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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신은 위험하다. 그러나 혁신하지 않는 것은 더 위험하다’고 한다. 국내 모 대기업에서는 ‘5퍼센트는 불가능해도 30퍼센트는 가능하다’라는 모토를 쓰고 있다. 사실 이런 민간기업이야 혁신하지 않으면 바로 시장에서 도태되기 때문에 누가 시키고 말고 할 것도 없다.
돌이켜보면 국내에선 지난 2000년대 중반부터 정부 주도의 혁신 광풍이 불면서 식스 시그마(Six Sigma)를 필두로 다양한 혁신관리 기법들이 현장에 속속 보급되었다. 특히 BSC(Balanced Scorecard)라 불리는 새로운 평가방식은 학생 교복처럼 전국 방방곡곡으로 팔려나갔다. 연공서열의 타파, 성과급제 실시, 팀제 도입, 외부 전문가 수혈, 성과평가 시스템 도입, 각종 프로세스 개선 활동 등등 사기업에서는 이미 이골이 난 제도지만 정부 및 공공부문에서 상당한 효과를 본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한편에선 혁신 열풍이 지나치다 보니 “혁신 업무가 많아 일을 못 해먹겠다”는 웃지 못 할 이야기도 나왔다. 또한 일부에선 1년 내내 평가보고서를 만드는 데 힘을 소진한 결과 정작 본업을 소홀히 하게 되는 본말전도 현상도 자주 목격된다. 더욱이 혁신이란 것이 공장의 연탄 찍듯이 되는 게 아닌데, 한술 더 떠 혁신 매뉴얼이란 것도 등장했다. 한국에서만 볼 수 있는 보급형 혁신의 진풍경이 아닐 수 없다.
한편, 오늘날까지 국내 경영 현장에서 가장 많이 써먹은 단어는 바로 ‘관리(管理)’라는 일본식 한자다. 관리란 기본적으로 나쁜 변화를 막는 기능으로서 조직의 생존을 보장해주는 가장 필수적 요소임에 틀림없다. 이에 대해 품질의 아버지라 불리는 주란(Juran) 박사는 일찍이 “경영이란 마차는 관리(control)라는 바퀴 하나로는 조금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좋은 변화를 가져오는 혁신(breakthrough)이라는 또 다른 바퀴가 같이 장착되어야만 비로소 운행이 가능하다.”고 설파한 바 있다. 문제는 이 혁신이란 바퀴의 성능이다.
혁신의 ‘혁(革)’은 원래 짐승의 머리 가죽을 펼친 꼴을 본뜬 글자다. 결국 혁신이란 머리 가죽을 벗기는, 정신 개조까지 포함하는 힘든 재탄생 과정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비교적 벗기기 수월한 피(皮)와 구별되는 개념이다. 영어에서도 혁신(innovation)의 어원을 살펴보면 라틴어의 새롭다(new)라는 뜻의 ‘novitas’에서 유래되었다. 따라서 혁신이란 동서양 공히 매우 어렵고 힘든 창조적 파괴의 과정을 의미함이 분명하다.
그런데 국내 경영현장에서는 혁신 하면 대개 구조조정(restructuring)과 동의어 정도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리고 구조조정은 곧 인원정리로만 알아듣는 문화가 만연해 있다. 이는 경영자들의 혁신에 대한 잘못된 인식과 고정관념, 무엇보다 이를 지나치게 남발해온 데다 직원들을 닦달하는 부정적 수단으로까지 써온 데에 그 원인이 있다. 그 결과 불행하게도 대부분 국내 조직의 구성원들은 그동안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들어온 변화와 혁신, 이 두 개의 단어는 듣기만 해도 지루하고 단물 빠진 일란성 쌍둥이 정도로 인식하고 있다. 이른바 ‘혁신피로(innovation fatigue)’ 현상으로 상징되는 지겨운 혁신은 절대 성공할 수 없다. 흥행이 안 되는 영화를 계속 틀어봐야 결과는 뻔한 것이기 때문이다.
혁신 하면 떠오르는 새가 바로 솔개다. 솔개는 최고 약 70세의 수명을 누릴 수 있는데, 이렇게 장수하려면 약 40세가 되었을 때 매우 고통스럽지만 중요한 결심을 해야만 한다. 솔개는 그 나이가 되면 부리나 발톱이 노화하여 사냥감을 효과적으로 잡아챌 수 없게 되고, 날개도 매우 무거워져 하늘로 날아오르기 힘들게 된다. 이때 솔개에겐 두 가지 선택이 있을 뿐이다. 그대로 죽을 날을 기다리든가, 아니면 새로 태어나는 혹독한 과정을 수행하는 것이다. 솔개는 먼저 산 정상부근으로 높이 날아올라 그곳에 둥지를 짓고 머물며 고통스런 수행을 시작한다. 먼저 부리로 바위를 쪼아 부리가 깨지고 빠지게 만든다. 그러면 서서히 새로운 부리가 돋아나는 것이다. 그런 후 새로 돋은 부리로 발톱과 깃털을 하나하나 뽑아낸다. 약 반년이 지나 새 깃털이 돋아난 솔개는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변신하게 된다.
경영학적 관점에서 보면 혁신은 기본적으로 ‘3P’를 바꾸자는 것이다.
첫째. Product(제품) 혁신이다. 이것은 과거 김치냉장고를 만들어낸 사건에서 보듯이 고난도 혁신에 속한다. 스티브 잡스의 아이폰 시리즈도 마찬가지다.
둘째, People(사람)이다. 이건 더욱 어려운 문제다. 많은 경우, 혁신이라 하면 우선 임직원들의 낡은 사고부터 뜯어고쳐야 한다며 대대적인 마인드 교육부터 시키는 것을 볼 수 있다. 과학적으로 밝혀진 사실이지만 인간은 30세 정도가 지나면 거의 바뀌지 않는다고 한다. 나름대로 인생관과 습관이 고정된 사람들을 모아 혁신기법 강의를 몇 번 듣게 한다거나, 지옥훈련을 간다고 해서 바뀌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엄청난 감동과 감화를 받는 경우가 아니라면, 자신에게 정말 도움이 되고 반드시 필요할 때만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한다. 따라서 리더가 비전과 목표를 분명히 정립하여 조직원들로 하여금 미래의 꿈과 함께 변화의 필요성을 인식케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셋째, Process(프로세스) 혁신이다. 기업 경영의 3박자는 결국 사람, 시간, 돈이다. 사람은 갑자기 똑똑해지지 않는다. 24시간을 늘리는 것도 불가능하다. 돈도 펑펑 쓸 수가 없다. 따라서 조직이 할 수 있는 길은 주로 ‘일하는 방식(how to work)’을 바꾸는 것, 즉 업무프로세스(business process) 개선이 될 수밖에 없다. 은행에서 IT 혁신을 통해 1주일 걸리던 대출 기간을 당일로 가능하게 만드는 식이다.
변화관리의 대가인 존 코터(J. Kotter) 교수는 그의 명저 〈Leading Change〉에서 변화와 혁신을 성공으로 이끄는 8단계 과정을 제시하고 있다. 여기서 그는 첫 번째 단계를 ‘불타는 갑판(Burning Platform)’이라 명명하고 있다. 배에서 바다로 뛰어내리라는 말만 듣고 뛰어내리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실제로 불을 본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더 이상 이대로는 안 된다’는 위기의식에서 출발하여 구성원의 자발적 참여를 유도하는 수순으로 가야한다는 것이다. 과거 구본형 박사는 〈익숙한 것과의 이별〉에서 이를 가리켜 ‘확실한 죽음’으로부터 ‘죽을지도 모르는 가능한 삶’으로의 선택이라고 묘사하였다. 결국 개인이나 조직이나 자만심이 팽배해 있을 때는 변화하려고 하지 않는다. 따라서 리더는 왜 변화해야 하는지에 대한 타당하고 극적인 근거를 보여주고, 궁극의 미래 모습을 공유케 하는 것이 혁신의 출발점인 셈이다.
흥미로운 것은 사람의 마인드가 바뀌어야 조직이 바뀌는 게 아니라, 시스템이 변해야 사람이 바뀐다는 사실이다. 기업경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조직문화라고 하지만 그 문화를 만드는 건 시스템이다. 예를 들어 각종 경영혁신 추진 과정에서 조직 내 각종 시스템을 설계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성과평가 시스템의 구축 여부다. 기존의 주먹구구식으로 해온 성과평가를 과학적, 체계적인 평가시스템으로 바꾸는 것만큼 인간의 행동양식을 바꿀 수 있는 강력한 무기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 혁신과정에선 여러 가지 형태의 저항이나 현실적 반대에 부딪히게 된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변화의 의지를 꺾는 냉소적 고정관념과 삐딱한 언사다. 그동안 국내에서 수집된 다양한 뒷다리 잡기식 언어 행태 중 가장 흔한 것을 보면,
“얼마나 가나 봐라” “전에 안 해본 지 아냐?” “빨리 크는 놈이 일찍 나간다” “또 바뀔 텐데, 뭘....” “너나 잘하세요” “구관이 명관이다” “규정엔 있나?” “당신이 부장이야?” 등등이다. 이에 반해 직원의 사기가 높기로 유명한 미국의 온라인 전문 신발기업인 자포스(Zappos.com)는 사내에 긍정적이고 용기를 북돋는 그들만의 문화를 대변하는 ‘Goals Words’ 리스트를 미리 설정해놓고 있다. 이는 상대를 인정하고 기를 살려주는 ‘Winning Words’와 부정적인 언어를 긍정적으로 바꾸어주는 ‘Replacement Words’로 구성되어 있다.
어차피 혁신이란 새로운 환경변화에 대한 시대별 적응 과정이므로, 반드시 필요하고 지속되어야 한다. 혁신이란 세상을 보고 각자의 느낌을 담아 표현하는 경영의 사생대회와 같다. 나아가 해당 기업(기관)의 내부고객과 외부고객의 아이디어의 화개장터가 되어야 한다. 도요타의 혁신과 현대의 혁신이 같을 수 없으며, 같아서도 안 된다. 기업마다 타고난 사주가 다르고 문화가 다르기 때문이다. 혁신에 정답은 없다. 혁신은 유행병이 아니며 평가가 목표인 것은 더더욱 아니다.
유념해야 할 것은 혁신의 타이밍이다. ‘건강은 건강할 때 지키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듯이 혁신은 원래 잘 나갈 때 하는 것이다. 배가 이미 기울기 시작했는데 혁신이다 뭐다 난리를 쳐봐야 배는 더욱 빨리 침몰하는 법이다.
ㅡ 웹진아르코 286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