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599
8월31일[연중 제21주간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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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강론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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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8disHUjQONQ
(장대건 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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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깨어 있다는 것은 곧 살아 있다는 것!>
젊은 형제들의 선생 노릇 할 때 기억들이 가끔 떠올라 혼자 웃곤 합니다. 강의나 회의 참석차 출타를 할 때는, 이런저런 과제물이나 작업을 한 보따리씩 안겨주고 떠납니다. “나 없는 동안 이게 웬 떡이냐? 하며 게으름 피우지 말고, 완벽하게 마무리해놓아야 한다.”
우렁찬 목소리로 “네!”라고 외치는 형제들의 얼굴은 벌써 제 부재로 인한 기쁨으로 충만합니다. 이박삼일 출장을 끝내고 돌아오는 날은 일부로 귀가 시간을 알려주지 않습니다. 불시에 돌아오면 형제들의 모습이 천태만상입니다.
해가 중천에 떴는데도 늘어지게 자고 있는 형제, 식사 시간도 아닌데 뭔가를 만들어 신나게 먹고 있는 형제, 행방이 묘연한 형제...심기가 불편해진 저는 ‘니들이 그러고도 인간이냐?’며 불벼락을 내립니다.
그런데 어떤 형제는 자습실에 앉아 열심히 과제를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어떤 형제는 경당에 앉아 깊은 기도에 심취해 있습니다. 마음이 흐뭇해진 저는 크게 칭찬하며, 뭐라도 챙겨주고 싶어 안달이 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도 깨어 있는 우리를 크게 칭찬하십니다. “깨어 있어라. 너희의 주인이 어느 날에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이것을 명심하여라. 도둑이 밤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 깨어 있으면서도 도둑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마태오 복음 24장 42~44절)
미국판 법정 스님 정도 되는 데이비드 소로는 이런 명언(名言)을 우리에게 남겼습니다.
“깨어 있다는 것은 곧 살아있다는 것입니다.”
사막의 교부들 역시 깨어 있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했습니다. 황량하고 깊은 사막 한가운데로 들어갔습니다. 어두운 동굴 깊숙이 들어가 기도와 노동에 전념했습니다. 홀로 고독 속에 단식하며 성경 말씀을 묵상하고 또 묵상했습니다. 시메온 교부 같은 경우 언제나 깨어 있기 위해 37년 세월 동안 높은 기둥 위에서 기도했습니다.
수도회 입회 후 평생토록, 환한 얼굴, 더 이상 행복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40년간 주방장 소임을 다한 가르멜 수도회 소속 부활의 라우렌시오 수사님 역시 언제나 깨어 있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라우렌시오 수사님의 영성생활은 지극히 단순명료했습니다. 자신이 행하는 모든 일 안에 하느님께서 현존하심을 굳게 믿었습니다. 그는 늘 깨어 있을 때, 우리가 행하는 모든 행위가 거룩하게 된다고 굳게 믿었습니다. 그는 늘 지금 이 순간 내가 하고 있는 이 일 가운데 하느님께서 함께하고 계심을 확신했습니다.
언제 어디서든 항상 깨어 있기 위해 노력하셨던 라우렌시오 수사님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저에게 일하는 시간은 기도하는 시간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부엌에서 달그락달그락 그릇을 씻으면서, 이것저것 부탁하는 동료 인간들 사이에서, 저는 마치 성체조배를 할 때처럼 깊은 고요 속에 하느님을 모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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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xLO_ZAQB3g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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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라? 먼저 먹고 기도하라!>
오늘 예수님은 깨어있으라고 명령하십니다. 종은 주인이 몇 시에 올지 생각하지 않고 언제나 깨어 주인이 맡긴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러니 일하지 않는다면 깨어있음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주인이 우리에게 맡긴 일은 무엇일까요? 양식을 제공하는 일입니다. 주인이 하인들에게 제때 양식을 주라는 소명을 주고 떠났다면 주인이 돌아왔을 때 양식을 주고 있는 이들은 깨어있는 종들입니다.
우리가 내어주어야 할 양식은 무엇입니까? 단순히 배만 불리는 음식일까요? 양식은 사랑이 담긴 음식입니다. 양식을 먹으면 그것을 주는 이의 자존감을 받습니다. 아이가 부모처럼 되는 것입니다. 양식을 내어주라는 말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도 마치 아담이 동물들의 이름을 지어준 것처럼 우리도 누군가에게 하느님 자녀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주라는 뜻입니다. 이 일을 하고 있지 않다면 잠을 자는 것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도 일곱 마귀가 들려 동물처럼 살다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느끼고 결국 부활하신 그리스도로부터 “마리아야!”란 이름을 듣습니다. 그때 막달레나는 지금까지의 모든 잘못된 삶을 버리고 자신의 이름을 불러준 그리스도 예수님께 합당한 사람이 되기를 결심합니다. 그렇게 자신도 예수님에게 “랍뿌니!”, 즉 ‘선생님’이라고 응답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언제까지나 배워가야 하는 처지기 때문입니다.
김춘수의 ‘꽃’에서 시인은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앉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라고 말합니다. 이 일을 함이 깨어있음입니다. 사랑하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내가 먹을 양식도 없는데 누군가에게 양식을 줄 수 있을까요? 이와 같은 일이 부모와 자녀 사이에서 벌어집니다. 최광현 작가의 『가족의 두 얼굴』에 나오는 사례입니다.
진혁 씨는 상담하며 자신은 30년 동안 한 번도 자신의 인생을 살아본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진혁 씨의 아버지는 돈이 없어 공부하지 못했지만 사업 수완을 발휘하여 자수성가한 분입니다. 그러나 아버지에게는 공부에 대한 한이 있었습니다. 행정고시에 합격하는 것이 꿈이었고, 주위에서도 공부만 했었다면 분명 합격했을 것이란 말을 합니다.
진혁 씨는 셋째였는데, 아버지는 진혁 씨를 임신했을 때 왕관을 받는 태몽을 꾸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진혁 씨가 자신의 꿈을 이루어줄 아들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다른 형제들보다 특별한 대우를 받았습니다. 진혁 씨도 아버지의 꿈을 이루기 위해 열심히 공부했지만, 번번이 떨어졌습니다. 고시 공부에 지친 진혁 씨는 회사에 취직했지만, 아버지는 여전히 다시 시도하라고 윽박지릅니다. 진혁 씨는 자기 인생을 살지 못하게 만든 아버지에 대한 증오와 또 그 꿈을 이뤄주지 못한 죄책감에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아버지에게 진혁 씨는 그저 맛있는 물고기에 불과합니다. 지금 깨어나지 못한다면 하느님 앞에 가서 자신은 셋째를 가장 사랑했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입니다. 깨어나야 합니다. 사랑은 양식을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을 양식으로 삼았습니다. 자신이 배가 고팠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배가 고픈데 어떻게 양식을 나누어줄 수 있을까요? 사랑하십시오. 그러나 그전에 먹고 기도해야 합니다.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2010)는 유명 작가 엘리자베스 길버트의 회고록을 영화화한 작품입니다. 엘리자베스는 8년 차 결혼 생활을 하고 있지만, 남은 것이 없다는 공허감에 빠집니다. 이혼을 결심하고 자신의 대본으로 연극을 하는 주인공과 새로운 사랑에 빠집니다. 그러나 그것도 금방 시들어버립니다. 사랑하면 행복할 줄 알았는데 항상 메마르게 끝나는 것 때문에 길을 잃습니다. 그리고 처음으로 하느님께 진심으로 기도합니다. 해답은 오지 않습니다. 그녀는 1년 동안 이탈리아와 인도, 그리고 발리를 여행하기로 합니다.
이탈리아에서는 좋은 친구들을 만나 실컷 맛있는 것을 먹습니다. 너무 기분이 좋아집니다. 그녀는 결혼만이 아니라 일상에서, 먹는 것에서도 행복을 찾을 수 있음을 발견합니다.
인도에서는 기도를 배웁니다. 그녀는 지금까지 자신을 고통스럽게 만들었던 것은 집착하는 자기 자신 때문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용서하기로 합니다. 자기 자신까지도.
마지막 인도네시아 발리에서는 새로운 사랑을 만납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자신이 했던 사랑은 텅텅 비어가는 자신을 메마르게 만드는 사랑이었습니다. 두려워서 망설입니다. 그러나 먹는 즐거움을 찾고 내면의 악마를 이기는 기도를 할 줄 안다면 더 큰 사랑으로 나아갈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사랑은 위험을 감수하는 것입니다. 내가 먹어야 할 양식을 내어주는 일입니다. 내어주면서 메말라진다면 그 사랑에는 언제나 한계가 옵니다. 우리는 누구나 사랑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깨어있으십시오. 먼저 먹고 기도하십시오. 그래야 내어줄 수 있습니다. 기도 안에서 먼저 자신이 꽃이 되지 않으면 어떤 풀도 꽃으로 불러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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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24,42-51: 너희는 늘 준비하고 있어라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항상 깨어있으라고 초대하신다.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들은 마지막 때를 걱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날이 언제든지 올 수 있으므로 경계를 게을리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분을 언제 만나게 될지 모른다. 확실한 것은 그분을 만나게 되고, 확실히 오신다. 우리가 깨어있지 못하면 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한 채로 뵙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돌아오시는 날, 즉 우리가 우리 자신의 종말을 모르는 것은 우리가 늘 노력하라는 하느님의 뜻이다. 언제나 방심하지 않고 노력하며 살기를 바라신다. 죽는 시간이 우리 모두에게 감추어져 있는 것은, 우리가 언제라도 죽을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고 늘 선을 행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도둑이 밤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 깨어있으면서 도둑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43절)
우리의 삶은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45절)의 모습이어야 한다. 이것은 충실한 사람을 의미한다. 그래야 동료 종들에게 제때 양식을 내주는 일을 할 수 있다. 필요한 사람들에게 제때 양식을 내주기 위해서는 슬기가, 어려울 때 양식을 자기 혼자 차지하려는 마음을 갖지 않으려면 믿음이 필요하다. 누구나 자신이 받은 것을 모든 사람의 유익을 위해 사용하여야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이다. 그러한 종에게 위대한 약속이 주어진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주인은 자기의 모든 재산을 그에게 맡길 것이다.”(47절) 종이 하늘의 보물을 받는 것은 이 지상에서 책임 있게 행동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큰 영예이다. 신앙인들은 그런 영예를 입은 사람들이다. 충실하고 슬기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러나 “못된 종”(48절)에 대해 말씀하신다. 이 종은 자기 아래 있는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고, 하느님의 뜻과는 반대되는 일을 서슴지 않는다. 심판을 전혀 생각지 않는 모습이다. 예수님께서는 방종하게 사는 사람들에게 엄한 벌을 받으리라고 경고하신다. 그들은 엄한 심판을 받을 것이며, 여기에서 주님께 받은 직무를 성실하게 수행하지 못한 사람들은 주님께 또 다른 직무를 받지 못할 것이다. “그를 처단하여”(51절) 라는 것은 영으로부터 자녀 됨의 자격을 박탈한다는 것이다. 그들이 웃음거리 같은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들이 당하는 고통과 벌 때문에 이를 갈게 될 것이라고 한다. 우리는 온 마음을 바쳐 열심히 노력하지 않고 못 배기는 사람들이 되어, 더욱더 충만한 은총을 받도록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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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잼버리’가 끝났습니다. 이번 행사에는 몇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폭염에 대한 대책이 부족했습니다. 더위에 지친 학생들이 탈진하여 쓰러지기도 했습니다. 배수 시설에 대한 대책이 부족했습니다. 텐트를 치는 것도 어려웠지만 더 힘들었던 것은 모기를 비롯한 해충에 의한 피해였습니다. 방역 조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서 많은 학생들이 벌레 때문에 힘들었습니다. 화장실이 부족했고, 위생상태가 좋지 않았습니다. 많은 학생들이 화장실 사용에 불편을 겪었습니다. 영국의 대원들은 급기야 야영지에서 철수 하였습니다. 미국의 대원들도 철수 하였습니다. ‘울고 싶은데 뺨 때린다.’는 말처럼 태풍까지 상륙하여서 모든 대원들은 야영장에서 철수하였습니다. 2023년 ‘새만금 잼버리’는 아쉬움과 부끄러움이 남는 행사였습니다. 대한민국의 품위를 떨어트린 행사가 되었습니다. 지방정부는 중앙정부에서 지원을 안 했다고 책임을 전가합니다. 중앙정부는 지방정부의 준비가 소홀했다고 책임을 묻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수많은 국제행사를 무탈하게 진행하였고, 성공적으로 마무리했습니다. 앞으로는 국가의 품위를 떨어트리는 행사가 없도록 준비에 만전을 기하면 좋겠습니다.
군대에서 전해지는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전투에서 패배한 것은 용서할 수 있지만 경계를 소홀히 한 것은 용서 받을 수 없다.” 전투는 이길 수도 있고, 질 수도 있습니다. 전투에서 패배했다고 그 죄를 물으면 군대가 존립하기 어렵습니다. 승리와 패배는 늘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경계를 소홀히 해서 부대가 위험에 처한다면 그것은 반드시 죄를 물어야 합니다. 모든 부대는 불침번과 초소 경계병을 운영합니다. 불침번과 초소 경계병이 있기에 다른 부대원들이 안심하고 잠을 잘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깨어 준비하고 있어라.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오리라.” 깨어 있는 것도 중요하지만 준비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잼버리를 기획하는 사람들도 깨어 있었습니다. 해외 출장도 다녀왔습니다. 예산도 집행하였습니다. 그러나 준비에는 소홀함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깨어 있지만 깨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초소 경계를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눈을 뜨고 깨어 있었어도 적이 몰래 침투하였다면 깨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전방을 주시하면서 지켜보아야 합니다.
8월의 마지막 날입니다. 어느덧 가을은 우리 곁에 다가왔습니다. 예전에 이런 글을 읽었습니다. “민들레 꽃 한 송이를 민들레가 피웠다면 하늘은 뭐가 되고 땅은 또 뭐가 되나. 하늘이 피웠다 하면 민들레는 뭐 되나.” 작은 글이지만 울림이 있었습니다. 가을은 그냥 오는 것이 아닙니다. 뜨거운 여름을 온 몸으로 맞이했던 땅과 곡식과 사람의 땀이 있었기에 가을이 오는 것입니다. 역사학자 이덕일은 ‘고금통의’라는 책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예전에 있었던 일들에서 지금의 삶을 돌아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의를 찾아야 하는데 이익을 찾으려하고 그 때문에 많은 갈등과 분쟁이 생깁니다.” 신앙은 이익을 쫓는 것이 아니라, 의를 생각하는 것이고, 특히 하느님의 뜻과 의를 먼저 생각하는 것입니다. 깨어있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마음의 눈으로, 신앙의 눈으로, 영성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세상을 보면 날마다 숨 쉬는 순간마다 하느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고린토의 교우들을 칭찬하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여러분이 주님 안에 굳건히 서 있다고 하니 우리는 이제 살았습니다. 우리가 여러분 덕분에 우리의 하느님 앞에서 누리는 이 기쁨을 두고, 하느님께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하겠습니까?” 주님 앞에 굳건히 서 있는 것이 깨어 있는 것입니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것이 깨어 있는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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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깨어 있어라.>
“깨어 있어라. 너희의 주인이 어느 날에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이것을 명심하여라. 도둑이 밤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 깨어 있으면서 도둑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마태 24,42-44)
‘깨어 있음’은 ‘살아 있음’입니다. 그리고 ‘살아 있음’이라는 말은, 야고보서에 있는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영이 없는 몸이 죽은 것이듯 실천이 없는 믿음도 죽은 것입니다.”(야고 2,26)
신앙인으로서 깨어 있는 것은 ‘영적으로’ 살아 있는 것이고, 믿는 대로 실천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반대로, ‘깨어 있지 않은 신앙인’은 믿는다고 말만 하면서, 또 믿는다고 생각만 하면서 믿음을 실천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영혼이 죽어 있으면 ‘죽은 신앙인’입니다. 따라서 영혼의 생명력과 건강을 잘 유지하는 것이 신앙인으로서 살아 있는 것이고, 그 방법은 ‘실천하는 믿음’입니다. 즉 ‘깨어 있음’은 믿음과 실천이, 또 믿음과 삶이 온전히 하나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재림에 관해서 말씀하시면서 강조하신 것은, “그날이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그날은 ‘반드시’ 온다.”입니다. 반드시 이루어지는 일이기 때문에 항상 깨어 있어야 하고, 그날이 언제인지 모르니까 ‘지금’ 깨어 있어야 합니다. “도둑이 밤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은 “도둑이 몇 시에 오는지는 몰라도 틀림없이 온다는 것을 알면”입니다.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라는 말씀은, “심판받을 준비를 하고 있어라.”이기도 하고, “구원받을 준비를 하고 있어라.”이기도 합니다.
깨어 있는(살아 있는) 신앙인에게 그날은 구원을 받는 날입니다. 그러나 깨어 있지 않은(준비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심판을 받는 날입니다. 이 말은, 개인의 임종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잘 준비된 사람에게는 지상의 생을 마치는 날이 곧 하느님을 만나러 가는 날인데, 아무 준비도 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심판대를 향해서 가는 날입니다. 그래서 죽는 것이 무서운 일이 되어버립니다. 죽음 자체도 두려운 일이지만, 죽은 다음에 겪어야 할 심판이 더 두려운 일입니다.
심각하게 죽을 고비를 넘긴 사람들 가운데에는 그런 것을 생생하게 체험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신 것에 감사드리면서 새롭게 살아야겠다고 결심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러다가도 시간이 흐르면서 차츰 그 결심이 희미해지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깨어 있음’은 한 번 하고 그치는 일이 아니라, ‘늘’ 유지되어야 하는 일입니다. 지속적으로 살아 있어야 살아 있는 것입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정신과 마음이 다른 곳을 향해 있으면서, 영적으로 죽은 상태가 되어버리는 일을 반복하는 것은, 살아 있는 것이 아닙니다.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라는 말씀은, 인간은 ‘재림의 날’을 미리 계산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전적으로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기 때문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깨어 있으면서 준비하는 것뿐입니다. 그날을 미리 계산하고 예측하려고 시도하는 것은 지극히 어리석은 일입니다.
“주인이 종에게 자기 집안 식솔들을 맡겨 그들에게 제때에 양식을 내주게 하였으면, 어떻게 하는 종이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이겠느냐?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에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주인은 자기의 모든 재산을 그에게 맡길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가 못된 종이어서 마음속으로 ‘주인이 늦어지는구나.’ 하고 생각하며, 동료들을 때리기 시작하고 또 술꾼들과 어울려 먹고 마시면, 예상하지 못한 날, 짐작하지 못한 시간에 그 종의 주인이 와서, 그를 처단하여 위선자들과 같은 운명을 겪게 할 것이다. 거기에서 그는 울며 이를 갈 것이다.”(마태 24,45-51)
이 말씀은, 표현만 보면 종교 지도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뜻을 생각하면 ‘모든 사람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재림과 종말과 심판은 특정인들만을 대상으로 한 일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주인이 맡긴 ‘식솔들’은 각자 자신의 ‘영혼’으로 해석되고, 제때에 양식을 내준다는 말은, 자기의 영혼 구원을 위해서 충실하게 노력한다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못된 종’은 재림, 종말, 심판, 구원 등에는 아무 관심이 없는 사람들, 현세의 생활만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심판에 관심이 없으니 죄를 지어도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신앙인은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마태 10,28)을 두려워하는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하느님의 심판과 처벌이 두려워서 죄를 안 지으려고 노력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은 초보 단계의 신앙입니다. 좀 더 성숙한 신앙인은 심판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구원의 기쁨을 얻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 단계보다 더 성숙하게 되면,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에서 얻는 기쁨으로, 또 하느님께 기쁨을 드리는 것에서 얻는 기쁨으로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 기쁨은 당연히 이웃 사랑 실천으로 이어집니다. 신앙의 완성 단계는 주님과 완전한 일치를 이루는 것입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신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갈라 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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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청주교구 정용진 요셉 신부님]
많은 성당 제의실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쓰여 있습니다. “주님, 오늘 제가 드리는 이 미사가 저의 첫 미사이고 마지막 미사인 것처럼 봉헌하게 하여 주소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은 자신에게 맡겨진 주인의 집안 식솔들에게 제때에 양식을 내주는 종입니다.(45-46절 참조) 오늘 복음이 말하는 충실한 그 종은 바로 우리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진심으로 정성을 다하여 돌보고 섬길 주님의 “집안 식솔”(45절)을 맡기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때때로 본분을 망각하고 우리에게 그들을 맡겨 주신 하느님마저 잊고 살아갑니다. 하느님을 공경하고, 우리에게 맡기신 식솔들을 돌보는 대신 자신의 명예와 영광을 얻으려고 세상의 우상들을 좇아 살고 싶은 유혹을 겪습니다.
그래서 예전부터 교회는 그리스도인이 갖추어야 할 중요한 덕으로 ‘깨어 있음’을 꼽습니다. “깨어 있다는 것은 우리 마음이 게을러져 일상의 평범함 속에 우리 자신의 영성이 매몰되고 사라지는 것을 결코 허락하지 않는 것”(프란치스코, 성녀 마르타의 집 아침 미사 강론, 2022년 8월 25일 자)입니다. 기도는 깨어 있으려고 우리 마음의 등불을 켜 두는 일입니다. 특별히 우리가 이웃과 형제들을 돌보려는 마음이 식어 갈 때마다 기도는 차가워진 그 열정을 다시 데워 줍니다. 이처럼 기도는 언제나 우리를 하느님과 형제들에게 다시 데려가 줍니다.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으로 살고자, 그리고 언제나 깨어 있고자 오늘도 기도합시다. 사랑으로 형제들을 돌보며 기쁨으로 만나 뵐 주님을 기다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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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교구 임문철 시몬 신부님]
<주님의 행복한 종>
소신학교 시절, 마라톤에 출전해본 적이 있습니다. 그때 저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을 생각하며 열심히 뛰었습니다. 그러나 마라톤은 신심으로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갑자기 온몸에서 열이 오르더니 정신이 가물가물해지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내가 죽는가보다 했습니다.
순간 성녀 소화 데레사가 떠올랐습니다. “성녀는 자신의 일생을 통해 한 번이라도 하느님을 방긋 웃게 해드릴 수 있다면 자신의 일생은 그것으로 족하다고 했는데, 나는 한 번도 그렇게 못해드리고 죽는구나!” 하니 제 짧은 인생이 아쉬웠던 기억이 있습니다.
새 성경 번역을 완성하신 임승필 신부님이 쉰셋의 나이에 하늘 나라로 가신 지도 수년이 지났습니다.
제가 제일 존경하는 임 신부님은 저의 테니스 호적수이기도 하여서, 휴가 때면 코트에서 치열하게 싸웠습니다. 그러나 휴가 중에도 테니스 외에는 식사만 하고 나면 성경 번역에만 매달리셨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하셨는데 완역 합본의 출판도 못 보고 가셨으니 우리로서는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렇지만 그분으로서는 탈대로 다 타고 남은 동강 하나 없이 온전히 재가 되어 가셨으니, 그분은 진정 행복한 주님의 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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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유재훈 솔로몬 신부님]
저는 가끔 죽음 이후 상황을 생각해 봅니다. 제가 지옥에 가게 된다면 죄목은 ‘시간을 무의미하게 허비한 죄’ 때문은 아닐지 모르겠습니다. 주어진 시간을 충실히 사용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지금 해야 할 일을 다음에, 조금 있다가, 내일로 미루며 게으름을 피우기 일쑤입니다.
충주에 있는 어느 국수집에 가면 손님들이 남기고 간 글들이 사방에 붙어 있습니다. 그 많은 글 중에 이런 글귀가 제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할 일 없이 보낸 오늘 하루가 어제 죽은 사람이 그토록 살고 싶던 내일이다.”
미래의 행복한 삶은 현재의 삶들이 쌓여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행복한 미래는 어느 순간, 갑자기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나에게 주어진 시간을 충실하게 살아갈 때 나의 삶이 행복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누가 나에게 “당신은 현재의 삶에 충실합니까?”라고 묻는다면 “예, 그렇습니다”라고 자신있게 대답할 수 있게 살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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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준비하고 있으면 걱정할 것이 없다>
늘 깨어 준비하고 산다는 것은 지혜로운 삶입니다. 비나 태풍 등 자연의 능력을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지만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은 사람의 몫입니다.
무슨 일이든 코앞에 닥쳐서 호들갑을 떨기보다는 먼 안목으로 미리미리 준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준비할 수 있다는 것은 깨어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깨어있지 않으면 준비할 수 없습니다.
저는 미리 미리 준비하는 스타일은 못됩니다. 그래서 무엇을 실행하고 나서는 ‘미리 준비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하고 후회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강의를 부탁받을 때 여유 있게, 준비하지 못하고 날짜가 임박해서 안절부절못합니다.
그러고는 다음부터는 잘해야지 다짐합니다. 그러나 막상 그날이 오면 결심을 실천에 옮기지 못하고 또 후회합니다. 바보들은 항상 결심만 한다는데 제가 그렇습니다.
운동선수에게 있어서 시합이 이루어지는 날은 희망의 날이고 영광의 날입니다. 노력한 모든 것을 마음껏 보여줄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정성과 땀이 함께 했으면 등수에 구애받을 이유가 없습니다.
설사 실패를 한다 해도 그 실패는 다시 일어설 수 있는 발판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깨어있는 사람에게는 실패는 늦추어진 성공이요, 최선을 다한 것 자체가 보상입니다. 그러나 준비 없이 경기에 임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리고 속임수로 준비했다면 그에게는 두려움의 날이 될 것입니다. 그에게 있어서는 패배는 패배일 뿐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하늘을 향한 인생 여정의 길도 다르지 않습니다. 세상의 종말이 언제 오든 깨어 준비하고 있으면 구원의 날을 맞이하게 됩니다. 반드시 올 그날을 지금 준비하면 그날이 언제 오든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사실 인생 여정의 모두가 구원의 날입니다. 예상하지 못한 날, 짐작하지 못한 시간에 주님께서 심판자로 오신다 해도 깨어 준비한 사람에게는 구원의 영광을 기뻐하게 됩니다.
그러나 깨어있지 못한 사람은 자기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야말로 심판대에 서게 되고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는 후회해도 이미 늦게 됩니다. 그러므로 기회가 주어진 지금 깨어 준비하고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날은 구원의 날입니다.
순간순간 주어지는 선택의 기회에 옳고 바른 것을, 그리고 구원을 이루는 선택을 함으로써 후회를 반복하는 일이 없기를 희망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깨어 있으십시오.”(마태24,42)
예수님께서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에게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주인은 자기의 모든 재산을 그에게 맡길 것이다.”(마태24,46) 하셨듯이 오늘 우리를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으로 인정해 주시기를 청합니다.
“여러분은 모두 빛의 자녀이며 낮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밤이나 어둠에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제 다른 사람들처럼 잠들지 말고, 맑은 정신으로 깨어 있도록 합시다.”(1테살5,5-6)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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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사제 서품을 받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어떤 분으로부터 화초를 선물로 받았습니다. 이제까지 어떤 식물도 키워본 적이 없어서 여기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었지요. 더군다나 당시에는 인터넷도 활성화되어 있지 않을 때였기에 정보를 얻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친한 친구에게 물어보니, 자기도 잘 모르지만 물 잘 주고, 햇빛 볼 수 있게 해주고, 여기에 사랑하는 마음까지 있으면 잘 자라지 않겠냐고 조언합니다.
매일 분무기로 물을 뿌려 잎과 줄기를 닦으며 사랑을 주었습니다. 또 하루도 빠지지 않고 물을 주었고, 햇빛도 볼 수 있도록 햇볕이 좋은 곳에 놓았습니다. 하지만 이 식물은 점점 시들어갔습니다. 화초에 대해 잘 아시는 분이 보더니 분갈이하지 않아서 그렇다고 말씀하십니다. 화원에서 처음 가져온 화분이 작아서 뿌리가 더 이상 자라지 못해 죽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솔직히 이제까지 식물에 이 정도 관심과 사랑을 준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사랑을 기울였음에도 죽고 말았습니다. 여기서 누구 탓을 해야 할까요? 사랑을 주었어도 죽어버린 이 식물을 탓해야 할까요? 아닙니다. 사랑했다고 하지만 제대로 알지 못한 제 탓이었습니다.
사랑의 주님이면서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화내는 분이 있습니다. 그만큼 정성을 기울였는데 왜 이런 처지에 놓이게 되었냐며 불평하는 분도 있습니다. 주님께 대한 원망이 가득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가장 큰 문제는 주님을 잘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알려고 노력도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과연 얼마나 주님을 알고 있습니까? 정성을 다하는 것과 사랑하는 것은 분명히 다릅니다. 단순히 정성을 다했다고 사랑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잘 알려고 노력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에 대해서 잘 알 수 있도록, 일상의 쉬운 예화를 통해서 설명해주십니다. 특히 우리의 구원을 위해 이 땅에 오신 주님이시기에, 잘 준비해야 한다는 것을 이야기하시지요. 어떻게 준비해야 할까요? 주님을 잘 알아야 합니다. 주인에 대해서 잘 아는 종이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인 것처럼, 주님에 대해 잘 아는 우리가 되어야 충실하고 슬기로운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예상하지 못한 날, 짐작하지 못한 시간에 오신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아직도 멀었다면서 자기 욕심과 이기심 채우는 데에 온 기울여야 할까요? 아닙니다. 주님을 잘 아는 사람은 주님께서 가장 좋아하시는 사랑의 실천을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위선자들처럼 하늘 나라 앞에서 울며 이를 가는 모습이 아니라, 환하게 웃으면서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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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마태오 24,42-51 (깨어 있어라, 충실한 종과 불충실한 종)
“깨어 있어라. 너희의 주인이 어느 날에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이것을 명심하여라. 도둑이 밤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 깨어 있으면서 도둑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 주인이 종에게 자기 집안 식솔들을 맡겨 그들에게 제때에 양식을 내주게 하였으면, 어떻게 하는 종이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이겠느냐?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에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주인은 자기의 모든 재산을 그에게 맡길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가 못된 종이어서 마음속으로 ‘주인이 늦어지는구나.’ 하고 생각하며, 동료들을 때리기 시작하고 또 술꾼들과 어울려 먹고 마시면, 예상하지 못한 날, 짐작하지 못한 시간에 그 종의 주인이 와서, 그를 처단하여 위선자들과 같은 운명을 겪게 할 것이다. 거기에서 그는 울며 이를 갈 것이다.”
<충실한 종의 기도>
보잘것없는
나에게
당신의 일을
맡기시고
당신 떠나신
빈자리에
나 아닌
당신 계신 듯
나 당신처럼
있으오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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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믿음은 있지만 사랑은 없는?'>
오늘 복음은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 얘기이고, 독서는 어제에 이어 바오로 사도와 신자들 관계 얘기로 오늘 나눔은 독서와 복음을 연결하여 묵상한 것을 나누겠습니다.
한 마디로 얘기하면 바오로 사도는 복음의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바로 그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이였다는 얘기가 되겠습니다.
충실한 종은 일차적으로 주인 곁을 충실히 지키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주인의 재산과 식솔들을 잘 관리하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주인을 떠나지 않고 주인 곁에 충실히 머물며 지키는 것이 인격적인 충실함이라면 주인의 재산과 식솔들을 잘 관리하는 것은 사명적인 충실함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인격적인 충실성은 주님을 만유 위에 사랑하는 것이고 오늘 복음의 말씀대로 주인에게 늘 깨어있는 것이며, 달리 말하면 늘 기도하고 언제나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늘 깨어 기도하며 언제나 기도하는 것은, 제 생각에 성사적인 기도와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성사적인 기도란 무엇을 하든 그 일 가운데서도 주님께 깨어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차를 마시더라도 그냥 마시는 것이 아니라 성음악을 듣거나 하느님을 묵상하면서 마시면 차 한 잔의 성사가 되지요.
저의 경우 옛날에 담배 필 때 한동안 무의식적으로 담배를 피웠습니다. 그러다 어떤 일을 계기로 흡연을 성사화해야겠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담배 필 때마다 십자성호를 긋고 담배 피기 시작했고, 흡연이 니코틴 중독이 아니라 주님께 올리는 분향 예절이 되게 했지요.
다음으로 사명적인 충실성은 이웃을 향한 사랑이고 열정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웃이란 내게는 이웃이지만 주 하느님께는 자녀이고 식솔이며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종인 나에게 돌보라고 맡긴 존재들이지요.
이는 마치 자식이 내게는 자식이지만 실은 하느님께서 돌보라고 내게 맡긴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렇게 내 자녀가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라고 받아들이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내 자녀이니 내 맘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고 더 나아가 하느님의 자녀답게 자라도록 영적으로 세심하게 돌볼 것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도 신자들이 하느님의 자녀답게 자라도록 영적으로 어떻게 세심하게 돌봤는지 얘기하는데 먼저 신자들을 믿음의 자녀로 키우는 것에 대해 이렇게 얘기합니다.
“우리는 여러분의 믿음에 부족한 부분을 채워 줄 수 있게 되기를 밤낮으로 아주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테살로니카 신자들의 믿음이 확고함을 칭찬하면서도 그래도 부족함이 있다면 그 부족한 부분을 자기가 채워줘야 한다고, 그러니까 믿음이 자라도록 도와주고 기도해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하나는 신자들의 사랑을 자라게 하는 역할인데 바오로 사도는 이에 대해 이렇게 또 얘기합니다.
“여러분이 서로 지니고 있는 사랑과 다른 모든 사람을 향한 사랑도, 여러분에 대한 우리의 사랑처럼 주님께서 더욱 자라게 하시고 충만하게 하시길 빕니다.”
하느님께 대한 믿음에 이어 이웃에 대한 사랑이 자라길 바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충만하면 이제 이웃 사랑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거지요.
사실 악마를 믿는다면 모를까 하느님을 믿는다면서 내게 믿음은 있지만 사랑을 없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지요.
그러므로 하느님을 믿는 대다수 사람은 하느님을 믿는다면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쯤은 머리로 아는 사람들입니다.
알지만 사랑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생각을 다하고 마음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여 사랑하라고 주님 말씀하셨고, 프란치스코는 여기에 더해 애를 다하고, 감각까지 다하여 사랑하라고 하는 거지요.
아무튼 하느님 믿음은 있지만 이웃 사랑이 없는 나는 아닌지, 사랑을 한다지만 머리 사랑으로 그치는 나는 아닌지 돌아보는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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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게을러서도 방탕해서도 안 되는>
마태오 복음 23장은 대부분이 종교 지도자들을 주님께서 비판하시는 내용이고 끝부분은 이런 지도자들로 인한 예루살렘 황폐에 대한 내용입니다. 이렇게 23장을 마친 마태오 복음은 24장에서 종말론적인 재난 상황에 대해 얘기를 한 다음 끝부분에서 이런 상황에서 깨어 있어야 함과 충실한 종과 불충실한 종의 기준을 들려주는데 오늘 복음이 바로 이 끝부분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얘기는 우선 종에 대한 얘기입니다. 그런데 종에 대한 얘기가 우리에게 해당이 됩니까? 종에 대한 얘기는 남 얘기가 아닙니까? 나는 종이 아니니 남 얘기가 아니냐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을 남이 아닌 내게 하시는 말씀으로 받아들인다면 먼저 나는 종이고 주인은 하느님이라는 것부터 받아들여야겠습니다. 이것을 달리 말하면 종 의식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공동생활을 하며 자주 주인 의식에 대해서 얘기합니다.
성숙한 사람이라면 공동체 또는 집을 나의 집이라고 생각하고 그래서 공동체에 대한 관심과 책임을 가져야 한다는 거지요. 사실 미성숙하면 할수록 공동체에 대해 아무런 관심이 없고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으며 집을 하숙집처럼 여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인간 공동체에서 그리고 우리 인간끼리는 주인 의식이 필요하고 중요하며 주인 의식만큼 성숙합니다. 그러나 신앙 공동체에서 그리고 하느님 앞에서는 종 의식이 필요하고 중요하며 따라서 성숙하면 할수록 주인에게 충성하고 주인이 맡긴 일에 충실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충성과 충실을 구분할 필요도 있습니다. 충성은 인격적인 말로서 하느님께 충성하는 것이며 오늘 복음에서는 주인이 언제 올지 또는 주인이 언제 부를지 늘 주인에게 깨어 있는 것이고, 다른 사람 곧 인간의 눈치가 아니라 주인이신 하느님 눈치를 보는 것이며 자기 욕구의 만족이 우선하지 않고 주님 뜻의 실현이 늘 우선하는 겁니다.
충실은 임무적인 말로서 일 특히 주님께서 맡기신 일에 성실한 것인데 주님께서 맡기신 일이란 주님의 식솔들에게 양식을 나눠주는 것입니다. "주인이 종에게 자기 집안 식솔들을 맡겨 그들에게 제때에 양식을 내주게 하였으면, 어떻게 하는 종이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이겠느냐?" 이 말씀을 뜯어 볼 때 주님이 종에게 맡긴 임무는 주인 집안의 식솔 관리와 양식 관리입니다. 그래서 충실한 종이란 맡겨진 사람을 주인 집안의 식솔로 여겨야 합니다. 그런데 주인 집안의 식솔이라면 주님 공동체 곧 교회 신자들이니 충실한 종은 신자들을 자기 집의 식솔이나 종처럼 부리지 않고 주님의 집안의 자녀로 여기며 받들어 섬겨야 합니다.
다음으로 충실한 종이란 양식 관리 곧 양식을 제 때에 나눠주는 겁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비유에서 '제 때'란 표현을 분명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양식을 안 나눠주는 것도 문제지만 설사 나눠준다 하더라도 제 마음대로 나눠주는 것도 문제라는 말이며, 주인이 돌아올 때 곧 주인의 때 못지 않게 식솔들의 때에도 깨어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게을러서도 안 되고 술이나 처먹으며 방탕해서도 안 됩니다. 요즘 저의 경우 게으름과 술이나 처먹는 방탕함이 목의 가시처럼 걸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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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깨어 있어라>
"깨어 있음도 훈련이요 습관이다"
-함께 희망하기(Hoping Together)-
“주님, 아침에 당신 자애로 채워 주소서. 저희는 날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리이다.”(시편90,14)
오늘 화답송 시편 성구가 위로와 힘이 됩니다. 오늘 새벽 산책시 놀랍고 신비스런 사실을 발견했고 확인했습니다. 곡식은 사람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큰 다 하는데 배밭사이 오솔길 배열매들이 그러합니다. 그 어느 배나무들보다 주렁주렁 달려 무럭무럭 자라나는 평화의 집 배밭사이 오솔길의 배나무 열매들이 그러합니다. 하찮은 미물도 사람이, 사람의 발자국 소리가, 사랑의 발자국 소리가 그립고 반가운가 봅니다. 1년 365일 날마다 새벽 기도 산책 때 마다 제 강복을 받는 배나무들이니 그럴 만도 합니다.
오늘 밤도 집무실에 들어오자 마자 어제부터 시작한 것처럼 십자고상 태극기 앞에서 만세 오창으로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나라가 있고 교회가 있습니다.
“하느님 만세!”
“예수님 만세!”
“대한민국 만세!”
“가톨릭 교회 만세!”
“요셉 수도원 만세!”
정신이 번쩍 들면서 깨어 있게 됩니다. 참으로 깨어 살아야 할 시절입니다. 어떤 때보다 간절하고 절박한 말마디가 “깨어 있어라”입니다. 사람이라 다 사람이 아닙니다. 참으로 깨어 있는 사람이 참으로 살아 있다 할 수 있습니다. 옛 사막 수도자들의 한 가지 목표는 참으로 사는 것이었고, 깨어 있을 때 비로소 참으로 살아 있다 할 수 있습니다. 어제 오랜만에 방문한 도반 사제의 고백성사가 있었고 보속으로는 말씀처방전과 함께 애국가 4절까지 콧팅한 자료를 드리며 1절까지 깨어 부르라 했습니다. 그대로 깨어 기도하는 고요하고 숙연한 분위기였고 감동했습니다.
“아, 고등학교 때 불러보고 처음입니다. 10년도 훨씬 넘은 것 같습니다.”
애국가를 부른 후의 고백이었고, 함께 십자가의 예수님과 태극기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니 흡사 둘다 독립운동가처럼 참 멋졌습니다. 이 또한 깨어 있음의 훈련입니다. 끊임없는 기도도, 회개도 결국은 깨어 살기 위함입니다. 영성생활의 직접적 목적은 깨어 있음의 순수요 궁극의 목적은 하늘 나라의 삶입니다.
“Hoping Together(함께 희망하기)!”
오늘 8.31일부터 9.4일까지 제43차 해외 사목 방문국인 몽골을 향한 영원한 현역이자 주님의 평화와 희망의 전사, 교황님의 모토가 참 멋집니다. 이에 한 형제는 주옥같은 말마디라 감탄했고 한 자매는 공동체의 모토로 삼았다 했습니다. 함께 희망할 때 저절로 모두가 깨어 있게 됩니다. 엊그제 8.29일은 경술국치(1910.8.29.) 113주간이 되는 날이었고 곳곳에서 추념식이 있었습니다.
바로 이날 일본은 오염수를 방류하기 시작했고, 국군의 요람 육사에서는 독립영웅 5인의 철거가 거론되기 시작했으니 참 반복되는 역사같아 이 또한 우리를 깨어 있게 합니다. 홍범도 평전을 낸 이동순 시인의 “내가 돌아오지 말걸-홍범도 장군의 독백-”이란 장시長詩를 통분의 마음으로 공감하며 읽었습니다. 홍범도 장군의 소련 입국신고서에 직업은 '의병', 목적과 희망 항목에는 '고려독립'이라 쓰여 있었습니다. 아, 왜 이런 뉴스가 일간지에 안 나오는지 모르겠습니다.
“역사를 잊어버린 육사에게 미래는 없다.”
말마디가 잊혀지지 않습니다. 어찌 육사뿐이겠습니다. 역사대신 민족, 나라, 공동체, 개인 모두를 넣어도 다 통합니다. 이래서 좋은 역사의 기억을 말하는 것이요 이래야 악순환의 역사를 멈출 수 있습니다. “기억이 없는 나라는 미래가 없다(A nation with no memory has no future)” 역시 어제 읽은 말마디도 같은 맥락입니다. 역사의식이 부재한 지도자들이 참으로 통탄스럽습니다.
이래서 어려서부터 올바른 역사 교육은 필수입니다. 역사교육 부재의 오늘의 교육현실은 그야말로 얼빤지, 넋빠진 교육입니다. 깨어 있음은 참으로 폭이 넓고 깊습니다. 과거를, 역사를 기억하는 것 역시 깨어 있는 행위입니다. “민중의 벗”이었던 고 김승훈 사제의 마지막 강론 주제는 무관심의 병이었습니다. 23년전 순교복자수녀원 피정지도시 머물고 계시던 신부님이 겸손히 고백성사를 청하던 모습이 눈에 선한데 그 이후 3년만(2003.9.2.)에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21세기 인류의 가장 큰 병은 무관심의 병입니다. 이 무관심의 병이 지금 인류전체를 죽음에 이르게 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고치기 힘든 무서운 병이 무관심의 병입니다.”
20년전 말씀이 지금도 여전히 호소력을 지닙니다. 바로 무관심 병의 치유를 위한 처방이 깨어 있음입니다. 참으로 잊어야 할 것을 잊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기억하는 것이 깨어 있음입니다.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을 잊는 망각이 죄요 병인 것입니다. 참으로 깨어 있음은 하느님의 시야와 관심에 까지 확장됨을 요구합니다. 텅빈 자족적 폐쇠적인 깨어 있음이 아니라 온통 주변 세상에 환히 열려 있는 깨어 있음입니다.
지난 18개월 동안 전쟁으로 우크라이나의 무죄한 어린이들 540명 이상이 죽었습니다. 교황님은 9월의 기도지향은 변두리의 열악한 곳에서 살고 있는 이들을 위해서입니다. 만연된 가난과 시련, 목이 뻣뻣하고 무디어진 마음에서 벗어나 환영의 문화를, 살심장을 지닐 것을 촉구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인구의 10% 7억이 굶주리고 있으며 16억이 아주 열악한 환경에서 지낸다는 교황님의 개탄이요 결론같은 말씀이었습니다.
“환영은 도움 이상이다. 그것은 우리가 잃어버린 형제자매를 회복시킴으로 타인을 우리 수준에 위치시킴을 뜻한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 한몸으로 변화되어야 한다.”
우리가 교회입니다. 참으로 깨어 있어야 할 교회인 우리들입니다. 깨어 살아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참으로 사는 것입니다.
“깨어 있음은 기억입니다. 깨어 있음은 은총입니다. 깨어 있음은 침묵입니다. 깨어 있음은 기도입니다. 깨어 있음은 기다림입니다. 깨어 있음은 인내입니다. 깨어 있음은 겸손입니다. 깨어 있음은 빛입니다. 깨어 있음은 사랑입니다. 깨어 있음은 관심입니다. 깨어 있음은 희망입니다. 깨어 있음은 회개입니다. 깨어 있음은 찬미입니다. 깨어 있음은 감사입니다. 깨어 있음은 평화입니다. 깨어 있음은 기쁨입니다. 깨어 있음은 개방입니다.”
깨어 있음의 덕이 끝이 없습니다. 그러니 깨어 있음은 모두라 할 수 있습니다. 깨어 있음의 훈련과 습관이 영성생활에 얼마나 결정적인지 깨닫습니다. 요즘 유행되는 향심기도, 비움기도, 명상기도등 모든 기도수행이 궁극으로 목표하는 바 깨어 있음의 훈련이요 습관화입니다. 참으로 의식적 지속적 한결같은, 끊임없는 분투의 노력을 요하는 깨어 있음의 영성훈련입니다.
참으로 희망하는 자가, 기다리는 자가 끝까지 깨어 살 수 있습니다. 바로 주님이 우리의 유일한 희망의 대상, 기다림의 대상, 그리움의 대상입니다. 외로움, 그리움, 기다림 모두의 갈망에 대한 근본적 해답은 주님뿐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믿고 희망하고 사랑하는 자만이 끝까지 깨어 있을 수 있고 기다릴 수 있습니다. 제가 날마다 밤 1시에 일어나 깨어 강론을 쓸 수 있음도 이런 주님께 희망을 두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주님 뵈올 희망에 설레는 마음으로 일어나 깨어 쓰는 매일 강론입니다.
오늘의 말씀은 고맙게도 “깨어 있어라”가 주제입니다. 주님으로 상징되는 주인이 언제 올지 모르니 이 말씀 명심하고 마음의 눈 크게 뜨고 마음의 귀 활짝 열고 깨어 있으라, 준비하고 있으라는 것입니다. 깨어 준비하고 기다림이 유비무환의 지혜입니다. 모두가 깨어 있되 공동체의 지도자는 더욱 그래야 합니다.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 어떻게 하는 종이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이겠느냐?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에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 내가 진실로 말한다. 주인은 자기의 모든 재산을 그에게 맡길 것이다.”
참으로 오늘 지금 여기 제자리 꽃자리에서 깨어 제정신으로 제역할의 몫을 다하는, 제책임을 다하는 제대로의 삶이 바로 구원이요 하늘 나라의 실현임을 깨닫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 역시 우리에게 깨어 살라 주시는 기도 말씀처럼 들립니다.
“여러분에 대한 우리의 사랑처럼 여러분의 사랑도 더욱 자라게 하시고 충만하게 하시며, 여러분의 마음에 힘을 북돋아 주시어, 우리 주 예수님께서 당신의 모든 성도들과 함께 재림하실 때, 여러분이 하느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흠없이 거룩한 사람으로 나설 수 있게 되기를 빕니다. 아멘.”
그러니 주님을 기다리며 하루하루 일일일생, 하루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깨어 사는 훈련이요 습관입니다. 내일 9월부터는 영적으로 여름방학이 끝나고 본격적으로 깨어 살아야 하는 기도의 계절에 돌입합니다. 9월 순교자 성월, 10월 묵주기도 성월, 11월 위령성월, 그리고 대망의 기다림의 시기 대림시기입니다. 참으로 늘 깨어 참으로 사는 삶이 될 수 있도록 이 거룩한 미사중 주님의 자비를 청합시다.
“하느님, 우리 주의 어지심이. 우리 위에 내리옵소서. 우리 손이 하는 일에 힘을 주소서. 우리 손이 하늘 일에 힘을 주소서.”(시편90,1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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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깨어 있어라. 너희의 주인이 어느 날에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마태24,42)
<자기 본분에 충실하자!>
오늘 복음(마태24,42-51)은 '깨어 있으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그리고 여기에 있는 또 다른 제자들인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깨어 있어라. 너희의 주인이 어느 날에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주인이 자기 종에게 자기 집안 식솔들을 맡겨 그들에게 제때에 양식을 내주게 하였으면, 어떻게 하는 종이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이겠느냐?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에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마태24,42.45)
'누가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인가?'
자기 본분을 잊지 않고 자기 본분의 충실한 종, 자기 신원을 망각하지 않고 자기 신원에 맞는 삶에 충실한 종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여기에서의 하느님의 나라 건설이라는 막중한 사명이 믿는 이들 모두에게 주어졌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들인 우리 모두는 '이 사명의 한 부분들'입니다. '하느님의 나라 건설이라는 이 전체의 한 부분들'입니다.
신앙 공동체 안에 있는 우리 모두는 전체가 아닙니다. 전체의 한 부분들입니다. 전체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이요, 하느님의 나라 건설'입니다.
우리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크고 작은 문제와 이에 따른 갈등은 내가 전체가 아님에도 전체가 되려는 마음과 행동에서 시작된 문제요 갈등이라고 생각합니다.
본당 공동체 안에서 사제는 전체가 아닙니다. 본당 공동체라는 전체의 한 부분입니다. 가정 공동체 안에서 남편 또는 부모는 전체가 아닙니다. 가정 공동체라는 전체의 한 부분입니다. 이런 본분과 신원 의식을 망각한 채, 전체가 되려고 할 때 문제가 발생합니다.
전체의 한 부분인 나입니다. 그리고 그런 나에게 역할이 주어졌습니다. 그 역할이 무엇인지 다시금 곰곰이 떠올려보면서, 이 역할에 충실할 것을 다짐하는 슬기로운 종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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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c0JBz8ID7j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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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마태 24, 44)
준비된
벼이삭이
들판에서
영글어가며
열매를 맺습니다.
모두가
시간만
흘려보낸다고
익어가진
않습니다.
뿌리가 땅에
하느님께 닿아야
익어가고
영글어 갑니다.
이들과 달리
우리는
하느님께
너무 불충실한
삶을 살아갑니다.
충실하고
슬기로운 관계가
행복한
관계입니다.
행복하지 않는
우리의
불성실과 위선을
먼저 아프게
꾸짖으십니다.
사랑이 없으면
기다림도
깨어있음도
준비도 있을 수
없습니다.
끊을 수 없는
사랑의 관계는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불성실과
무책임의
아픈 관계를
반성합니다.
준비한다는 것은
충실하고
슬기로운 삶으로
우리가
삶의 좌표를
이동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늦어지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엉뚱한 일을
하기에 늘
우리 쪽에서
늦는 것입니다.
예상하지 못한 날
짐작하지 못한
시간에 우리는
하느님을 만날
것입니다.
우리를 위한
준비이며
하느님을 위한
깨어있는
사랑입니다.
잇속은 빠르고
회개는 더딘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충실한 사랑입니다.
충실한 관계
충실한
열매입니다.
행복은 충실함이
빚어내는
준비의 잔치
깨어있음의
기쁨입니다.
내어맡김의
기쁜 날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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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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