 중정에 향사를 지내고 있으며, 제품은 4변(籩) 4두(豆)이다. 재산으로는 전답 3,600평, 임야 6정보, 대지 1,000여 평 등이 있다.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장현광(張顯光)은 본관이 인동(仁同)이고, 자 덕회(德晦)이며. 호 여헌(旅軒)이다. 정부에서 학문적 권위를 인정한 산림(山林)에 꼽혔다.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에 힘써 이황(李滉)의 문인들 사이에 확고한 권위를 인정받았다. 류성룡(柳成龍) 등의 천거로 여러 차례 내외의 관직을 받았으나, 1602년(선조 35) 공조좌랑으로 부임하여 정부의 주역(周易) 교정사업에 참여하고 이듬해 잠깐 의성현령으로 부임한 것 외에는 모두 사양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후 산림직으로 신설된 성균관 사업(司業)에 서인인 김장생(金長生), 박지계(朴知誡)와 함께 선발되었다. 이후 장령으로 잠깐 상경하였을 뿐 이조참판·대사헌·우참찬 등에 모두 나아가지 않아서, 영남 남인 중 정경세(鄭經世) ·이준(李埈) 등이 중앙에 진출하려 한 것에 대비된다. 1636년 12월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여러 군현에 통문을 보내어 의병을 일으키게 하고, 군량미를 모아 남한산성으로 보내기도 헸다. 그러나 이듬해 1월 삼전도(三田渡)에서의 항복 소식을 듣고, 절망한 나머지 세상을 버릴 생각으로 동해 바닷가의 입암산(立嵒山)에 들어가, 반 년 후에 세상을 떠났다.
사상적 특징은, 유학의 입장에서 태극(太極)을 내세우되 일체유(一體儒)와 그 근원을 대대(對待)와 조화(調和)의 논리로 융화 종합하는 철학적 근거를 명시하였다. 문집으로 『여헌집』이 있고 『성리설(性理說)』『역학도설(易學圖說)』『용사일기(龍蛇日記)』등이 있다. 류성룡·정경세 등과 더불어, 영남의 수많은 남인 학자들을 길러냈다. 영의정이 추증되었다. 성주의 천곡서원(川谷書院) 등 여러 곳에 제향되었다.
병자호란(丙子胡亂) — 조선의 굴욕으로 끝난 47일간의 전쟁
17세기 초, 만주에는 누르하치가 여진족(女眞族)을 통일하고 후금(後金)을 세웠다. 당시 중국 땅을 차지하고 있던 명(明)나라는 임진왜란 때 5만의 군사를 보내어 조선을 도와준 후, 국력이 약해지고 농민의 반란이 일어나 멸망의 길을 걷고 있었다. 명나라 동북의 도시 랴오냥(遼寧)을 공격하여 빼앗은 후금(後金)은 조선에 갖가지 조공과 형제 관계를 요구했다.
명나라가 약해진 틈을 타 일어난 후금이 힘을 키우고 있을 때, 조선의 임금은 광해군(光海君)이었다. 광해군은 냉철하고 현명한 임금이었다. 의리만 생각하여 망해가는 명나라를 무조건 돕다가는 후금이 중국의 주인공이 되는 날 후환을 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간파했다. 그래서 명나라에 지원군을 보내며 강홍립 장군에게 기회를 엿보라는 지시를 내렸다. 강홍립은 광해군의 뜻을 알아채고 명나라를 도와주는 척하다가 후금에 투항했다. 이런 탁월한 중립 외교 덕분에 광해군 때에는 후금의 침입이 없었다.
그런데 광해군이 도덕적으로 큰 잘못을 저질렀다. 선조의 계비 인목대비에게서 태어난 이복동생인 영창대군을 강화로 유배 보낸 후, 죽여 버렸다. 광해군의 반대파인 서인(西人)들은 군사를 일으켜 광해군을 몰아내고 능양군을 왕위에 올렸다. 이것이 1623년에 일어난 '인조반정(仁祖反正)'이다.
그런데 인조의 조정은 금(金)을 배척하고 명(明)과 친하게 지내는 ‘친명배금(親明排金)' 정책을 취했다. 또 후금이 차지하고 있던 요동 지방을 되찾기 위해 평안북도에 주둔한 명나라 군대를 몰래 지원했다. 명나라와 경쟁 관계에 있던 후금은 이것을 아주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런데 때마침 '이괄(李适)의 난'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남은 무리들이 후금을 찾아가 ‘지금이야말로 조선을 칠 때’ 라고 조선을 칠 것을 부추겼다. 후금은 이러한 것들을 구실 삼아 형제 관계를 요구하며 전쟁을 일으켰다. 이것이 1627년에 일어난 '정묘호란(丁卯胡亂)'이다. 3만 군사를 앞세운 후금은 압록강을 건너 황해도까지 침입했고, 인조는 할 수 없이 후금과 형제 관계를 맺었다. ☞ * [참고] … ‘이괄의 난’은 인조반정에서 인조를 왕위에 올리는 데 큰 공을 세운 이괄(李适)이 높은 벼슬을 받지 못한 것에 불만을 가지고 일으킨 반란이다. 이괄의 군대가 평안도부터 한양까지 점령하여 인조는 공주까지 피신을 했다.
그런데 1636년 병자년(인조 14년) 12월 조선의 친명정책에 불만을 품은 청나라가 강력한 군사력으로 조선을 침략해 왔다. 바로 ‘병자호란(丙子胡亂)’이다. 명나라를 치고 중국 천하를 평정하겠다는 야욕을 가지고 있는 청(淸) 태종 홍타이치가 조선에 군신 관계를 요구하며 황금·백금 1만 냥, 전마(戰馬) 3,000필 등 세폐(歲幣)와 정병(精兵) 3만을 요구하였다.
그런데 조선의 조정(朝廷)은 끝까지 싸우자는 척화파(斥和派, 김상헌)와 화친(和親)을 맺고 훗날을 기약하자는 주화파(主和派, 최명길)로 나뉘어 팽팽히 대립했다. 결국 척화파의 주장이 우세한 가운데, 이에 청 태종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조선을 침공했다. 임경업 장군은 압록강 백마산성에서 철벽 수비를 하였지만 청나라 군대는 우회하여 한양으로 진격해 왔다.
인조는 먼저 왕세자와 왕실 가족을 강화도(江華島)로 피신시키고, 후에 강화도로 가려 했다. 그러나 이미 한양 가까이까지 밀고 들어온 청군에 길이 막혀 갈 수 없었다. 그래서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난을 갔다. 청의 홍타이치는 12만의 대군을 이끌고 신의주-평양-개성을 거쳐, 한양 도성을 유린하고 지금의 송파 석촌호수 백사장에 진을 치고 조선을 공포에 몰아넣었다.
인조는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피신했다. 남한산성에는 50여 일분의 식량과 1만 3천여 명의 군사밖에 없었지만, 인조의 조정은 47일간 청나라와 맞서 싸웠다. 청나라 군사는 남한산성을 포위하고 외부의 지원부대를 차단하고 압박했다. 그해 겨울 혹독했다. 살을 에는 추위 속에서 식량과 모든 물자가 소진한 가운데 조선의 조정은 버틸 여력이 없었다. 그런 가운데 강화도가 함락되어 왕실 가족이 모두 인질로 잡혔다는 비보가 전해졌다. 인조는 47일만에 남한산성을 내려와 청나라에 항복(降服)했다.
* [삼전도(三田渡)의 굴욕(屈辱)]
▶ 1937년 1월 30일, 인조는 한겨울 찬바람이 몰아치는 날, 남한산성 서문을 나와 얼어붙은 산길을 내려와 삼전도(지금의 송파)에 있는 청 태종 홍타이치 앞에 나아가 무릎을 꿇었다. 인조는 항복의 표시로 차가운 땅바닥에서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를 해야 했다. ‘3배9고두’란 상복을 입고 3번 큰절을 하고 9번 땅바닥에 머리를 꽝꽝 박아, 절하는 소리가 단 위에 앉아 있는 청 태종의 귀에 들리도록 하는 청(淸)나라 항복의 방식이다. 인조의 이마에서는 피가 흘러 내렸다. 그렇게 조선은 청의 신하가 되었고, 항복의 대가로 엄청난 배상금과 함께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윤집·홍익한·오달제 등 척화파 신하들과 20만 명의 백성을 청에 인질로 보냈다. … 병자호란 후, 청 태종의 요구로, 조선의 항복과 서약을 기록한 大淸皇帝功德碑(대청황제공덕비) [삼전도비]가 세워졌다. 현재 최초에 세워진 곳인 서울 송파구 석촌호수 서호 언덕으로 옮겨져 사적 제101호로 자리잡았다.
임금 인조(仁祖)는 용렬(庸劣)했다. 광해군을 몰아내는 반정으로 뜻밖에 임금으로 옹립되어, 스스로 정치적 역량을 갖추지 못했고 반정공신인 서인(西人)들의 권세에 자신의 뜻을 제대로 펼치지 못했다. 특히 대청(對淸) 전략에서 예조판서 김상헌을 중심으로 한 ‘척화파’의 의리적 명분론과 최명길을 중심으로 한 ‘주화파’의 상황적 현실론을 조율하거나 자신의 주체적인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다가 국가패망의 치욕을 당했다. 김상헌과 최명길은 같은 반정공신으로 같은 서인이었지만 청나라에 대한 대응전략은 상반되었다. 병자호란 이후 김상헌은 노론(老論)의 중심이 되었고 최명길은 소론(小論)이 되었다.
☞ 안동 풍산 소산마을의 안동 김씨 세거지에 있는 청원루는 김상헌이 청나라에 인질로 잡혀 갔다가 돌아와서 기거했던 집이다. 청나라에 대한 반감으로 당호를 청원루(淸遠樓)라 하였다. 그리고 이후 노론의 영수인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은 이미 망해버린 명나라를 죽을 때까지 섬겼다. 만동묘(萬東廟)는 충청북도 괴산군 청천면 화양계곡에 위치한 사당으로,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와준 명나라 신종(萬曆帝)과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의종(崇禎帝)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사당이다. 송시열이 죽자 그의 제자들이, 중국은 이미 청나라 천지로 통일되었는데, 만동묘(萬東廟)를 짓고 글이나 비석마다 명나라 연호 '숭정(崇禎)'을 쓰고 '대명천지(大明天地)'를 표방했다. 만동묘라는 이름은 경기도 가평군에 있는 조종암(朝宗巖)에 새겨진 선조의 어필인 ‘만절필동(萬折必東)’을 모본하여 화양리 바위에 새겨놓은 것을 그 첫 글자와 끝 글자에서 취해 지은 것이다. '만절필동(萬折必東)'은 춘추전국시대 제자백가의 하나인 순자(荀子)가 쓴 말이다. 중원의 젖줄인 황하(黃河)는 수만 번 물길을 꺾어 흐르지만 결국은 동쪽을 향한다는 뜻이다. 중국에선 충신의 절개를 가리키는 이 말이 조선의 중화주의자들에겐 명나라 황제를 향한 변함없는 충절을 뜻하게 됐다.
¶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인조실록(仁祖實錄) 1월 30일자에 이렇게 적고 있다. … [삼전도에서 삼배구고두례를 행하다]
… 용골대(龍骨大)와 마부대(馬夫大)가 성 밖에 와서 상(上, 仁祖)의 출성(出城)을 재촉하였다. 상(上)이 남염의(藍染衣) 차림으로 백마를 타고 의장(儀仗)은 모두 제거한 채 시종(侍從) 50여 명을 거느리고 서문(西門)을 통해 성을 나갔는데, 왕세자가 따랐다. 백관으로 뒤쳐진 자는 서문 안에 서서 가슴을 치고 뛰면서 통곡하였다. 상(上)이 산에서 내려가 자리를 펴고 앉았는데, 얼마 뒤에 갑옷을 입은 청나라 군사 수백 기(騎)가 달려 왔다. (중략) 마침내 말을 달려 앞에서 인도하였다.
상(上)이 단지 삼공 및 판서ㆍ승지 각 5인, 한림(翰林)ㆍ주서(注書) 각 1인을 거느렸으며, 세자는 시강원(侍講院)ㆍ익위사(翊衛司)의 제관(諸官)을 거느리고 삼전도(三田渡)에 따라 나아갔다. 멀리 바라보니 한(칸汗, 청태종 홍타이치)이 황옥(黃屋)을 펼치고 앉아 있고 갑옷과 투구 차림에 활과 칼을 휴대한 자가 방진(方陣)을 치고 좌우에 옹립(擁立)하였으며, 악기를 진열하여 연주했는데, 대략 중국 제도를 모방한 것이었다. 상(上)이 걸어서 진(陣) 앞에 이르고, 용골대 등이 상을 진문(陣門) 동쪽에 머물게 하였다. 용골대가 들어가 보고하고 나와 한[칸]의 말을 전하기를, “지난날의 일을 말하려 하면 길다. 이제 용단을 내려 왔으니 매우 다행스럽고 기쁘다.” 하자, 상(上)이 대답하기를, “천은(天恩)이 망극합니다.” 하였다.
용골대 등이 인도하여 들어가 단(壇) 아래에 북쪽을 향해 자리를 마련하고 상(上)에게 자리로 나가기를 청하였는데, 청나라 사람을 시켜 여창(臚唱)하게 하였다. 상(上)이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를 행하였다. 용골대 등이 상(上)을 인도하여 진의 동문을 통해 나왔다가 다시 동북쪽 모퉁이를 통하여 들어가서 단(壇)의 동쪽에 앉게 하였다. 대군(大君) 이하가 강도(江都)에서 잡혀왔는데, 단 아래 조금 서쪽에 늘어섰다. ☜ 국립고전번역원
… 龍、馬兩胡, 來城外, 趣上出城。上着藍染衣, 乘白馬, 盡去儀仗, 率侍從五十餘人, 由西門出城, 王世子從焉。百官落後者, 立於西門內, 搥胸哭踊。上下山, 班荊而坐。 俄而, 淸兵被甲者數百騎馳來。(중략) 遂馳馬前導。上只率三公及判書、承旨各五人, 翰、注各一人, 世子率侍講院、翊衛司諸官, 隨詣三田渡。 望見, 汗張黃屋而坐, 甲冑而帶弓劍者, 爲方陣而擁立左右, 張樂鼓吹, 略倣華制。上步至陣前, 龍胡等留上於陣門東。龍胡入報, 出傳汗言曰: "前日之事, 欲言則長矣。今能勇決而來, 深用喜幸。" 上答曰: "天恩罔極。" 龍胡等引入, 設席於壇下北面, 請上就席, 使淸人臚唱。上行三拜九叩頭禮。龍胡等引上由陣東門出, 更由東北隅而入, 使坐於壇東。大君以下, 自江都被執而來, 列立於壇下少西矣。
▶ 김훈의 소설 『남한산성』(2008)은, 작가의 상상력이 가미된 소설이기는 하지만, 당시의 처절한 상황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이 작품은 ‘병자호란’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바탕으로 창작된 것으로, 인조와 조선의 조정이 46일 동안 남한산성에 고립된 채 일어나는 다양한 상황들을 임금과 대신, 백성들이 처한 각자의 입장에서 서술하고 있다. 작가는 청나라의 침입과 남한산성에서의 저항, 삼전도에서의 굴욕적인 항복 등을 현대적 정서에 맞도록 재구성하였으며, 간결하면서도 힘 있는 문장을 통해 전쟁의 비참함과 현실에 대한 대응 방식을 두고 벌어지는 주전파(척화파)와 주화파의 갈등, 인조의 고민 등을 실감 나게 묘사하고 있다. 작가는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살아서 죽을 것인가, 죽어서 살 것인가? / 죽어서 아름다울 것인가, 살아서 더러울 것인가? / 실천 불가능한 정의(正義)인가, 실천 가능한 치욕(恥辱)인가?”
인조에 이어 왕위에 오른 효종(孝宗, 봉림대군)은 오랫동안 청에 잡혀 지냈기 때문에 청(淸)에 대한 적대감이 매우 컸다. 조선의 백성들도 청에 엄청난 양의 공물을 바치느라 불만이 높았다. 이에 효종은 '청나라를 쳐서 원수를 갚겠다.'는 북벌정책을 폈다. 그러나 북벌 운동은 효종이 병으로 죽으면서 큰 성과를 얻지 못한 채 실패로 끝났다.
비통한 역사의 눈물
동락서원을 둘러보고 돌아오는 다리 위에서, 나는 얼굴이 화끈거리고 울컥 눈물이 났다. 멀건 대낮, 평화롭기 짝이 없는 낙동강 대교를 건너며 가슴속은 뜨거운 그 무엇이 소용돌이치는 것이었다. 동락서원 강가에서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선생을 만나고, 구미대교를 건너오며 나의 마음은 시리고 아팠다. 병자호란(丙子胡亂) 그 삼전도의 치욕과 처절한 상황이 머릿속에 그려지고, 당대 산림에 처하여 학문에 정진하던 선비 여헌 선생이 그 참담한 소식을 듣고 몸 둘 바를 모르고 부끄러움과 분노로 치를 떨었을 것을 생각하며 공감의 아픔을 느낀 것이다. 그해 병자년 혹독한 겨울, 남한산성에 갇혀 있는 인조와 조선의 조정을 위하여, 선산 낙동강의 선비 여헌(旅軒)은 의병의 궐기를 도모하기도 하고 군량미를 모아 보내는 작업도 하였으나, 결국 나라가 처절한 패망의 굴욕(屈辱)을 당하고 말았으니 얼마나 황망하고, 비통하였을까!
구한말, 구례 지리산의 선비 매천(梅泉) 황현(黃玹) 선생이 경술국치(1910)를 당하여 절명시를 써놓고 자결하신 마음도 이와 같았으리라. … 풍산에서 서애(西厓) 선생의 『징비록』을 통하여 참혹한 임진왜란의 상황을 아프게 회고했지만, 병자호란은 더욱 얼굴을 화끈거리게 했다. 임진왜란 중 우리 민족은 씻을 수 없는 깊은 상처를 입고 또 많은 것을 잃었지만 이순신·권율 장군의 용감하고 헌신적인 활약과 각처에서 일어난 의병(義兵)의 분발로 결국 왜적을 패퇴시켰다. 임금이 무릎을 꿇지는 않았다. …♣
<계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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