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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한 것을 기뻐함
고후 12:1-10
1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2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그는 십사 년 전에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3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4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5 내가 이런 사람을 위하여 자랑하겠으나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하지 아니하리라
6 내가 만일 자랑하고자 하여도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아니할 것은 내가 참말을 함이라 그러나 누가 나를 보는 바와 내게 듣는 바에 지나치게 생각할까 두려워하여 그만두노라
7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8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9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10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고후 12:1-10 / [환상과 계시] 이처럼 자랑을 늘어놓는 것은 모두 어리석은 짓이지만 조금 더 자랑을 하겠습니다. 주께서 보여주신 환상과 계시에 대해서입니다. 2-3) 14년 전에 나는 하늘로 들려 올라간 일이 있습니다. 내가 몸까지 올라갔는지, 아니면 내 영만 올라갔는지는 묻지 마십시오. 그것을 대답할 수 있는 분은 하나님뿐이십니다. 4) 어쨌든 나는 낙원으로 올라갔고 거기서 인간의 능력으로나 말로는 도저히 그려 낼 수 없는 놀라운 사실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 내용 또한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도록 금지되어 있습니다. 5) 그 일이야말로 내게는 크나큰 자랑거리입니다. 하지만 내놓고 떠벌리고 다닐 마음은 없습니다. 내가 자랑하고 싶은 것은 다만 내가 나약한 인간이라는 것과 이런 나를 당신의 영광을 위해서 불러 주시는 하나님이야말로 얼마나 위대한 분인가 하는 것입니다. 6) 내가 비록 이런저런 자랑을 한다 해도 그것이 모두 사실이니 어리석은 자가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나를 내 생활과 설교에서 실제로 보고 들은 것 이상으로 과장할까 싶어 그만두겠습니다. 7) 다만 이 말을 덧붙여 두고 싶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그 놀라운 경험 때문에 교만해질까봐 내 몸에 가시로 찌르는 것 같은 병을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그 병은 사단의 사자가 되어 내가 교만해지지 않도록 나를 괴롭히고 고통을 주었습니다. 8) 나는 그 병에서 회복되기를 세 번이나 간절히 하나님께 빌었습니다. 9) 그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안 된다. 그러나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마. 네게 내리는 은총은 그것으로 충분하다. 내 능력은 약한 사람에게 가장 잘 나타난다.' 이제 나는 내 약한 것을 기쁘게 자랑합니다. 나의 힘이나 능력을 나타내 보이기 보다는 그리스도의 능력을 생활로 증거하는 것을 기쁘게 여기고 있습니다. 10) 나는 모든 것이 그리스도를 위한 것임을 알기에 그 가시도 모욕도 고통도 박해도 어려움도 온전히 기쁘게 받아들입니다. 내가 약할 때 나는 강하기 때문입니다. 무력해질수록 나는 그만큼 더 그리스도를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밝힌 그 네 번째 증거요 자랑으로서 놀라운 신비 체험과 특별 계시를 받았는데 그 체험의 위대함은 심지어 그로 인하여 자고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바울에게 육체의 가시까지 주실 정도였다는 진술을 보도합니다. 자랑이 있다면 주 안에서 자랑하라고 권했던 바울 그의 약함을 자랑 속에 담습니다.
하늘에 이끌려간 자(1-6) 사실 사도 바울은 자랑하는 것을 ‘어리석다’라고 하였습니다(고전 11:16). 하지만 부득불 자랑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는 것은 거짓 사도들에 의하여서 잘못된 길로 가고 있는 고린도 교인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후서를 쓰기 14년 전에 셋째 하늘에 이끌려갔습니다. 셋째 하늘은 ‘지극히 높은’ 또는 ‘최고로 완전한’이라는 뜻 대신해서 사용한 것으로 바로 하나님의 거룩한 보좌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모든 하늘 위”(엡 4:10)로 표현하고, 또 다른 말로는 ‘낙원’이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의 이 경험은 하나님의 주권에 의하여서 이루어졌음을 분명히 밝히고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낙원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보고 말을 들었는데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었습니다. 바울은 너무 신비롭고 자랑스러운 일 이었지만 성도들에게 미혹을 줄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 자랑하지 않고 오로지 약한 것들을 자랑하겠다고 했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7-10) 사도 바울은 많은 계시를 경험하였습니다. 이것이 사도를 교만하게 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도 바울에게 육체의 가시(말뚝)를 주셨습니다. 이 또한 하나님의 세심한 배려인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으나 일반적으로 육체에 고통을 주는 질병이었다고 여겨집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육체의 가시, 사탄의 사자라 불리는 질병은 너무나 힘들고 무거운 것이어서 이것이 떠나가게 해 달라는 기도를 세 번이나 했습니다. 하지만 매번 하나님의 응답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였습니다. 하나님은 벗어날 수 없는 고통에서 위대한 고백을 이끌어 내셨습니다.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졌습니다.’ 또한 ‘내가 약한 그 때에 하나님은 강하셨습니다.’라고 고백을 한 것입니다. 약함에서 온전하게 하시고 나의 약함을 넘어선 하나님의 강함이 있었던 것입니다.
적용: 당신의 강함은 언제입니까? 사도 바울과 같이 약한 그 때에 온전하여지고, 강해지나요?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돈키호테>의 작가인 세르반테스, <실낙원>의 존 밀턴, 불후의 명곡 <메시아>의 작곡가 헨델은 인생의 마지막 순간을 극복하고 성공한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약한 그때 하나님의 강한 능력이 임합니다. 우리가 할 수 없다고 고백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손을 잡아주십니다. 모든 상황 속에서 자만하지 않게 하시기 위해 우리에게 주신 육체의 가시가 무엇인지 생각해봅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우리의 약한 부분들로부터 우리를 강하게 해주실 것입니다. 약한 것을 통해 참 기쁨과 강함을 경험하시는 오늘 하루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설 교 >
12장: 사도의 표
1-10절, 육체의 가시
[1-2절]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14년 전에 그가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주셔서 자신이 받았던 하나님의 환상들과 계시들에 대해 말한다.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라고 말한 것을 보면, 14년 전에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는 바로 자기 자신을 가리킨다고 보인다. 그는 사도직의 변호를 위해 부득이 이 사실을 언급한다. ‘환상과 계시’는 옛 시대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특별하게 나타내셨던 그의 특별계시의 방법이었다. 민수기 12:6, “너희 중에 선지자가 있으면 나 여호와가 이상(異像)[환상]으로 나를 그에게 알리기도 하고 꿈으로 그와 말하기도 하거니와.” 히브리서 1:1-2,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하나님의 이런 특별계시들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죄를 깨닫고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고 또 온전케 된다(딤후 3:15-17). 사도 바울이 14년 전에 환상 중에 올라간 셋째 하늘은 하나님께서 계시고 천사들이 거하는 가장 높은 하늘을 가리켰다. 그러면 첫째 하늘은 새들이 나는 창공을, 둘째 하늘은 해와 달과 별들이 있는 하늘을 가리킬 것이다.
[3-4절]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할 수 없는[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사람이 말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은] 말이로다.
사도 바울은 그 셋째 하늘을 ‘낙원’이라고 표현한다. 그 곳은 우리가 천국이라고 부르는 곳이다. 예수께서 하신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에서 나사로가 죽은 후 들어간 ‘아브라함의 품’(눅 16:22)이나 십자가 위에서 회개한 강도에게 약속하신 ‘낙원’(눅 23:43)은 다 이 곳을 가리킨다. 또 히브리서 12:22가 말한 ‘하늘의 예루살렘’도 바로 이 곳이다. 셋째 하늘, 아브라함의 품, 낙원 등은 다 천국을 가리킨다.
천국은 확실히 있다. 영원하신 하나님께서는 영광스러운 천국을 예비하셨다. 에녹은 일찍이 그 곳으로 올라갔고, 엘리야도 그 곳으로 올라갔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그 곳으로 올라가셨다. 의인들의 영들이 지금 그 곳에서 안식과 평안을 누리고 있다. 천국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약속된 기업이다. 그러나 사람이 거듭나지 않고는 그 곳에 들어갈 수 없다. 모든 죄인들과 악인들은 그 곳에 들어갈 수 없다. 천국에 들어갈 자들은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아야 하고, 이 세상에서도 하나님의 계명을 즐거이 순종하며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 삶을 살아야 한다.
사도 바울은 거기서 사람이 말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은 말을 들었다. 우리는 천국에서도 인격적 의사 소통을 가질 것이다. 천국은 확실히 대화가 있는 사랑의 세계일 것이다. 사도의 자격 요건의 하나는 주께서 자신의 뜻을 그에게 계시하심에 있었다. 자기 마음의 생각을 하나님의 뜻인 것처럼 말하는 자들은 분명히 거짓 사도들이다. 오늘날 성경을 충실히 강해하거나 강론하지 않고 자기의 생각이나 세상의 생각들을 전하는 목사는 확실히 거짓된 목사일 것이다.
[5-6절] 내가 이런 사람을 위하여 자랑하겠으나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치 아니하리라. 내가 만일 자랑하고자 하여도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아니할 것은 내가 참말을 함이라. 그러나 누가 나를 보는 바와 내게 듣는 바에 지나치게 생각할까 두려워하여 그만 두노라.
사도 바울이 셋째 하늘에 올라간 환상과 계시를, 자기 몸 안에 있었든지 혹은 자기 몸 밖에 있었던 한 사람의 경험이라고 말한 것(2-3절)은 자신의 사도직의 변증을 위해 부득이 하는 자랑이었기 때문이다. 이 간증은 거짓말이거나 과장된 말이 아니고 ‘참말’이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을 보거나 자신의 간증을 듣는 자들이 무엇을 지나치게 생각지 않도록 그 정도만 말하고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7절]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사도 바울은 여러 가지 놀랍고 중요한 계시들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다. 여기에 주께서 직접 부르시고 세우신 사도들, 즉 열두 사도들과 사도 바울의 권위가 있고 신약성경의 신적 권위성이 있다. 사도 시대 이후의 목사들은 사도들과 분명히 다르다. 목사들은 선지자들과 사도들을 통해 주신 신구약성경을 열심히 읽고 묵상하고 연구함으로써 거기에 담긴 하나님의 진리와 교훈을 전하는 자들이다. 오늘날 목사들의 권위는 바르고 충실한 성경적 설교와 교훈에만 있다.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에게 주신 계시들이 너무 중대하였기 때문에 그가 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그의 육체에 가시를 주셨다. 교만은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근본적인 죄이다. 교만은 마귀가 마귀가 된 죄라고 보인다. 디모데전서 3:6, “새로 입교한 자도 말지니 교만하여져서 마귀를 정죄하는 그 정죄에 빠질까 함이요.” 그러므로 목사들도 성도들도 교만을 조심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 속에 있는 교만의 경향성을 꺾고 하나님의 은혜로 겸손한 봉사자가 되어야 한다.
사도 바울에게 주신 ‘육체의 가시’란 몸의 어떤 질병이나 연약성을 가리키는 것 같다. 그것은 그를 교만치 못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수단이었다. 그는 그것을 ‘사탄의 사자’라고 표현했다. 사탄은 하나님의 허락 속에서 욥을 쳐서 온 몸에 악창이 나게 하였었다(욥 2:7). 그러나 욥에게나 바울에게나 그런 고난은 하나님의 은혜의 수단이었다.
[8-9절]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병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므로 그가 제거하실 수 있다. 성도가 병들었을 때 먼저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고 약이나 의술을 의지하는 것은 분명히 불신앙이다(대하 16:12). 의술은 제한적이다. 우리는 병들었을 때 먼저 하나님께 회개하며 그의 긍휼과 치료를 간구해야 하며(약 5:14-16) 그 후에 의사의 치료도 감사히 받아야 한다.
사도 바울은 그의 ‘육체의 가시’를 제거해주시기를 위해 하나님께서 세 번 간구했으나 거절되었다. 거절하심도 일종의 기도 응답이다.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과 자주 다르다. 우리의 최선의 소원이 하나님의 보시기에는 최선이 아닐 수 있다.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보다 낫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은 하나님의 생각과 그의 섭리하심에 우리 자신을 항상 의탁하여야 한다. 바울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답변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는 말씀이었다.
육체의 가시는 하나님께서 그를 미워하셨기 때문에가 아니라 더 사랑하셨기 때문에 주신 것이었다. 사람은 부족하고 연약하다. 조금만 편안해도 해이해지고 교만해진다. 그래서 하나님의 징계와 훈련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징계가 없었다면 우리는 지금의 우리 정도도 되지 못했을 것이다. 앞으로도 우리는 하나님의 징계와 훈련 속에서 완전을 향해 더 잘 갈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바울의 연약을 통해 충만한 능력으로 역사하셨다. 우리가 스스로 강하다고 느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용하지 않으실 것이지만, 우리가 연약하다고 느낄 때 그는 우리를 통해 능력으로 역사하셔서 그의 일을 이루시며 그의 영광을 나타내신다. 하나님의 지혜와 섭리는 참으로 놀랍다.
[10절]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때에 곧 강함이니라.
사도 바울은 자신이 약할 때 하나님의 일도 약해지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그때 하나님의 능력이 그의 사역에 충만히 나타남을 깨달았다. 즉, 그가 약할 때가 곧 그가 강할 때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의 약함들, 곧 많은 고난과 수고와 육체의 가시까지 간증하고 자랑하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오늘날도 우리의 몸과 마음은 연약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런 우리를 사용하셔서 그의 일을 힘있게 이루신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바울의 사도직은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수고하고 고난 당했음을 통해 증거되었을 뿐 아니라, 그가 받았던 주의 환상과 계시를 통해서도 증거되었다. 환상과 계시는 하나님께서 선지자들과 사도들에게 주셨던 그의 특별계시의 방법이었다. 그것은 선지자들과 사도들의 글인 성경의 신적 권위성을 증거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그들의 글들인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다. 우리는 성경이 증거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확신하고 순종하자.
둘째로, 우리는 셋째 하늘 곧 낙원의 영광을 사모하자. 이 세상의 삶은 나그넷길이며 우리의 본향은 천국이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천국을 확신하고 그 영광스럽고 복된 천국에 우리의 소망의 닻을 든든히 두자.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그의 귀한 종 바울에게 육체의 가시도 주셨다. 그 육체의 가시는 바울로 하여금 교만치 않고 겸손케 하기 위한 하나님의 은혜의 수단이었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주시는 고난은 그들을 미워하셔서가 아니고 그들을 거룩함과 겸손과 믿음으로 단련시키시기 위함이다. 우리에게 주신 고난들은 성화와 온전함을 위해 유익하다.
넷째로, 하나님의 능력은 사도 바울이 연약할 때 온전히 나타났다. 바울에게는 연약함이 많았으나, 하나님께서는 능력으로 그를 사용하셨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의 고난과 연약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오늘날 우리도 고난 중에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자.
11-21절, 사도의 표와 바울의 주관심
[11-12절] 내가 어리석은 자가 되었으나 너희가 억지로 시킨 것이니 내가 너희에게 칭찬을 받아야 마땅하도다. [이는] 내가 아무것도 아니나 지극히 큰 사도들보다 조금도 부족하지 아니하니라[아니함이니라].
사도 바울은 자신이 셋째 하늘에 올라간 일을 말한 것이 어리석은 자랑임을 말한다. 그것은 고린도 교인들 중에 어떤 이들이 거짓 교사들의 말에 동요되어 바울의 사도직을 부정하고 도전했기 때문에 그가 부득이 한 자랑이었다. 그러나 그는 비록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지만 자신이 ‘지극히 큰 사도들’보다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고 말한다.
[12절] [참으로](멘)(KJV) 사도의 표된 것은 내가 너희 가운데서 모든 참음과[참음으로]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한 것이라[참으로 사도의 표들은 모든 참음 가운데서 표적들과 기사들과 능력들에 의해 행해졌도다].
바울은 자신의 사도직의 표가 특별한 환상들을 본 것뿐 아니라,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한 것”임을 말한다. 사도들은 주 예수께서 친히 부르시고 세우시고 보내신 자들이며 특히 그들이 기적을 행한 것은 주께서 그들에게 주신 신분증, 즉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표와 같았다. 그것은 구약시대에 참된 선지자들이 가졌던 표와 같았다.
[13-14절] 내 자신이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아니한 일밖에 다른 교회보다 부족하게 한 것이 무엇이 있느냐? 너희는 나의 이 공평치 못한 것을 용서하라. 보라, 이제 세 번째 너희에게 가기를 예비하였으나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아니하리라. 나의 구하는 것은 너희 재물이 아니요 오직 너희니라. 어린아이가 부모를 위하여 재물을 저축하는 것이 아니요 이에 부모가 어린아이를 위하여 하느니라.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물질적 폐를 끼치지 않았다. 그가 그것을 ‘공평치 못한 것’이라고 표현하고 있지만, 그 행위는 잘못된 불공평이 아니고 사랑의 동기에서 나온 불공평이었다. 폐를 끼칠 수 있는 자가 폐를 끼치지 않는 것은 사랑이지 인격적 결함이 아니다. 이것은 우리 모든 성도들이 본받아야 할 사랑과 봉사의 삶이다. 우리는 다른 이들에게 폐를 끼치는 자가 되지 말고 유익을 주는 자가 되어야 한다. 사도 바울은 교인들의 재물을 구하는 자가 아니고 그들의 영혼들을 구원하고 바로 세우기를 원하는 자이었다. 천하보다 귀하고 세상의 모든 재물보다 귀한 것은 사람의 영혼이다. 예수께서는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고 말씀하셨다(마 16:26). 또 부모가 아이들을 위해 재물을 저축하듯이, 바울은 성도들을 위해 자신을 드렸고 그의 재물도 사용했다. 물질적 이익을 초월한 교훈은 진리의 교훈이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은 이 세상과 세상의 것들밖에 모른다. 물질적 이익은 그들에게 가장 큰 가치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리는 그것들을 초월한다. 교인들에게 물질적 폐를 끼치지 않는 바울은 하나님의 진리를 전하는 참된 종이다.
[15절] 내가 너희 영혼을 위하여 크게 기뻐함으로 재물을 허비하고 또 내 자신까지 허비하리니 너희를 더욱 사랑할수록 나는 덜 사랑을 받겠느냐?
고린도 교인들을 향한 사도 바울의 사랑은 컸고 그는 그들을 위해 재물을 허비하고 자기 자신까지 허비하려고 한다. 주 예수님과 그의 종들은 바로 이런 길을 가셨다. 우리는 세상에서 현세적, 물질적 대가를 기대하지 말고 장차 하나님께서 주실 영원하고 영광스럽고 존귀한 대가만을 바라며 하나님께 충성해야 한다. 주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도 사람들에게 섬김을 받기 위함이 아니셨고 도리어 사람들을 섬기시며 자신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시기 위함이었다.
[16-17절] 하여간 어떤 이의 말이 내가 너희에게 짐을 지우지는 아니하였을지라도 공교한 자가 되어 궤계로 너희를 취하였다 하니 내가 너희에게 보낸 자 중에 누구로 너희의 이(利)를 취하더냐?
사도 바울은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고 깨끗하게 사역했지만, 비난하는 자들은 그가 간교한 속임수로 교인들을 취하였다고 말했다. 그 비난은 그를 통해 이루신 하나님의 일을 허물어뜨리려는 악한 말이었다. 바울의 경우처럼, 주의 종들에게는 그들의 선한 봉사의 걸음에 때때로 악한 비난의 말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참 일꾼과 거짓 일꾼의 차이는 분명하다. 거짓 일꾼은 썩어지고 허무한 이 세상의 것들과 물질적 이익만을 구한다. 그러나 참 일꾼은 이 세상을 사랑치 않고 오는 세상을 사랑하며, 세상의 썩어질 것을 구하지 않고 장차 하나님께서 천국에서 주실 존귀와 영광을 구한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의 영광과 그의 교회를 위해 이 세상의 것들을 소비하고 자신까지 희생하면서 주를 기쁘시게 하는 일에 힘쓸 수 있다.
[18-19절] 내가 디도를 권하고 함께 한 형제를 보내었으니 디도가 너희의 이(利)를 취하더냐? 우리가 동일한 성령[정신](KJV, NASB, NIV)으로 행하지 아니하더냐? 동일한 보조로 하지 아니하더냐? 이때까지 우리가 우리를 너희에게 변명하는 줄로 생각하는구나?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앞에 말하노라. 사랑하는 자들아, 이 모든 것은 너희의 덕을 세우기 위함이니라.
바울과 디도는 동일한 정신을 가졌고 동일한 보조로 행하였다. 그 정신과 그 걸음은 이기적이지 않고 이타적인 것이요,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고 교회와 교인들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요, 이 세상을 사랑치 않고 장차 올 세상 곧 새 하늘과 새 땅을 사랑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목사와 성도들의 정신과 걸음이어야 한다. 오늘날에도 우리 모두가 이런 정신과 보조로 행할 때 하나님의 일은 잘될 것이다.
이제까지 사도 바울의 변명은 단지 자기 변명의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었다. 사실 그런 의미뿐이라면 그가 그렇게 변호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는 이미 주를 위해 죽기를 각오한 자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변명은 단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고 고린도 교인들의 유익을 위함이었다. 그것은 다른 말로 그들의 덕을 세우기 위함이었다. 그가 하고자 한 일은 주의 복음으로 사람들을 구원하여 하나님의 모든 뜻 안에 그들을 굳게 세우는 것뿐이었다. 오늘날에도 복음사역자들의 관심은 영혼들의 구원과 구원받은 자들의 성화 곧 영적 성장뿐이다.
[20-21절] 내가 갈 때에 너희를 나의 원하는 것과 같이 보지 못하고 또 내가 너희에게 너희의 원치 않는 것과 같이 보일까 두려워하며 또 다툼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중상함과 수군수군하는 것과 거만함과 어지러운 것이 있을까 두려워하고 또 내가 다시 갈 때에 내 하나님이 나를 너희 앞에서 낮추실까 두려워하고 또 내가 전에 죄를 지은 여러 사람의 그 행한 바 더러움과 음란함과 호색함을 회개치 아니함을 인하여 근심할까 두려워하노라.
사도 바울의 주관심은 그들의 회개이었다. 그는 그들이 회개하고 순종하며 사는 것을 보기를 원하며, 자신도 그들에게 책망의 얼굴로가 아니고 사랑과 기쁨의 얼굴로 대하게 되기를 원했다. 또 그는 그들이 회개하여 다툼이나 시기나 분냄이나 당 짓는 것이나 중상함이나 수군수군함이나 거만함이나 어지러운 일들이 없기를 바랬고, 또 그가 다시 그 곳에 갈 때 그들에게 무시를 당하지 않기를 원했고, 또 이전에 범죄했던 자들이 그 더러움과 음란함과 호색함을 떠나 거룩한 삶을 살기를 원했다. 구원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고 영생을 얻는 것일 뿐 아니라, 이제는 서로 미워하지 않고 사랑하고 서로를 존중하고 음란하지 않고 거룩하게 사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참된 구원이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서 그런 참된 믿음과 변화된 삶을 보기를 원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모든 것, 성경에 어긋나는 모든 것, 모든 잘못된 생각과 말과 행위를 다 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사도의 표는 기적을 행하는 것이었다. 12절, “참으로 사도의 표들은 모든 참음 가운데서 표적들과 기사들과 능력들에 의해 행해졌도다.” 마태복음 10:1, “예수께서 그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마가복음 3:13-15, “또 산에 오르사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 이에 열 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병들을 고치며](전통사본) 귀신을 내어쫓는 권세도 있게 하려 하심이러라.” 사도들이 병들을 고치며 기적을 행한 것은 주께서 그들에게 주신 권위의 표이며 신분증과 같았다.
둘째로, 사도 바울의 주관심은 교인들의 재물이 아니고 교인들 자신이었다. 14절, “나의 구하는 것은 너희 재물이 아니요 오직 너희니라.” 바울은 그들의 재물을 원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그들 자신이 구원받은 자가 되는 것을 원한다. 그는 그들에게 폐를 끼치기를 원치 않는다. 그의 동역자들도 동일한 정신으로 그들을 위해 일하였다. 기독교는 단지 현세의 문제, 육신의 문제, 물질적 문제에 관심을 갖는 것이 아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몸의 건강과 일용할 양식을 주신다. 그러나 기독교의 참된 관심은 죄 문제의 해결,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의 문제, 영생과 천국의 문제에 있다. 그것은 영원한 평안과 행복의 문제이다. 그것은 참된 회개와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얻는 구원이다.
셋째로, 사도 바울의 주관심 속에는 구원받은 성도들의 덕을 세움, 즉 그들의 성화와 온전함이 있다. 이것은 모든 전도자와 목회자들의 주관심이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주신 목적은 성도들로 온전케 하기 위함이며(딤후 3:17), 하나님께서 교회에 목사들을 주신 목적도 성도들을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다(엡 4:11-12). 사도 바울은 자신이 복음을 전해 세운 고린도교회가 온전케 되기를 원한다. 그는 그들 가운데 다툼이 없고 서로 사랑하며, 교만하지 않고 겸손하며, 말씀의 사역자를 무시하지 않고 존중하며, 또 음란하지 않고 거룩하기를 원한다. 그 일을 위해 그는 편지로 교훈했었고 또 지금도 편지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온전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