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있음은 완벽하게 둘이 아닌 상태임을 의미 합니다.
따라서 장소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아무리 산속에 들어가서 수행을 해도 마음속에 이런 저런 생각이 있다면 더이상 홀로 있음이 아닙니다.
저자거리에서 살아도 그의 마음속에 더이상 생각이 없다면 그는 홀로있는 사람입니다.
홀로 있기 위하여는 오직 지금 현재에 머물러야 합니다. 밥을 먹을 땐 밥만 먹어야 하고 다른 생각을 말아야 합니다. 즉 밥을 먹을 땐 자신의 팔이 움직이기전에 어떤 신체적 현상이 나타나고 또한 팔이 그에 따라서 어떻게 움직이고 음식을 어떻게 씹고 삼키는지 살펴야 합니다.
이렇게 하면 잡념이 생기지 않아서 오롯이 홀로 있게 됩니다. 한번 홀로있음을 증득하면 그 상태가 지속됩니다. 이 것이 일상삼매 입니다.
위빠싸나라는 수행법이 있는데 이 수행이 자신의 신체의 움직임을 관하는 것인데 주로 걷는 것을 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혹자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생각을 안한다면 어떻게 일상을 살것인가? 사실 깨달은 자는 일상을 살면서 필요한 만큼의 의식을 발현시키고 나머지는 공, 즉 아무것도 없는 곳에 의식을 놓아 둡니다.
홀로있음의 순간들은 다음과 같은 경우들입니다.
달리기를 하는데 가슴이 벅차오르고 숨가쁜데 어느 한순간 고통을 잊으면서 자신이 어떻게 결승점을 통과 했는지 모르는 경우
바이올린이나 피아노 연주자가 음악에 몰입히여 자신이 어디있는지 조차 모르는 경우
위빠싸나 수행자가 자신이 걸어가면서 그 걷는 것에 몰이하여 자신이 어디있는지 조차 모르는 경우
사랑하는 두 연인이 사랑에 몰입하면서 활홀감의 극치속에 상대가 있다는 것 조차 잊어버리는 경우
좌선 선 수행자가 자신을 관조하면서 시간도 공간도 자신이 어데있는지도 모르는 상태에 들어가는 경우
이러한 홀로있음의 상태와 불가의 평상심과는 대단히 유사합니다. 평상심은 흔들림이 없는 고요함인데 이것은 홀로 있음으로 인하여 상대가 없기에 흔들림이 없는 것입니다.
오래전에 조주스님이 뜰이 보이는 곳에 앉아서 차를 마시고 있었습니다. 이때 학인이 느닷없이 절을 하면서 "무엇이 부처입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이러한 학인을 그저 조용히 바라보고 나서 뜰을 바라보면서 한마디 합니다. "정전 백수자이니라" 이말을 듣고 학인은 벼락을 맞은 듯 놀라면서 조주스님에서 절을 하고 물러 났습니다.
한순간 학인은 생각이 끊긴 홀로있음, 즉 각성을 맛 보았던 것입니다. 즉 자신이 무엇인지를 알게돤 것입니다.
정전 백수자 - 뜰앞의 잣나무