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어 있는 세계사]
13세기 여몽 연합군 일본 정벌,
태풍 때문에 실패했어요
원에 항복한 고려도 전쟁에 참가, 두 번 원정 모두 풍랑에 배 침몰
전세 역전한 日, 가슴 쓸어내렸어요… 이 태풍을 후에 '가미카제'라 불렀죠
지난 15일 수퍼 태풍 '망쿳'이 필리핀과 홍콩, 중국 남부를 휩쓸고 지나갔어요. 필리핀이 가장 피해가 컸어요. 필리핀에서만 최소 64명이 목숨을 잃고 45명이 행방불명됐다고 해요. 미국에서는 허리케인 '플로렌스'가 남동부를 강타해 사람들이 10명 넘게 숨졌어요. 미국 정부가 허리케인이 지나는 길목에 사는 사람들 150만명에게 대피하라고 경고했지만, 자연의 위력을 이기진 못했죠.
때로는 인간이 손쓸 수 없는 자연재해가 세계사 흐름을 통째로 바꿔버리기도 한답니다. 일본을 전쟁 위기에서 구해준 태풍이 그 예라고 할 수 있어요.
◇쿠빌라이가 보낸 사신
13세기 후반 쿠빌라이 칸이 몽골 제국의 황제 자리에 올라 나라 이름을 '원나라'로 바꾸고 수도를 베이징으로 옮겼어요. 몽골 제국의 전성기였죠.
몽골 제국이 힘을 얻기 전, 중국 대륙의 주인이었던 송나라는 북쪽에서 내려오는 몽골 제국에 중국 대륙 남쪽으로 밀려난 상태였어요. '남송'이라고 해요. 쿠빌라이는 남송을 마저 정복하고 싶어 했어요. 그는 우선 남송과 가깝게 지내던 일본을 몽골 제국 편으로 끌어들이려 했어요. 하지만 일본은 몽골 제국의 말을 듣지 않았어요. 쿠빌라이는 일본을 괘씸하게 여겨, 몽골 제국과 일본의 중간에 있는 고려에 "길을 안내하라"고 했어요.
고려는 고민에 빠졌어요. 고려는 몽골 제국 침략에 맞서 30년 동안 싸우다가 항복한 터라, 몽골 제국의 말을 거역하기 힘들었어요. 그래서 고려 정부는 몽골 제국 사신들에게 잔뜩 겁을 줬어요. 바다가 험하고 풍랑이 심해 군대가 일본까지 무사히 가기 힘들다고요. 그래도 쿠빌라이는 뜻을 굽히지 않았어요. 고려는 하는 수 없이 일본 남부 규슈까지 가는 바닷길을 몽골 제국에 알려줬어요.
◇여몽 연합군 덮친 태풍
쿠빌라이가 일본 정벌을 벼르는 중에도, 일본은 쿠빌라이가 보낸 외교 문서와 사신을 모두 무시했어요.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원나라 군대가 정말로 쳐들어올까 봐 신에게 계속 기도를 올렸어요.
몇 번이나 사신을 보내도 일본이 제대로 답하지 않자, 마침내 쿠빌라이는 전쟁을 결심했어요. 고려에 전쟁 물자를 준비하라고 지시했지요. 고려는 몽골의 독촉에 쫓겨 4개월간 일본 원정에 쓸 군함 900척을 만들었어요. 몽골군 2만5000명, 고려군 1만5000명이 모인 '여몽 연합군'이 생겼죠.
▲ 원나라와 고려 연합군이 군함을 이끌고 두 차례 일본 정벌에 나섰어요. 그때 엄청난 태풍이 불어닥쳐 연합군 배가 침몰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입니다. 일본에선 이 바람을 신이 보냈다고 믿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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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4년 여몽 연합군이 경남 마산을 출발해 일본 쓰시마섬으로 향했어요. 1차 원정이 시작된 거죠. 연합군이 섬을 점령하는 데 두 시간도 채 안 걸렸다고 해요. 연합군은 쓰시마섬을 점령한 뒤 다시 배를 타고 일본 남부 규슈에 상륙했어요. 일본이 저항했지만 대부분의 전투에서 여몽 연합군이 압도적인 승리를 거뒀어요. 일본은 충격에 빠졌어요.
승리를 이어가던 연합군은 병사들을 쉬게 해주려고 바다에 정박한 함대로 돌아갔어요. 그런데 새벽에 갑자기 연합군 함대가 닻을 내리고 있던 하카타 만에 엄청난 태풍이 몰아쳤어요. 하룻밤 새 군함 200척이 침몰하고 수없이 많은 병사가 바닷속으로 사라졌어요. 여몽 연합군은 결국 철수를 결정했어요.
◇신이 보낸 바람일까요?
일본 사람들은 자기네가 연합군을 물리치도록 신이 태풍을 보내줬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여몽 연합군을 덮친 태풍에 '가미카제(神風·신풍)'라는 이름을 붙였어요. '신이 보낸 바람'이라는 뜻이죠.
1차 원정에 실패한 쿠빌라이는 항복을 권유하는 사신단을 일본에 보냈어요. 이번엔 일본도 가만히 있지 않았어요. 일본은 쿠빌라이가 보낸 사신 30여 명을 모조리 처형했어요. 몽골은 그런 줄도 모르고 다시 한 번 사신단을 보냈어요. 일본은 두 번째 사신단도 모조리 죽였어요.
뒤늦게 소식을 들은 쿠빌라이가 격분해 2차 원정을 준비했어요. 고려가 "1차 원정에서 이미 많은 피해를 입었다"고 호소했지만 소용이 없었어요.
1281년 2차 원정에 나선 여몽 연합군은 모두 15만명으로 1차 때보다 규모가 훨씬 컸어요. 하지만 일본은 지난번의 패배를 교훈 삼아 전쟁을 철저히 준비하고 있었어요. 일본 정부가 전국에서 불러 모은 무사들이 여몽 연합군에 맞섰어요.
이때 연합군이 머무르던 규슈 북서쪽 다카시마(鷹島) 섬에 다시 한 번 태풍이 불어왔어요. 2000척이나 되는 군함이 이리저리 부딪쳐 아비규환이 벌어졌어요. 병사들은 바다에 빠져 죽거나, 가까스로 육지에 도달해 산속에 숨었어요. 살아남은 자들에게 닥친 운명은 가혹했어요. 일본에 붙잡힌 여몽 연합군 병사들은 사형을 당하거나 노예가 됐어요.
◇모두에게 큰 상처 남긴 정벌
전쟁을 두 번이나 겪으며 몽골도, 고려도, 일본도 모두가 상처를 입었어요. 몽골은 성과 없이 국력만 낭비해 나라가 휘청했어요. 고려는 억지로 전쟁에 나가느라 배를 만들고 군량미를 모으는 데 고생했어요. 연합군을 막아낸 일본도 자기 땅을 지켰을 뿐 전리품은 없었어요. 전쟁에 참가한 무사들이 갈수록 가난해져 몰락하고, 무사들을 지휘하던 막부(일본 특유의 무사 정부)도 무너졌어요.
일본은 이후 '가미카제'라는 말을 한 번 더 역사 속에서 불러냈어요. 몽골 침략으로부터 650년 정도 흐른 1930~40년대, 이번엔 일본이 군대를 일으켜 이웃 나라들을 침공했어요.
미국을 중심으로 한 연합군이 일본군을 반격해 전세가 일본에 불리하게 기울어지자, 일본은 자기네 전투기 조종사들에게 "연합군 항공모함에 비행기를 몰고 가서 부딪쳐 '인간 폭탄'이 되라"고 명령했어요. 그러면서 이 자살 특공대에게 옛날 여몽 연합군을 물리쳤던 '가미카제'란 이름을 붙였지요.
하지만 전세를 뒤집진 못했어요. 신도 일본의 무리한 침략 전쟁까진 도와주진 않았어요.
안영우·명덕고 역사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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