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 묘 東 廟
태어난 시각은 틀려도 죽을 때는 같이 죽자는 도원결의 관우.장비.유비 촉나라는 위나라
조조 북벌중 오나라 여몽 장군에 포위되어 관우는 청룡언월도를 옆에 두고 긴수염 몇번
쓰다듬고는 자진한다. 오나라 손권은 관우를 위나라 조조에게 보내지며 조조는 관우 목이하
부분을 향나무로 형체를 만들어준 후 장례를 후하게 치러준다.
보물 제142호로 지정되어 있는 동묘는 『삼국지』의 영웅 관우(關羽)를 모시는 묘우(廟宇)로 정식 명칭은 동관왕묘(東關王廟)이다. 조선 말기에는 관왕을 관제라고 높여 불러 관제묘(關帝廟)라고도 불렀으며, 문선왕(공자)을 모시는 문묘에 대응해 무안왕(武安王)인 관우를 모신다 하여 무묘(武廟)라고도 일컬었다. 이곳 외에도 관우를 받드는 사당으로는 선조 31년(1598)에 남관왕묘가, 고종 20년(1883)에는 북묘가, 광무 6년(1902)에는 서묘가 세워졌었는데 지금은 동묘만이 남아 있다. 동묘는 이들 가운데서 가장 규모가 크고 제대로 격식을 갖춘 대표적인 관우의 사당이다.
오전엔 종묘, 오후엔 동묘를 관람했다. 나는 6호선 종묘역 정도만 알고 있었다.
중전은 관우의 사당이란 걸 알고 있었지만, 나는 종묘에 대해 전혀 몰랐었다.
그런데 왜 중국 촉한의 장군을 사당까지 만들어가며 모시게 된 걸까? 이야기는 임진왜란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지원병을 이끌고 참전한 명나라 장수 진인(陳寅)은 관우의 숭배자였다.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 겨울, 그는 울산에서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이끄는 왜군을 공격하다 부상을 입고 한양으로 후송되어 치료를 받게 된다. 완쾌 뒤 그는 관우의 음덕이 있었다 하여 관우의 소상(塑像)을 개인적으로 봉안하여 받들었는데, 이것이 확대되어 함께 참전했던 명의 여러 장수가 돈을 내고 우리 조정에서도 건립 비용을 보태 1598년 5월에 사당을 완공하였다. 이것이 남관왕묘다.
입장료 없이''' 입장할 수 있도록 개방되어있었다.
전쟁이 끝난 뒤 명의 신종(神宗)은 사신 편에 “관공(關公)은 원래 영령(英靈)이 비범하여 임진왜란 때 귀국을 음으로 도움이 지대하였으니 묘(廟)를 세워 그 공을 갚는 것이 마땅하다”는 조서(詔書)와 4천 금의 건립 기금을 보내와 묘우 설립을 강력하게 종용하였다. 이에 우리 조정에서는 어쩔 수 없이 동대문 밖에 터를 잡아 관왕묘를 세우게 되었으니, 그것이 지금의 동묘이다. 선조 35년(1602) 봄의 일이었다.
종묘란 동관왕묘(관우)의 준말이란 것도 방문해서 첨 알았다.
관왕묘가 자리를 잡자 이제는 관우를 숭배하는 현상이 차츰 전국적으로 확산되었고 급기야는 최영 장군과 이성계가 무속이나 민간신앙의 숭배 대상으로 변모하듯 섬김의 내용이 바뀌면서 1920년대에는 관성교(關聖敎)라는 종교단체까지 등장하였다. 이런 연고로 전국 곳곳에 관우를 섬기는 사당이 들어서게 되었으니 조선 말기 서울에 세워진 북묘와 서묘는 다분히 이런 흐름이 반영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금잡인 " 관계없는 사람이 함부로 드나드는 것을 금함 " 표지판이 있었다.
동묘는 우리의 의지보다는 중국의 입김이 크게 작용해 세워진 까닭에 설립 뒤 한동안 방치되다시피 관리되었다. 그러다가 숙종이 정릉(貞陵: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의 능)을 다녀오는 길에 친히 참배한 이래 영조부터 철종까지 역대 임금이 모두 능행길에 동묘에 들를 만큼 관심을 갖기에 이른다. 특히 정조는 자신을 포함한 네 임금, 즉 숙종과 영조, 뒷날 장조로 추존된 아버지 사도세자가 지은 관우를 찬양하는 글을 새긴 비석, 이른바 사조어제무안왕묘비(四祖御製武安王廟碑)를 남묘와 이곳 동묘에 세운다.
동묘 배치도
동묘 건물은 숙종 17년(1691)에 부분적인 개수가 있었으며, 영조 15년(1739)에도 중수되어 오늘에 이른다. 동묘는 담장으로 에워싸인 장방형의 대지에 건물들이 남북 축선상에 배치되어 있다. 가장 남쪽에 남향하여 낮은 기단 위에 세워진 정문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겹처마 맞배지붕 건물이면서 가운데 3칸의 지붕이 양옆의 1칸보다 높은 솟을지붕이다. 정면 5칸 가운데 중앙의 3칸은 널문을 달아 출입할 수 있게 하고 좌우 한 칸에는 벽돌로 옆면을 막고 살문을 단 마루방을 들였다. 지붕의 마루에는 모두 양성을 하고 취두와 용두를 올려놓았다. 대문 좌우로는 작은 일각문을 두었는데 이 문은 바로 담장으로 연결된다.
종묘는 종묘역, 신설동역 부근에 종묘는 자리잡고 있었다.
대문을 들어서면 동쪽으로 네모지게 쌓은 석단이 보이고, 맞은편에는 관리사무소가 있으며 정면 앞쪽에 중문이 마주보인다. 화강암을 네모지게 다듬어 두벌대로 쌓은 석단은 용도가 무엇인지 분명히 알려진 바 없으나 앞쪽 모퉁이와 가운데 놓인 세 마리 돌짐승(해치와 사자)을 다듬은 솜씨가 궁궐 건축에서 보이는 솜씨 그대로여서 퍽 중요한 의미와 상징을 간직한 공간으로 여겨진다. 특히 양쪽 귀퉁이에 놓인, 목에 방울을 달고 겨드랑이에 작은 날개를 단 사자는 애완견처럼 귀엽다. 중문은 정면 3칸 측면 4칸의 초익공 겹처마 팔작지붕집이다. 가로보다 세로가 칸수도 많고 길이도 정면과 비슷하여 문으로서는 특이한 평면 구조를 보인다. 측면 벽의 가운데 2칸에만 창방 높이까지 벽돌벽을 쌓아올린 모습이 특이하다. 지붕마루는 대문과 마찬가지로 양성을 하고 취두, 용두, 잡상을 얹어놓았으며, 사래에는 토수를 끼웠다.
관우의 아들 관평장군도 여몽 장군에 의해 포위되어 전사했다.
중문 안뜰 좌우에는 대칭으로 동무와 서무가 자리잡고 있으며, 그 안쪽에 정전이 서 있다. 정전은 건립 당시 중국의 관여가 있어서인지 평면 구성, 외부 마감, 지붕 구조가 우리 건축과는 무척 다른 중국식 건물이다. 평면은 정면 5칸 측면 6칸으로 좌우보다 앞뒤가 긴 장방형이며 정면을 제외한 삼면의 가장자리 한 칸은 좁은 퇴칸을 돌린 특이한 형태이다. 내부는 각각 정면 3칸 측면 2칸의 전실과 본실로 나뉘어져 있으며, 중간에 문을 달아 양자를 구분하였다. 내부 바닥에는 벽돌[磚]을 깔았는데 본실은 전실보다 한 단 높게 하였다. 본실의 중앙 뒤편으로 석단을 마련하여 나무로 만든 관우의 상을 안치하였다. 불상이나 조각상에 옷을 입히는 일은 중국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라고 하는데, 금빛 옷을 걸친 관우의 상이 우리 눈에는 좀 낯설게 느껴진다. 석단 앞으로는 관우의 아들 관평(關平)을 포함한 4명의 무인상이 서 있다.
정전 내부
전실보다 한 단 높은 본실의 중앙에는 금빛 옷을 입고 긴 수염을 뽐내고 있는 관왕이 앉아 있다.
건물의 입면도 색다른 모습이다. 정면의 외관은 어칸의 4짝문, 좌우 협칸의 1짝문과 살창 모두 문과 창으로 처리하였는데, 모두 살문과 살창인데다 문 위의 상인방에도 마치 홍살문처럼 살대를 꽂아 유별스럽다. 옆면과 뒷면 벽은 세벌대로 쌓은 화강암 기초 위에 회흑색 벽돌을 창방까지 높게 쌓아올린 벽돌벽으로 마감하였다. 뒷면 가운데 칸에 문을 내어 안으로 출입이 가능하게 했고, 옆면에도 두번째 칸에 화강암을 다듬어 작은 무지개문을 놓았다.
지붕의 모습 또한 아주 흥미롭다. 용마루가 특이하게도 T자형이고 그것이 팔작지붕 형태로 마감되어 정면과 양 측면의 삼면에 합각부가 보이며, 여기에 더하여 전실 부분은 맞배지붕으로 꾸몄다. 마루는 모두 양성을 하였는데, 팔작지붕의 귀마루 네 곳과 맞배지붕의 앞면 내림마루 두 곳에 잡상이 설치되었으며, 모든 마루에 용두 또는 취두가 올려져 있어 꽤나 복잡해 보인다.
관우상은 정전 안에 있어(어두침침하여) 촬영하기 어려웠다.
정면 5칸 측면 1칸 반의 동무와 서무의 모습도 예사롭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반칸 폭의 앞퇴는 모두 개방하였으며, 안쪽은 북쪽과 남쪽 끝 칸에만 문을 달고 나머지 칸에는 살대를 꽂아 입면을 구성하였다. 그밖의 옆면과 뒷면은 정전처럼 동무는 외벌대, 서무는 두벌대 화강암 받침 위에 창방 높이까지 벽돌벽을 쌓아올렸다. 벽돌벽 중간에 기와 한 장 너비로 눈썹지붕이 가지런하게 돌아가고 있는데, 우리 건축에서는 전혀 볼 수 없는 것으로, 무슨 기능을 하는지 아니면 단지 장식에 지나지 않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정전 관우상 건물 뒷편에 만고표명 萬古標名 액자가 걸려 있었다.
관우를 " 오랜 세월 이름을 떨친다." 라는 뜻이다.(라고~)
동무의 북편 끝 칸에는 네모진 화강암 받침에 목조건축 지붕 모양의 지붕돌을 얹은 비석이 하나 있다. 이른바 사조어제무안왕묘비 가운데 무안왕묘비(武安王廟碑)로, 1785년에 세워진 이 비석의 앞면에는 사도세자가 짓고 쓴 글이, 뒷면에는 정조가 짓고 쓴 글이 새겨져 있다. 사도세자의 글씨는 가벼운 흘림체의 행서이고 정조의 글씨는 또박또박한 해서임에도 불구하고 양쪽 모두 글자마다 정중한 무게가 실려 있으며 분위기가 매우 닮아 있어 야릇한 느낌을 자아낸다.
정전 뒷뜰 정원엔 " 관우를 만고에 알려라! " 하듯이 꽃이 활짝 피고 있었다.
첫댓글 요즘 뭐문화해설사 . .이런직업이 있던데 차자바 . 두루 박식한데 사장시키면 않되자나 도올선생에 버금가는 학식과 경륜이 있구먼 . .너무뜨면 책낸다고 난리칠거구 여하튼 대단하네
종묘 안내 해설사 보고''' " 참 잘했어요! 해설사 몇년했어요! " 했뜨니''' 해설사 曰 " 아휴~ 고마워요! 5년 했어요! 좋아서 하구있어요 " 라고 답한다. 언변 타고난 기질과 좋아해야''' 그 노릇하제~ ㅎㅎㅎㅎ
아직도 그대는 내사랑 . .느찌 안았어 종묘 해설사 도전해봐여 . .헹님은 누가 뭐락해도 껍떼기는 개안차나
아름다운 비율로 버꺼진 이마빡이 이꼬
적절히 빠져나온 배떼지도 이꼬
이력서를 제출해봐
뒷구녕에서 내가 좀 쑤셔볼께
해설사로 등록하구 난중에는 경복꿍 수문장으로 이직를 해
알겄쩨
해설사 자격 수료증 따러 함 댕겨 볼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