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촌 일기-2021 새로운 시작, 한여름 날/소름 끼치는 감동

[기원섭]

교촌 일기-2021 새로운 시작, 한여름 날/소름 끼치는 감동

15년쯤 전의 일이다.

그때 나는 31년 9개월을 몸 담았던 검찰을 떠나 서울남부지방법원 소속의 집행관으로 제 2의 인생을 엮어가고 있었고, 맏이는 이름만 들으면 다 아는 큰 회사 입사시험에 합격해서 초임발령 대기 중에 있었다.

내 그때 뜻한 바가 있어, 맏이를 등 떠다밀다시피 해서 보름 일정의 유럽 배낭여행을 보냈었다.

영국과 프랑스와 이태리 등, 서유럽 몇 개국을 두루 도는 일정이었는데, 그 일정을 다 채우지 못하고 일주일 만에 귀국해야 했다.

그 사이에 첫 출근을 하라는 회사의 통보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서둘러 귀국한 맏이가, 비록 반 토막 나기는 했지만, 잊을 수 없는 경험을 했다면서, 내게 그 여행담을 들려줬었다.

이랬다.

“아버지, 이번 여행에서 제가 감동한 것이 참 많아요. 그 중에서도 잊지 못할 감동이 3가지였어요. 하나는 런던의 허 마조스틱 극장에서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 원본을 감상한 것이고요, 둘은 비틀즈가 팔을 쫙 벌리고 걸었던 거리를 저도 같은 폼으로 걸은 것이고요. 셋은 런던의 내셔널 갤러리에서 그림 한 점을 본 것이었는데, 그것은 소름끼치는 감동이었어요.”

도대체 어떤 그림이었기에 ‘소름끼치는 감동’이라고까지 표현을 했을까,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당연히 되물어봤고, 맏이는 그 답을 했다.

이랬다.

“바로 고흐가 그린 해바라기 그림이었어요. 뒤쪽에는 세잔느의 정물화가 있었는데, 그 그림에는 관객들이 별로 없었고, 고흐의 해바라기 그림에만 관객들이 가득 몰려서 한참을 기다려 앞자리로 치고 나갈 수가 있었어요. 자세히 봤는데, 정말 감동이더라고요. 제가 그동안 고흐의 그림을 본 것은 그림도감이나 그림엽서 같은 것에 의한 것이었어요. 그때는 그 그림들이 별 것 아니구나하고 생각했었어요. 그런데 직접 원본을 보니까, 그게 아니더라고요. 우선 노란색의 배경이 그랬어요. 그저 쓱쓱 붓 칠 했을 줄로 알았었는데, 그게 아니라 한 점 한 점 찍어서 화판을 꽉 채우고 있었는데요, 배색이 같은 점이 하나도 없었어요. 그 많은 점을 어찌 찍어갔을까를 생각하니 감동일 수밖에 없더라고요. 그다음은 말라비틀어진 해바라기 꽃잎이었는데요, 가만히 보니까 그 꽃잎에 줄무늬가 있더라고요. 그 줄무늬가 면도칼로 벤 듯이 너무나 곧게 그어갔더라고요, 그리고 해바라기 씨앗이었는데요, 까만 씨앗에 솜털을 그려놓았더라고요. 정말로 소름끼치는 감동이었어요.”

그 이후로 회사 일에 충실한 맏이의 행적을 쭉 지켜보면서, 내 마음속으로 혼자 부르는 쾌재가 있었다.

곧 이 쾌재였다.

‘나, 아비 노릇 참 잘했다.’

황화 코스모스와 함께, ‘햇비농원’ 우리들 텃밭을 아름답게 하는 풍경이 하나 더 있었다.

바로 노란 꽃을 피워낸 황화 코스모스 그 뒤쪽으로 높다랗게 솟아서 역시 노란 꽃을 피워낸 해바라기 풍경이 그것이다.

두 해 계속해서 우리들 텃밭을 뽐내주는 풍경이다.

“아침에 일어나서 맨 먼저 그 해바라기 꽃을 봅니다. 노란 그 꽃빛깔이 제 가슴까지 따스하게 해주는 것 같아서 참 좋습니다.”

앞집 아주머니의 토로가 그랬다.

첫 번째 해인 지난해는 일러스트 디자이너로 서울 남산자락의 터줏대감인 최민주 작가가 선물해준 해바라기 꽃씨를 심어서 그 풍경을 지어냈고, 두 번째 해인 올해는 지난해에 거둔 씨앗을 심어서 또 그 풍경을 지어냈다.

해바라기 풍경을 지어낸 그 두 해 사이에, 그 해바라기와 관련해서 참 귀한 사실을 알게 된 것이 있었다.

멀대같기는 하지만 높이 솟은 해바라기의 바람막이 역할로 그 안쪽 작물이 강풍을 견뎌내더라는 사실을 안 것이 그랬고, 해바라기는 줄기가 꺾일 정도로 자빠져도 살아남아 꽃을 피우더라는 사실을 안 것이 그랬고, 그 씨앗은 덜 여물었어도 싹이 트더라는 사실을 안 것이 그랬고, 쟁반만큼이나 큼지막한 해바라기 꽃에는 쌀알만큼이나 작은 꽃들이 피어 있고 그 작은 꽃에도 꿀벌이 날아들더라는 사실을 안 것이 그랬다.

내 나름 감동의 경험이었다.

혹 싹이 안 트면 어쩌나 싶어서, 지난해 거둔 해바라기 씨앗을 주위 두루 나눠주지 못한 것이 뒤늦게 참 아쉬웠다.

우뚝 솟은 해바라기 풍경을 보면서 이 생각 저 생각을 떠올렸다.

그 끝에 내 문득 연상 지은 생각이 하나 있었다.

올해 거두는 해바라기 씨앗은, 그 꽃을 좋아하는 주위에 두루 나눠줘야겠다는 내 할 일의 연상이었다.

그래서 우리 맏이가 그랬고 내가 그랬던 것처럼, 그 주위에도 소위 ‘소름 끼치는 감동’의 세계를 경험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晩村 안휘덕]

공자가 한일(一)字에 막힌다드니

오늘은 해바라기 보고

계속 코스모스라 하는구만
완벽보다 좀 오자 탈자가 있어야
인간 답지 그렇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