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 기도)
주님,
어제, 세대를 넘어서는 교제를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보다 더 즐거운 만남이 없는 것 같습니다.
주님을 이야기하는 만남이기 때문입니다.
주일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영과 진리로 드리는 모든 예배가 되게 하시고
성도의 풍성한 교제가 있게 하옵소서.
말씀 앞에 나아갑니다.
타인의 가식을 긍휼히 여기지 못하는 마음이 불편함으로 남는 것은
그것을 판단함으로 나의 의를 드러내고자 하는 또 다른 욕망임을 생각하며
이것을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주님의 보혈로 덮어 주옵소서.
오염된 영혼을 정결케 하여 주옵소서.
성령님, 말씀을 조명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본문)
1.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유대 지경과 요단 강 건너편으로 가시니 무리가 다시 모여들거늘 예수께서 다시 전례대로 가르치시더니
2.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묻되 사람이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3. 대답하여 이르시되 모세가 어떻게 너희에게 명하였느냐
4. 이르되 모세는 이혼 증서를 써주어 버리기를 허락하였나이다
5.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마음이 완악함으로 말미암아 이 명령을 기록하였거니와
6. 창조 때로부터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으니
7.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8.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9.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더라
10. 집에서 제자들이 다시 이 일을 물으니
11. 이르시되 누구든지 그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에 장가 드는 자는 본처에게 간음을 행함이요
12. 또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데로 시집 가면 간음을 행함이니라
13. 사람들이 예수께서 만져 주심을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14. 예수께서 보시고 노하시어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1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 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
16. 그 어린 아이들을 안고 그들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
(본문 주해)
1~12절 : 이 단락은 이혼에 대한 내용이다.
모세 율법에 이혼 증서를 써 주면 이혼해도 된다는 율법조문을 유대인들이 얼마나 악하게 사용하는지를 예수께서 말씀하시면서 이혼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1~4절--예수께서 가시는 곳마다 무리가 몰려들고 예수께서는 무리들에게 늘 하시던 대로 가르치신다.
이때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이혼에 대해 시험하여 묻는데 이는 예수님을 올무에 걸려고 하는 짓이었다. 예수님은 바로 답변을 하지 않으시고 ‘모세는 무엇이라고 하였느냐’ 되물으심으로 그 본질이 무엇인지 알려주시려고 하신다. 그러자 바리새인들은 이혼증서를 써 주면 아내를 버려도 된다고 한다. 그들은 신명기 24:1~4절을 근거로 하여 이 대답을 하였다.
“사람이 아내를 맞이하여 데려온 후에 그에게 수치되는 일이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면 이혼 증서를 써서 그의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보낼 것이요”(신24:1)
‘수치되는 일’을 보수적인 삼마이 학파는 음행의 문제로만 보았고, 좀 자유로운 힐렐 학파는 여자가 밥을 하다가 밥을 태워도 이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라고 하여 이혼증서를 주어서 이혼을 할 수 있다고 한 것이다.
유대인들이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이 조문을 가지고 남자들이 자기의 마음에 들지 않는 아내를 버리기 위하여 이혼증서만 써 주면 이혼해도 된다고 생각하며 그들의 전통의 가르침을 따라 살았던 것이다.
5~9절--그런데 예수님은 모세가 그런 이혼을 허락한 것은 너희 마음이 완악함을 인하여 허락한 것이라고 하신다. 그 마음이 완악함이란 하나님의 거역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 상태를 말한다.
그 완악함은 아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데 이혼할 수 없다면 아내를 괴롭히고 죽이기까지 할 수 있으므로 차라리 이혼 증서를 주고 이혼하라고 한 것이다.(여자들은 이혼증서가 있어야 재혼할 수 있었다.) 이것은 약자에 대한 보호차원이었다.
예수께서 ‘너희가 모세의 율법을 그렇게 적용해 온 것은 너희의 악함 때문이지 하나님의 뜻은 원래 그런 것이 아니라’고 하신다.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한다고 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처음 아담을 만드시고 그 옆구리에서 갈비뼈를 취하여 여자를 만드셔서 둘이 한 몸이라고 하신 말씀이다.
이는 타락하기 전의 상태인 것이다.
모세가 이혼증서를 주어서 이혼해도 된다는 것은 이미 타락하여 완악하여진 것을 전제로 한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원래는 그렇지 않다고 하신 것이다.
10~12절--집에서 제자들이 이 일에 대하여 다시 예수님께 묻는다.
제자들도 모세의 율법을 그들의 전통을 따라 믿고 살아가기에 예수님께 다시 질문한 것이다.
그때 예수님은 ‘누구든지 그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에 장가드는 자는 본처에게 간음을 행함이며 또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데로 시집가면 간음을 행함이라’고 하신다.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의 반응이 본문에는 없지만 마태복음에는 그들의 대답을 통해 그들이 얼마나 완악한지를 잘 드러내고 있다. ‘이혼증서를 주어서 아내를 버릴 수 없다면 아내가 싫어도 평생 데리고 살아야 하니 차라리 장가가지 않는 것이 좋겠다’(마19:10)고 한 것이다.
13~16절 : 제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일에 어린아이는 걸리적거리는 존재로 보았기에 사람들이 어린아이를 데려온 것을 꾸짖는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어린아이나 세리나 죄인과 같은 자들을 배척하고, 자신들처럼 메시아를 위하여 헌신 충성 봉사하는 그런 능력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말하지만 전혀 하나님의 나라를 모르는 자들이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가 어린아이 같은 자들의 것이라고 하신다.
그런데 어린아이 같아야 천국에 들어간다는 말씀은 어린아이처럼 순수하고 깨끗해야 한다는 말씀이 아니다. 성경은 아담의 타락 이후로 모든 인간은 그 마음의 생각과 계획이 어려서부터 항상 악하다고 하였다.(창8:21)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가 어린아이 같은 자의 것이라고 하시는 것은 어린아이는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것을 가리킨다. 즉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같이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의 힘으로는 이룰 수도, 들어갈 수도 없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나의 묵상)
1~12절 :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되냐?’고 묻는다.
그들은 예수님을 올무에 걸기 위한 딱 좋은 질문을 발견한 것이다.
만일 예수님이 답하기를 아내를 버리라고 한다면 선지자가 아니라고 비난할 수 있고 또 아내 버리기를 금하면 아내를 버려도 된다는 모세의 법을 위반했다고 공격하려 했던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말씀하심으로 그들의 악함을 드러내신다.
모세가 이혼 증서를 주어서 이혼해도 된다는 것은 인간이 이미 타락하여 완악하여진 것을 전제로 한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원래는 그렇지 않다고 하시며, 아담과 하와의 창조와 더불어 결혼에 대한 본래적인 하나님의 뜻을 말씀하신 것이다.
자기의 마음에 들지 않는 아내를 버리기 위하여 온갖 구실을 다 내세우는 유대인들의 마음 상태를 결국은 ‘간음’이라고 주님은 표현하신다.
정당하다고 생각한 이혼 증서는 결국 간음하기를 좋아하는 그들의 본성인 것이다.
사실 이 간음이 이스라엘 백성들, 그 유대인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리라.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백성들이 끊임없이 우상숭배를 하며 자기만족을 위해 헤매고 다니는 모습을 간음이라고 구약에서부터 말씀하셨다.
이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구원받은 자이면서도 끊임없이 세상을 향해 눈과 귀와 목이 돌아가는 나 같은 자에게 주시는 말씀이다.
그런데 끝없이 간음하는 나를 주님은 버리지 않으시고 돌이키고 또 돌이키신다.
그 이유는 나를 주님이 거하시는 성전으로 삼으시겠다는 주님의 약속 때문이다.
단 한 순간도 간음하지 않은 적이 없어 이혼을 당하는 것이 마땅하지만 창세전 하나님께서 하신 언약으로 인하여 나를 용서하시고 주님의 십자가 보혈로 덮으시니 나는 완전한 새 언약 백성이 된 것이다.
13~16절 : 지난 주 목요일 묵상에서 전적 무능의 상태를 고백하는 것이 기도라고 묵상했었다.
전적 무능의 상태는 바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아기의 상태이다.
예진이가 아기일 때 할머니를 바라보는 그 눈은 전적 무능의 눈빛이었다.
할머니를 좋아하고 오직 할머니를 기대하는 눈빛이다.
초등학생이 된 지금은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많고, 심지어는 할머니가 모르는 것을 가르쳐 주려고도 한다. 성인이 되면 어떨까?
하나님 앞에서 성인이 된 내 마음을 십자가에 못 박는다.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하나님 나라를 내 힘으로 어떻게 해 보려고 한 적이 너무도 많았다.
오늘 본문의 제자들처럼 걸리적거리는 어린아이들은 치우고, 주를 위해 열심을 내는 나야말로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자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세월이 흐를수록 하나님 나라는 내가 확장하는 것이 아니요, 주님께서 하시는 것임에 두 손을 든다.
그러니 성령께서, 그 나라를 이루시는 주님을 어린아이처럼 바라보고 받아들이는 즐거움을 누리게 하신다.
(묵상 기도)
주님,
순간마다 간음하는 자를 내치지 않으시니 감사합니다.
이혼당해 마땅한 존재를
주님의 보혈로 씻기시고 덮어주시니 감사합니다.
주님의 보혈로 새 언약 백성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제 자기 힘과 경험으로 팔을 걷어붙이는 자가 아니라,
전적 무능의 눈빛으로 주님만을 바라고 또 바랍니다.
주님 품에 안긴 어린아이의 즐거움을 누리게 하옵소서.
성령님,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