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미지출처:네이버
-인터넷에서 우연히 접한 글입니다
아마 글을 올리신 분이JHKang로 생각되어집니다
원주정보공업고등학교 기계과 선생님이신 강진호님의 글 또는 강진호님홈피에 게재된 글로 생각되어집니다
직선을 위한 동경의 시작, 그리고
가끔씩 나는 가볍게 걷는다는 것에 대하여 생각하기도 하고 곧바로 흐름에 관하여 즐겁게 떠올리기도 한다.
사람들이 걷는다는 것에 관하여 생각하고 혹은 흐름에 대하여 이야기한다는 것은 아마도 인류가 시작된 시점부터 걷는다는 것은 흐름 그 자체에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제각기 다른 목적지를 향해 걸어가는 발걸음이지만 그것이 향하는 것은 결국 하나의 정상을 향한 흐름으로 귀결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의 삶이 그 끝을 알수 없는 유한한 여정인 것처럼 말이다.
강의실로 향하는 학생들의 종종 걸음이 흐름이 되어 눈가에 머문다. 바라본다는 것 또한 큰 기쁨이어서 가만히 옆에서 직시하기로 한다.
때론 빗겨서 바라본다는 것은 우리에게 색다른 감응을 준다. 물론 여기서 빗긴다는 것은 탈선의 의미보다는 가벼운 관조의 입장이 강하지만 말이다.
중·고등학교 때의 기억을 되살린다면 그 생각은 역시 또렷해진다. 많은 학생들을 태운 버스가 그려지고 이 버스 안에는 무릇 숱한 얼굴들이 고만 고만히 담그어져 있다. 그들을 각기 다른 생각을 하고 대화를 나눈다. 버스 안에서 다섯명이 앉을 수 있는 맨 뒷좌석은 빗긴 시선을 만들 수 있는 최상의 공간이기도 하다. 모든 이들의 말과 몸짓을 한눈에 담을 수 있다는 것은 여간 큰 행운이 아니다. 포만에 겨워 작은 눈도 둥그레진다.
어쩜 그 빈 틈 없는 버스 안에서도 삶의 커다란 원은 흔들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주 겨벼히 요동치고 있어 쉽게 감지할 수 없었을 뿐이지. 그렇게 버스는 흐르고 있었다.
다시 빗긴 시선은 움직이는 것과 정지하는 것에 닿아서 심하게 물결치기도 한다.
교정의 잔디밭을 찾을 때면 빗긴 시선으로 흐르는 학우들을 바라보게 되고 이윽고 우리의 시선은 움직이는 학우들을 번번히 앞지른다.
정지 한채 바라보면 너무나 삶이 아름답게 어우러지는 것이다.
간혹 사람들은 둥글다는 것을 동적인 것 혹은 역동적인 것으로 표현하여 가치있게 생각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의외로 움직이는 모든 것을 바라보고 느끼는 것은 때론 정지하려고 한다. 물론 정지한다는 단어 자체의 애매함이 있기는 하지만, 가끔 너무나 아름다운 사물을 바라 보았을 때 감탄하다 못해 말을 잊지 못하기도 하고 전율을 느끼며 숨을 멈추기도 하는 것이다.
어쩌면 많은 움직임들이 정지해서 보게 될 때 마음 깊은 곳까지 저려오는 슬픔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산을 오르고 보면 이런 상념들이 더욱 더 강해진다. 푸르름의 공간에 수없이 갈라진 길들의 짜임새를 생각하게 되고 갈라진 수많은 길들이 산이라는 거대한 형상으로 하나의 형체를 이루고 있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 보기도 한다.
모든 사물들이 어느 만큼의 정해진 흐름을 따르고 있다는 생각, 그것은 카오스 이론이 말하는 삶의 정형화된 모습일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혼돈이 아닌 단순, 반복 속에 들어있는 조화의 모습말이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본다.
동그란 원과도 같은 삶을 산다는 것은 아마도 평범한 삶의 모습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한다. 그러나 그런 삶의 모습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어떠한 의미가 있는 것일까 하고 생각을 해 본다. 반복되는 일상의 삶 속에서(원) 뛰쳐나가고자 할 때 그것은 벅찬 몸짓을 필요로 한다. 둥그런 원을 박차고 나갈 수 있는 강인함, 일탈성, 그것이 직선의 삶을 추구하는 모습이 아닌가 한다.
소설가 박상륭이 말하고자 하는 삶의 모습은 과연 어떠한 것이었을까? 등대를 죽음의 끝간 시간까지 지키는 할아범의 모습을 통해서 무엇을 말하려고 한 것일까.
우리가 말하는 둥그런 삶의 모습은 어쩌면 강한자의 모습 보다는 약하고 의욕적이지 못하다는 생각으로 가볍게 다루어지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잘 못 된 생각이 아닌가 한다. (물론 직선의 삶을 추구한다는 것에는 많은 두려움과 용기가 따르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직선의 삶에 대한 동경은 우리가 말하는 둥그런 삶의 모습을 가볍게 버린 삶의 모습은 아니다. 시금 털털하면서도 따뜻하고 정겨움을 간직 한, 그런 이웃집 아저씨 같은 두리 뭉실함이 언처진 직선으로의 동경인 것이다.
무릇 원의 삶에서 벗어나려고 하지만 젼혀 빗나가기를 원치 않는 삶, 원에서 떨어지지 않는 뭉특한 삶 그것이 우리가 꿈꾸는 직선의 삶에 대한 동경이 아닌가 한다.
위에서도 잠시 언급했지만 조화를 추구하는 삶말이다.
그것이 우리가 바라는 원끝의 벼랑에서 큰 호흠 가볍게 내 쉴수 있는 모습이고 너무나 정감어린 모습이 아닌가 한다.
때로 우리는 현재의 모습이나 삶에 대해서 불평을 토로하는 경우가 있다.
그럴때면 간혹 나 역시 변화를 추구한다는 미명아래 탈출을 가만히 꿈꾸기도 하는 것이다.
벗어 난다는 것에 대한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말이다.
이것은 어쩌면 너무나 감상적인 발상이 될 가능성이 크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의 어떤 모습에서도 불평이나 혹은 부정적인 모습이 없을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그것을 바라보는 자세의 문제이다. 우리의 삶은 원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라는 말을 나는 수긍한다.
박상륭 소설의 '7일과 꿰미'에서 등대지기 할아범이 죽음의 그 순간까지 등대로 지키고자 한 것 또한 둥그런 삶에 최선을 다한 모습으로 남고자 했기 때문이 아닐까? 그러나 죽음의 그 순간에서야 할아범은 직선을 꿈꾸고 있었고 직선을 동경하기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정말로 조그많고 둥그렇게 우리의 삶을 만들어 가고 있을 때 그때 바로 우린 직선을 꿈꾸고 있는 것이다.
밤바다를 그리거나 파도 치는 풍경에 가볍게 울어 버릴 수 있는 서정적인 모습일수도 있을 것이다.
이제 그만큼 우리는 직선을 꿈꾸고 그리는 그만큼의 삶에 가만히 다가서 있는 것이다.
이제 우리 직선을 동경하자. 그리고 그 직선의 시작점은 어느 조그만한 원의 가장자리 쯤 이겠지.
Mike Oldfield-Hibernaculum
첫댓글 .글과 미술 음악 영화 모두를 좋아하는데 그중에 문학을 가장 사랑하는 한사람으로서 음악감상으로 이렇게 좋은 글을 접해서 행복했 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