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 기도)
주님,
새벽에 대구에 도착하여 몇 시간을 못 잤지만
평범한 일상의 소중함을 생각하며
말씀 앞에 먼저 나아가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십자가 보혈을 의지합니다.
정결한 마음 주시옵소서.
성령님, 말씀을 조명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본문)
38. 요한이 예수께 여짜오되 선생님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자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39. 예수께서 이르시되 금하지 말라 내 이름을 의탁하여 능한 일을 행하고 즉시로 나를 비방할 자가 없느니라
40.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
41.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42. 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들 중 하나라도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
43.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장애인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곧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44. (없음)
45. 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46. (없음)
47.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48. 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49.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
50.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
(본문 주해)
38~41절 : 예수님을 따라오지도 않고 제자들과 함께 하지도 않는데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사람들을 보고 하지 말라고 했다고 요한이 예수께 말씀드린다.
요한은, 우리 편이 아니면 좋은 일이라도 하지 말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금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고 누가 물 한 그릇이라도 대접하면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고 하신다.
이 말씀은 제자들처럼 주의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못하지만 제자들에게 물 한 그릇 정도 주는 미미한 자도 상을 주신다고 하시는 것이다.
같은 복음 안에 있지만 믿음이 연약한 자가 있을 때에 서로 비판하여 편 가르기를 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사실 참으로 복음을 아는 자라면 남을 판단하고 정죄할 시간이 없다. 자신을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기에도 바쁜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이 연약한 자들만이 아니라 이단에 속한 자라고 하여도 긍휼로 볼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믿음이 연약하다고 정죄하고 판단하는 먹고 마시는 그런 나라가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자들이 평강을 맛보며 기뻐하는 나라인 것이다.
42절 : 41절이 소자 하나에게 물 한 그릇이라도 대접한 것에 관한 말씀이라면, 42절은 소자 하나를 실족하게 하는 일에 관한 말씀이다.
타인을 실족하게 하는 일이 있다면 연자 맷돌이 목에 달려 바다에 빠지는 것이 낫다고 하신다.
43~47절 : 스스로의 실족에 관한 말씀이다.
손, 발, 눈은 인간이 실족할 수 있는 원인들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손, 발, 눈은 우리의 모든 인격, 즉 마음이 추구하는 것을 선택하는 바를 가리킨다.
손과 발이 범죄 하면 손과 발을 찍어 버리고, 눈이 범죄 하면 눈을 빼서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낫다고 하신다.
왜냐하면 지옥은 더 이상 죽을 수도 없는 곳으로서, 그곳에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기 때문이다.
왜 주님은 이렇게 극한의 과장법을 사용하시는 것일까?
신체 일부를 절단하라는 말씀은 악을 단호하게 끊어야 한다는 비유이다. 이것은 양자택일을 요구한다. 단호하게 악을 끊는 희생을 하고 생명에 들어가거나, 아니면 죄를 지어 영원한 형벌에 들어가거나 선택을 요구한다. 이 양자택일에 의하면, 소중하기 이를 데 없는 지체를 잃고 생명에 들어가는 것이 성한 몸으로 죄를 짓다가 지옥에 들어가는 것보다 낫다.
또한 주님께서 이러한 말씀을 하시는 것은, 하나님 나라(영생)는 요한의 말처럼 기득권을 주장하는 나라가 아니라, 주님의 수난예고에서 이미 말씀하신 것처럼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삼 일만에 살아나는 것, 그런 방법으로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말씀인 것이다.
49~50절 : “모든 사람이 다 소금에 절이듯 불에 절여질 것이다.
소금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소금이 짠 맛을 잃으면, 너희는 무엇으로 그것을 짜게 하겠느냐? 너희는 너희 가운데 소금을 쳐 두어서, 서로 화목하게 지내어라.”(새번역)
‘불’이나‘소금’은 성경에서 은유적으로 사용된다.
오늘 본문에서의 불과 소금은 다같이 정결하게 하는 역할이다. 소금은 부패를 방지함으로 정결하게 하고(왕하2:19~22), 불은 이미 부패한 것을 태움으로 정결하게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불은 43절과 48절처럼 지옥의 모습으로 심판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부패한 것을 태우고 은과 금을 연단하는 것과 같은 ‘불’(말3:2~3)을 의미한다.
따라서 49절은 선인과 악인, 불신자와 신자를 엄격히 구분하는 연단과 격렬한 시험과 환난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 시험과 환난은 악인에게서 선인을, 불신자들에게서 신자들을 분리시킬 뿐 아니라, 심지어는 신자들의 마음과 삶 속에서 악한 요소들을 정결케 하는 소금의 역할을 할 것이라는 의미이다.
성도 안에 소금을 치라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성도 안에 두라는 것이다. 소금을 치면 무릇 살아있는 것이 죽게 되지만, 부패하지 않고 보존 되듯이, 예수님을 믿는 것은 세상에 대하여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것이다.
(나의 묵상)
33절에서 자리 다툼하던 제자들 그리고 오늘 ‘편 가르기’까지 하는 요한의 말에 대해 주님이 말씀하신다.
‘주님을 믿는 작은 자’ 하나를 어떻게 대하는가에서부터 스스로를 실족케 하는 요인에 이르기까지 성도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말씀이다.
대단한 영향력을 주지 않아도, 물 한 그릇 대접할 정도의 미미한 행위를 하는 자라도 그가 예수 안에 있는 자라면 귀히 여기라는 말씀, 그것도 모르고 그를 함부로 대하여 실족하게 한다면 영원히 헤어나오지 못하는 바다에 빠지는 것과 같은 벌을 받으리라는 말씀, 눈과 손과 발의 장애가 있더라도 죄짓지 않음으로 지옥불에서 영원히 허덕이지 않아야 한다는 말씀을 주님이 주신다.
바로 불로 부패한 것을 태우고, 소금으로 부패함을 방지하는 삶이다.
어떻게 그와 같은 삶을 살 수 있다는 말인가?
그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다 이루시고 성령을 부어주심으로 이루어지는 삶이다.
성령이 임하면 나를 살리시기 위해 죄를 대속하신 주님의 보혈을 믿게 된다.
그 피의 은혜는 죄사함의 은혜와 옛 사람이 죽음으로 인해 죄에 대해 불구가 된 자신을 아는 은혜와 자기주장을 할 수 없는 자가 되었음을 알게 되는 은혜이다.
이 땅을 사는 동안 죄가 불살라지는 은혜요, 소금이 쳐지는 은혜, 바로 주님이 지신 십자가의 은혜이다.
자리다툼에 이어 편 가르기, 연약한 자를 무시하는 것 등이 지옥불로 연결되지 않도록 오늘도 주님은 십자가로 소금을 쳐 주신다.
높아지려는 세상 욕망을 십자가에 못 박는다.
편을 갈라 자기들만의 힘을 축적하려는 못된 습관을 십자가에 못 박는다.
주님이 귀히 여기시는 소중한 영혼을 세상의 잣대를 들이밀어 차별을 두려는 자기의와 주장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다.
오염된 모든 것을 불살라지게 하시고, 오염될 것을 소금으로 정결케 하여 주시는 삶, 그것은 바로 십자가에 연합되는 삶이다.
(묵상 기도)
주님,
소금을 두고 화목하라는 말씀은
결국 주님의 수난예고, 십자가와 연결되어 있음을 생각합니다.
주님의 십자가에 연합됨으로
불과 소금으로 정결케 되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오늘의 일정을 주관하여 주옵소서.
언제 어디서나 십자가에 연합되게 하셔서
정결한 삶, 풍성한 복음을 나누는 삶이 되게 하옵소서.
성령님, 의지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