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회의 뿌리를 찾아서] 한국의 성씨 이야기 <43> 나주정씨·초계정씨
세계일보 기사 입력 : 2013-02-05 22:43:39
김성회 : 한국다문화센터 사무총장 kshky@naver.com
정해·정배걸 시조로 고려 때 문벌 형성… 조선시대 과거 통해 세력 키워
나주정씨는
나주정씨(羅州鄭氏)의 시조는 고려 중엽 때 군기감(軍器監)에 추증된 정해(鄭諧)이다. 그의 증손 정가신(鄭可臣)은 나주의 시중동에서 태어났고 문하시중이 되었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정가신은 시중이 된 뒤 증조부인 정해를 군기감에 추증되도록 했다. 이에 따라 정해를 시조로 하고 정가신을 중시조로 삼고 있다.
정가신이 태어난 지명은 ‘시중동’이다. 그의 벼슬이 시중(侍中)에 이르렀으므로 사람들이 붙여준 이름이다. 또 그가 살던 곳을 금안동(金鞍洞)이라 하는데, 그가 원나라 사신으로 갔다가 황제에게 금으로 된 말 안장과 백마를 하사받아 귀향했기 때문에 생긴 이름이다.
정가신은 7남3녀를 두었다. 그 중 장남은 천태종 대선사인 천이(遷怡)이고 4남은 조계종 대선사인 경부(景孚)이다. 차남 정탁(鄭倬)은 은청광록대부 검교 참지정사이다. 안동부사와 진주목사를 지냈으며 그의 시(詩)가 동문선에 올라 있다. 하지만 그의 후손 파명은 알 수가 없다.
그 외 4명의 아들이 각 파조를 형성하여 나주정씨의 큰 줄기를 형성하고 있다. 3남 정전(鄭佺)의 후손이 대호군공파(大護軍公派)를, 5남 정길(鄭佶)의 후손이 소윤공파(少尹公派)를, 6남 정억(鄭億)의 후손이 지유공파(指諭公派)를, 7남 정엄(鄭儼)의 후손이 상서공파(尙書公派)를 이루고 있다.
나주정씨는 고려조에서 15대 본관 성씨에 꼽힐 정도로 가문이 크게 일어났다. 조선시대 와서는 54명의 과거급제자를 배출했다. 현재 정씨 인구 중에서는 동래정, 경주정, 진주정, 연일정, 하동정 다음으로 많으며 2000년 인구조사에서는 총 2만9068가구에 9만3845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나주정씨의 연혁과 인물
나주정씨의 인물로는 사실상 나주정씨를 개창한 정가신을 들 수 있다. 정가신의 초명은 정흥(鄭興)이고 호는 설재(雪齋)이다. 가신(可臣)은 왕에게 하사받은 사명(賜名)이다. 그는 어려서 천기(天琪)라는 승려의 손에 이끌려 상경했다. 고려 고종 때 문과에 급제한 뒤 충렬왕 때 보문각 대제가 됐으며 밀직학사로 정조사가 되어 원나라에 다녀왔다. 또 정당문학으로 사유(師儒)가 되어 세자를 따라 원나라에 다녀왔다. 다음엔 성절사로 다시 원나라에 다녀온 후 벽상삼한삼중대광수사도에 이르렀다.
문장에 능해 ‘천추금경록(千秋金鏡錄)’을 저술하였고 많은 사령(辭令)을 짓기도 했다. 지금도 그가 태어난 곳을 시중동이라 하고 원의 황제로부터 백마와 금안장을 받아와 살았던 곳을 금안동이라 한다. 또한 그의 집 옆에 지었다는 쌍계정과 태평정이 있다.
정가신의 증손인 정초(鄭初)는 조선 태조 때 문과에 급제한 후 사헌부 지평과 집현전 교리를 거쳐 예문관 응교(藝文館 應敎)를 지냈다. 태종 때는 가뭄이 심하게 든 제주에 목사 겸 안무사로 임명되어 치적을 쌓았다. 그 후 벼슬이 호조판서 겸 오위도총부도총관 의금부사에 올랐다.
또 정가신의 5세손인 정식(鄭軾)은 세종 때 식년문과에 급제하였다. 예조좌랑과 이조정랑을 지내기도 했지만 주변의 음해로 두 번에 걸쳐 벼슬이 삭직되기도 했다. 소헌왕후가 죽자 국장도감 판관(判官)이 되어 능실제도를 관장했으며 이후 의정부 검상(檢詳)과 사인(舍人)을 지냈다.
또한 의주성 축성을 감독하였고 세조 때는 함길도 관찰사로 나갔다가 야인을 정벌하는 데 공을 세웠다. 그 공으로 자헌대부에 올랐으며 그 뒤 병조참판으로 조선 초기 군사제도를 확립하는 데 많은 공을 세웠다. 벼슬은 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가신의 6세손 정국(鄭菊)은 형조참판과 수문전제학을 지낸 정공진(鄭公軫)의 아들이다. 세종 때 과거에 급제하고 단종 때 예조판서에 올랐다. 하지만 세조가 들어서자 벼슬에서 물러나 낙향한 뒤 다시는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정심(鄭諶), 정상(鄭詳), 정여린(鄭如麟). 정심은 선조 원년에 문과에 급제한 후 정랑을 지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병량(兵粮)을 모집하여 김천일(金千鎰)과 함께 출전하였으나 노령으로 병이 나자 조카인 정여린에게 맡기도 돌아왔다.
정상은 정식의 현손이다.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한 후 서천군수와 정랑을 지냈다. 이순신이 한산에서 싸움을 벌일 때 출전하였으나 병을 얻어 귀가하였다. 그 대신 아들 정여린과 종손인 정란(鄭瀾)을 군진에 보냈다.
정상의 아들 정여린은 선조 때 무과에 급제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군량을 이억기군에 공급하였다. 또한 김덕령을 도와 적군을 참살하였으며 이원익의 부산진 공격에 참가하여 전공을 세웠다. 인조 때에는 이괄의 난과 정묘호란에 전공을 세웠으며 벼슬이 가선대부 경원도호부사에 이르렀다. 또한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두 아들을 모두 종군케 했다.
정응(鄭鷹)은 선조 때 무과에 급제한 후 선전관을 지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초토사로 고경명 막하에서 금산전투에 참가하였으나 패전 후 일시 귀향하였다. 다시 아우 정홍(鄭鴻)과 함께 의병 수백명을 모아 도원수 김명원을 찾아갔다. 이에 김명원이 좌수사 이억기 휘하로 들게 하여 당포와 견내량전에서 전공을 세웠다.
또 안골포해전에서 적선 수십 척을 격파하는 전공을 세워 훈련원 주부가 되었다. 그 후 이순신 장군의 노량해전에 참전하여 적선을 공격하던 중 적탄에 맞아 전사하였다. 순조 1년에 통정대부 병조참의에 추증되고 오산사에 배향되었다.
또한 정가신의 11대 손인 정기수(鄭麒壽)는 임진왜란 때 의병을 모아 이순신 장군 휘하에 들어갔으며, 이후 훈련원 참정에 제수되어 한산대첩에 참전하였다. 또한 명량해전 때 전공을 세워 훈련정에 제수되었으나, 이후 노량해전에 참전하여 적탄을 맞고 전사하였다. 후에 병조참의에 증직돼 선무원종공신록에 기록되었다.
정황수(鄭凰壽)는 선조 때 무과에 급제해 선전관이 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김예수·정현보 등과 함께 의병을 모집하여 최경회(崔慶會) 휘하에 들어가 금산과 무주의 적을 격파하였다. 순찰사 권율(權慄)의 추천으로 다경포와 목포 등지에서 전승을 올렸다. 정유재란 때는 서생포로 출전하여 절영도에서 한 척의 배로 적을 물리치는 전공을 세워 군기사 판사에 임명되었다. 선조 41년엔 충청방어사로 출전하여 적선 40여척을 격파한 공으로 가선대부에 올랐다. 후에 이순신 장군 휘하에서 활동하다 노량해전에서 순절하였다.
이렇듯 나주정씨 일문은 임진왜란 때 이순신의 휘하에서 수많은 전투에 참가해 전공을 세운 선조가 많았다. 나주정씨의 현대 인물로는 정광훈(JMI 회장), 정승조(전 합참의장) 등이 있다.
초계정씨는
초계정씨(草溪鄭氏)의 본관인 초계는 지금의 경남 합천군 초계면을 말한다. 초계정씨의 시조는 정배걸(鄭倍傑)이다. 그는 초계면 성산 출신으로 고려 현종 때 급제해 문종 때 예부상서에 이르렀다. 그는 생전에 사숙(私塾)을 열고 많은 제자를 가르쳤다.
그가 연 사숙의 이름은 홍문공도(弘文公徒)다. 이는 고려시대 12공도 중의 하나. 고려시대 12공도 중에서 최충의 문헌공도(文憲公徒)와 더불어 홍문공도가 가장 흥(興)했다는 것이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다. 이로 인해 그는 홍문광학(弘文廣學) 추성찬화공신(推誠贊化功臣)으로 문하시중(門下侍中) 상주국(上柱國)에 올라 광유후(光儒侯)에 추증되었다. 또한 초계군(草溪君)에 봉해져 그의 후손이 초계를 본관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초계정씨는 정배걸의 4세손으로 전중내급사(殿中內給事)를 지낸 정영(鄭榮)의 후손이 내급사공파(內給事公派)를, 또 대제학을 지낸 정윤기(鄭允祺)의 후손은 대제학공파(大提學公派)를 이루고 있다. 그 외에 천호장공파(千戶長公派), 박사공파(博士公派), 대사성공파(大司成公派) 등 5개 파가 있다.
초계정씨의 조선시대 과거 급제자는 문과 58명, 무과 27명, 사마시 203명, 음양과 1명 등 총 289명이다. 또한 2000년 통계청이 발표한 결과에 의하면 총 2만9264가구에 9만3586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초계정씨의 연혁과 인물
시조 정배걸의 4세손 정영은 전중내급사를 지냈고 정윤기(鄭允祺)는 이부상서를 지냈으며 또 다른 후손 정윤기(鄭允耆)는 대제학을 지냈다.
정엽(鄭曄)은 정희년(鄭熙年)의 증손으로, 아버지는 진사 정유성(鄭惟誠)이다. 선조 때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형조좌랑을 거쳤으며 황주판관으로 있을 때 왜군을 격퇴한 공으로 중화부사가 되었다.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고급사(告急使)로 명나라에 파견되었다. 정인홍이 권력을 잡자 종성부사로 좌천되고 동래에 유배되기도 했다. 광해군 때에는 대사성을 거쳐 충청감사와 도승지 등을 지냈다. 계축옥사가 일어나자 도승지를 사직하고, 폐모조치가 일어나자 관직을 버리고 낙향했다. 인조반정 후 대사성과 동지경연, 원자사부를 겸하고 성균관을 다시 일으키는 공적을 세웠다. 이괄의 난 때 공주파천 안을 제기하였으며 공주에 있을 때 정헌대부로 대사헌에 제수돼 우참찬에 올랐다. 저서로 ‘근사록석의(近思錄釋疑)’와 ‘수몽집’이 있다. 사후 우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정온(鄭蘊)은 진사였던 정유명의 아들로 광해군 때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정언 등을 거쳐 부사 직에 올랐다. 그러나 광해군의 비위에 거슬려 제주도에서 10년 동안 귀양살이를 했다. 유배생활 중에 ‘망북두시(望北斗詩)’ ‘망백운가(望白雲歌)’를 지었다.
그 뒤 인조반정으로 풀려나와 경상도 관찰사와 부제학 등을 지냈고 이조참판에 이르렀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김상헌 등과 함께 척화(斥和)를 주장했으나 화의가 성립되자 벼슬을 버리고 덕유산에 들어가 은둔생활을 하였다.
정윤영(鄭胤永)은 순조 때 경기도 화성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정현풍(鄭鉉豊)이며 큰아버지 정현택(鄭鉉澤)에게 입양되어 자랐다. 조선 후기 성리학자인 임헌회(任憲晦)의 문인이 되었으며 심성이기론을 주기의 입장에서 피력하였다. 고종 때 유생들의 신사척사운동(辛巳斥邪運動)이 전국적으로 일어나자 이를 적극 지원한 혐의로 이원현(利原縣)에 정배되었다가 3년 만에 풀려났다. 후에 금부도사, 성균관직강 등의 벼슬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저서로 ‘후산집’ ‘위방집략(爲邦輯略)’ ‘화동연표(華東年表)’ 등이 있다.
초계정씨 현대 인물로는 서울합창단·국립오페라단 지휘자를 지낸 정재동씨가 있으며 정계에는 정균식·정우식 국회의원, 정연기(전북지사), 정종철(경남지사) 등이 있다.
또 의학계에 정담진(의학박사)·정순경(고려연합병원장)·정순오(정산부인과병원장)·정순만(정형외과병원장)·정도영(왕산병원장)·정좌구·정만홍·정재명 등이 있으며 학계에서는 정현복(서예가)·정현백(성균관대 교수)·정종화(건국대 교수)·정경섭(충북대 교수)·정용태(청주대 교수)·정병학(숙명여대 대학원장) 등이 있다. 재계에서는 정인승(쌍용제지 회장)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