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이란 무엇인가 What is faith
의견 ;
헌데 아무 담보도 없이 믿었다가 손해보는건 누가
책임을 지는가?
신을 믿으러 강요해서 성직자들이 이익을 보고,
교인들은 희생양이 된다면 그건 믿음이 낳은 사기이고
비극이다.
신이던 상대방이던 믿어서 유익한게 아무것도 없다.
이 세상은 의심함으로 구원을 얻는다. 누구도 믿지말라.
믿었다가 사기를 당하는건 누가 책임 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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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이란 무엇인가? 너무 쉬운 질문이다.
말 그대로 믿음은 믿는 것 신뢰 trust 이다.
내가 누구에게 일만불을 담보도 없이, 차용증도
없이 꾸어주었다고 하자.
다른 사람이 물어볼 것이다. 어떻게 그렇게 거액을
그런 식으로 꿔주었나요?
나는 대답할 것이다. 믿으니까요.
그런데 언젠가부터 “믿음”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이상하게 변해버렸다.
“특정 지식이나 사상이 진리라고 인정하고 동조하는것”이 되어버렸다.
예를 들어 “저는 불교를 믿습니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신뢰를 뜻하지 않는다.
불교의 철학이 진리라고 인정한다는 뜻이다. Trust가 아니라believe가 되어버렸다.
무엇이 기독교의 하나님에 대한 “믿음”인가? trust인가? believe인가?
놀랍게도 (아니면 전혀 놀랍지 않게도)
trust이다.
아마 헬라 철학이 기독교에 들어오면서 “믿음”은 believe의 의미로 축소된 것이 아닐까 싶다.
왜냐하면 헬라 철학은 지식 중심이고,
기독교는 관계, 즉 신 과의 관계 중심이기 때문이다.
신에 대한 믿음은 신에 대한 철저한 신뢰이다.
헬라 철학이 들어오면서 기독교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기반으로 한 신앙에서,
쓸데없는 지식 논쟁이 중심이 된 신학으로 변질되었을 것이다.
차근차근히 살펴보자.
“믿음”은 주로 faith라는 영어단어로 번역된다. 물론 “I have faith in him.”에서는 신뢰의
의미로 쓰인다. 그러나 faith
또한 “특정지식이나 사상이 진리라고 인정하고 동조하는 것”이라는 의미를 포함하게 되었다.
그 faith가 full을 만나서faithful이 되면 “신뢰”의 의미를 되찾는다.
faithful은 한국어로 “신실”이라고 번역된다.
한자를 보면 믿을 신에 가득찰 실이다. 믿음이
가득찼다는 의미이다.
우리는 보통 하나님을 신실하신 분이라고 한다.
즉, 하나님은 완전히, 100%,
뒤통수 침을 당할 염려가 전혀 없이 완전하게 믿을 수 있는 분이시다.
의견 ; 그러나 성직자는 그것을 악용 한다.
그래서 신실, 믿음이 가득찬 분이신 것이다.
만약 faithful이 “특정지식에 대한 인정이 가득찼다”는 의미로 쓰여졌다면 웃기는 일이다.
하나님 자신이 스스로에 대한 특정지식을 인정했다고? 말이 되지 않는다.
그런데 믿음, 또는 신뢰는 행동이 반드시 따라주어야
한다.
아니, 행동이 믿음을 증명한다. 또는, 행동은 믿음의 일부분이다.
예를 들어, 내가 누군가를 “믿는다고” 큰소리 치고 다녔다고 하자.
큰 돈을 얼마든지 쉽게 꿔줄 수 있다고 나불거리고 다녔다고 하자.
그런데 정작 그 사람이 나한테 와서 돈을 꿔달라고 했다. 그러자 나는 온갖 핑계를 다 대며 돈을 꿔줄 수 없다고 하거나, 아주 쥐꼬리만한 금액만 꿔주었다.
그렇다면 나는 그에 대한 “믿음”이 진정 있었는가?
당연히 없었거나, 믿음이 “적었을” 뿐이다.
다른 예로, 야구감독이 진정으로 투수를 믿는다면,
그를 경기 초반에 강판시키지 않고 9회말까지 기회를 줄 것이다. 다시 강조하자면, 행동 없는 믿음은 믿음이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느 정도의 행동을 보여주어야 진짜 믿음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흔히 하나님에 대한 신뢰 또는 믿음을 생각하면 우리는 그저 “먹고 사는 것에 대한 근심 걱정을
안 하는 것” 정도로 생각한다.
새와 들풀도 먹이시는 하나님이 하물며 사람을 굶기시랴는 말씀이 보통 단골로 인용된다.
사실 먹고 사는 문제를 근심하지 않고 염려하지 않는 정도의 믿음도 흔하지 않다.
그만큼 많은 성도들이, 먹고 사는 문제로 염려하는
“이방인들”과 별로 다를 바가 없다.
그러나 과연 하나님께서 이 정도의 믿음만 요구하시는가?
그저 내 뒤에 든든한 빽이 있다는 믿음만으로 의롭다 칭함을 받을 수 있을까?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믿음은 히브리어 원문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
“믿음”을 가리키는 히브리어 원어는
emunah이다.
emunah는 하나님에 대한 완전한 신뢰가 행동, 인생으로 표출되는 것을 뜻한다.
하나님의 모든 것을 믿기 때문에, 인생의 모든
행동들이 다 그 믿음에 기반하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셨고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시며 인자하심의 끝이 없고 그 죄대로 우리를 처벌하지 않으시며 그 강한 손과 뻗은 팔로 능히 구원하시는 분이시고 그 모든
행위가 의로우시며 모든 일이 은혜로우신 분이시며 자기를 경외하는 사람들을 선대하신다 (시편
103편, 145편 참조).
emunah는 그것을 믿기 때문에 자신의 모든 행동, 모든 인생의 하나하나 모든 것을 다 하나님께 맡기고, 다 하나님께 드려서 다 하나님께서 좌지우지하시는
상태이다.
그러므로 emunah는 하나님을 완전히 신뢰하지
않고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확고부동
요지부동한 신뢰가 아니고서는 생길 수가 없다.
하나님에 대한 불신이 조금만이라도 있다면 그런 행동을 보일 수 없기 때문이다.
emunah의 좋은 예는 바로 아브라함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완전히 신뢰했다.
하나님의 모든 것을 신뢰하였기 때문에 그는 살던 곳을 버리고 낯선 땅으로 나아갔다.
하나님의 모든 것을 신뢰하였기 때문에 사라를 통해서 후손을 주겠다는 약속을 확고하게
믿었다.
얼마나 확고하게 믿었는지 이삭을 제물로 바칠 때 한 순간의 주저함도 없었다.
하나님의 모든
것을 신뢰하였기 때문에 그는 비록 후손들이 하늘의 별처럼 많아지리라는 약속을 보지 못하고
죽었지만 죽는 날까지 그는 그 약속을 믿어의심치 않았다.
아브라함은 그의 온 인생으로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보여주었다.
내친 김에 히브리서 11장을 펼쳐들고
“믿음”이라는 단어를 모조리 emunah로
바꿔서 읽어보자.
emunah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emunah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emunah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emunah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emunah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emunah으로 이삭은 장차 있을 일에 대하여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하였으며
emunah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
emunah으로 요셉은 임종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이 떠날 것을 말하고 또 자기 뼈를 위하여
명하였으며
emunah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겨
왕의 명령을 무서워하지 아니하였으며
emunah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emunah으로 칠 일 동안 여리고를 도니 성이 무너졌으며…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및 사무엘과 선지자들…emunah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감하게 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들을 부활로 받아들이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믿음, 신뢰, emunah의 깊이를 깨달았을 때 나는 비로소 이신칭의 – 오직 믿음으로서 의롭다고 칭함받는다–의 교리가 얼마나 무거운지 알게 되었다.
로마서 4장은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칭함을
받았다고 말한다. emunah로 의롭다 칭함을 받은 것이다.
이 얼마나 깊고 진중한 믿음인가. 그 믿음으로
의롭다 칭함을 받을 수 있는 복이 무할례자들에게도
부어졌으니 그 얼마나 감사한가. 누가 감히 값싼 복음을 말하는가.
여기에 대해 더 자세한 것은 벤자민 오 목사님의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설교 시리즈와 신년 초에 매튜 톨러 목사님께서 하신 부흥회
설교에 다 있다.
믿음, 신뢰, emunah의 깊이를 깨달았을 때 나는 정말로 겨자씨만한 믿음이 없다고 책망하신 예수님의 말씀도 이해할 수 있었다. 정말로 우리는 겨자씨만한 emunah도 없다.
믿음, 신뢰, emunah의 깊이를 깨달았을 때 나는 행함과 믿음을 언급한 야고보서의 말씀도 그제서야 이해할 수 있었다.
믿음을 “특정 지식에 대한 동조”로 본다면 믿음과 행함을 구분할 수 있다.
그래서 “여러분도 이제 행함이 있는 믿음을 가져야
하지 않겠어요”라는 캠페인성 구호 밖에 외칠 수 없다. “행함과 믿음
둘 다 중요하지요”정도의 개념 밖에 가질 수 없다.
그러나 emunah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행함이
없는 믿음은 존재하지 않는다.
행함이 없으면 emunah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행함이 없으면 믿음, emunah도 없고,
믿음이 없으면 의롭다고 칭함받을 수도 없다.
FAITH IN ACTION 정도가 아니다. FAITH IS
ACTION이다. NO ACTION? NO FAITH!
하나님에 대한 완전한 emunah를 소망한다.
그래서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기 원한다.
하나님께 완전히 굴복하여 순종하기를 원하고,
그 분께서 사랑하시는 것을 사랑하고 그 분께서 미워하시는 것을 미워하기 원한다.
하나님의 모든 약속을 굳게 믿으며 어떤 환란도 견뎌내기를 원한다. 그러한 관계를 하나님과 이루기를 원한다.
오잉? 쓰고 보니 어디서 많이 듣던 소리이다.
어디서 많이 들은 관계다. 그렇다. 바로 부부관계가
그러한 신뢰를 요구한다. 부부 사이에는 온전한 신뢰가 생명이다. 그러고
보니
예수님께서 우리를 신부로 삼으시지 않았던가?
그렇구나! 우리가 전적인 믿음,
emunah를 가져야 의롭다고 칭함을 받는 이유는 바로 하나님께서 그러한 온전한 관계를 원하시기 때문이구나!
인간 부부 사이에도 서로 온전하게 사랑하고 신뢰하는 것을 부부간에 요구를 하시는데,
사랑이신 하나님께서 오죽하겠는가? 그렇다.
모든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로 결론내려진다.
믿음도, 십자가도, 재림도, 영원한 하나님 나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